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나는 고3이었다. 그 날, 기억이 맞다면 나는 친구들과 보충수업 중이었다.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스무 살이 된다. 이제 정말 조금만 더 참으면 된다.

 

어두컴컴한 교실로  고3 교실에 참을 인자를 적어 놓던 자그마한 국어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얘들아, 백화점이 무너졌단다."

어안이 벙벙했다. 도저히 무너질 수 없는 것이 거짓말처럼 해체됐다.

그 백화점 안에 있었던 숱한 생명들이 나에게 구체적이지는 않았지만 뭉뚱그려 하나의 예기치 않은 희생으로 다가왔다.

연일 티비에서는 재난 속보 방송을 했고 그 방송을 들으며 영웅처럼 귀환하는 생존자들의 모습에 뭉클했다.

그들도 나도 견디고 있었다. 그 무게는 비교할 수가 없었지만.

 

김영하의 팟캐스트로 정이현의 <삼풍백화점> 낭독을 들었다.

여고 동창생과의 조우. 그 친구는 삼풍백화점 의류 매장에서 일하는 친구였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 문득 종료 버튼을 눌렀다.

이제는 읽을 차례다, 싶었다. 결말까지 육성으로 들을 용기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95년 나는 새파랗게 젊었고 어렸고 무모했다. 나를 둘러싼 모든 일들은 스쳐 지나가지 못했고

하나하나 가슴으로 포박해 들어왔다. 트라우마는 그 일을 겪은 당사자에게만 남는 것이 아닌가 보다.

 

 

그해 봄 나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비교적 온화한 중도 우파의 부모, 슈퍼 싱글사이즈의 깨끗한 침대, 반투명한 초록색 모토롤라 호출기와 네 개의 핸드백.

- 정이현 <삼풍백화점>

 

 

 

 

 

 

 

 

 

 

 

 

 

 

 

 

1995년 6월 29일 삼풍백화점 에어콘은 고장이었다. 교실 안도 후끈했다. 선풍기를 돌리고 부채질을 하며 과연 수능날까지 전과목을 제대로 정리할 수 있을까 싶어 아연했다. 많은 것들이 예비되어 있을 거라고 착각한 열아홉. 주인공은 서태지와 동갑이었다. 그녀는 취업 시장에 뛰어들었지만 반겨주는 곳이 없었다. 내가 대학교 4학년 때 당면할 현실이기도 했지만. 스무 살 문턱은 너무나 눈부셔서 그 이후를 걱정할 여유가 없었다. '나'는 존재감 없던 여고 동창 R을 삼풍백화점 여성복 매장에서 만나게 된다. R과 나는 여고 동창생인데 여고를 졸업하고 이제 대학까지 졸업하려는 찰나에서야 소통하게 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찍 사회인이 된 R은 나에게 고속터미널 근처 칼국수를 사준다. 그리고 남산 근처의 그녀의 작은 방으로 '나'를 초대한다. 스물네 살. 삼풍백화점에서 '나'는 하드커버의 일기장과 소중한 친구를 함께 얻는다. 그 친구가 일하는 매장에서 임시 아르바이트를 하다 도리어 그 친구에게 피해만 끼치고 어색하게 헤어지고 그것으로 그 둘의 인연은 끝이 난다. 한때 절절하게 가까웠던 누구와 어이없이 헤어지는 일은 우리 청춘의 부산물이다. 그 인연히 훑고 지나간 자리에서 우리는 성장한다.

 

그.리.고. 백화점이 무너진다."R과 나의 삐삐번호는 이미 지상에서 사라졌다."는 문장에 가슴이 아려왔다. 물론 나의 삐삐번호도 그 번호를 둘러싸고 만들어졌던 우리들의 관계도 이 지상에서 사라졌다. 그녀는 싸이홈페이지에서 R을 찾아 헤맨다. 그러다 R을 닮은 여자아이의 사진을 발견하고 그것이 R의 딸이기를, R은 삼풍백화점에서 무너지지 않았기를 바란다.  

 

정이현의 <삼풍백화점>은 이런 내용이다. 나의 삶을 스쳐 지나간 인연이 거대한 재해 속에 고난 속에 함몰되지 않았기를 기도하는 모습이다. 우리가 어쩔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슬픈 복기이기도 하다. 잊을 만하면 다시 떠오르는 것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과정이기도 하다. 어떻게 지내는지 잘 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나의 사랑하는 청춘의 친구들. 가만 가만 나도 그녀들의 안위를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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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애(厚愛) 2013-04-12 2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리신 글은 언제봐도 참 좋습니다!
즐겁고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blanca 2013-04-16 11:5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후애님. 어제까지 춥더니 오늘 드뎌 봄기운도 느껴지고 벚꽃도 자주 보이네요^^

후애(厚愛) 2013-04-21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비가 와서 그런지 오늘은 좀 쌀쌀합니다.
날씨가 이래서 감기도 안 낳고...ㅠㅠ
건강 꼭 챙기시고 즐겁고 알찬 주말 되셔요.*^^*

blanca 2013-04-22 16:50   좋아요 0 | URL
감기 걸리셨군요--;; 아무쪼록 빨리 나으세요! 수분 섭취 많이 하시고 목에 스카프나 손수건을 두르면 목감기 예방도 되고 치료도 조금 빨라지는 느낌이더라고요.
 

