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샹소르에서 찍은 내걸작들을 자주 봐요. 정말 많이 있어요. 그러니까, 사진이 정말 많아요. 내의견을 말해보자면, 그렇게 나쁜 사진들은 아니에요." 사진 촬영 기술은 최고로 익히려고 노력했지만, 암실에서 사진을 인화하는 기술은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는 사실도 비비안의 직업적 야망을 가로막는 요인이었다. - P131

보모가 조앤의 가족을 떠나간 방식은 지금도 이 가족의 고개를 절레절레 짓게 한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아이들은 비비안과 함께 방을 썼는데, 이른 아침에 들리는 소리 때문에 잠에서 깨야 했다. 눈을 뜬 아이들은 여행가방을 질질 끌면서 방을 나가고 있는 보모를 보았다. 보모는 아이들에게조용히 하고 다시 자라고 하더니 아무 말도 없이 떠나버렸다.  - P148

이 같은 초기 연출 방식은 그 뒤로 평생, 경계 없이 실험하고 새로움을시도했던 자화상 사진 촬영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뉴욕을 떠날 무렵이면 비비안은 토스터 기계나 쟁반을 비롯해 거의 모든 곳에 자신의 얼굴을비춰 사진을 찍었다. 비비안은 늘 몸을 가린 채 무표정한 모습이었지만,
해변에서만큼은 긴장을 풀고 수영복 차림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로부터 불과 몇 년 후, 비비안은 자화상 사진을 더 자주 찍으면서도 자신을 덜드러내게 되는데, 그녀의 신체적 페르소나가 점차 극단적이 되어가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 P169

 무엇보다도 끔찍한 일은 조금이라도 추적할 수 있는 흔적을 남기면 가족들이 찾아와 돈을 요구하고 비비안의 정체를 폭로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따라서비비안이 취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방법은 입을 다물고 사람들에게서 멀리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사진이 비비안의 감정 배출구 역할을 한 것은 당연하다. 많은 사람이, 타인에게 자신을 드러내기를 힘들어했던 여인이 그토록 개방적이면서 감성적이고 인간미 넘치는 사진을 촬영했다는 데서 역설을 발견한다. - P205

저장 장애는 진행되는 질병이기 때문에 적절한 개입이 없으면 시간이갈수록 악화되어, 그저 수집만 하던 상황에서 주변을 난장판으로 만드는단계로 넘어간다. 사람들과 교류하지 않고 고립된 채 제대로 사회생활을하지 못하며, 그 때문에 상처받고 분노해 더욱더 사람들과 멀어지는 악순환에 빠질 수도 있다. 스트레스도 저장 장애를 악화시키는데, 1966년에 겐스버그 가족을 떠나면서 비비안의 상태는 더 나빠졌다. 그때부터 비비안은 신문 한 장, 한 장을 모두 찍는 강박 행동을 보이기 시작한다. 11년을함께한 집과 가족을 떠난다는 것은 비비안의 저장 장애를 한층 악화시키기 충분한 불안정한 사건이었다. - P268

비비안에게 이미지를 보관하는 형식은중요하지 않았다. 사진이건, 네거티브건, 현상하지 않은 필름이건, 모두 같은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다른 방식일 뿐이었다. 비비안에게는 원하기만하면 필름을 현상할 수 있는 자원이 있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자신이 찍은 사진을 보고 싶다는 욕망보다 갖고 싶다는 욕망이 훨씬 컸다. - P273

분열성 성격장애에 관한 강연에서 마호니 박사는 분열성 성격장애가 있는 사람은 실행 능력이 탁월하며, 종종 살아남기 위한 수단으로 고압적인태도, 강한 자기 주장, 자기 만족, 그리고 완벽주의를 보상적 특질로 발전시킨다고 설명한다. 비비안에게는 이런 특징들이 모두 있었다. 또한 분열성 성격장애인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감정을 모르거나 지속적으로 사회와 접촉할 수 없는 사람들도 있다. 깊은 양가성이 존재해, 친밀한 관계를갈망하면서도 타인에게 휘돌릴지 모른다는 위협을 끊임없이 느낀다. 확실하고 안전하게 분리되어 있을 수 있는 거리를 찾는다"고 덧붙이고 있다.
분열성 성격장애인 사람이 성적 학대를 받았다면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자신을 매력적이지 않은 모습으로 꾸며 위험한 성적 매력을 숨긴다. 여성은 근원적인 여성성을 감추고 남성적이고 강한 태도를 장착할 수 있다." - P274

