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세상이 비라면
이치카와 다쿠지 지음, 양윤옥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2월
품절


"그래도 어떻든 그 자는 후카자와한테까지 손을 댔잖아, 어머니를 배신하고."
그녀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몇 번인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몹시 분해하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그 참된 의미를 짐작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라고 그녀는 말했다.
"네 말이 맞아."
그녀는 이마에 걸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 그 손을 뺨에 갖다 댔다. 시선을 떨구고 잠시 망설이는 몸짓을 보이더니 속삭이듯 말했다.
"그건…… 일종의 거래 같은 것이었어. 엄마와 나를 지키기 위한."
"거래?"
"그래, 서로가 필요로 하는 것을 교환하는 거. 잠시 잠깐의 쾌락과 잠시 잠깐의 평안을 거래하는 거야."
생각해보면 그것 또한 우리의 먼먼 조상들이 마침내 땅바닥에서 두 손을 떼고 걷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줄기차게 써먹어온 방법이었다. 내 몸을 지키기 위해, 굶주림에서 벗어나기 위해 되풀이해온 짐승의 관습.-.쪽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단지 그 자리에 존재한다. 이 순간도, 그 순간도, 지금도, 그때도, 앞으로 오게 될 때도, 모든 것은 언제나 그 자리에 존재한다.
그래서 '끝'은 참된 의미에서의 끝이 아니다. 그때까지의 나날은 영원히 그곳에 내내 존재하는 거니까.-.쪽

"도망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녀가 말했다.
"도망?"
그렇게 묻자, 그녀는 날카로운 시선을 내게로 향했다.
"그래요. 비가 내리면 사람들은 처마 밑으로 도망쳐요. 그런 식으로 할 수도 있었어요."
"하지만……"이라고 나는 말했다.
"온 세상이 비라면?"
내 말을 듣고 그녀가 피식 웃었다. 뜻밖에 어린 얼굴이어서 나는 그녀가 동생과 같은 나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언니, 도가와하고 똑같은 말을 하네요."
왠지는 알 수 없지만, 가슴이 찌르르 아파왔다.
"온 세상이 비라면……"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세상 바깥으로 도망치면 되죠."
"이 세상에 바깥이 있어?"
그녀는 등까지 내려간 반듯하고 검은 머리칼을 흔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조그만 세계에서 살고 있어요. 그 바깥이 있다는 건 몰라요."
"조그만 세계라니, 이 동네나 학교?"라고 나는 물었다.
그녀는 뭔가 생각하는 듯 시선을 떨구더니, 살짝 어깨를 움추렸다.
"장소가 아니라 연결이라든가 그런 거."
"그걸 전부 끊어내라는 얘기?"
그녀는, 글쎄, 라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입술을 깨물고, 그리고는 가만히 숨을 내쉬었다.-.쪽

나는 생각하고 있다.
분명 뭔가 틀렸었는지도 모른다.
동생은 어느 누구와도 닮지 않았었다. 지독히 독특해서 다른 사람들의 눈에 그는 그저 괴물일 뿐이었다. 그런 그를 나는 무의식중에 이렇게 바라보았는지도 모른다.
-최소한 남들 만큼만이라도.
내가 그런 집착을 버렸다면 동생은 좀 더 편안히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막다른 궁지에 몰리는 일 없이, 그가 아니면 볼 수 없는 아름다운 길을 느긋한 걸음으로 계속 걸어갔을 것이다.
탄탄한 주먹도, 교과서를 암기하는 능력도 그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뒤떨어진 인간으로 여겨졌다. 그의 착한 성품은 약하다는 소리를 들었고, 약한 것은 나쁜 것이라고 배웠다. 그리고 나도 그런 사고방식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그가 강해지기를 원했고 조금이라도 그를 주변 친구들과 비슷하게 만들어보려고 했다.-.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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