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마침 19세기에서 20세기로의 전환기에 들어서면서 철도와 증기선의 발달로여행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기 시작했다. 대륙의 횡단 및 해양 항해의 가능성이 열리자 영국을 비롯한 서양인들이 조선으로 향했고, 이들은 손쉽게 조선의 유물을 수집해 갔다. 말하자면 수집이라는 행위는 머나먼 조선 땅과 영국을 연결하는 실체적 수단이자 만남의 증거였다. 다양한 형태의 수집 활동은 영국 박물관 전문가, 외교관,
학자, 무역상, 선교사를 비롯한 수많은 인물과 직업군에 의해 이루어졌다. - P30

그러다 1882년 우에노 공원에 들어선 일본 최초의 동물원이 대중을 위한 볼거리 public spectacle이자 위락 시설의 역할을 담당하기 시작했는데, 이 동물원에서 이국적인 동물들이 특히 인기가 높았다. 그렇게 동물원에서 우리에 갇힌 동물들을 접하는 것과 동시에 제국주의와 근대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어느덧 대중의 눈에 이국적인 동물은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에서 인간에게 정복당한존재, 즉 인간의 강력한 힘을 확인시키는 대상이자 상징이 되었다.
실제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치르면서 일본군은 한반도의 많은 야생 동물을앞다퉈 포획했다. 그렇게 잡은 동물들은 곧 일본이 이 땅을 정복했다는 상징으로 여겨졌고, 실제로 전리품 혹은 동물 트로피animal war trophies라는 라벨을 붙여 전시하기도했다. 이렇게 포획, 분류된 한반도의 동물들은 다른 국가로부터 선물받은 동물들과함께 대중들 앞에 전시되었고, 우에노 동물원은 제국주의 권력의 진열장이 되었다. - P57

이처럼 약 20여 년 사이에 일어난 변화는 일본인 수집가들의 연구와 그들의 수집품 그리고 한국 유물에 관해 일본인들이 주도한 전시 등의 행사가 매우 큰 영향을끼쳤다. 다시 말해 영국의 한국 유물 수집가들에게 일본인들에 의해 제공되는 다양한 정보가 한국의 유물을 접하고 이해하는 데 이정표 역할을 했다는 것을 단적으로보여준다. 그렇게 막연하고 신비하기만 했던 ‘은둔의 나라‘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라는 매우 구체적인 모습으로 영국인들에게 점점 그 이미지가 굳어지고 있었다. - P76

19세기 말부터 한국의 도자기 유물들이 일본은 물론 서구 여러 나라로 유출되었다는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1870년대부터 ‘코리아‘ 도자기로 둔갑한 가짜 도자기들이 영국으로 흘러들어갔다는 것을 아는 이들은 매우 드물다.  - P76

1890년과 1891년 폭발적으로 증가한 일본 도자기 수입 물량은 두 가지 사실을말해준다. 하나는 그만큼 일본인들의 이주가 늘어나고 있었다는 사실, 또 하나는 조선인 사용자들도 확연하게 증가했다는 사실이다. 개항 이후 다량으로 유입된 일본자기는 왕실뿐만 아니라 민간에 유통되며, 매우 빠른 속도로 조선의 시장을 점유했고, 이것이 결국 조선 도자기 사업을 잠식해 가고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 P82

 특히 중국 혹은 중국풍 미술품 수집 유행은 제2차 아편전쟁 이후에 중요한 전환점을 맞는다.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원명원에 불을 지르고 다량의 문화재를 약탈한 사건은 중국으로서는 치욕적인 일이었겠으나 그렇게 약탈된 문화재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동안 화려하게 장식된 청나라 수출 도자기만을 수집하던 유럽인들에게 신선한 오리지
‘중국 도자기 유행을 일으킨 계기가 되었다. 유럽인들은 그동안 선호하던 화려한수출용 채색 도자기 대신에 ‘진짜‘ 중국인들, 혹은 중국 황제들이 쓰던 ‘고급‘ 물건들을선호하기 시작했고 나아가 송나라와 원나라 시대의 순수하고 소박한 도자기를 찾기시작했다. 이것이 서양인들로 하여금 고려청자를 좋아하고 수집하게 한 원류임은 부정할 수 없다. - P89

중국 도자기 수집이 그러했듯이 1880년대 조선 도자기, 특히 그 가운데 고려청자를 선호하고 수집하려는 이들의 취향의 형성은 한두 개의 특별한 이유에서 비롯한것은 아니다. 다양한 관련 요소가 얽혀 있지만 그 가운데서 이미 중국, 넓게는 동양도자기의 원류를 찾고 즐기려는 영국인들의 확장된 수집 취향과 시장의 형성이 전제되었다는 점은 특히 강조하고 싶다. - P90

이렇듯 이왕가박물관은 표면적으로는 조선 왕가의 정통성을 유지하고 대중을위한 교육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곳이었으나 실제로는 고대 예술품을 통해 일본의 식민지 문명화 정책을 드러내기 위한 장이었다. - P127

이러한 소장가들의 면면을 볼 때 당시 고려청자 수집 열풍이 일본의 고위직 관료들과 성공한 기업인, 학자 등 일본 상류층을 중심으로 형성된 계급적 문화임을 알수 있다. 이러한 문화는 당시 일정한 취향을 통해 사회 계급적 정체성을 형성했고,
식민지 조선의 미술품 소장과 감상 문화는 당시 일본에서 유행한 다도 문화의 부활과도 연결된다.  - P133

참고로 러일전쟁 당시 자국인들의 조선 이주 장려는 일본의 주요 정책 중 하나였다. 일본 정부는 조선을 일본인의 제2의 고향으로 만들기 위해 인구 이동을 추진했는데 이것은 곧 식민지에서의 무역, 권력 및 영향력의 확장을 의미했다. 하와이나미국으로 이주한 일본인 대다수가 노동자 계급이었던 것과는 반대로, 식민지 개척자들의 조선 이동은 상업과 해군력의 상징이었다. 따라서 책,기사, 팸플릿 등을 비롯한 여러 매체는 조선으로 이주한 이들을 개척자이자 정착자, 일본의 운명을 짊어진사람으로 묘사하곤 했다. 엘리트 남성의 특권적 관점을 사용하여 일본 제국의 정책과 제도를 구체화했고, 정부 관리 · 군사 지도자 · 부유한 기업가 저명한 작가 및 학자들이 매체의 중심에 소개되었다.  - P139

1900년대 일본인들의 수집 활동은 16세기 다도인들의 특별한 심미안을 이어받았을 뿐만 아니라 서양인들은 알아보지 못하는 조선 미술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자신들이 소개하는 자부심으로 연결되었다. 그런 한편으로 조선시대를 바라보는 일본인들의 부정적인 태도와 조선 예술 쇠망론은 반복적으로 되풀이되고 있었다. 다시말해 이 시기 일본인들은 일본의 과거와 연결된 한국의 고대 미술을 찬양하면서 그것을 보존한다는, 스스로 부여한 일본의 의무는 자신들의 제국주의적 야심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하고 있었다. 일본 지배 계급의 이러한 고려청자 취향은 이왕가박물관에서, ‘고려소‘ 전시에서 그리고 런던의 화이트 시티 전시장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 P143