책을 읽긴 읽었는데 미처 그 책에 대한 감상이나 느낌을 추스르지도 않고 바로 다음 책으로 고고,한 것같다. 먼저 뒤늦게 읽은  로맹 가리의 단편집.

 

 

음, 사실 쉽게 완독하지는 못했다. 로맹 가리 특유의 그 가볍지 않은 진중함이 빛을 발할 때도  있고 지루했던 적도 있어 읽다, 말다 했다. 처절한 경험으로 자의적으로 눈이 멀어버린 소녀와 떠돌이 도붓장소의 기묘한 동행. 크리스마스 특수와 인간의 친절을 믿는 그들이 끝내 또 처절한 배신을 당하고도 그것을 애써 외면하려는 모습을 그린 <지상의 주민들>에서는 로맹가리 특유의 냉소적이면서도 어쩔 수 없이 노출하는 삶과 인간에 대한 애정이 절묘하게 배합된 시선이 드러났다. <우리 고매한 선구자들에게 영광 있으라> 같은 작품은 다소 그로테스크하고 SF적인 분위기가 도발적이었다.

 

로맹가리는 짧은 이야기도 함부로 쓰지 않는 작가인 것같다. 물론 다른 작가들도 그렇겠지만 그는 어디에 발자국을 찍어도 다른 사람들보다 더 깊고 뚜렷하게 남기고 사라지는 그런 캐릭터의 작가다.

 

 

 

 

 

사실 이탈리아를 가 본 적도 갔던 사람의 이야기를 길게 들어 본 적도 없다. 그래서 찰스 디킨스가 그려내는 이탈리아의 풍경이 상상만으로 부족해 참으로 아쉬웠다. 군데 군데 그의 어쩔 수 없는 위트, 풍자가 드러나 재미있었다. 1844년 일요일 아침, 가족과 함께 이탈리아로 떠나는 풍경을 소설처럼 묘사하며 시작하는 이 여행기는 카톨릭에 대한 가감없는 냉소, 관광지의 뒤안길의 그 적나라한 결핍과 생계를 위한 사투에 대한 묘사로 때로 독자를 불편하게 한다. 그만큼 찰스 디킨스는 솔직하고 그다운 산문을 써내어 그의 언어에 대한 펜심을 충족시켜 준다고나 할까. 화려한 사육제 풍경에 대한 생생한 묘사도 아름답다. 170년 전 이탈리아 풍경에 대한 대작가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그 대상이 아니라 그 자체를 다시 발견하는 재미를 누릴 수 있다.

 

 

 

 

 

 

 

 

벼르고 벼르다 드디어 구입해서 영어 공부 한답시고 영어 자막 띄우고 봐서 그런지 영화를 본 게 아니라 한바탕 수업을 들은 기분으로 좋아하는 작가 제인의 북클럽을 오염시킨 것 같아 다소 아쉽다. 다시 한글 자막으로 보니 그 한글자막마저 너무 빨라서 한번에 이해가 되지 않더라. 그러니 하물며 영어라니. 매달 오스틴의 작품을 한 권씩 선정해서 다 같이 읽고 저마나 자신의 시선과 목소리로 재해석하는 그 토론 장면이 너무 아름답고 부러웠다. <맨스필드 파크>, <노생거 사원> 같은 경우는 읽어보지 못해서 토론 내용에 흠뻑 젖을 수 없어 안타까웠다. 오스틴 작품을 다 읽고 다시 본다면 더 재미있게 몰입해서 볼 수 있을 것같다. 이런 북클럽 하나가 있어 테마별로 같이 책 읽고 이야기도 하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혼자 읽는 것과 함께 읽는 것의 그 찬란함의 밝기 차이는 실로 대단하다. 어떤 책이 공통된 정서와 감동을 끌어내지 못할지라도 함께 그 책을 읽었다는 시간 공유의 경험만으로도 소통의 지점은 빛난다.

 

 

 

 

알라딘 서재분들이 종종 언급했던 김영하의 팟캐스트를 드디어 다운받아 듣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작가지만 시간 분량이나 어조가 때로 눈을 감기게 했다. 그의 작품이나 산문집을 보면 대단히 기발하고 재미있는 감각적인 사람일 것 같은데 책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에는 대학교에서 강의를 듣는 느낌이 나서 좋기도 했고 아쉽기도 했다. 정이현의 <삼풍백화점>을 듣다 당장 구입해서 읽어야 겠다는 생각에 팟캐스트 듣기를 중단하고 바로 주문했다.

