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나는 고3이었다. 그 날, 기억이 맞다면 나는 친구들과 보충수업 중이었다.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스무 살이 된다. 이제 정말 조금만 더 참으면 된다.

 

어두컴컴한 교실로  고3 교실에 참을 인자를 적어 놓던 자그마한 국어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얘들아, 백화점이 무너졌단다."

어안이 벙벙했다. 도저히 무너질 수 없는 것이 거짓말처럼 해체됐다.

그 백화점 안에 있었던 숱한 생명들이 나에게 구체적이지는 않았지만 뭉뚱그려 하나의 예기치 않은 희생으로 다가왔다.

연일 티비에서는 재난 속보 방송을 했고 그 방송을 들으며 영웅처럼 귀환하는 생존자들의 모습에 뭉클했다.

그들도 나도 견디고 있었다. 그 무게는 비교할 수가 없었지만.

 

김영하의 팟캐스트로 정이현의 <삼풍백화점> 낭독을 들었다.

여고 동창생과의 조우. 그 친구는 삼풍백화점 의류 매장에서 일하는 친구였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 문득 종료 버튼을 눌렀다.

이제는 읽을 차례다, 싶었다. 결말까지 육성으로 들을 용기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95년 나는 새파랗게 젊었고 어렸고 무모했다. 나를 둘러싼 모든 일들은 스쳐 지나가지 못했고

하나하나 가슴으로 포박해 들어왔다. 트라우마는 그 일을 겪은 당사자에게만 남는 것이 아닌가 보다.

 

 

그해 봄 나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비교적 온화한 중도 우파의 부모, 슈퍼 싱글사이즈의 깨끗한 침대, 반투명한 초록색 모토롤라 호출기와 네 개의 핸드백.

- 정이현 <삼풍백화점>

 

 

 

 

 

 

 

 

 

 

 

 

 

 

 

 

1995년 6월 29일 삼풍백화점 에어콘은 고장이었다. 교실 안도 후끈했다. 선풍기를 돌리고 부채질을 하며 과연 수능날까지 전과목을 제대로 정리할 수 있을까 싶어 아연했다. 많은 것들이 예비되어 있을 거라고 착각한 열아홉. 주인공은 서태지와 동갑이었다. 그녀는 취업 시장에 뛰어들었지만 반겨주는 곳이 없었다. 내가 대학교 4학년 때 당면할 현실이기도 했지만. 스무 살 문턱은 너무나 눈부셔서 그 이후를 걱정할 여유가 없었다. '나'는 존재감 없던 여고 동창 R을 삼풍백화점 여성복 매장에서 만나게 된다. R과 나는 여고 동창생인데 여고를 졸업하고 이제 대학까지 졸업하려는 찰나에서야 소통하게 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찍 사회인이 된 R은 나에게 고속터미널 근처 칼국수를 사준다. 그리고 남산 근처의 그녀의 작은 방으로 '나'를 초대한다. 스물네 살. 삼풍백화점에서 '나'는 하드커버의 일기장과 소중한 친구를 함께 얻는다. 그 친구가 일하는 매장에서 임시 아르바이트를 하다 도리어 그 친구에게 피해만 끼치고 어색하게 헤어지고 그것으로 그 둘의 인연은 끝이 난다. 한때 절절하게 가까웠던 누구와 어이없이 헤어지는 일은 우리 청춘의 부산물이다. 그 인연히 훑고 지나간 자리에서 우리는 성장한다.

 

그.리.고. 백화점이 무너진다."R과 나의 삐삐번호는 이미 지상에서 사라졌다."는 문장에 가슴이 아려왔다. 물론 나의 삐삐번호도 그 번호를 둘러싸고 만들어졌던 우리들의 관계도 이 지상에서 사라졌다. 그녀는 싸이홈페이지에서 R을 찾아 헤맨다. 그러다 R을 닮은 여자아이의 사진을 발견하고 그것이 R의 딸이기를, R은 삼풍백화점에서 무너지지 않았기를 바란다.  

 

정이현의 <삼풍백화점>은 이런 내용이다. 나의 삶을 스쳐 지나간 인연이 거대한 재해 속에 고난 속에 함몰되지 않았기를 기도하는 모습이다. 우리가 어쩔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슬픈 복기이기도 하다. 잊을 만하면 다시 떠오르는 것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과정이기도 하다. 어떻게 지내는지 잘 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나의 사랑하는 청춘의 친구들. 가만 가만 나도 그녀들의 안위를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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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애(厚愛) 2013-04-12 2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리신 글은 언제봐도 참 좋습니다!
즐겁고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blanca 2013-04-16 11:5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후애님. 어제까지 춥더니 오늘 드뎌 봄기운도 느껴지고 벚꽃도 자주 보이네요^^

후애(厚愛) 2013-04-21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비가 와서 그런지 오늘은 좀 쌀쌀합니다.
날씨가 이래서 감기도 안 낳고...ㅠㅠ
건강 꼭 챙기시고 즐겁고 알찬 주말 되셔요.*^^*

blanca 2013-04-22 16:50   좋아요 0 | URL
감기 걸리셨군요--;; 아무쪼록 빨리 나으세요! 수분 섭취 많이 하시고 목에 스카프나 손수건을 두르면 목감기 예방도 되고 치료도 조금 빨라지는 느낌이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