영국, 나아가 서양에서는 일찍이 먼 바다를 건너온 진귀한 동양의 도자기는 왕실과 귀족들만이 소유할 수 있었고, 이는 곧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다. 또한 아편전쟁을 통해 그 이전까지 침범할 수 없었던 중국 옛 황실의 소장품을 약탈해 온 것은 자신들의 제국적 우위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토 히로부미가 수천 점의 고려청자를 조선 땅에서 싹쓸이하듯 수집했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영국 왕실과 귀족들이 자신들의 궁과 별장의 벽장과 캐비닛을 동양 도자기로 가득 채울 만큼 열광적으로 사들인 것과 비슷해 보인다. 제1장에서 살핀 호랑이 사냥이 그러했듯 일본은 영국을,
영국은 일본을 서로 모방하면서 제국주의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만들어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고려청자를 향한 일본의 제국주의적 애호는 어쩌면 그런 이유로 영국인들에게 쉽고 빠르게 전이되었던 것은 아닐까. - P143

"지난 몇 년 동안 이 지역에서 이루어진 철도 여행의 급속한 발전은 유럽과극서부 지방 서양의 현대 문명과는 다른 것을 찾는 이들을 뭔가 다르고 뭔가 새로우면서도 예스러운 곳으로 안내한다. " - P153

세키노 다다시의 고적 조사가 조선총독부의 관광 정책에 큰 영향을 끼친 점은간과할 수 없다. 서울의 관광 명소로는 철도역과 조선총독부 건물, 통감부 시절 창경궁의 동쪽 부분을 개조한 이왕가박물관과 동물원, 지역 관광 상품 및 기념품 쇼핑을위해 포함한 것으로 짐작되는 일본인 거주지 본정통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뿐만 아니라 경복궁 근정전을 뜻하는 왕궁 접견실도 관광지로 손꼽혔다. 경복궁은 왕궁 RoyalPalace 이라고 지칭되긴 했지만, 1907년 순종이 창경궁으로 이어한 이래 더이상 조선의 왕이 거주하는 궁궐이 아니었다. 관광지 코스 중 하나로 들어간 것을 통해 궁궐이더이상 조선의 위상을 대표하는 기능을 상실하고, 대중의 오락물로 격하되었음을 목격할 수 있다. - P197

49다. 이처럼 제국주의자들이 자신들이 지배한 식민지 국가의 풍경과 사람들을 촬영하여 대량 생산, 판매한 사진과 엽서는 근대적 우편 제도와 맞물려 유럽 본국의 대중들에게 이국적인 오리엔트 이미지를 제공하는 동시에 이들을 타자화하고 상투화하여 고정된 스테레오 타입을 만들어 나갔다. - P201

"이상한 복장의 한국 사람들 - 특히 흰 나이트 가운잠옷을 입고, 말털로 만든알약 상자 모자를 쓰고 거리를 활보하는 남자들이 가장 흥미롭다. " - P206

비록 서양 고객의 수요에 맞춰 새롭게 제작되기는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출 가구는 전통 방식의 장식 기법과 디자인, 재료 등을 유지하면서 어디까지나 ‘한국적인 것으로 남아 있기를 요구받았다. 어쩌면 ‘진짜‘ 한국 물건이면서 동시에 서양식 주거 공간 안에서 ‘이국적이고 흥미로운 인테리어 소품이자 가구로 보이기까지해야 하는 딜레마를 출발점부터 품은 채 발전해온 셈이다. - P231

대체품으로 등장한 것이 또 있는데, 바로 조선백자다. 제대로된청자를 구하기 어렵게 되면서 일본인 지식인층을 중심으로 조선백자의 가치를 알아보는 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1920 년대 무렵부터 미술품 수집에 관심을 보인 중산층 컬렉터들 사이에서 고려청자의 대체품으로 조선백자가 부상했다. - P238

이렇게 되자 경성과 도쿄에서 활동하던 야나기와 아사카와 노리타카 그리고 그동생 아사카와 다쿠미 1891~1931 주축으로 한 조선 도자기에 관심을 둔 무리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20세기 일본 역사 연구가 킴 브란트Kim Brand는 이들이 당시 다도 문화를 주도하던, 즉 이 세계에 급부상한 부르주아 계급과 비교하자면 다소불안정한 위치에 있는 예술가·작가·대학생 또는 교사 신분 등의 중산층 지식인이었다고 설명한다." 이 새로운 그룹은 식민지 조선에서의 자신들의 위치를 충분히 활용하고, 서양미술사조와 지식을 흡수하여 당시 ‘수집할 만한 미술‘의 카테고리를 확장하고 변화시키려고 했다. 자본주의적 사치와 쾌락주의적 생활 양식을 대표하게 된당시 다도문화의 권위에 도전하면서 동시에 사치스럽지 않은 소박한 생활 용구와공예품에 가치를 부여했다. 12 - P239

이왕가박물관과 조선총독부박물관은 고려와 신라 시대를 한국 문화의 정점으로 해석했다. 특히 조선총독부박물관은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의 고적조사를 통해 발굴한 불교 미술과 건축 관련 고고학 유물 전시에 초점을 맞췄다. 신라와 고려 시대번성했던 불교 문화와 과거의 예술적 아름다움에 초점을 맞추고, 문화·과학·기술및 건축 표본 전시를 통해 그 의미와 가치를 입증하고 부각함으로써 이왕가박물관과조선총독부박물관은 조선총독부, 나아가 일본 제국주의의 ‘문명화‘ 임무의 성공적인결과물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에게 조선시대는 한국 예술 및 문화의 절정을 지나 문화의 쇠퇴기로 접어든 지 오래인 것으로 치부되었다. - P249

김환기가 백자 항아리와 달의 형상을 연결시킨 정확한 시점을 확인하긴 어렵지만, 1945~1949년 사이에 그는 ‘하얗고‘, ‘크고 둥근 형태의 달의 이미지를 백자 항아리와 연결시켜 달항아리‘란 새로운 미학을 확립해 갔다. 그의 작품 속 달항아리 이미지는 백자가 밤의 달을 대신하고 있는 것으로 1949년 <백자와 꽃에 처음 등장한다. 1952년에는 달과 항아리가 병치되어 <호월>, 즉 항아리와 달이라는 제목처럼 두 대상을 개념적으로 통합했다. 1956년에는 ‘우리 민족의 진정한 얼(예술)은 결국항아리에서 멎었다‘며 한국인의 정신과 아름다움은 백자 항아리로 대표할 수 있다고믿었다. - P266