 

 

정이현이 서울 출신 72년생 작가라는 것이 시사하는 바에 대하여 김영하는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 하숙생과 월남인들로 꾸려졌던 우리의 문학에서 서울에서 태어나서 자란 작가의 등장은 흔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정이현의 소설에는 종종 강남의 중산층의 모습이 가감없이 그려진다. 어쩌면 제인 오스틴도 프루스트도 자주 묘사했던 솔직한 속물적 욕망에 대한 묘사.  바라지만 드러내기는 어쩐지 두려운 것들에 대하여 이 작가는 매우 예리하고 흥미롭게 천착한다.

 

삼풍백화점 의류 매장에서 일하는 여고 동창생을 우연히 만나게 되는 '나'. '나'는 고등학교 때 그녀와 친하지 않았지만 우연한 조우는 그녀와의 인연의 틀을 다시 짜기 시작한다. 그녀들이 결국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호기심과 걱정으로 이 책을 시작하게 되었다.

 

 

 

 

어제 식당에서 거의 고봉밥으로 김치볶음밥을 주신 아주머니에게 먹다 먹다 좀 남긴 접시를 갖다드렸더니 너무 어두운 얼굴로 "맛이 없었어요?"라고 해서 괜시리 미안했다. 아주머니가 내가 남긴 김치볶음밥으로 자신의 요리 실력을 폄하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감기는 끝물이고 이제 정말 봄이 오는 것같다. 4월에는 잠시 살았던 이천의 산수유 축제에 꼭 가보고 싶다. 그때 너무 슬픈 일이 있어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바람에 날리는 산수유를 보며 눈물을 삼켰었는데 이제 웃으면서 산수유를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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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04-04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인오스틴 북클럽]을 보면 등장인물들이 책 읽는 모습들이 종종 나오잖아요. 밤을 새며 책을 읽는 모습도, 침대에 앉아 책을 읽는 모습도요. 그런 모습들이 무척이나 좋았어요. 굉장히 친근하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렇게 여러 사람이 모여 함께 책을 읽기에는 제인 오스틴이 적절하지 않나 싶기도 하고요. 로맹 가리라면, 코맥 매카시라면 그렇게 모여서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었을 것 같아요. 등장 인물중 '그렉'이 르귄의 책을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에게 선물하고 끊임없이 읽었냐고 묻잖아요. 나는 네가 좋다는 책을 읽었다, 너를 좋아하니까. 그런데 너는 내가 주는 책을 읽지 않는구나, 하는 것도 너무 공감이 됐고요. 결국은 그녀가 그 책을 무척이나 재미있게 읽어서 제가 다 행복했어요. 책 읽는 사람들이라면 정말 공감하고 좋아할 예쁜 영화에요. 저는 제인 오스틴을 좋아하진 않지만요.

blanca 2013-04-05 09:56   좋아요 0 | URL
우아, 다락방님 정말 영화의 디테일한 부분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저도 그 책 읽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어요. 원서 페이퍼백이 예뻐 보이기도 했고 가장 연장자(이름이 가물가물)의 그 책갈피도 넘 탐나고. 맞아요, 그렉이 자꾸 자기가 권한 책을 읽지 않았다고 서운해하는 모습 정말 현실적이었죠! 마지막에 북파티도 너무 부럽고요. 부러운 것 투성이였어요!

2013-04-04 12: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4-05 09: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진 2013-04-05 0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인오스틴 북클럽>이라니. 정말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모습이네요. 영화를 언젠가 꼭 보리라 다짐했어요. 물론 그 전에 제인오스틴의 책을 한 권이라도 읽고 말이죠. 제 주변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없어서 작품을 읽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어떤 로망처럼 인식되어 있어요. 참 재미있고 괜찮을 거 같은데.
정이현의 저 책은 한국 현대 단편 소설집을 한 열 권 정도 한꺼번에 주문할 때 끼어 있었어요. '삼풍백화점' 기억하고 갈게요.

blanca 2013-04-05 10:00   좋아요 0 | URL
아, 특히 남자와 제인 오스틴은 쉬운 접근은 아니에요^^;; 이 영화에서도 나오거든요. 아무래도 다분히 소녀적 취향이라는 선입견이 있어서요. 하지만 절대 아니예요. 소이진님도 한번 시도해 보세요. <설득> 같은 책도 참 좋거든요. 아, <삼풍백화점>이요! 제 고등학교 때 삼풍백화점도 성수대교도 무너졌었던 기억이 너무 강렬해서요. 소이진님한테는 이 작품이 또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듯싶어요.
 

