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그냥 그렇고 그런 책인줄 알았다. 너무 드라마틱하고 너무 뻔할 거라고. 기대 없이 나간 소개팅.
오히려 그런 소개팅은 결혼까지 가곤 한다. 이 책도 그랬다.
물론 이 책의 저자 마이클 게이츠 길은 스타벅스의 종업원인 만큼 스타벅스에 대단히 호의적이다. 그러나 그런 그의 스타벅스 예찬이 커피농사의 3세계 아이들의 노동력착취, 1회용 제품의 남용 등 다른 측면에서의 비판의식과 대척점에 놓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대기업 중역에서 종이나부랭이처럼 갑자기 추락하여 스타벅스에서 라떼 한 잔을 사먹는 비용에도 버거워하며 괴로워하다 우연히 브로드웨이의 그 매장의 종업원이 되어 자신의 화려했던 과거의 삶에서 현재의 비참한 경제적 상황, 결혼실패, 건강악화를 어떻게 건강하게 극복해가는 지에 대한 솔직담백한 고백은 굉장한 진정성을 지닌다. 이 책은 스타벅스에 대한 홍보가 아니라 한 인간이 자신의 삶을 둘러싼 외부의 파고를 어떻게 넘어나가고 균형감을 가지게 되는 지에 대한 감동적인 예시다.
이런 고백을 공적으로 하기란 쉽지 않다. 사실 말할 수 있을 때 이미 우리는 극복의 지점을 넘어가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나는 돈관리를 제대로 못해서 ,또 성적 본능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해 이 지경까지 왔다는 잔인한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중략>일자리를 구하기에 너무 늙어버린 지금, 내가 맞닥뜨린 현실은 자기 몸 하나 부양할 능력도 없고, 그 어떤 회사에서도 반겨주지 않는 미국 노인들이 처한 잔인한 현실 바로 그것이었다. 불안하고 암담하고 창피했다. 그런 마음으로 나는 스타벅스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p.60
그는 뉴욕 맨해튼 어퍼이스트 지역의 최고급 주택에서 성장한다. 소위 상류층 자제로 예일대에 진학하여 굴지의 광고회사 JWT의 고위직까지 승진가도를 달린다. 단란하고 다복한 가정. 백인 중산층. 그곳에서의 추락은 예기치 않게 왔고 그런 만큼 더 뼈아픈 것이었다. 정리해고 후 그는 십년 동안 방황하다 혼외정사로 낳게 된 늦둥이 아들의 부양과 이혼, 사업 실패, 뇌종양 등 온갖 악재는 다 경험하게 된다. 행복하고 화려했던 유년의 회상, 언론인 아버지 덕에 숱한 명사들과의 교유 등을 경험했던 그를 이제는 전염병 환자나 되는 마냥 피하는 무리들이 생긴다. 환갑이 훌쩍 넘은 나이. 그는 검은 복장에 초록색 스타벅스 앞치마를 두른다. 화장실을 대걸레로 밀고 손님들에게 거스름돈을 내어 주며 그는 다시 태어난다. 불행했을까, 비참했을까. 우연히 마주치는 예일대의 동창들은 그를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그는 부끄럽지 않다. 특히나 화장실에서 마약을 하다 폐장시간까지 나가기를 거부하며 그에게 칼까지 들이밀던 젊은이를 경험하며 그가 정작 자신의 분노를 찬찬히 들여다 보는 장면. 그는 그 젊은이에게 분노하는 대신, 늙고 오만하고 통제광이었던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모든 상황을 통제하기를 원했던 지난 시절의 잔재로 그는 그 젊은이와 상황을 통제하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그는 육십이 넘어서도 이렇게 스타벅스 매장에서 끊임없이 성장한다. 뭉클했다. 늙고 오만하고 독선적인 노인. 우리는 일부의 습성을 흡사 그 연령대의 본질적인 특질인 것처럼 오도하고 있지나 않은지. 지하철 경로석에서 젊은 사람들과 노인들이 벌이는 그 수많은 유쾌하지 않은 상황들을 이 마이크처럼 자신에게서 극단적으로 치솟는 부정적인 감정을 통하여 돌아보는 기회로 삼는다면 우리는 다 점점 더 성장할 것이다.
스타벅스 매장에서 청소, 계산, 음료 만들기 등 한 단계 한 단계 일을 배워나가며 빛나는 마이클이 드디어 매장에 찾아온 전처 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과 행복하게 화해하고 서로를 토닥이는 장면은 영화의 클라이맥스 같다. 군데 군데 그의 유년, 청년기의 아름다운 추억들은 커피에 얹은 토핑 크림처럼 달콤하고 아련하다. 지하철을 몇 번이나 갈아타며 한 시간이 넘게 걸려 매장에 도착하여 손님들 하나하나에게 덕담과 인사를 건네는 이 인상좋은 할아버지의 모습이 한국에서도 낯선 것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재기'라는 그 진부한 용어에 의외로 너그럽지 않다. 추락은 쉽고 재기는 어렵고 낯선 것이다.
힘들 때에는 우울할 때에는 라떼를 마신다. 술과 담배를 하시지 않는 아버지도 테이크 아웃 커피를 마신다. 고단했던 삶에서 아버지에게 이런 테이크 아웃 커피는 하나의 축복이다. 너무 많은 진지한 생각, 어려운 비판의 잣대를 들이대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냥 이 책에서는 넘어져도 정말 아프게 쓰러져도 다시 행복해질 수 있고 웃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구체적이고 와닿게 아름답게 그려냈다는 것, 그래서 마지막 장을 덮으면 그냥 갑자기 삶이 너무나 눈이 부시게 느껴진다는 것으로 즐겁고 유익한 독서였다고 할 수 있다. 스타벅스에는 된장남, 된장녀만 있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