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영화를 본 상태이니 완벽하지 않은, 그래서 지극히 현실적이고 정감이 가는 엠마 우드하우스양의 얼굴에 끊임없이 그 역을 연기했던 여배우 기네스 펠트로우가 오버랩됐다. 적잖은 분량인데 마지막 챕터는 너무 아쉬워서 다른 책을 읽다 다시 돌아와서 마무리했다. 착각하고 오판하고 오해하고 때로는 스스로의 어리석음에 기만당하는 그녀의 캐릭터가 언제나 단면적이고 일관적인 버석거리는 여느 다른 소설 속 주인공들과 달리 살아서 책장을 뚫고 걸어 나올 것만 같았다. '역자 해설' 부분, <정글북>의 작가 루디야드 키플링의 단편소설 <제이나이트>에서 제1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의 전선에서 일하던 취사병이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탐독하는 장교들의 북클럽에에 가입하기 위하여 그녀의 소설을 읽는다는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물론 여느 다른 제인의 작품처럼 이 이야기도 급작스러운 해피엔딩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래서 그녀의 이야기들은 지극히 달콤하다. 언제나 개연성 있고 진지하고 무겁기만 한 이야기가 시간의 고문을 견디는 것은 아니다. 해럴드 블룸은 이데올로기와 개혁 요소가 없는 이러한 제인의 이야기가 가지는 진가를 신중하게 인정한다. 그는 <설득>에 이은 두 번째로 좋아하는 작품으로 <엠마>를 지목했지만 클리프턴 패디먼은 이 <엠마>를 제인 오스틴의 작품 중 우선으로 친다. 다른 사람들 소개팅 해 주는데 골몰하느라 (물론 그 소개팅도 대부분은 서로 전혀 안 맞는 사람을 잘못 맺어주는 것으로 끝난다) 정작 자신의 사랑은 챙기지 못하는 어느 시대에나 있을 법한 천방지축 발랄한 아가씨의 이야기. <엠마>를 읽고 다음 두 책의 저자들의 <엠마>에 대한 자기 나름의 평가와 제인 오스틴에 대한 느낌을 챙겨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

 

 

 클리프턴 패디먼의 <평생독서계획>이 고전에 대한 친절한 지도 역할을 한다면 예일대 교수인 해럴드 블룸의 이 책은 마치 대학교 강의실에 들어가 이제 안 읽은 책이 없는 노교수의 귀한 강의를 듣는 느낌이다. 그래서 가끔 졸리고 가끔은 잘 이해되지 않는 어려운 구석이 있지만 강의평가에서는 최고의 점수를 줄 수밖에 없는 양질의 강의를 수강한 느낌이다. 조금 더 묵혀놓고 책에 나오는 고전을 읽을 때마다 찾아 정독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시나 희곡 부문은 아무래도 거의 제대로 읽은 원전이 없어 그것에 대한 해설이나 감상의 상당 부분이 잘 다가오지 않아 아쉬웠다.

 

 

 

 

 

 

모교의 구내 서점에서 우연히(물론 재학중은 아님었다) 김연수의 책을 처음 만났었다. 윗통을 벗고 하늘을 올려다 보는 청년의 모습이 뭐랄까, 청춘 그 자체 같았다.

 

 이 책은 2009년 읽고 리뷰를 썼다. 더운 여름 시원한 탄산수를 마신 것 같은 기분. 나는 드디어 김연수를 좋아하기 시작했다. 친절한 책은 아니었지만 너무 아름답고 청량감 있는 이야기였다. 지역과 시대를 마구 넘나들며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느라 심장 박동이 빨라진 작가가 시어 같은 언어들을 마구 발사하는 그 느낌이 좋았다. 이 근사한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이란 제목은 인용된 메리 올리버의 시 <기러기>의 한 대목이었다.

 

그래서 메리 올리버라는 시인을 찾아 헤맸지만 아쉽게도 그녀의 작품은 번역본이 없었다. 2013년 현재 <완벽한 날들>이 나오기 전까지 메리 올리버는 김연수만의 시인이었다.

 

 

나는 시집을 잘 읽지 않는다. 번역된 시는 사실 제대로 내가 시를 읽고 있는지를 확신할 수 없는 그 느낌이 싫고 우리말로 되어진 시는 아직 내가 거기까지 가서 그 천상으로 가려는 시인의 그 무용하지만 가치로운 시도에 동참할 단계까지 가지 못한 것 같아서다. 아직 내게 시란 어렵고 저 너머에 있다. <완벽한 날들>은 메리 올리버의 시와 산문이 적절하게 조합되어 있어 그녀에 관한 깊이 있는 천착은 어렵겠지만 아, 김연수가 그래서 메리 올리버였구나, 싶은 수긍을 가능하게 하는 책이다.