 

 

 

 

 

 

 

 

 

 

 

 

 

 

 

 

이미 영화를 본 상태이니 완벽하지 않은, 그래서 지극히 현실적이고 정감이 가는 엠마 우드하우스양의 얼굴에 끊임없이 그 역을 연기했던 여배우 기네스 펠트로우가 오버랩됐다. 적잖은 분량인데 마지막 챕터는 너무 아쉬워서 다른 책을 읽다 다시 돌아와서 마무리했다. 착각하고 오판하고 오해하고 때로는 스스로의 어리석음에 기만당하는 그녀의 캐릭터가 언제나 단면적이고 일관적인 버석거리는 여느 다른 소설 속 주인공들과 달리 살아서 책장을 뚫고 걸어 나올 것만 같았다. '역자 해설' 부분, <정글북>의 작가 루디야드 키플링의 단편소설 <제이나이트>에서 제1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의 전선에서 일하던 취사병이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탐독하는 장교들의 북클럽에에 가입하기 위하여 그녀의 소설을 읽는다는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물론 여느 다른 제인의 작품처럼 이 이야기도 급작스러운 해피엔딩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래서 그녀의 이야기들은 지극히 달콤하다. 언제나 개연성 있고 진지하고 무겁기만 한 이야기가 시간의 고문을 견디는 것은 아니다. 해럴드 블룸은 이데올로기와 개혁 요소가 없는 이러한 제인의 이야기가 가지는 진가를 신중하게 인정한다. 그는 <설득>에 이은 두 번째로 좋아하는 작품으로 <엠마>를 지목했지만 클리프턴 패디먼은 이 <엠마>를 제인 오스틴의 작품 중 우선으로 친다. 다른 사람들 소개팅 해 주는데 골몰하느라 (물론 그 소개팅도 대부분은 서로 전혀 안 맞는 사람을 잘못 맺어주는 것으로 끝난다) 정작 자신의 사랑은 챙기지 못하는 어느 시대에나 있을 법한 천방지축 발랄한 아가씨의 이야기. <엠마>를 읽고 다음 두 책의 저자들의 <엠마>에 대한 자기 나름의 평가와 제인 오스틴에 대한 느낌을 챙겨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

 

 

 클리프턴 패디먼의 <평생독서계획>이 고전에 대한 친절한 지도 역할을 한다면 예일대 교수인 해럴드 블룸의 이 책은 마치 대학교 강의실에 들어가 이제 안 읽은 책이 없는 노교수의 귀한 강의를 듣는 느낌이다. 그래서 가끔 졸리고 가끔은 잘 이해되지 않는 어려운 구석이 있지만 강의평가에서는 최고의 점수를 줄 수밖에 없는 양질의 강의를 수강한 느낌이다. 조금 더 묵혀놓고 책에 나오는 고전을 읽을 때마다 찾아 정독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시나 희곡 부문은 아무래도 거의 제대로 읽은 원전이 없어 그것에 대한 해설이나 감상의 상당 부분이 잘 다가오지 않아 아쉬웠다.

 

 

 

 

 

 

모교의 구내 서점에서 우연히(물론 재학중은 아님었다) 김연수의 책을 처음 만났었다. 윗통을 벗고 하늘을 올려다 보는 청년의 모습이 뭐랄까, 청춘 그 자체 같았다.

 

 이 책은 2009년 읽고 리뷰를 썼다. 더운 여름 시원한 탄산수를 마신 것 같은 기분. 나는 드디어 김연수를 좋아하기 시작했다. 친절한 책은 아니었지만 너무 아름답고 청량감 있는 이야기였다. 지역과 시대를 마구 넘나들며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느라 심장 박동이 빨라진 작가가 시어 같은 언어들을 마구 발사하는 그 느낌이 좋았다. 이 근사한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이란 제목은 인용된 메리 올리버의 시 <기러기>의 한 대목이었다.

 

그래서 메리 올리버라는 시인을 찾아 헤맸지만 아쉽게도 그녀의 작품은 번역본이 없었다. 2013년 현재 <완벽한 날들>이 나오기 전까지 메리 올리버는 김연수만의 시인이었다.

 

 

나는 시집을 잘 읽지 않는다. 번역된 시는 사실 제대로 내가 시를 읽고 있는지를 확신할 수 없는 그 느낌이 싫고 우리말로 되어진 시는 아직 내가 거기까지 가서 그 천상으로 가려는 시인의 그 무용하지만 가치로운 시도에 동참할 단계까지 가지 못한 것 같아서다. 아직 내게 시란 어렵고 저 너머에 있다. <완벽한 날들>은 메리 올리버의 시와 산문이 적절하게 조합되어 있어 그녀에 관한 깊이 있는 천착은 어렵겠지만 아, 김연수가 그래서 메리 올리버였구나, 싶은 수긍을 가능하게 하는 책이다.