다시 말해 영국에서 조선백자가 사랑받게 된 배경에는 조선의 도자기를 예술적영감으로 수용하고 재평가한 영국 스튜디오 포터리라는 매우 유용한 촉매자의 역할이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 - P279

다시 말해 조선 도자기는 이 무렵 더이상 작은 틈새 시장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이미 영국, 일본, 한국 수집가들의 요구와 선호도에 따라 그 수요가 늘어나고 있었고 시장 역시 성장하고 있었다.
와일드와 탭을 비롯한 여러 서양의 수집가들이 기증한 조선백자는 1920년대에이미 영국의 어러 박물관 전시장에 등장하기 시작했고, 영국의 스튜디오 포터리 세계에서도 이를 주목하는 시선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었다. 이는 곧 1935년 영국에 도착한 달항아리를, 이미 이들의 세계에서는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의미이기도 하다. - P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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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합은 환원주의와 반대의 길을 간다. 환원주의가 멈춤이라.
면 융합은 지속적인 이동, 재해석이다. 재해석은 창의력의 발판이고, 창의력이 필요한 이유는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다. 융합 능력, 즉 ‘공부를 잘하는 방법은 기존의 언어를 어떻게 재구성하느냐에 달려 있다. 다른 앎과 만나 혼란을 느끼면서 기존 개념에 의문을 품고, 차이와 경계의 기준을 재설정해서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사안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 P179

요약하면 융합은 원래 존재했고(혼종성, hybridity), 대화가 필요하며(learning), 기존의 지식을 넘어서야 한다(trans~). 물론세 번째가 가장 중요하다.  - P191

대립하는 논리의 충돌은 필연적이다. 융합은 충돌을 지향한다. 합치지말고 충돌 양상을 질문해야 한다. - P200

그들은 시간을 중심으로 삼아 세계를 해석했다. ‘원시 사회 - 봉건제 -자본주의‘처럼 문명의 발전에 따라 역사를 서열화하는 것, 역사를 과거의 사건으로 생각하는 것, ‘세계 최초‘가세계 최고라는 인식, ‘~의 아버지‘라는 말처럼, 시원(始原)을 중요시하는 사고방식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고는 한 사회의 역사밖에 서술하지 못한다. 세계 200여개 나라가 동시에 같은 경험을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동시대여도 지역마다 삶이 다른데, 하나의 시간을 기준으로삼아 사유하면 ‘문명인, 야만인‘ 같은 구분이 생길 수밖에 없다.
시간 중심 사고는 한 사회(서구)가 기준이 되어 강자 중심의 보편성을 만든다. 나머지 사회는 서구를 따라잡아야 할 역사의 대기실로 간주된다. 타자(the others)를 만들어내려면 단일한 시간개념이 필수다. - P212

객관성은 중립의 대명사다. 그래서 진리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너의 객관‘이 ‘내겐 폭력‘인 경우가 많다. 객관은 스스로 선재한다고 여겨지지만, 상황적 지식은 지식이 만들어진 조건을 파고든다. 어떤 조건에서 우리의 인식이 만들어졌는가. 그과정을 알아야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 모든 지식은 특정 맥락에서만 의미가 있다. 만사에 적용되는 지식은 없다. 시트콤처럼 어떤 테두리, 상황, 패러다임 안에서만 ‘웃기는 것이다. 다른상황에서 그것을 재연하면 ‘썰렁한‘ 이유가 그것이다. - P222

 이성애의 정상성은 동성애를 비정상으로 간주했을 때, ‘남성‘은 여성/노인/가난한 사람/장애인 등 지배의 규범에서 배제된 ‘비(非) 남성‘을 상정했을 때만 가능하다. ‘서양‘은고정된 ‘동양‘의 이미지가 필요하다. 백인우월주의는 유색인종이라는 임의적 설정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이처럼 대개 언어는위계의 만남이다. 이분법은 A와 B가 아니라 기준으로 삼은 A와 그 외 것들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 P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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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2-09-05 11: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특히 222쪽의 글, 기억해 둘 글 같습니다. ˝어떤 조건에서 우리의 인식이 만들어졌는가˝하는 것.
조건이나 상황의 중요성을 놓치면 안 될 것 같아요. 상황에 따라 인식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를 간과해선 안 되겠습니다.
바람돌이 님의 발췌를 보니 저도 하고 싶네요. 에세를 읽고 좋은 문장을 올려 보겠습니다.^^

바람돌이 2022-09-06 14:29   좋아요 0 | URL
저 문장은 저에게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었습니다. 제가 옳다고 별 생각없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쓰는 말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가 되거나 폭력이 될 수도 있음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지 뭐 이런 생각도 한번 더 하게 되고요.
페크님의 에세 문장 열심히 기다릴게요. ^^
 
















미국인/프랑스인      권위적인/소극적인       배려하는/냉담한      여성적인/남성적인      재미있는/엄격한

너그러운/고집센      쾌활한/냉소적인          깔끔한/지저분한

친절한/심술궂은      열정적이/둔감한          매력적인/심각한

정중한/퉁명스러운   책임감있는/무신경한     사교적인/비사교적인     페미니스트/전통적인

눈에 띄는/은둔하는  메리포핀스/사악한 마녀

            비비안 마이어를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 묘사한 비비안의 모습 - 11쪽


인간이 모순적인 존재라고 다들 얘기하지만 그래도 한 사람에 대한 묘사가 이토록 극단적인 경우가 많지는 않을 것이다.

느닷없이 갑자기 발견되어 우리 앞에 훅 다가온 사진예술가 비비안 마이어

2007년 시카고 경매장에서 존 말루프라는 26살의 부동산 중개업자는 무명 사진작가가 찍은 인화하지 않은 필름과 네가티브 필름이 잔뜩 든 상자들을 낙찰받는다.

이 필름들에서 이것들이 특별하다는 것을 알아챈 존 말루프의 필름 주인 찾기가 시작이었다.

열심히 찾았으나 존 말루프가 이 사진작가를 찾아낸 것은 2009년 4월 그녀의 부고기사를 보고서였다.

보모로 평생을 살았고, 끊임없이 사진을 찍었으나 그것을 세상에 내보낸 적은 없었고, 철저하게 자신을 감추고 산 이 여성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토록 수많은 사진을 남겻으면서 왜 생전에 한번도 전시회를 열거나 세상에 내보이려 하지 않았을까?

존 말루프와 또다른 수집가 제프리 골드스타인의 노력으로 세상에 그녀가 알려지면서, 앤 마크스라는 이 책의 저자가 그녀의 삶을 찾는 여정에 동참하였다.

앤 마크스는 존 말루프와 제프리 골드스타인이 가지고 있는 모든 사진과 자료의 이용권을 받아 비비안의 삶을 추적하기 시작하다. 

