꼬리 빵즈 눈높이 어린이 문고 89
신지은 지음 / 대교출판 / 2006년 1월
구판절판


동준이가 손바닥에 놓여진 몇 개 안 되는 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우째 모든 사람이 똑같이 나눠 먹노? 부지런한 사람이 더 많이 먹어야제. 할매는 공산주의가 싫다. 내사 한시도 쉬지 않고 몸뚱이 놀려서 자식들 배 안 곯게 했다. 넘 못 시키는 공부도 시키고."
"할매, 그런 말하면 안 된다. 공부 많이 하몬 지식분자다. 지식분자는 속이 시꺼멓다꼬 하던데. 우리 아부지도 진짜로 속이 시꺼멓나? 형아, 진짜로 우리 아버지 속이…… 시꺼……멓나?"
동준이는 말끝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동혁이는 소학교도 안 들어간 동준이가 기특했다. 벌써 공산주의도 알고 공부하면 안 되는 줄도 알고.
"아니다. 우리 아부지가 얼매나 좋은 사람이고. 니도 알제?"
"그래도 나는 우리 아부지가 무식한 사람이몬 좋겠다. 나보고 지식분자 새끼라꼬, 꼬리 빵즈라꼬 놀린다."
"할매는 이 중국 땅에 살면서 꼬리 빵즈 소리를 수천 번도 더 듣고 살았다. 하지만 할매는 하나도 기 안 죽었다. 너거 죽은 할배가 카던데……."
"우리 할배? 독립운동하다가 하얼빈에서 죽은 우리 할배 말이가?"
동혁이와 동준이가 입을 모으고 물었다. 할머니는 좀처럼 할아버지 이야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쪽

"그래, 너거 할배가 그카더라. 꼬리는 '고려'고, 고려는 '고구려'를 말하는 거라고. 빵즈가 우리말로 막대기인 거는 너거들도 알제? 그라니까 꼬리 빵즈는 '고구려 막대기'란 말이다."
"고구려 막대기? 형아, 그게 뭔데?"
동준이는 동혁이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줄 안다. 모든 것을 동혁이한테 묻고 확인한다.
하지만 동혁이도 '고구려 막대기'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단지 꼬리 빵즈가 조선 사람을 업신여기거나 놀리는 욕인 줄로만 알았다.-.쪽

"좀 가만히 있어라. 할매, 고구려 막대기가 뭐꼬?"
"고구려는 너거들의 조국, 조선 땅의 옛날 이름이라 카더라. 조선이 그 옛날에는 땅덩어리가 컸었는데, 이 만주 땅도 다 조선 땅이라 카더라. 그 때는 나라 이름이 조선이 아니고 고구려라꼬 했다더라."
"고구려라꼬?"
아이들은 할머니의 말꼬리를 물었다.
"그래, 고구려. 그 고구려 사람들은 말도 잘 타고 활도 잘 쏘았다고 했다. 얼매나 말을 잘 탔던지 거꾸로 달리면서도 사냥을 했다더라. 그래도 백발백중으로 마찼다고 했다."
"와! 우찌 말을 거꾸로 탈 수가 있노? 형아, 그라몬 고구려 사람도 우리 조상이가?"
이야기는 할머니가 하는데 동준이는 자꾸만 동혁이한테 묻는다.
"하모, 고구려 사람은 당연히 우리 조상이지. 그래서 떼놈들이 우리 보고 고구려 막대기라꼬 놀린다 아이가."
할머니는 지팡이를 끌어당겼다.
"그냥 고구려라고만 하지 막대기는 와 붙이노? 형아는 아나?"
"고구려 사람들이 말을 잘 타고 화살도 잘 쏘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말 용감했다 카더라. 특히 창이나 막대기를 휘두르고 나타나면 전부 무릎을 꿇었다꼬 했다."
할머니는 지팡이를 휘두르며 진짜 고구려 사람이 된 것처럼 말했다.
"그래서 꼬리 빵즈가 온다고 하면 아이들도 울음을 뚝 그쳤다꼬 했다."
"우리 조상, 고구려 막대기 만세!"
동준이가 신이 나서 만세를 불렀다. 욕인 줄로만 알았던 '꼬리 빵즈' 속에 그렇게 깊은 뜻이 숨어 있다니, 아이들은 가슴이 뿌듯했다.
-.쪽

"말이라는 것은 하루 아침에 생겨나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고구려 막대기는 천 년도 넘게 내려온 말이다. 고구려 사람을 무서워하던 중국 사람들 속에서. 이제 시절이 변해서 사람들은 그 뜻도 모르고 그저 조선 사람을 놀리는 욕인 줄 알지만."
"할매는 와 진작 말 안 했노? 그랬으면 내가 한족 놈한테 가만 안 있었을 낀데."
동준이가 할머니한테 볼멘소리를 했다.
"지금 할매가 한 말은 아무한테도 하면 안 된다. 우리 둘이만 알고 있어야 한다. 이 만주 땅을 조선 땅이라꼬 해 봐라. 그라몬 우리 아부지는 다시 비판을 받아야 하고, 우리도 우찌 될지 모른다. 형아 말 알아듣제?"
동혁이가 동준이의 눈을 들여다보며 다짐을 놓았다. 동준이는 형이랑 같이 비밀 결사대에라도 가담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일곱 살배기 얼굴에 비장한 각오가 흘러넘쳤다.-.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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