 

'나에게 시는 세상에 바치는 찬사다.'라고 이야기하는 메리 올리버가 43년간 지내온 프로빈스타운이라는 도시에서 그녀가 관조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의 경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어쩌면 이렇게도 투명하고 올곧을 수 있는지. 그 시선이 참 신선하고 경이로워 나도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아침마다 소란과 고요가 결혼하여 빛을 만든다. 태양이 장밋빛 자두처럼 떠오른다.

p.33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시인이다. 모든 존재, 현상에 그녀가 던지는 시선은 한량없이 친근하고 소중하다. 그녀 앞에서의 낙관은 생명의 의미이자 삶의 지향이다. 도처에서 몰려오는 절망과 비판의 부정적인 언어들을 물리치고 그녀의 그것들은 우뚝 솟아오른다. 아, 시인이란 이런 존재구나. 그래서 사람들이 시를 읽는구나. 이런 시인 앞에서 현실 도피 운운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면적인 시선이 아닌가 싶다. 나는 그래서 메리 올리버가 인용한 에머슨의 이 글이 너무나 좋다. 하나의 예언 같다.

 

나는 식물의 법칙처럼 도덕의 법칙을 확신한다. 나는 17년 동안 해마다 6월이면 내 땅에 옥수수를 심으며 거기서 스트리크닌이 나진 않는다는 걸 안다. 나의 파슬리, 비트, 순무, 당금, 갈매나무, 밤나무, 상수리나무도 마찬가지다. 나는 정의는 정의를 낳고 부정은 부정을 낳는다는 걸 믿는다.-p.86

 

무겁고 진지하고 비관적이지 않아도 세상에 대하여 설명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들은 많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 침묵되는 것들을 다 포용하는 것들은 정작 그런 것들이 아닌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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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ne_Hebuterne 2013-03-05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상을 바라보는 섬세한 시각, 기민한 노력, 성실한 자세.
제인 오스틴, 그렇지요?

blanca 2013-03-06 08:46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제한된 공간과 한정된 경험에서 어쩌면 이다지도 풍부한 것들을 길어내는 걸까요? 천상 이야기꾼이란 그녀를 지칭하는 얘기인 것 같아요.

세실 2013-03-05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에게 시는 세상에 바치는 찬사다' 참으로 아름다운 표현이네요. 이런 마음으로 시를 쓰는구나....
세상엔 왜이리도 좋은 책이 많은거고, 난 왜이리도 안 읽은 책이 많은 걸까요? ㅎ

blanca 2013-03-06 08:47   좋아요 0 | URL
세실님은 책들에 둘러싸여 사시잖아요. 제가 제일 부러워하는 직장입니다.^^

감은빛 2013-03-06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인 오스틴. 제게 참 많은 영향을 미친 작가예요.
말씀하신 것처럼 '살아서 책장을 뚫고 걸어나올 것 같은' 인물들이죠.

독서에 대한 책들은 예전엔 관심이 많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더 읽기 싫어지더라구요.
특히 저런 번역서들은 말씀하신 것처럼 원전을 읽지 못한 경우가 더 많기도 하구요.

잘 지내시죠? ^^

blanca 2013-03-07 10:04   좋아요 0 | URL
감은빛님^^ 저도 독서에 관한 책을 몰아쳐서 읽었더니 이제는 다시 제대로 책을 찾아 읽어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남자분들한테는 제인 오스틴이 별로 호소력이 없는 작가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군요^^;; 날이 따뜻해져서 기분도 좋아지고 그러는 와중입니다. 환절기 감기 조심하시고 가족들도 다 평안하시기를...

후애(厚愛) 2013-03-07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지내고 계시지요?
요즘 봄날씨인데도 밤에는 무척 춥습니다.
건강 챙기시고, 감기조심하세요.^^

blanca 2013-03-08 10:19   좋아요 0 | URL
패딩을 입기에도 얇은 겉옷을 입기에도 참 애매한 날씨지요? 황사도 있고요. 빨리 따뜻한 진짜 봄이 오기를 기다려 봅니다. 후애님도 감기 조심하세요^^
 

엄마는 이름을 잃어버린다. 엄마는 언젠가부터 장녀인 나의 이름으로 불렸다. 어쩌다 엄마의 이름이 들리면 부르는 사람도 그 이름을 듣는 엄마도 나도 어쩔 수 없는 어색함이 묻어났다. 나는 영원히 예외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회사에 입사하며 명명되는 나의 이름은 무언가 경직되고 거리낌이 묻어났다. 무언가 문제가 생길 때 나의 성에 붙여 불리던 직함은 이름으로 대신되어 '~씨'가 되었다. 그래서 나의 이름이 들리면 다정함이나 친근함 대신 무언가 책임질 일이 일어날 것만 두려움이 들었다.

