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중용 - 완벽한 하루를 만드는
박민영 지음 / 북스토리 / 2006년 9월
절판


풍요로운 생활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은 소박한 마음을 잃기 쉽다. 그래서 남을 위한 작은 배려를 잘 행하지도 않지만, 설사 그런 배려를 받아도 고마운 줄 모른다. 무슨 큰 배려를 받아야 비로소 고마운 줄 안다. 큰 배려는 일상적일 수 없지만, 작은 배려는 일상적일 수 있다. 그런 점을 안다면 작은 배려를 할 줄 모르고, 그에 고마워할 줄 모른다는 것은 결국 사랑을 할 수도 받을 수도 없는 불행한 존재가 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쪽

되도록 논쟁을 피하되, 논쟁할 경우에는 그 결과에 대해 겸허한 마음을 가집시다

가장 좋은 것은 논쟁하지 않고 사는 것이다. 그러나 논쟁을 전혀 하지 않고 살 수는 없다. 살다보면 불가피하게 타인과 논쟁해야 할 일도 생긴다. 그러나 논쟁에서 이기고 지는 것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논쟁이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을 알면 내용적으로는, 논쟁에 이겼다고 해서 상대방의 의견을 무시하지 않으며, 논쟁에 졌다고 해서 나의 의견이 전부 틀렸다는 자괴감을 갖지도 않게 될 것이다. 또한 태도의 측면에서는, 논쟁에서 이겼다고 해서 기고만장하지도 않고, 논쟁에서 졌다고 해서 모욕감을 갖지도 않게 될 것이다. 나아가 다른 사람이 내 편을 들어주었다 해서 나의 의견이 객관적으로 옳다는 것이 증명되었다고 우기지 않고, 상대의 편을 들어주었다 해서 나의 의견이 객관적으로 그르다는 것이 증명되었다고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쪽

『관윤자』에 이런 말이 있다.
"두 사람이 겨루는 궁술시합에서 누가 잘하고 누가 못하는가를 볼 수는 있다. 두 사람이 장기를 둘 때, 한쪽이 지고 다른 쪽이 이기는 것을 볼 수는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도(道)에 있어서 만나면 아무것도 표시되는 것이 없으며, 기술의 우열도 없고, 승패도 없다."
논쟁도 마찬가지다. 승패는 있을 수 있지만, 큰 범주에서 보면 옳고 그름은 사라진다. 논쟁을 통해 시비를 명쾌하게 가릴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현명함보다는 무지에 가깝다.-.쪽

차이의 관점에서 검토할 때, 만일 크게 생각하는 판단기준에 따라 모든 것을 크다고 간주한다면, 만물 중 크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만일 작게 여기는 판단기준에 따라 모든 것을 작다고 간주한다면, 만물 중 작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천지가 쌀 한 톨만큼 작다는 것을 알 때, 그리고 털끝이 언덕이나 산만큼 크다는 것을 알 때, 차이의 정도가 보일 것이다.
업적의 관점에서 검토할 때, 만일 있다고 생각하는 판단기준에 따라 모두 있다고 간주한다면, 만물 중 업적이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만일 없다고 생각하는 판단기준에 따라 모두 없다고 간주한다면, 만물 중 업적이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동과 서가 서로 반대이지만 상대방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안다면, 업적의 몫은 결정될 것이다.
성향의 관점에서 검토할 때, 만일 옳다고 생각하는 판단기준에 따라 모든 것을 옳다고 여긴다면, 만물 중 옳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만일 틀렸다고 생각하는 판단기준에 따라 모두 틀렸다고 생각한다면, 만물 중 틀리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성왕(聖王) 요(堯)와 폭군 걸(桀)이 모두 자기가 옳고 상대방이 틀렸다고 생각했다는 것을 알 때, 성향의 배후에 있는 의지가 보일 것이다. -.쪽