이 과정은 생각보다 훨씬 더 어려운 과정이었다.

한편으로 비비안은 누구도 자신을 찾지 못하게 할 요량이었는지 자신의 모습을 온전히 노출하는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1955년에 거리에서 비비안이 찍은 이 어린아이의 사진을 보는 순간 숨이 턱 막히여 마음이 찌릿해진다.

눈물이 글썽한 눈동자, 하지만 세상을 향해 도전적인 응시, 어른 남자용 시계와 자신을 보호하려는듯하지만 어딘가 무너져 내리는 팔, 그리고 학대받은 건지, 지나친 노동의 흔적인지 알 수 없는 상처들.

어른과 아이의 모습이 묘하게 섞인 이 어린 아이의 초상을 보는 순간 비비안의 어릴 때의 모습이 이렇지 않았을까 싶어졌다.

그녀 역시 폭력적인 아버지, 무책임한 어머니속에서 불안정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아버지가 떠난 이후에는 어머니와 함께였으나 거의 방치되다시피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굉장히 강인한 사람이었을 듯하다.

이 불행한 가족의 고리를 스스로 끊어낼 수 있었던데서 말이다.

세상에는 불행한 가족의 고리를 끊지 못해 평생을 같이 수렁으로 끌려가버리는 사람도 얼마나 많은가말이다. 

그녀의 나이 열네 살에 그녀는 독립하고, 외할머니의 친구인 에밀리 오마르의 아파트로 이사하면서 그녀의 독립이 시작된다.

책임감있고, 그래도 손자들을 최선을 다해 보살폈던 외할머니의 영향인지 비비안은 나이 많은 노인들과 편안하게 지낸다.


 

27살이 비비안, 믿을 수 있는 어른 에밀리 오자르와 같이 있는 모습의 그녀는 딱 그녀 나이 또래의 모습과 웃음, 당당함을 보여준다. 아마도 그녀가 첫번째 행복했던 시기가 이 때가 아니었을까?



고향인 프랑스에 갔던 시절 그녀가 찍은 고향사람들에는 그들에 대한 그녀의 애정이 보인다.

마을의 어른을 부감으로 찍은 사진에서는 오랜 세월을 견뎌온 위엄이 돋보이고, 아기양 3마리를 안고 있는 남자에게서는 자신의 양에 대한 애정과 뿌듯함이 돋보인다. 양 1마리를 안고있는 청년에게서는 사진이 어색한듯하지만 그래도 비비안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고 피사체가 되어주는 수줍은 모습이, 그리고 알프스를 배경으로 선 노인에게서는 묘한 당당함이 보인다.

어떤 사진을 봐도 이 때의 그녀가 세상과 사람에 대해 보고싶고, 알고싶고, 찍고싶다는 열망이 보이는 모습들이다.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돌아가는 배 위에서 찍힌 비비안의 모습은 건강하고 자신감에 차 있으며, 아름답다.

자신의 삶에 대한 계획이나 희망 이런 것들을 가지고 돌아가는 모습이다.



뉴욕으로 돌아온 비비안은 뉴욕거리와 뉴욕의 사람들, 그리고 자신을 대상으로 부단한 실험을 하고 작품을 만들고 그것을 엽서 사업으로 확장할 방법을 찾는다.

이 일을 진행하는 와중에 보모라는 직업은 살곳을 해결해주고, 시간을 만들어주는 유용한 직업이었다.

그녀가 자신의 작품이나 사업을 위해 얼마나 간절하게 원했는지,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의 노력을 기울였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제대로 된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고, 이렇다 할 연줄도 없이, 가진 것도 없었던 여성 사진작가가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펼치기는 당연히 힘들었을 것이다.

이 즈음 어딘가에서 비비안은 오랜 시절을 보냈던 뉴욕을 떠나 시카고로 떠난다.

그녀의 시카고행에는 가족으로부터 떨어지고자 하는 욕망이 작용했는지도 모른다.


시카고에서 그녀가 만나 행운이 갠스버그 가족과의 만남이었다. 

그 집안에서 3명의 남자아이들을 돌보았던 기간은 비비안에게 정서적인 안정감과 소속감, 그리고 아이들과의 유대와 사랑을 체험했던 기간이었던듯하다.

이 때 아이들을 찍은 그녀의 사진은 따뜻하고 자신의 사진 역시 여러가지 실험속에서 자신을 또렷이 위치시키려는 의욕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생애에서 유일하게 가족 비슷한 것을 가져본 시기였지만 이것이 진짜 가족은 아니었다.

아이들이 크자 더 이상 보모는 필요없어졋고, 그녀는 떠나야 했다.

비비안이 사람들과 헤어지는 과정을 보면 지나치게 단호하다는 인상을 버릴 수가 없다.

보모로 일하던 다른 가족을 떠날 때도 그녀는 항상 어느날 갑자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단호하게 떠나는 쪽을 선택한다.

보통 이런 경우는 버림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역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은데 비비안이 그런 경우가 아닐까 싶었다.

어릴 때 방치되었고, 제대로 된 애정을 받지 못했던 이의 안타까운 두려움.

더더군다나 정말로 사랑했던 갠스버그 가족과의 헤어짐은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 상처를 더욱 두텁게 만들었으리라 짐작이 된다.


이후 그녀의 삶에서는 조금씩 이상 징후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가장 압도적이었던 것이 저장 장애이다.

사진과 필름은 말할 것도 없고, 신문, 온갖 잡다한 기록, 영수증등에 대한 강박적인 저장 장애.

새로운 고용주에게 나는 내 인생과 같이 이 집에 들어와요라고 말했을 때, 그 비비안의 인생이 200개의 상자더미일 줄은 고용주가 결코 알 수 없었다. 

이 시기부터 그녀는 거의 사진을 인화하지 않는다.

사진을 찍어서 세상에 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날 것 그대로 소유하는 것이 그녀의 목적인 듯.......



그럼에도 세상에 대한 관심과 희망은 여전히 간직한 모습을 그녀의 약간 코믹한 스파이 비비안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자신의 옷을 자화상처럼 찍은 사진에서는 그녀가 앓고 있던 정신 질환과 상관없이 여전히 번뜩이는 재치와 유머감각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온전히 혼자인 시간이 길어지고, 딱히 다른 사람과의 정신적인 유대를 깊게 가지는데는 저항이 많았던 이 외로운 사진작가에게 나이가 든다는 것은 혼자 견뎌야 하는 시간이 더 많았음을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겠다.



그녀의 마지막 자화상은 사진의 초점이 흔들리고, 그녀의 저장장애를 상징하는 상자들과 함께 한다.

그리고....



2008년에 다른 사람에 의해 찍힌 그녀의 마지막 사진.

더 이상 사진을 찍지 않고 하루종일 공원 벤치에 앉아있던 비비안의 기록된 마지막 모습이다.

