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마흔이 훌쩍 넘어서야 딸 다섯 아래 아버지를 낳으셨다.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세살 때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할머니의 성취이자 또다른 삶이었던 것같다. 모자는 밀착되어 있었고 죽음으로 헤어질 때까지 서로를 애달파 했다. 꿈에서라도 할머니를 만나면 아버지는 오열한다. 나는 아이를 낳으면서 할머니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산고를 열번 가까이 외롭게 겪고 생떼 같은 자식들을 때로 앞세우기도 했던 당신의 삶. 시대는 변해도 어머니와 자식의 그 치밀하고 절절한 애착의 고리는 끊어지지 않는다. 그 어떤 언어로도 그것을 모두 주워담을 수 없다. 그저 느끼고 또 잊었다 뒤돌아 보고. 여기까지다.

 

스물다섯 살의 로렌스는 암으로 죽어가며 누워 있는 어머니에게 바치기 위해 이 작품을 집필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그녀에게 고통스런 삶을 보상해 주기 위한 시도였다.-켈렌 바론과 칼 바론 

 

 

 

 

 

 

 

 

 

 

 

 

 

 

 

 

 

 

D.H.로렌스 하면 흔히 떠올리는 <채털리 부인의 사랑>. 그는 흔히 에로티시즘과 연결된다. 그의 작품을 시작한다는 것은 왠지 그래서 불온해 보인다. 실제 그의 작품 중 상당수가 20세기 당시 선정성으로 출판 불가 판정을 받았다. <아들과 연인>도 상당부분 삭제된 판본으로 독자와 만나오다 드디어 무삭제 케임브리지 판본의 번역본으로 한국 독자와 만나게 되었다. 이 책에는 평생 어머니와 밀착되어 있었던 로렌스의 자전적인 부분이 상당부분 반영되어 있다. 광부의 아내였던 모렐 부인의 서른한 살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는 마침내 그녀가 죽고 장성한 둘째 아들 폴이 세상으로 나가는 부분까지 장대한 가족 서사시다. 모렐 부인은 로렌스의 어머니 그 자체다. 풍광에 대한 묘파가 뛰어나고 사람의 내면 심리에 대한 간파가 놀랍다. 그에게 에로티시즘의 멍에가 씌어졌다면 그것은 모든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냄새 맡는 것에 로렌스가 얼마나 형형한 눈빛을 빛내며 적시에 적절한 언어로 그것들을 포박했는 지에 대한 몰이해가 아닌가 싶다. 그의 앞에서 모든 사물은 농밀하게 그려진다. 생명력은 놀랍다. 그리고 그것은 생명과 연결되어 있기에 다소 선정적으로 느껴지는 것같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열정적으로 사랑했다. 그 아이는 어머니에게 환멸의 쓰라림이 가장 견디기 어려울 때, 삶에 대한 그녀의 믿음이 흔들리고 그녀의 영혼이 황량하고 외로울 때 태어났다. 그녀는 아이를 대단히 소중하게 여겼고 아이의 아버지는 그것을 질투했다.

-1권 p.40

 

모렐 부인은 상류층 귀부인 같은 우아함을 지녔지만 그의 남편은 술과 유흥에 탐닉하며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만났던 그 활기 있고 매력적인 청년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그녀는 그를 점점 경멸하게 되었고 그 사이 사이 윌리엄, 애니, 폴, 애덤이 태어났다. 어머니가 열정적으로 사랑했고 전장에 그녀의 총애의 표시를 달고 나간 기사와 같았던 장남 윌리엄은 폐렴으로 어이없이 죽어버린다. 그리고 그녀의 삶은 다시 차남 폴에게 닻을 내린다. 폴은 로렌스다.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고 모든 일을 어머니를 위해 했던 폴과 모렐 부인의 유대는 각별하다. 그가 두 여인 사이에서 갈팡질팔 할 때도 그의 지향은 정작 어머니였다. 긴 시간에 걸쳐 서서히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렐 부인에 대한 묘사는 인간의 의지, 꿈, 소망이 그 잔인하고 초라한 종결 앞에서 얼마나 무기력하게 스러지는 지에 하나의 예시이자 전언이다. 죽음과 사투를 벌이는 어머니에게 모르핀을 과다 투여하는 그 남매 간의 암묵적인 합의 장면에서 가슴이 저릿했다. 사랑하는 나를 세상에 내어 놓았던 그 강한 어머니가 작게 오그라들며 고통에 허덕이는 장면. 우리는 대체 뭘 할 수 있을까. 그 명철했던 수전 손택도 죽음 앞에서는 무기력했다. 아들은 어머니를 보내고 그 장면을 또 복기하고 복기하며 대체 뭘 더 어떻게 했어야 했나, 자문하고 또 자문한다. 이런 장면에서 누군들 자유로울 수 있을까.

 

 

 

 

 

 

 

 

 

 

 

 

 

 

 

 

마침내 모렐 부인이 죽고 이제 자식들은 어머니의 죽음을 공적으로 전환해야 했다. 어머니가 죽고 난 세상. 폴이 느낀 것은 이러했다.

 

그의 어머니는 진정으로 그의 삶을 지탱해 주었었다. 그는 어머니를 사랑했고 그들 모자는 실제로 함께 세상을 대면했었다. 이제 어머니가 없었으므로 그의 뒷전에서 삶은 영원히 갈라져서 틈새가 생겨낳고 베일이 찢어져서 마치 죽음을 향해 이끌리듯이 그의 삶은 천천히 표류하고 있었다.

-2권 p.383

 

<아들과 연인>을 읽고 나면 그저 가슴이 먹먹해진다.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가 그려낸 어머니와 자신의 삶과 작별은 잔인할 정도로 사실적이라 읽는 이를 절로 괴롭게 만든다. 어린 아들 앞, 시장에서 막무가내로 값을 깎아서 산 자신의 형편에는 호사스럽게 느껴지는 접시를 자랑핬던 젊고 예쁜 엄마는 어느 날 더 이상 우리와 함께 하지 못한다. 그리고 우리는 또 그러한 우리를 낳는다. 그런 게 삶이라고 생각하니 가슴 한 켠이 뭉근하게 아파온다. 이 모든 것에 허무한 끝이 있다는 명제는 절망적이기도 하고 희망적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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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3-05-08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제 이 책은 자전적 요소가 강한데,로렌스의 아버지는 광부,어머니는 교사여서 당시 영국의 관점에서 본다면 사회적 게급이 틀린 이들끼리의 결혼이었다고 하더군요.이후 로렌스의 어머니는 남편에게 실망해 자식들에게 애정을 쏟았는데 특히 몸이 약한 로렌스를 더욱 사랑하고 아꼈다고 하더군요.

blanca 2013-05-09 10:06   좋아요 0 | URL
정말 책 내용이 비슷하군요! 이 책 읽다 보니 정말 소설을 읽는다기보다는 로렌스의 자서전을 읽는 느낌이었어요. 참 슬프고 뭉클한 이야기였어요. 어머니가 로렌스를 각별히 여겼군요.

세실 2013-05-09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을 읽다보면 자전적인 내용이 들어갈 수 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수필 한편을 써도 내 삶이 들어가는데 하물며 긴 긴 소설은........
요즘 아들에게 서운한 일 있는데 이 책 읽으면 더 서운하려나? ㅎㅎ

blanca 2013-05-10 08:58   좋아요 0 | URL
세실님 어떤 서운한 일이 있으신지 궁금하네요^^;; 내리사랑이라는 말. 참 맞는 것 같아요. 여긴 봄비가 추적추적 내려 운치 있어요. 즐거운 주말 보내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