 

회사를 퇴직하고 아이를 낳고 아이가 기관에 들어가기 전까지 알게 된  또래 아이 엄마들은 그래도 나의 이름을 궁금해했고 서로 이름을 불러주곤 했다. 하지만 유치원에서 만난 학부모가 나의 이름을 물어주는 경우는 거의 전무했다. 아무리 관계가 오래되어도 나도 그녀들도 서로의 이름을 부르거나 알려 하는 것은 무언가 한 발짝 물러나게 되는 지점이 있었다. 이렇게 아이의 엄마는 이름을 잃어버린다. '~엄마'라고 부르는 관계에서 진정한 소통이나 완전한 신뢰는 순간들의 착각인 경우가 많았다. 물론 그때에는 그 나름으로 충실하고 진실한 관계였지만 무언가 조심스럽고 저어하는 일말의 망설이는 지점의 철책이 학부모 간에는 무너지기 어려운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드라마 스페셜 '그녀들의 완벽한 하루'에서 유치원 학부모들인 그녀들의 관계는 물론 드라마틱함을 강조하게 위하여 과장되어 있고 뒤틀려 있고 비현실적인 부분도 많지만 내어 놓고 인정하기 힘들어 애써 외면하는 미성숙한 부모들의 감정 중에 예리하게 잘 포착한 부분들이 많다.  서로 견제하고 질시하며 겉으로는 하나의 목적을 향하여 의기투합하는 모습으로 그녀들은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다. 아이의 성취는 각자의 성취로 치환되고 아이의 절망은 각자의 고통으로 변환된다. 어른들의 관계에서 그녀들은 없다.

 

드라마밖에서도 아이들이 싸우거나 불이익을 보게 되면 어른의 상식이나 중립성과 인내는 먼 나라로 가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래서 친구로서의 그녀와 그 아이의 엄마로서의 그녀는 잘 통합되지 않는다.

 

 

 

일어나는 일들과 어젯밤에 한꺼번에 보게 된 <그녀들의 완벽한 하루>와 상 위에 펼쳐져 있는 이 책은 신기하게도 겹친다. 어쩌면 나는 지금 조금 환멸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크면서 어머니와 학부모들이 가졌던 관계, 내가 이제 시작하는 관계들, 듣는 이야기들 속에서 여중, 여고 시절 그 성숙하지 못했던 감정들의 잔재가 고스란히 표출되는 것을 까끔 경험한다. 결국 해결되지 못하거나 치유되지 못하고 미제로 남아 잇던 모든 것은 언젠가 다시 그 자리로 돌아오는 것 같다. 이 책에는 동서양 문화권을 떠나 경험하는 학부모들 간의 그 이해할 수 없고 때로는 지나치게 미성숙한 불통에 대한 현상론적 관찰이 적나라하다.

 

 

당신은 사춘기 시절이 끝났을 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겠지만-다시는 그 시절로 돌아갈 일이 없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그것은 착각이다. 자녀가 생기면서 사춘기 시절 이후 성숙해진 감정은 창밖으로 날아가 버린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우리에게서 최고의 것을 끌어내는 일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최악의 것을 끌어내는 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p.46

 

 

 

나의 피와 살과 눈물로 맺어지는 아이는 흔히 나의 모든 것의 투영의 결정체가 되기 싶다. 제대로 성숙하고 성장하지 못한 나의 모든 욕망, 결핍이 아이의 그것들과 혼동이 되는 지점에서 우리는 부모가 되어 더 넚어지고 관대해진 마음 대신 더 좁고 못나고 유치한 감정들의 편린과 만난다. 그녀들이 단지 '~의 엄마'로만 보이는 순간부터 그녀들과의 관계의 중심에 '나'와 '너' 대신 '아이'가 자리잡는다. 아이가 가끔 투닥거려도 때로 서로의 아이가 더 돋보여서 조금 질투가 나는 시점이 와도 그 근저에는 인간대 인간으로 이름을 불러주고 아이를 키우는 그 고행을 함께 하는 동료로서의 동질감, 유대감, 신뢰가 있었으면 좋겠다. 나의 아이의 성적이 나에게 성숙하고 좋은 엄마로서의 훈장을 달아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나의 아이가 아닌 다른 아이가 손해 보는 일에도 함께 나서서 도와줄 수 있는 그런 넓은 엄마가 되고 싶고 또 그 소망이 퍼져 있는 그런 그녀들의 모임이 학부모 모임이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이러한 드라마가 너무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않았으면 좋겠다. '맞아, 맞아'를 연발하며 보는 지점에서 느끼는 씁쓸함은 이런 바람들이 저마다 있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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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아이즈 2013-03-01 1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한참 학부모 입장이신 것 같아요.
내 아이 때문에 만나는 학부모 모임,
키우는 동안에는 시샘도 비교도 되지만 어느 순간 다 놓게 되고
여자라는 공감대 하나로 만나지는 부분이 있더라구요.
그래서 전 아이 다 키웠지만 학부모로 만난 친구들이 무람없어 좋아요.
첫 아이는 하나, 둘째 아이는 무려 네 개의 모임이 있다는...ㅋ
고백하자면 막강파워 엄마표 모임인 한 모임은 살짝 불편하긴 한데 제가 워낙
그쪽과는 거리가 먼 방임형 엄마다 보니 견딜만합니다.^^*

이름을 잃어가는 게 싫다고, 모두 이름 부르자고 하지만 정작 말 뿐이고
서로 누구 엄마로만 통하는데도 서글프기보단 그조차 흥미로워요.^^*


blanca 2013-03-01 20:05   좋아요 0 | URL
역시 선배님 말씀을 들어야 안심이 됩니다.^^ 저야 아직 일곱 살이라 명함도 못 내미는 수준이지요. 정말 그랬으면 좋겠어요. 저도 방임형에 가까운데 이게 어쩌다 불안을 자극하는 모임이 있더라고요. 벌써. 영어 때문에 난리입니다. 이름을 부르는 게 어찌나 멋쩍은지 저부터도 차마 아이 친구 엄마 이름은 잘 부르지 못하겠더라고요.

