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이름을 잃어버린다. 엄마는 언젠가부터 장녀인 나의 이름으로 불렸다. 어쩌다 엄마의 이름이 들리면 부르는 사람도 그 이름을 듣는 엄마도 나도 어쩔 수 없는 어색함이 묻어났다. 나는 영원히 예외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회사에 입사하며 명명되는 나의 이름은 무언가 경직되고 거리낌이 묻어났다. 무언가 문제가 생길 때 나의 성에 붙여 불리던 직함은 이름으로 대신되어 '~씨'가 되었다. 그래서 나의 이름이 들리면 다정함이나 친근함 대신 무언가 책임질 일이 일어날 것만 두려움이 들었다.

 

회사를 퇴직하고 아이를 낳고 아이가 기관에 들어가기 전까지 알게 된  또래 아이 엄마들은 그래도 나의 이름을 궁금해했고 서로 이름을 불러주곤 했다. 하지만 유치원에서 만난 학부모가 나의 이름을 물어주는 경우는 거의 전무했다. 아무리 관계가 오래되어도 나도 그녀들도 서로의 이름을 부르거나 알려 하는 것은 무언가 한 발짝 물러나게 되는 지점이 있었다. 이렇게 아이의 엄마는 이름을 잃어버린다. '~엄마'라고 부르는 관계에서 진정한 소통이나 완전한 신뢰는 순간들의 착각인 경우가 많았다. 물론 그때에는 그 나름으로 충실하고 진실한 관계였지만 무언가 조심스럽고 저어하는 일말의 망설이는 지점의 철책이 학부모 간에는 무너지기 어려운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드라마 스페셜 '그녀들의 완벽한 하루'에서 유치원 학부모들인 그녀들의 관계는 물론 드라마틱함을 강조하게 위하여 과장되어 있고 뒤틀려 있고 비현실적인 부분도 많지만 내어 놓고 인정하기 힘들어 애써 외면하는 미성숙한 부모들의 감정 중에 예리하게 잘 포착한 부분들이 많다.  서로 견제하고 질시하며 겉으로는 하나의 목적을 향하여 의기투합하는 모습으로 그녀들은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다. 아이의 성취는 각자의 성취로 치환되고 아이의 절망은 각자의 고통으로 변환된다. 어른들의 관계에서 그녀들은 없다.

 

드라마밖에서도 아이들이 싸우거나 불이익을 보게 되면 어른의 상식이나 중립성과 인내는 먼 나라로 가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래서 친구로서의 그녀와 그 아이의 엄마로서의 그녀는 잘 통합되지 않는다.

 

 

 

일어나는 일들과 어젯밤에 한꺼번에 보게 된 <그녀들의 완벽한 하루>와 상 위에 펼쳐져 있는 이 책은 신기하게도 겹친다. 어쩌면 나는 지금 조금 환멸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크면서 어머니와 학부모들이 가졌던 관계, 내가 이제 시작하는 관계들, 듣는 이야기들 속에서 여중, 여고 시절 그 성숙하지 못했던 감정들의 잔재가 고스란히 표출되는 것을 까끔 경험한다. 결국 해결되지 못하거나 치유되지 못하고 미제로 남아 잇던 모든 것은 언젠가 다시 그 자리로 돌아오는 것 같다. 이 책에는 동서양 문화권을 떠나 경험하는 학부모들 간의 그 이해할 수 없고 때로는 지나치게 미성숙한 불통에 대한 현상론적 관찰이 적나라하다.

 

 

당신은 사춘기 시절이 끝났을 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겠지만-다시는 그 시절로 돌아갈 일이 없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그것은 착각이다. 자녀가 생기면서 사춘기 시절 이후 성숙해진 감정은 창밖으로 날아가 버린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우리에게서 최고의 것을 끌어내는 일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최악의 것을 끌어내는 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p.46

 

 

 

나의 피와 살과 눈물로 맺어지는 아이는 흔히 나의 모든 것의 투영의 결정체가 되기 싶다. 제대로 성숙하고 성장하지 못한 나의 모든 욕망, 결핍이 아이의 그것들과 혼동이 되는 지점에서 우리는 부모가 되어 더 넚어지고 관대해진 마음 대신 더 좁고 못나고 유치한 감정들의 편린과 만난다. 그녀들이 단지 '~의 엄마'로만 보이는 순간부터 그녀들과의 관계의 중심에 '나'와 '너' 대신 '아이'가 자리잡는다. 아이가 가끔 투닥거려도 때로 서로의 아이가 더 돋보여서 조금 질투가 나는 시점이 와도 그 근저에는 인간대 인간으로 이름을 불러주고 아이를 키우는 그 고행을 함께 하는 동료로서의 동질감, 유대감, 신뢰가 있었으면 좋겠다. 나의 아이의 성적이 나에게 성숙하고 좋은 엄마로서의 훈장을 달아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나의 아이가 아닌 다른 아이가 손해 보는 일에도 함께 나서서 도와줄 수 있는 그런 넓은 엄마가 되고 싶고 또 그 소망이 퍼져 있는 그런 그녀들의 모임이 학부모 모임이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이러한 드라마가 너무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않았으면 좋겠다. '맞아, 맞아'를 연발하며 보는 지점에서 느끼는 씁쓸함은 이런 바람들이 저마다 있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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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아이즈 2013-03-01 1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한참 학부모 입장이신 것 같아요.
내 아이 때문에 만나는 학부모 모임,
키우는 동안에는 시샘도 비교도 되지만 어느 순간 다 놓게 되고
여자라는 공감대 하나로 만나지는 부분이 있더라구요.
그래서 전 아이 다 키웠지만 학부모로 만난 친구들이 무람없어 좋아요.
첫 아이는 하나, 둘째 아이는 무려 네 개의 모임이 있다는...ㅋ
고백하자면 막강파워 엄마표 모임인 한 모임은 살짝 불편하긴 한데 제가 워낙
그쪽과는 거리가 먼 방임형 엄마다 보니 견딜만합니다.^^*

이름을 잃어가는 게 싫다고, 모두 이름 부르자고 하지만 정작 말 뿐이고
서로 누구 엄마로만 통하는데도 서글프기보단 그조차 흥미로워요.^^*


blanca 2013-03-01 20:05   좋아요 0 | URL
역시 선배님 말씀을 들어야 안심이 됩니다.^^ 저야 아직 일곱 살이라 명함도 못 내미는 수준이지요. 정말 그랬으면 좋겠어요. 저도 방임형에 가까운데 이게 어쩌다 불안을 자극하는 모임이 있더라고요. 벌써. 영어 때문에 난리입니다. 이름을 부르는 게 어찌나 멋쩍은지 저부터도 차마 아이 친구 엄마 이름은 잘 부르지 못하겠더라고요.

순오기 2013-03-01 2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구 엄마로 사는 삶도 의미있지만, 내 이름으로 불리워지는 것이 나는 더 좋아요!
학교에서 만난 엄마들도 꼭 이름을 기억해서 불러주는 편이어요.
아주 오랜만에 만나거나 통화할 때 이름을 불러주면 좋아하더라고요.
블랑카님 이름도 불러드릴까요?^^

blanca 2013-03-02 14:04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닉네임이 그래서 더 정겹게 들려요. 뵙거나 통화할 기회가 된다면 저도 이름을 불러주세요. 그런데 마찬가지로 여기에서 활동하는 닉네임으로 불려도 참 기분이 좋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