로저스 파크에서 쓰러져 구급대원에게 실려갔던 비비안은 이후 회복되지 못하고 갠즈버그 형제들이 마련해준 요양원에서 오랫동안의 고단하고 외로웠던 삶을 마감한다.


그리고 그녀의 사후 그녀의 수백개의 상자를 경매에서 낙찰받은 존 말루프와 제프리 골드스타인의 노력 이후 그녀가 알려지고 그녀의 작품이 회자되고, 전시되고, 그리고 작품집의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 온다.














<비비안 마이어 - 나는 카메라다>

나는 카메라다, 이 말처럼 비비안을 적절하게 묘사하는 말이 있을까?

이 사진집에 실린 그녀의 다양한 사진들을 보면 그녀는 비록 개인적인 친분관계를 오래 유지하는데는 두려움이 많았지만,

당대의 사람에 대한 관심과 연민이 지대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당대의 사회문제에 대해 카메라로 관찰하는 위치에 늘 있었음도 알 수 있다. 

아래의 자화상이 보여주듯이 어쩌면 비비안은 항상 관찰자의 위치에 있었다고도 할 수 있겟다.

사진의 주인공들은 저 멀리 길의 끝 바다의 시작점에 멀리 존재하고 그들을 찍고 있는 비비안 자신은 그림자로 존재한다.

이 비비안의 사진에서 누가 주인공일까?

그림자 비비안의 저 꼿꼿하고 자신감에 찬 자세만으로도 그녀가 그녀 삶과 사진의 주인공이라는 당당함을 느끼는 것은 나만일까?




개인적으로 이 사진집에서 가장 마음이 갔던 사진



기차를 타고 가다 잠이 든 어느 남녀의 사진.

이 사진을 보면서 바로 "아 이렇게 늙어가고 싶다."라고 생각했다.

비비안의 사진 중에서는 드물게 그저 아름답기만 한 장면이다.

비비안도 이 사진을 찍으면서 잠시 그런 생각을 했을까?

많은 사람들이 비비안에 대해서 차갑다 냉정하다 이상하다라고 했지만 그녀의 내면에는 표현하지 못한 따뜻함, 인간애가 넘치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저 한장의 사진을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비비안의 삶이 워낙에 알려지지 않았고, 그럼에도 그녀의 사진은 엄청나고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녀에게 관심의 가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런 관심은 그녀의 삶을 재구성해보고싶은 욕구로 이어지는 듯하다.

프랑스 작가 가엘 조스에 의해 쓰여진 <역광의 여인, 비비안 마이어>

이 책을 읽다보면 이 책이 소설인지 아니면 그저 비비안의 뒤를 쫓아 기록한 기록물인지 헷갈리는 지점들이 많다.

하지만 책 앞쪽면에 작가는 분명히 이 책은 소설- 픽션이라고 선언하고 시작한다.















이 책은 소설의 외피를 둘러싼 비비안의 이야기라고나 할까? 상상으로 만들어낸 비비안의 내면?


책 서두에 "이 책은 픽션이다. 따라서 이 책에 나오는 이름, 인물, 사업,  장소, 행사, 현장 그리고 사건들은 저자의 상상의 산물이거나 허구적 방식으로 서술된 것이다. 아직 살아 있거나 세상을 떠난 실존 인물들 또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들과의 유사성은 순전히 우연의 일치이며 '이스테이트 오브 비비안 마이어', '말루프 컬렉션' 혹은 '하워드 그린거그 갤러리'의 승인을 받지 않았다. 라고 쓰여있다. 

아마도 작가가 여러 자료를 이용하긴 했지만 어떤 자료에 대해서도 정식 사용허가를 받지는 못했던 듯하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어떤 지점에서는 비비안의 사진을 묘사하는데 그 사진이 없어서 굉장히 갑갑해지는 장면들이 몇 개 있다.

책은 소설이라고 했지만 사실 이번에 나온 앤 마크스의 위의 책 <비비안 마이어>와 크게 다른 지점은 없다.

비비안의 내면을 보기 위해서는 가엘 조스의 감상적인 한탄보다는 역시 그녀의 사진을 보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남긴 14만점의 사진

그것이 그녀가 남긴 그녀의 삶이자 목소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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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2-09-04 12:5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비비안의 마지막 흔들린 셀피와 스파이 비비안
마음에 특히 들어옵니다. 한 사람의 생이 그저 경이로워요. 고향사람들을 담을 때 비비안의 눈을 상상해봅니다. 성수동에서 사진 전시회 열리고 있던데 가을에 가보면 올마나 좋을까요. 2015년에도 했는데 못 가봤어요. ㅠ
전 다큐를 봤었고 책은 가지고 있지만 전시회 느낌이 있으니^^ 다음에 서울 가시게 되면 한번…

바람돌이 2022-09-04 13:34   좋아요 2 | URL
스파이 비비안은 저도 비비안의 다른 면모를 보는 것 같아서 참 좋더라구요. 마지막 셀피는 마음이 아프고요.
프레이야님 덕분에 또 전시소식도 알게 되었네요. 다름 서울갈 때 같이 가자고 또 딸과 얘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가을과 함게 전시회도 보고 다음 서울행이 또 기대되네요. ^^

새파랑 2022-09-04 16: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바람돌이님이 가장 마음에 갔던 사진이 좋아보이네요. 배경과 그림자가 잘어울리는거 같아요 ^^

바람돌이 2022-09-04 21:49   좋아요 2 | URL
그쵸? 뭔가 비비안의 마음이 그림자에 잘 드러난다고 할까? 비비안답다고 할까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

stella.K 2022-09-04 19:1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와~! 14만점요? 대단하네요.
저장장애라...
왜 비비안 마이어인지 알 것도 같네요.

바람돌이 2022-09-04 21:51   좋아요 3 | URL
평생동안 찍은 것들이고 대부분의 필름은 현상하지도 않은채 모아만 둔것이니 얼마나 많은지요. 이 책 말고 다른 곳에서는 또 15만점이라고도 하더라구요. 이렇든 저렇든 정말 어마어마한 규모죠. 한 사람의 일생이 이룰 수 있는게 어느 정도일까를 생각해보기도 햇어요.

그레이스 2022-09-04 20: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유년시절의 포즈는 예사롭지가 않네요^^

바람돌이 2022-09-04 21:51   좋아요 2 | URL
아 유년시절의 저 사진은 비비안 마이어가 아니에요. 비비안 마이어가 찍은 거리의 아이 사진인데 제 생각에 비비안의 어린 시절이 이렇지 않았을까 싶은 느낌에 가져와봤어요. ^^

그레이스 2022-09-04 22:03   좋아요 2 | URL
하하하하;;;;;
바로 밑에 글을 놓쳤군요^^;;

잠자냥 2022-09-04 22:1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와우 저 소녀 사진 정말 인상 깊습니다! 그 아래 바람돌이 님 설명도!