순오기 2013-03-01 2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구 엄마로 사는 삶도 의미있지만, 내 이름으로 불리워지는 것이 나는 더 좋아요!
학교에서 만난 엄마들도 꼭 이름을 기억해서 불러주는 편이어요.
아주 오랜만에 만나거나 통화할 때 이름을 불러주면 좋아하더라고요.
블랑카님 이름도 불러드릴까요?^^

blanca 2013-03-02 14:04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닉네임이 그래서 더 정겹게 들려요. 뵙거나 통화할 기회가 된다면 저도 이름을 불러주세요. 그런데 마찬가지로 여기에서 활동하는 닉네임으로 불려도 참 기분이 좋답니다.
 

책에 대한 책은 아주 많다. 하지만 감히 나에게 베스트 오브 베스트를 꼽으라면 알라딘 서재에서 여러번 추천된 책인 아래 책을 주저없이 내밀 것이다.

 

 

 

책에 대한 책의 가장 큰 함정은 불균형성과 저자의 자의성이다. 저자는 흔히 자신의 삶 속에 자신의 독서 경험과 자신의 독서 기호도와 작가 선호도를 슬몃 끼워 놓는다. 그것은 때로 공감을 불러일으키도 하지만 어떤 책에 대한 완벽한 오해, 고정관념, 오독을 불러온다. 그런 면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것이 이 책이다. 일단 이 책의 저자 클리프턴 패디먼은 라디오 퀴즈 쇼의 사회자였고, 비평가이자 작가였다. <평생독서계획>의 초판은 1960년에 나왔다 저자가 99년 사망할 때까지 수정과 증보를 거듭하다 마침내 완결된 판으로 우리 손에 왔다. (작가 소개 참조) '길가메시 서사시', '맹자'로부터 치누아 아제베의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에 이르기까지 이 책의 스펙트럼은 어마어마하다. 희곡, 철학책, 과학책, 소설 등 균형을 갖춘 독서를 진작하는 저자의 배려는 흔히 독서의 여정에서 치우치기 쉬운 균형점을 잡기 위한 하나의 노력이다. 한 권의 책에 대한 간략학 소개, 저자의 소고, 그리고 독자가 이 책에 어떤 식으로 접근해야 하는 지에 대한 안내가 적절하고 친절하게 잘 버무려져 있다. 고전의 초입문에 있는 독자라면 이 책을 안내 지도로 가지고 출발해도 좋을 것 같다. 빌려서 돌려주고 말기에는 너무나 참조할 구석이 많아 두고두고 옆에 두며 꺼내보게 되는 책이다. 일례로 제인 오스틴의 <이성과 감성>을 읽고 클리프턴 패디먼의 그녀에 대한 평가가 궁금해 다시 이 책을 꺼내놓고 보다 그가 권하는 <엠마>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식이다. 클리프턴 패디먼은 게다가 아주 직설적이고 솔직하다. <돈키호테>는 발췌독을 해도 된단다. 무조건 읽으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너무나 읽기 난해하고 지루한 책에 대한 솔직한 감정과 독자에게 그 책을 어떤 식으로 알아가야 할 지에 대한 더 쉬운 지름길도 제시한다. 이 사랑스러운 책을 쓴 저자의 책은 번역된 것으로 이게 전부다. 너무 아쉬웠다. 그러다 읽게 된 책

 

 

 

이 책의 저자 앤 패디먼은 위의 클리프턴 패디먼의 딸이다. 이 책도 책에 대한 책이다. 다만 이 책은 철저히 개인적인 책에 대한 감상이다. 항상 책에 둘러싸여 있던 유년시절, 남편을 만나 결혼하여 서재를 합치는 과정 등 앤 패디먼의 재기어린 입담은 아버지의 그것보다 조금 가볍지만 나름 상큼하고 흥미롭다. 그리고 이 책에서의 수확은 군데군데 클리프턴 패디먼에 대한 개인 정보다. 아버지로서의 그. 그는 장수했지만 너무나 슬프게도 여든여덟 망막 괴사 진단을 받는다. 이러한 슬픈 노년에 대한 이야기.