 

'나에게 시는 세상에 바치는 찬사다.'라고 이야기하는 메리 올리버가 43년간 지내온 프로빈스타운이라는 도시에서 그녀가 관조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의 경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어쩌면 이렇게도 투명하고 올곧을 수 있는지. 그 시선이 참 신선하고 경이로워 나도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아침마다 소란과 고요가 결혼하여 빛을 만든다. 태양이 장밋빛 자두처럼 떠오른다.

p.33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시인이다. 모든 존재, 현상에 그녀가 던지는 시선은 한량없이 친근하고 소중하다. 그녀 앞에서의 낙관은 생명의 의미이자 삶의 지향이다. 도처에서 몰려오는 절망과 비판의 부정적인 언어들을 물리치고 그녀의 그것들은 우뚝 솟아오른다. 아, 시인이란 이런 존재구나. 그래서 사람들이 시를 읽는구나. 이런 시인 앞에서 현실 도피 운운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면적인 시선이 아닌가 싶다. 나는 그래서 메리 올리버가 인용한 에머슨의 이 글이 너무나 좋다. 하나의 예언 같다.

 

나는 식물의 법칙처럼 도덕의 법칙을 확신한다. 나는 17년 동안 해마다 6월이면 내 땅에 옥수수를 심으며 거기서 스트리크닌이 나진 않는다는 걸 안다. 나의 파슬리, 비트, 순무, 당금, 갈매나무, 밤나무, 상수리나무도 마찬가지다. 나는 정의는 정의를 낳고 부정은 부정을 낳는다는 걸 믿는다.-p.86

 

무겁고 진지하고 비관적이지 않아도 세상에 대하여 설명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들은 많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 침묵되는 것들을 다 포용하는 것들은 정작 그런 것들이 아닌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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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ne_Hebuterne 2013-03-05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상을 바라보는 섬세한 시각, 기민한 노력, 성실한 자세.
제인 오스틴, 그렇지요?

blanca 2013-03-06 08:46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제한된 공간과 한정된 경험에서 어쩌면 이다지도 풍부한 것들을 길어내는 걸까요? 천상 이야기꾼이란 그녀를 지칭하는 얘기인 것 같아요.

세실 2013-03-05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에게 시는 세상에 바치는 찬사다' 참으로 아름다운 표현이네요. 이런 마음으로 시를 쓰는구나....
세상엔 왜이리도 좋은 책이 많은거고, 난 왜이리도 안 읽은 책이 많은 걸까요? ㅎ

blanca 2013-03-06 08:47   좋아요 0 | URL
세실님은 책들에 둘러싸여 사시잖아요. 제가 제일 부러워하는 직장입니다.^^

감은빛 2013-03-06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인 오스틴. 제게 참 많은 영향을 미친 작가예요.
말씀하신 것처럼 '살아서 책장을 뚫고 걸어나올 것 같은' 인물들이죠.

독서에 대한 책들은 예전엔 관심이 많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더 읽기 싫어지더라구요.
특히 저런 번역서들은 말씀하신 것처럼 원전을 읽지 못한 경우가 더 많기도 하구요.

잘 지내시죠? ^^

blanca 2013-03-07 10:04   좋아요 0 | URL
감은빛님^^ 저도 독서에 관한 책을 몰아쳐서 읽었더니 이제는 다시 제대로 책을 찾아 읽어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남자분들한테는 제인 오스틴이 별로 호소력이 없는 작가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군요^^;; 날이 따뜻해져서 기분도 좋아지고 그러는 와중입니다. 환절기 감기 조심하시고 가족들도 다 평안하시기를...

후애(厚愛) 2013-03-07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지내고 계시지요?
요즘 봄날씨인데도 밤에는 무척 춥습니다.
건강 챙기시고, 감기조심하세요.^^

blanca 2013-03-08 10:19   좋아요 0 | URL
패딩을 입기에도 얇은 겉옷을 입기에도 참 애매한 날씨지요? 황사도 있고요. 빨리 따뜻한 진짜 봄이 오기를 기다려 봅니다. 후애님도 감기 조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