바람돌이 2022-09-04 22:22   좋아요 3 | URL
아 저 소녀 사진에 대한 이야기는 이 책의 저자인 앤 마크스의 생각이기도 하구요. 저도 그 생각에 동의하면서 제 생각을 덧붙여 봣어요. ^^ 저는 저 아이의 사진을 보면서 왠지 지금 저 아이의 팔짱 낀 팔을 풀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리고 너를 안아줘도 되겠니? 라고 묻고 싶어요.

페넬로페 2022-09-05 00: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첫번째 사진이 젤~~
아이의 모습에 어찌 세상 다 산 것 같은 모든 것이 담겨 있을까요!
여러 인물들의 사진의 느낌이 다 다르네요~~

책읽는나무 2022-09-05 11:0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첫 번째 사진에서 벌써 압도 당하는데 왜 전시회를 하지 않았을까? 저도 의아합니다.
비비안 마이어에 왜 바람돌이님이 푹 빠지셨는지 글과 사진을 보니 공감이 가네요^^

2022-09-05 21: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람돌이 2022-09-06 14:24   좋아요 2 | URL
20대 초기에는 사진으로 엽서사업 같은걸 해볼려는 시도가 있었던 거 같아요. 그게 좌절되면서, 또 가족에게서 벗어나는게 중요해지면서 시카고로 이전하고 뭔가 복잡한 것들이 있었을듯해요. 하지만 비비안은 또 자기 얘기를 남들에게 털어놓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다 짐작일분 오늘 우리가 알 수 있는건 정말 얼마 안되네요.
태풍은 밤사이에 빠르게 지나가서 다행입니다. 나무님도 별 탈 없으시죠?

거리의화가 2022-09-05 11:1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마지막 사진이 참 좋아요 두 분의 모습이 참 편안해보이네요. 저도 저렇게 늙어가고 싶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14만점의 사진들이 그녀의 인생을 대변해주는 것이 아닐까 싶군요^^

바람돌이 2022-09-06 14:25   좋아요 1 | URL
저 사진을 보면 다 저렇게 늙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될듯해요. 정말 사진으로만 남은 사람이 비비안 마이어가 아니가 싶네요.

mini74 2022-09-05 12: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님 리뷰에서 드디어!! 작품을 보내요 ~

바람돌이 2022-09-06 14:25   좋아요 1 | URL
^^ 역광의 마이어 보면서는 저도 사진이 없으니까 좀 갑갑하더라구요. ^^

희선 2022-09-06 03: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남긴 사진 14만점이라니 엄청나네요 보모 일을 하다가 남은 시간에는 거의 사진을 찍었을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비비안 마이어가 죽은 다음 사진이 알려지고 비비안 마이어라는 이름도 알려졌지만, 그런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뭔가 하고 싶은 게 있었을지, 그건 모르겠군요 사진뿐 아니라 글도 남겼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사진이 바로 비비안 마이어를 나타내주는 거겠네요


희선

바람돌이 2022-09-06 14:28   좋아요 1 | URL
보모일을 하다가 남은 시간이 아니라, 사진을 찍기 위해서 보모일을 한듯하더라구요. 애들 데리고 맨날 산책 나가고 위험한 시위현장도 데려가고, 그리고는 가는 곳마다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대고..... 그래서 해고당하기도 하고 그러더라구요. ^^ 비비안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더라면 사진뿐만 아니라 자신의 예술관 이런걸 글로도 남길 수 있었을텐데 하는 생각은 저도 하게 되네요.
 

 "샹소르에서 찍은 내걸작들을 자주 봐요. 정말 많이 있어요. 그러니까, 사진이 정말 많아요. 내의견을 말해보자면, 그렇게 나쁜 사진들은 아니에요." 사진 촬영 기술은 최고로 익히려고 노력했지만, 암실에서 사진을 인화하는 기술은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는 사실도 비비안의 직업적 야망을 가로막는 요인이었다. - P131

보모가 조앤의 가족을 떠나간 방식은 지금도 이 가족의 고개를 절레절레 짓게 한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아이들은 비비안과 함께 방을 썼는데, 이른 아침에 들리는 소리 때문에 잠에서 깨야 했다. 눈을 뜬 아이들은 여행가방을 질질 끌면서 방을 나가고 있는 보모를 보았다. 보모는 아이들에게조용히 하고 다시 자라고 하더니 아무 말도 없이 떠나버렸다.  - P148

이 같은 초기 연출 방식은 그 뒤로 평생, 경계 없이 실험하고 새로움을시도했던 자화상 사진 촬영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뉴욕을 떠날 무렵이면 비비안은 토스터 기계나 쟁반을 비롯해 거의 모든 곳에 자신의 얼굴을비춰 사진을 찍었다. 비비안은 늘 몸을 가린 채 무표정한 모습이었지만,
해변에서만큼은 긴장을 풀고 수영복 차림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로부터 불과 몇 년 후, 비비안은 자화상 사진을 더 자주 찍으면서도 자신을 덜드러내게 되는데, 그녀의 신체적 페르소나가 점차 극단적이 되어가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 P169

 무엇보다도 끔찍한 일은 조금이라도 추적할 수 있는 흔적을 남기면 가족들이 찾아와 돈을 요구하고 비비안의 정체를 폭로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따라서비비안이 취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방법은 입을 다물고 사람들에게서 멀리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사진이 비비안의 감정 배출구 역할을 한 것은 당연하다. 많은 사람이, 타인에게 자신을 드러내기를 힘들어했던 여인이 그토록 개방적이면서 감성적이고 인간미 넘치는 사진을 촬영했다는 데서 역설을 발견한다. - P205

저장 장애는 진행되는 질병이기 때문에 적절한 개입이 없으면 시간이갈수록 악화되어, 그저 수집만 하던 상황에서 주변을 난장판으로 만드는단계로 넘어간다. 사람들과 교류하지 않고 고립된 채 제대로 사회생활을하지 못하며, 그 때문에 상처받고 분노해 더욱더 사람들과 멀어지는 악순환에 빠질 수도 있다. 스트레스도 저장 장애를 악화시키는데, 1966년에 겐스버그 가족을 떠나면서 비비안의 상태는 더 나빠졌다. 그때부터 비비안은 신문 한 장, 한 장을 모두 찍는 강박 행동을 보이기 시작한다. 11년을함께한 집과 가족을 떠난다는 것은 비비안의 저장 장애를 한층 악화시키기 충분한 불안정한 사건이었다. - P268

비비안에게 이미지를 보관하는 형식은중요하지 않았다. 사진이건, 네거티브건, 현상하지 않은 필름이건, 모두 같은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다른 방식일 뿐이었다. 비비안에게는 원하기만하면 필름을 현상할 수 있는 자원이 있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자신이 찍은 사진을 보고 싶다는 욕망보다 갖고 싶다는 욕망이 훨씬 컸다. - P273