 

읽거나 쓰지 못한다면 나는 끝난 것이라고 봐도 좋다."

p.60

 

 

그가 딸 앤 패디먼에게 한 이야기. 책에 대한 그 훌륭한 이야기들을 그렇게나 아름답게 유려하게 했던 그가 자신의 실명 앞에서 한 이야기.  딸이 편도선절제술을 받았을 때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읽어주었던 아버지. 이제 딸은 아버지에게 전화로 책을 읽어준다. 밀턴의 <나의 실명에 대하여>를 전화로 아버지에게 읽어주는 딸. 그리고 그것을 말없이 듣는 아버지. 이 대목은 그 어떤 소설이나 영화의 클라이막스보다 더 가슴 안쪽을 울리게 했다. 언제나 책을 읽고 책을 숭배하고 음식점 메뉴판의 오탈자 찾기에 골몰했던 패디먼 가족의 이야기.

 

책에 대해 이야기하였던 그는 실명 앞에서도 꿋꿋하게 책 앞을 떠나지 않는다. 어린 딸에게 읽어 주었던 그 숱한 책들은 다시 그 성장한 딸의 입에서 그의 귀로 흘러들어온다. 비극적인 계기 앞에서 그의 삶은 더욱 찬란하고 책에 대한 밀착도는 더욱 높아진다. 활자와 이야기에 중독된 사람들에게 이 부녀의 이야기는 왠지 더 희망적이다. 아무리 늙고 병들어도 우리는 여전히 책을 읽고 있을 거라는 이야기. 꼭 책을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낭만적인 메시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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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19 1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에 대한 낭만주의는 blanca님도 이들 부녀 못지 않군요.^^

blanca 2013-02-20 08:43   좋아요 0 | URL
섬님, 제가 그래요?^^;;

꿈꾸는섬 2013-02-19 2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결혼시키기, 담아야겠어요.

blanca 2013-02-20 08:44   좋아요 0 | URL
이 책은 예전에 알라딘 서재에서 화제가 되었던 책이에요. 지금 와서야 왜들 그렇게 좋아들 하셨는지 역시 알라딘 서재분들이 좋아하는 책은 배신이 없구나, 싶었어요. <올리브 키터리지>도 그랬고요. 섬님도 많이 좋아하실 것 같아요.

댈러웨이 2013-02-19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클리프 패디먼의 책은 아주 간결하고 군더더기 없게 요점을 정리해놨죠. 저도 종종 참고하고 있어요. 해럴드 블룸 <세계문학의 천재들>도 좋아하실것 같아요. 클리프 패디먼의 이 책이 좋으셔다면요. 블룸의 책은 편역 오역의 문제가 지적된 것으로 아는데 참고용으로는 일단 좀 깊게 들어가서 도움이 많이 되더라고요. 서재결혼은 정말 사랑스런 책이에요. 블랑카님, 정말 오랫만요. :)

blanca 2013-02-20 08:45   좋아요 0 | URL
아, 댈러웨이님 정말 반갑습니다.^^ 아! 저도 언젠가 블룸의 책을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님이 추천해 주신다면야 다음에 꼭 읽어봐야 겠습니다. 좀 더 깊이가 있군요!

라로 2013-02-20 0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딸을 먼저 알았어요!!ㅎㅎㅎ 그리고 그녀의 글이 좋아서 다른 책도 샀는데 그 책도 좋아요,,,번역 제목은 [세렌디피티 수집광]인데 알라딘에선 아예 검색도 안 되네요???헐
아니면 제가 못 찾는 것일까요???ㅠㅠ
암튼 저도 클리프 패디먼의 저 책에는 블랑카님과 같은 깊은 애정을 갖고 있답니다!!^^
블랑카님이 글을 아주 잘 쓰신다는 것을 알지만 제가 그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갖고 있어서 그럴까요????이 글이 젤로 좋아요!!>.<
기분나쁘진 않으시죠???^^;;;
이 글 패디먼 부녀를 대신해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을 정도에요!!^^

blanca 2013-02-20 08:47   좋아요 0 | URL
아, 기분이 나쁘긴요. 저는 아래에서 '기분나쁘진 않냐'는 글을 먼저 읽고 긴장하고 댓글 읽었답니다.ㅋㅋ 패디먼 부녀, 패디먼 가족의 이야기가 참 감동적이더라고요. 저도 나이들어 제일 무서운 게 사실 책을 읽지 못하게 되는 것이라 클리프턴 패디먼이 잘 극복하는 과정이 참 감동적이었어요. 혹시 앤 패디먼의 책은 절판된 것이 아닐까요?

자하(紫霞) 2013-02-21 0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책 다 읽었는데 부녀 사이라는 것은 블랑카님 글 읽고 처음 알게 되었네요. 오~@@

blanca 2013-02-22 14:47   좋아요 0 | URL
신기하게 부녀더라고요^^ 그런데 역시 책을 많이 읽고 책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던 집안 분위기에서 또 글을 쓰는 딸이 나온 것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