우리는 본 것을 토대로 인식한다. 그리고 그 인식이 사실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런 인식은 어느 정도 사실이지만 어느 정도는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세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각을 변화시키는 결정적 사건은 일생에 몇 번 있을 따름이며,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이미 결정된 고정관념에 따라 세계를 해석한다.
세계는 고정관념에 맞추어 눈에 보인다. 자신이 세계를 긍정적으로 보고자 한다면 세계는 긍정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세계를 부정적으로 보고자 하면 세계는 부정적으로 보인다. 당신이 세계를 기계적 세계관에 의해서 보고자 하면, 세계는 기꺼이 그 증거가 되는 것을 내놓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세계를 생태적 세계관에 의해 보고자 하면, 세계는 그에 대한 증거도 내놓을 것이다.
그런 과정은 단지 이성의 문제만은 아니다. 그 과정은 감성도 수반한다. 그 때문에 월터 리프만(Walter Lippman)은 "어떤 사건이 고정관념에 부합하는 경우, 거기에는 일종의 친밀감이 생긴다. 그럴 때 우리는 그와 운행을 같이하고 있는 듯이 느낀다"고 말했다. 이런 느낌은 사건뿐 아니라 사람에게도 적용된다. 우리가 이성적인 판단에 의해 어떤 사람을 긍정적 혹은 부정적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믿는 경우에도 고정관념이 작용하고 있을 가능성은 늘 있다. 우리가 늘 자기 생각에 대해 회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쪽

잠시 서두름을 멈추고, 작은 고요와 느림을 즐겨봅시다

무엇보다 속도는 '비실존(non-existence)'을 만들어낸다. 빠른 이동은 '경험'이 거세된 여행을 만들어낸다. 빠른 속도는 상대방과 차분히 대화할 수 있는 분위기와 시간을 앗아간다. 그에 따라 사람들은 상대방에 대한 이해의 폭이 좁아지고 홀로 고립된다. 휴대전화, 전자메일 등 의사소통수단의 발달은 겉보기에는 의사소통을 도와주는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직접적인 대면을 통한 친교와 충분한 정서적 교감의 기회를 앗아간다. 의사소통수단이 발달하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의사소통장애로 고통받는 것은 그 때문이다.
앞으로도 문명의 속도는 더욱 빨라질 것이다. 그러나 빠른 속도가 여유와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빠른 속도는 사색과 휴식을 방해하여 사람들을 침착하지 못하게 만들고 스트레스를 증가시키며 극단적으로 만드는 환경이 되고 있다. 그에 따라 중용과 행복을 유지하기 위해 생활의 속도를 조절하려는 노력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쪽

어떤 운명을 믿고자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인간 의지의 동력이 된다. 의지가 있으면 그 운명이 실현될 가능성이 더욱 높아진다. 실현된 가능성은 그 운명에 대한 증거로 여겨진다. 또한 그 증거는 그의 믿음을 더욱 강고하게 만드는 데 일조한다.
인간이 의식적인 동물이라는 사실은 매우 미묘한 함의를 가진다. 그 때문에 믿음은 의지를 낳는다. 믿음은 매우 논리적인 예상에 합당한 결과도 낳지만, 매우 비논리적인 예언에 합당한 결과도 낳을 수 있다. 운명은 존재한다고도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운명이 아니라 운명에 대한 '믿음'이다. 운명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운명도 없다. 운명은 주체의 개입을 통해서만 실현되기 때문이다.
마르틴 부버(Martin Buber)는 "운명과 자유는 각자 서로를 기약해준다"고 말했다. 정해진 운명이 있다고 믿으면 자유의 몫은 없어진다. 반면 정해진 운명이 없다고 믿으면 자유의 몫은 무한대가 된다. 그러나 양극단은 모두 현실적이지 못하다. 주어진 운명이 있더라도 자유의 몫은 남아 있게 마련이며, 자유가 있더라도 주어진 운명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어느 것에 더욱 비중을 두느냐 하는 태도에 따라 자신의 운명이 달라지는 것 또한 사실이라 하겠다.-.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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