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정말 하늘을 향해  튀긴 팝콘 같았던 벚꽃은 엔딩을 향해 하고 있다. 하지만 그 뒤를 이어 그 어떤 인공 향수로도 흉내낼 수 없는 달콤하고 향그러운 라일락 꽃망울이 터진다. 시작과 끝은 항상 이렇게 맞물린다.

 

아름다운 계절. 어울리지 않는 어두운 책인 줄만 알았다.

 

캘리포니아 주 몬터레이의 캐너리 로는 시이고 악취이고, 삐걱거리는 소음이고, 독특한 빛이고, 색조이고 습관이고, 노스텔지어고 꿈이다. 캐너리 로는 모여 있는 동시에 흩어진 곳이고, 함석과 쇠와 녹과 쪼개진 나무이고, 잘게 부서진 보도와 잡초가 무성한 나대지와 고물 수집장이고, 골함석으로 지은 통조림 공장이고, 초라한 극장이고, 식당과 매음굴이고, 북적이고 작은 식료품점이고, 연구소와 싸구려 여인숙이다. -존 스타인백 <통조림공장 골목>

 

 

지금은 상류층 거주 지역으로 알려져 있는 몬터레이. 존 스타인벡이 그려낸 과거의 그곳, 통조림공장 골목은 이 도입부의 환유법으로 대치된다. 소란 없이 조용히 타협하는 방법을 아는 중국인 이민자 리청이 운영하는 식료품점, 엄숙하고 당당한(?) 도라의 매음굴, 그레고리 성가를 듣는 닥의 해양 생물학 연구소, 그리고 이러한 닥의 잔심부름을 하기도 그를 성가시게 하는 사고뭉치들 맥 패거리. 이들의 좌충우둘 에피소드는 고상하지는 않지만 때로 웃음을 터뜨리게도 하고 뭉클한 감동을 주기도 하는 에너지로 부글부끌 끓는다. 작가 존 스타인벡은 살리나스 계속의 3대에 걸친 그 대서사시를 장중하게 완성했던 그 동일작가가 분명한데 여기에서는 계속 독자를 포복절도하게 만든다. 소재와 배경은 우울에 물들 만도 한데 그 안의 과육은 어찌나 달큰한지 다 먹기가 아까울 정도이다.

 

 

 

 

부랑자 맥 패거리가 식료품점 주인 리청이 외상 대신 받아낸 창고를 겁박으로 점령하다시피 하고 닥을 위한답시고 그의 생물학 연구소에 필요한 개구리를 잡고 어처구니 없는 깜짝 파티를 준비하는 장면은 시트콤보다 재미있다.

 

그러나 경제적인 울분은 맥 패거리를 깊이 잠식할 수 없었다. 그들은 상업적인 인간이 아니었다. 기쁨을 팔린 물건으로 재지 않았고, 자존심을 은행 잔고로로 재지 않았고, 사랑을 그 값으로 재지 않았다.

-p.162

 

"캐너리 로에서 이른 아침은 마법의 시간이다." 이 시간 통조림 공장의 골함석은 진줏빛 광택을 발한다. 스타인 벡이 명명한 이 '진주의 시간' 에 대한 이야기. 결국 미워할 수 없는 이 구제불능의 맥 패거리들과 마을 주민들은 연합하여 마을의 거의 유일한 지식인이다시피 한 닥을 위하여 성공적인 파티를 공모한다. 실수투성이, 결함투성이의 이들의 파티는 캐너리 로 주민 전체로 연결되고 우리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거대한 파티를 끝으로 이제 해가 거의 중천을 넘어가는 것을 깨닫고 화들짝 놀라게 된다.

 

 

자, 이제 해가 막 떠오르는 진주의 시간이 품은 눈물과 그 눈물이 해를 받아 빛나는 시기에 대한 이야기라며, 저녁의 시간에 대하여 이야기할 차례다.

 

 

 

 

어린 시절 영국으로 이주하여 살게 된 일본인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이 작품은 한번 읽고 말 이야기가 아니었다. 설명할 수 없는 저릿함, 아름다움, 감동은 <통조림공장골목>이 다루었던 하류층, 활기, 애환들과 상치되는 영국의 상류층을 지척에서 수행했던 노집사의 담담한 회고록 전체에서 배어 나온다. 평생 독신으로 오직 위대한 사람을 제대로 보필함으로써 그 위대함과 품위를 부수적으로 얻을 수 있었던 집사의 지난 인생에 대한 합리화는 이 이야기 전체가 하나의 역설을 힘겹게 서술하고 있는 느낌이다.

 

그가 섬겼던 위대하다고 생각했던 주인은 나치의 협력자로 판가름난다. 주인의 죽음 후 다른 미국인에게 저택과 함께 일괄 거래된 그의 인생은 잠깐 동안의 휴가로 이어지고 그 휴가의 갈피짬마다 노집사는 자신의 삶의 여러 편린들을 통합하여 하나의 일관성과 의미를 부여하기 위하여 발버둥친다. 누구의 인생인들 이러한 모순과 자가당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우리도 결국 삶의 퇴로없는 저녁즈음에 '나의 삶'을 제대로 누군가에게 설명해 내고 싶은 욕구를 참아내지 못할 것이다. 이 집사가 전부로 알고 섬겼던 주인처럼 우리도 삶의 전체를 통하여 무언가에 끄달리고 지배당하고 좌우될 것이다. 남아 있는 나날 앞에서 돌아본 그것들이 너무나 빈약했음을 깨닫는 것이 인생이라면 얼마나 서글플까. 그 어떤 착각도 오해도 위선도 교정하지 않은 채 그대로 내버려 두는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화법은 오히려 더 강력한 지향을 역설한다. 그 지향은 절대로 외부를 향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진주의 시간과 저녁의 시간. 이 두 책은 결국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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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ne_Hebuterne 2013-05-14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황의 위태로운 합리화와 의미 부여를 피하기란 어지간한 통찰력이 있지 않고서야 힘들 것 같아요. 가즈오 이시구로는 늘 그 아슬아슬한 줄타기의 한 장면을 보여주었어요. 적당한 서사, 맥을 관통하는 힘이 조화를 이루는 작품이었어요.

덧-저야말로 제가 좋아하던 작품을 블랑카님의 글로 다시 떠올려서 참 즐겁습니다.

blanca 2013-05-16 08:45   좋아요 0 | URL
아, 쟌느님도 이 작가 읽으셨군요! 정말 묘한 글솜씨의 작가였어요. 다른 책도 읽어 볼까 하고 있어요. <녹턴> 같은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