비비안의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그녀가 사진에 분명히 담은 인간애 사이의 극단적인 차이를 이제는 이해할 수 있다. 비비안에게 사진은 믿음과 감정, 그리고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이해를 표현하는 배출구로 기능했고,
그 결과 보편적인 진리와 폭넓은 정서를 반영하는 방대한 작품 세계를 낳을 수 있었다. 그녀의 사진 언어는 무수히 많은 것들로부터 영향을 받았지만, 주제의 일부는 어린 시절의 경험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보는 것이 논리적일 것이다. 예를 들어, 비비안의 사진에서 여성은 자주 등장하기도 하고긍정적으로 묘사되지만 남자는 모든 연령에서 좀 더 냉소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 P275

자화상 사진은 비비안이 병치되는 이미지를 만들고, 자신의 정체성을 탐구하고, 실재하는 시간 속에 자신의 존재를 확립하는 데 위협적이지 않은 매개물이었다. 지금까지 비비안의 아카이브에서 찾은 자화상 사진은 600장이 넘는데, 들여다볼 때마다 새로운 사진이 계속 발견된다. 이토록 많은자화상 사진은 소통하고 참여하고자 하는 비비안의 욕구를 보여주면서도,
작업 전체를 보았을 때 비비안의 자아상과 마음의 상태가 어떤 식으로 변해갔는지를 알 수 있는 자료가 된다.  - P277

레인 겐스버그는 존 말루프 앞에서 비비안을 회상하며 "스스로 나설 수없는 사람들을 위해 앞장서는 사람이었다고 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비비안은 분명히 다른 사람의 마음에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타인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어른들 손에서 자란 사람이 폭넓은 사회 변화의 최전선에 서 있었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놀랍다. 분명 할머니 외제니가 심어준 포용력과 정의감이라는 씨앗이 비비안의 깊은 지성과 정밀한 사고에 의해활성화되어 단호하고 진취적인 그녀 자신의 관점을 형성했을 것이다. - P308

비비안이 자신의 방에 전시한 자화상은 단 하나, ‘스파이 비비안‘뿐이었다. 여섯 장으로 된 자화상 시리즈에서 비비안은 지금까지의 자화상과는다른,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사진을 찍었다. 도저히 자화상을 찍을 새로운방법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옷을 사용해 신체적 존재감을 드러냈다. 신문을 피사체로 삼을 때처럼 비비안은 거리를 두고, 자기 자신을 살짝 희화화했다. - P340

우리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사진에 관해 비비안은 그 어떤 계획도 세우지 않았다. 젊었을 때는 전문 사진작가가 되려고 노력했고,
자신이 찍은 작품을 판매하려 했으며, 지인들에게도 나누어주었다. 그러다 정신 질환이 발현해 신문을 병적으로 모으고, 그게 어떤 형태이든 자신의 사진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비비안은 자신의 재능을 확신했고, 유명인을 동경했으며, 예술은 타인의 프라이버시를 침범할 수 있다고 믿었고, 궁극적으로는 숙명론자였다. 창고 사용료도 제대로 지불하지 않으면서 사진도, 네거티브도, 현상하지 않은 필름도, 어느 것 하나 버리지 못했던 비비안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일어날 법하지 않은 자신을 발견하게 될 사건들이 차례로 일어나게 할 도화선을 마련해놓았다. 비비안이 살았던 인생을 모두 파악할 수 있다면 상황은 훨씬 명확해지겠지만, 그 누구도 비비안의 궁극적인 바람이 무엇이었을지 분명히 알 수 없을 테고, 어쩌면 비비안자신도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는지 모른다.
우리는 그저 비비안 마이어의 진정한 꿈과 바람이 어떻게 해서든 이루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 P389

청년기의 비비안은 여자가 우월한 존재는 아닐지라도 남성과 동등한존재라는 사실을 굳게 믿었다. 1950년대에는 자신이 페미니스트의 견해를 가지고 있음을 겐스버그 가족에게 분명히 보여주었고, 그 뒤 10년간은페미니스트로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가톨릭 신자로 자랐지만, 산아제한을 찬성했고, 낙태권을 지지했다. 끊임없이 자신을 노동자 계층으로 규정하면서, 좌파적인 이상과 조직적인 노동 운동을 옹호했다. 1950년에는 프스 공산당 지도자 모리스 토레즈Maurice Thorez 를 지지하는 집회에 참석했고, 1954년에는 미국 공산당을 창건한 이스라엘 암터 Israel Amter 의 추모식 사진을 찍었다. 시카고에서는 사회주의 노동자운동을 지지했고, ‘노동자 인권선언Bill of Rights for Working People‘과 워싱턴 포스트」의 노조 파괴 행위를 비판한 평론 같은 문헌 자료를 보관했다. 시민 평등권 운동이 절정에달하기도 전에 인종차별 폐지와 소수자 권리를 옹호했고, 다른 인종이 서로 섞여 살아가는 것을 지지했다. 시카고의 아프리카 하우스와 제시 잭슨의 <오퍼레이션 푸시>의 활동에 활발하게 참여하는 회원이었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권리에 관해서는, 비비안은 독자적인 행보를 걷는 이단아였다. - P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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