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긴 읽었는데 미처 그 책에 대한 감상이나 느낌을 추스르지도 않고 바로 다음 책으로 고고,한 것같다. 먼저 뒤늦게 읽은 로맹 가리의 단편집.
음, 사실 쉽게 완독하지는 못했다. 로맹 가리 특유의 그 가볍지 않은 진중함이 빛을 발할 때도 있고 지루했던 적도 있어 읽다, 말다 했다. 처절한 경험으로 자의적으로 눈이 멀어버린 소녀와 떠돌이 도붓장소의 기묘한 동행. 크리스마스 특수와 인간의 친절을 믿는 그들이 끝내 또 처절한 배신을 당하고도 그것을 애써 외면하려는 모습을 그린 <지상의 주민들>에서는 로맹가리 특유의 냉소적이면서도 어쩔 수 없이 노출하는 삶과 인간에 대한 애정이 절묘하게 배합된 시선이 드러났다. <우리 고매한 선구자들에게 영광 있으라> 같은 작품은 다소 그로테스크하고 SF적인 분위기가 도발적이었다.
로맹가리는 짧은 이야기도 함부로 쓰지 않는 작가인 것같다. 물론 다른 작가들도 그렇겠지만 그는 어디에 발자국을 찍어도 다른 사람들보다 더 깊고 뚜렷하게 남기고 사라지는 그런 캐릭터의 작가다.
사실 이탈리아를 가 본 적도 갔던 사람의 이야기를 길게 들어 본 적도 없다. 그래서 찰스 디킨스가 그려내는 이탈리아의 풍경이 상상만으로 부족해 참으로 아쉬웠다. 군데 군데 그의 어쩔 수 없는 위트, 풍자가 드러나 재미있었다. 1844년 일요일 아침, 가족과 함께 이탈리아로 떠나는 풍경을 소설처럼 묘사하며 시작하는 이 여행기는 카톨릭에 대한 가감없는 냉소, 관광지의 뒤안길의 그 적나라한 결핍과 생계를 위한 사투에 대한 묘사로 때로 독자를 불편하게 한다. 그만큼 찰스 디킨스는 솔직하고 그다운 산문을 써내어 그의 언어에 대한 펜심을 충족시켜 준다고나 할까. 화려한 사육제 풍경에 대한 생생한 묘사도 아름답다. 170년 전 이탈리아 풍경에 대한 대작가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그 대상이 아니라 그 자체를 다시 발견하는 재미를 누릴 수 있다.
벼르고 벼르다 드디어 구입해서 영어 공부 한답시고 영어 자막 띄우고 봐서 그런지 영화를 본 게 아니라 한바탕 수업을 들은 기분으로 좋아하는 작가 제인의 북클럽을 오염시킨 것 같아 다소 아쉽다. 다시 한글 자막으로 보니 그 한글자막마저 너무 빨라서 한번에 이해가 되지 않더라. 그러니 하물며 영어라니. 매달 오스틴의 작품을 한 권씩 선정해서 다 같이 읽고 저마나 자신의 시선과 목소리로 재해석하는 그 토론 장면이 너무 아름답고 부러웠다. <맨스필드 파크>, <노생거 사원> 같은 경우는 읽어보지 못해서 토론 내용에 흠뻑 젖을 수 없어 안타까웠다. 오스틴 작품을 다 읽고 다시 본다면 더 재미있게 몰입해서 볼 수 있을 것같다. 이런 북클럽 하나가 있어 테마별로 같이 책 읽고 이야기도 하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혼자 읽는 것과 함께 읽는 것의 그 찬란함의 밝기 차이는 실로 대단하다. 어떤 책이 공통된 정서와 감동을 끌어내지 못할지라도 함께 그 책을 읽었다는 시간 공유의 경험만으로도 소통의 지점은 빛난다.
알라딘 서재분들이 종종 언급했던 김영하의 팟캐스트를 드디어 다운받아 듣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작가지만 시간 분량이나 어조가 때로 눈을 감기게 했다. 그의 작품이나 산문집을 보면 대단히 기발하고 재미있는 감각적인 사람일 것 같은데 책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에는 대학교에서 강의를 듣는 느낌이 나서 좋기도 했고 아쉽기도 했다. 정이현의 <삼풍백화점>을 듣다 당장 구입해서 읽어야 겠다는 생각에 팟캐스트 듣기를 중단하고 바로 주문했다.
정이현이 서울 출신 72년생 작가라는 것이 시사하는 바에 대하여 김영하는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 하숙생과 월남인들로 꾸려졌던 우리의 문학에서 서울에서 태어나서 자란 작가의 등장은 흔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정이현의 소설에는 종종 강남의 중산층의 모습이 가감없이 그려진다. 어쩌면 제인 오스틴도 프루스트도 자주 묘사했던 솔직한 속물적 욕망에 대한 묘사. 바라지만 드러내기는 어쩐지 두려운 것들에 대하여 이 작가는 매우 예리하고 흥미롭게 천착한다.
삼풍백화점 의류 매장에서 일하는 여고 동창생을 우연히 만나게 되는 '나'. '나'는 고등학교 때 그녀와 친하지 않았지만 우연한 조우는 그녀와의 인연의 틀을 다시 짜기 시작한다. 그녀들이 결국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호기심과 걱정으로 이 책을 시작하게 되었다.
어제 식당에서 거의 고봉밥으로 김치볶음밥을 주신 아주머니에게 먹다 먹다 좀 남긴 접시를 갖다드렸더니 너무 어두운 얼굴로 "맛이 없었어요?"라고 해서 괜시리 미안했다. 아주머니가 내가 남긴 김치볶음밥으로 자신의 요리 실력을 폄하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감기는 끝물이고 이제 정말 봄이 오는 것같다. 4월에는 잠시 살았던 이천의 산수유 축제에 꼭 가보고 싶다. 그때 너무 슬픈 일이 있어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바람에 날리는 산수유를 보며 눈물을 삼켰었는데 이제 웃으면서 산수유를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