분열성 성격장애에 관한 강연에서 마호니 박사는 분열성 성격장애가 있는 사람은 실행 능력이 탁월하며, 종종 살아남기 위한 수단으로 고압적인태도, 강한 자기 주장, 자기 만족, 그리고 완벽주의를 보상적 특질로 발전시킨다고 설명한다. 비비안에게는 이런 특징들이 모두 있었다. 또한 분열성 성격장애인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감정을 모르거나 지속적으로 사회와 접촉할 수 없는 사람들도 있다. 깊은 양가성이 존재해, 친밀한 관계를갈망하면서도 타인에게 휘돌릴지 모른다는 위협을 끊임없이 느낀다. 확실하고 안전하게 분리되어 있을 수 있는 거리를 찾는다"고 덧붙이고 있다.
분열성 성격장애인 사람이 성적 학대를 받았다면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자신을 매력적이지 않은 모습으로 꾸며 위험한 성적 매력을 숨긴다. 여성은 근원적인 여성성을 감추고 남성적이고 강한 태도를 장착할 수 있다." - P274

비비안의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그녀가 사진에 분명히 담은 인간애 사이의 극단적인 차이를 이제는 이해할 수 있다. 비비안에게 사진은 믿음과 감정, 그리고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이해를 표현하는 배출구로 기능했고,
그 결과 보편적인 진리와 폭넓은 정서를 반영하는 방대한 작품 세계를 낳을 수 있었다. 그녀의 사진 언어는 무수히 많은 것들로부터 영향을 받았지만, 주제의 일부는 어린 시절의 경험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보는 것이 논리적일 것이다. 예를 들어, 비비안의 사진에서 여성은 자주 등장하기도 하고긍정적으로 묘사되지만 남자는 모든 연령에서 좀 더 냉소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 P275

자화상 사진은 비비안이 병치되는 이미지를 만들고, 자신의 정체성을 탐구하고, 실재하는 시간 속에 자신의 존재를 확립하는 데 위협적이지 않은 매개물이었다. 지금까지 비비안의 아카이브에서 찾은 자화상 사진은 600장이 넘는데, 들여다볼 때마다 새로운 사진이 계속 발견된다. 이토록 많은자화상 사진은 소통하고 참여하고자 하는 비비안의 욕구를 보여주면서도,
작업 전체를 보았을 때 비비안의 자아상과 마음의 상태가 어떤 식으로 변해갔는지를 알 수 있는 자료가 된다.  - P277

레인 겐스버그는 존 말루프 앞에서 비비안을 회상하며 "스스로 나설 수없는 사람들을 위해 앞장서는 사람이었다고 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비비안은 분명히 다른 사람의 마음에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타인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어른들 손에서 자란 사람이 폭넓은 사회 변화의 최전선에 서 있었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놀랍다. 분명 할머니 외제니가 심어준 포용력과 정의감이라는 씨앗이 비비안의 깊은 지성과 정밀한 사고에 의해활성화되어 단호하고 진취적인 그녀 자신의 관점을 형성했을 것이다. - P308

비비안이 자신의 방에 전시한 자화상은 단 하나, ‘스파이 비비안‘뿐이었다. 여섯 장으로 된 자화상 시리즈에서 비비안은 지금까지의 자화상과는다른,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사진을 찍었다. 도저히 자화상을 찍을 새로운방법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옷을 사용해 신체적 존재감을 드러냈다. 신문을 피사체로 삼을 때처럼 비비안은 거리를 두고, 자기 자신을 살짝 희화화했다. - P340

우리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사진에 관해 비비안은 그 어떤 계획도 세우지 않았다. 젊었을 때는 전문 사진작가가 되려고 노력했고,
자신이 찍은 작품을 판매하려 했으며, 지인들에게도 나누어주었다. 그러다 정신 질환이 발현해 신문을 병적으로 모으고, 그게 어떤 형태이든 자신의 사진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비비안은 자신의 재능을 확신했고, 유명인을 동경했으며, 예술은 타인의 프라이버시를 침범할 수 있다고 믿었고, 궁극적으로는 숙명론자였다. 창고 사용료도 제대로 지불하지 않으면서 사진도, 네거티브도, 현상하지 않은 필름도, 어느 것 하나 버리지 못했던 비비안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일어날 법하지 않은 자신을 발견하게 될 사건들이 차례로 일어나게 할 도화선을 마련해놓았다. 비비안이 살았던 인생을 모두 파악할 수 있다면 상황은 훨씬 명확해지겠지만, 그 누구도 비비안의 궁극적인 바람이 무엇이었을지 분명히 알 수 없을 테고, 어쩌면 비비안자신도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는지 모른다.
우리는 그저 비비안 마이어의 진정한 꿈과 바람이 어떻게 해서든 이루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 P389

청년기의 비비안은 여자가 우월한 존재는 아닐지라도 남성과 동등한존재라는 사실을 굳게 믿었다. 1950년대에는 자신이 페미니스트의 견해를 가지고 있음을 겐스버그 가족에게 분명히 보여주었고, 그 뒤 10년간은페미니스트로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가톨릭 신자로 자랐지만, 산아제한을 찬성했고, 낙태권을 지지했다. 끊임없이 자신을 노동자 계층으로 규정하면서, 좌파적인 이상과 조직적인 노동 운동을 옹호했다. 1950년에는 프스 공산당 지도자 모리스 토레즈Maurice Thorez 를 지지하는 집회에 참석했고, 1954년에는 미국 공산당을 창건한 이스라엘 암터 Israel Amter 의 추모식 사진을 찍었다. 시카고에서는 사회주의 노동자운동을 지지했고, ‘노동자 인권선언Bill of Rights for Working People‘과 워싱턴 포스트」의 노조 파괴 행위를 비판한 평론 같은 문헌 자료를 보관했다. 시민 평등권 운동이 절정에달하기도 전에 인종차별 폐지와 소수자 권리를 옹호했고, 다른 인종이 서로 섞여 살아가는 것을 지지했다. 시카고의 아프리카 하우스와 제시 잭슨의 <오퍼레이션 푸시>의 활동에 활발하게 참여하는 회원이었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권리에 관해서는, 비비안은 독자적인 행보를 걷는 이단아였다. - P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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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지식, ‘나‘와 지구를 살리는 지식을 생산하려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공부가 필요하다. 융합 글쓰기는 그중 하나다.
융합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식의 양이 아니라 가치관,
연결 능력이다. 평화학, 여성학, 환경학은 하나의 학문 분과가아니라 가치관이다.  - P11

 보이지 않는 것은 없는 것이다. 어느 사회에나 ‘이미 배제된(foreclosure)‘ 영역이 있다. 해방은 우리가 무엇을 모르는지를 질문하는 행위로부터 시작된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무엇을 모르는지 모르기 때문에 모르는 것과 아는 것을 구분할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의 한계가 아니라 축복이다. - P12

융합은 우리가 아는 지식에 다른 방식으로 접근함으로써 공부의 즐거움과 성과를 극대화하려는 실천(practice)이자 내 생각을 분명히 알고 더 필요한 삶을 향해 나아가기 위한 경계 넘기(rooting and shifting)다. - P16

융합은 계급, 젠더, 인종, 성정체성 등을 동시에 고려하는 상호 교차성 (inter-sectionality)과도 다르다. 계급, 인종, 연령, 지역, 종교를 통한 여성들 간의 억압은 교차하고 겹치는 더 커다란 구조의 매트릭스(母型)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것이 융합의 의미다. 즉 융합은 자유주의 사상에 대한 비판이고 재구조화perfo이자 자유주의 사상의 질적 전환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융합의가장 정확한 번역은 ‘횡단의 정치‘이다. - P21

약자는 언어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참여하지 못한다. 애초부터백인 남성 외의 이들은 선제, foreclosure)되었다. 지동설부터 여성주의까지 새로운 사유는 어느 시대나 파문과 혐오의 대상이었다. 그러니 나를 억압하려고 만든 말에 답하려 하면 백전백패다. 융합적 사고는 언어의 전제를 알고 자기 관점에서 기존지식에 대응하는 사고방식이다. ‘답정너‘는 폭력이다. 질문을 되돌려주거나 말을 궤도 밖으로 끌어내 ‘그들을 낙후시키자. - P40

지식은 내가 처한 현실에서 - 미시에서 거시로, 아래에서 위E로-만들어지는 새로운 몸이다. 융합은 새로운 몸으로 태어나는 변태(變態, metamorphosis)의 과정이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연속선에서 몸(생각)이 변하고 다른 지식이 생산된다. 변태는 알아 가는 몸, 그 변화를총체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 P53

융합은 우리가 그때그때 ‘선택한 위치에서 기존의 지식을 재조직화하는 공부법이다. 창의적일 수밖에 없다. - P57

프로이트를 다시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예비 내담자다. 누군가의 한마디가 평생을 살아갈 힘이 된다. 좋은 사람은 타인을 분석하거나 판단하지 않는다. 상대방의 장점과 자원을 알아내는데 주력하고 삶의 대처 능력을 함께 모색한다. - P81

파이 통렬하게 지적한 대로 하얀 가면을 쓴 흑인은 백인과 같은 주인이 되고 싶어 한다. 그러므로 그의 흑인 개념은 헤겔식 노예보다 훨씬 종속적이다. 상대방에 대한 동일시와 욕망 상태에서는 변증이 발생할 수 없다. 당연히 상호 해방의 가능성도없다. 욕망의 특징은 절대성, 일방성, 그리고 주체적 종속이기때문이다.  - P89

문해력은 자신의 가치관과 무지에 대한 자기 인식의 문제다.
그러므로 문해력 향상의 첫걸음은 에포케 (epoche, 판단 정지)이다. ‘나는 모른다‘는 자세가 공부의 시작이다.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이해력부터 의심해야 한다. 물론 우리 몸에는 이미많은 의미들이 축적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이 무지하다고 가정하는 데는 굉장한 노력이 필요하다. 공부가 중노동인 이유다.
잠깐의 판단 중지. 그 잠깐의 시간이 얼마나 될지는 모른다.
얇은 자기 진화의 과정이지 시비를 판단하는 행위가 아니다. 지식을 하나의 고정된 정보로 여기는 이들은 타인을 ‘가르치려 들지만‘, 알아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이들은 우리를 가르친다‘. - P98

융합은 합하는 작업이 아니라 융합하는 개별적 몸들이 접속하는 상태다. 융합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각자의 가치관이 충돌하여 새로운 사유를 만들어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타인과 충돌할 자기만의 몸이있어야 한다. 이처럼 도반은 믿을 만한, 편한 길동무라기보다는자극과 긴장 관계에 가깝다. - P104

융합이 가성비 높은 공부인 이유는, 융합을 공부하려면 기존의 지식은 물론이고 그 지식과 융합할 수 있는 자기 가치관을 확립하는 공부를 병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관점을확립하고 응용하려면 연습(practice)과 현실 개입적 실천(praxis)이 모두 필요하다. - P115

·쓰기가 최고의 공부이자 지식 생산 방법인 이유는 쓰는 과정에서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알게 되기 때문이다. 쓰기와 실험외에 모르는 것을 아는 방법은 많지 않다. 생각과 읽기가 공부의 주요 수단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다.  - P138

주류 언어가 나의 삶을 삼켜버릴 때, 현실이 교착 상태에 빠져 공동체가 고통받을 때 새로운 말을 찾는 과정이 융합이다.
융합은 창의적 사고가 왜 필요한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이다. - P146

성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의 진보 진영에서 많이 사용하지만 가장 실천과 거리가 먼 단어는 ‘연대‘와 ‘성찰‘이 아닐까? 연대는 융합에 대한 최악의 이해다. 통용되는 연대 개념은
"우리가 99퍼센트(?)이니, ‘나쁜‘ 1퍼센트(?)를 제거하자"는 논리다. 문제는 99퍼센트 안에 광범위한 갈등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정치는 갈등의 교차 영역에서 발생한다. 오로지 한 가지 억압이 위에서 아래로 찍어 내리는 것이 아니다.
노학 연대, 청년 빈민 연대, 성소수자 연대, 사회적 약자와의연대・・・・・・ 그런데 연대 과정에서 각 집단은 등가 사슬(chain ofequivalences), 즉 하나의 ‘마디 (article)‘가 되지 못하고 약자는연대에 동원된다. 인구수가 많은데도 여성이나 장애인 이슈는대동단결 일치단결의 ‘대의‘에 종속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대의를 약자와 대립시킨다. 예를 들면 "민족 문제냐, 여성 문제냐"가 있다(이 말 자체가 여성을 민족에서 배제한다). 장애인 문제는 시혜적이고, 성소수자 문제는 ‘나중에‘다. 이것은 융합도 절합도 아니고 폭력이다. - P148

인간이 만든 차이를 두고 "차이는 인정하지만 차별해서는 안된다"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 언설이다. 이 언설은 사회적 구성물인 차이를 본질적인 속성으로 전제한다. 이때 차이를 해결하는 방식은 공정함이 아니라 배려와 관용이다. 차이는 해소하거나 인정하는 차원에서 접근해서는 안 된다. 융합은 차이의 발생을 추적하고 분석하는 사유, 즉 권력과 지식을 탐구하는 작업이다. 자연스러운 차이는 없기 때문이다. - P151

중산층 가족의 계급 재생산, 남성 세력간의 갈등으로 변질된 여성에 대한 폭력, 여전한 일본관 세 사건은 한국 사회를 파악하는 새로운 지식 생산의 계기가 되어야 한다. - P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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