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마침 19세기에서 20세기로의 전환기에 들어서면서 철도와 증기선의 발달로여행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기 시작했다. 대륙의 횡단 및 해양 항해의 가능성이 열리자 영국을 비롯한 서양인들이 조선으로 향했고, 이들은 손쉽게 조선의 유물을 수집해 갔다. 말하자면 수집이라는 행위는 머나먼 조선 땅과 영국을 연결하는 실체적 수단이자 만남의 증거였다. 다양한 형태의 수집 활동은 영국 박물관 전문가, 외교관,
학자, 무역상, 선교사를 비롯한 수많은 인물과 직업군에 의해 이루어졌다. - P30

그러다 1882년 우에노 공원에 들어선 일본 최초의 동물원이 대중을 위한 볼거리 public spectacle이자 위락 시설의 역할을 담당하기 시작했는데, 이 동물원에서 이국적인 동물들이 특히 인기가 높았다. 그렇게 동물원에서 우리에 갇힌 동물들을 접하는 것과 동시에 제국주의와 근대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어느덧 대중의 눈에 이국적인 동물은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에서 인간에게 정복당한존재, 즉 인간의 강력한 힘을 확인시키는 대상이자 상징이 되었다.
실제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치르면서 일본군은 한반도의 많은 야생 동물을앞다퉈 포획했다. 그렇게 잡은 동물들은 곧 일본이 이 땅을 정복했다는 상징으로 여겨졌고, 실제로 전리품 혹은 동물 트로피animal war trophies라는 라벨을 붙여 전시하기도했다. 이렇게 포획, 분류된 한반도의 동물들은 다른 국가로부터 선물받은 동물들과함께 대중들 앞에 전시되었고, 우에노 동물원은 제국주의 권력의 진열장이 되었다. - P57

이처럼 약 20여 년 사이에 일어난 변화는 일본인 수집가들의 연구와 그들의 수집품 그리고 한국 유물에 관해 일본인들이 주도한 전시 등의 행사가 매우 큰 영향을끼쳤다. 다시 말해 영국의 한국 유물 수집가들에게 일본인들에 의해 제공되는 다양한 정보가 한국의 유물을 접하고 이해하는 데 이정표 역할을 했다는 것을 단적으로보여준다. 그렇게 막연하고 신비하기만 했던 ‘은둔의 나라‘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라는 매우 구체적인 모습으로 영국인들에게 점점 그 이미지가 굳어지고 있었다. - P76

19세기 말부터 한국의 도자기 유물들이 일본은 물론 서구 여러 나라로 유출되었다는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1870년대부터 ‘코리아‘ 도자기로 둔갑한 가짜 도자기들이 영국으로 흘러들어갔다는 것을 아는 이들은 매우 드물다.  - P76

1890년과 1891년 폭발적으로 증가한 일본 도자기 수입 물량은 두 가지 사실을말해준다. 하나는 그만큼 일본인들의 이주가 늘어나고 있었다는 사실, 또 하나는 조선인 사용자들도 확연하게 증가했다는 사실이다. 개항 이후 다량으로 유입된 일본자기는 왕실뿐만 아니라 민간에 유통되며, 매우 빠른 속도로 조선의 시장을 점유했고, 이것이 결국 조선 도자기 사업을 잠식해 가고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 P82

 특히 중국 혹은 중국풍 미술품 수집 유행은 제2차 아편전쟁 이후에 중요한 전환점을 맞는다.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원명원에 불을 지르고 다량의 문화재를 약탈한 사건은 중국으로서는 치욕적인 일이었겠으나 그렇게 약탈된 문화재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동안 화려하게 장식된 청나라 수출 도자기만을 수집하던 유럽인들에게 신선한 오리지
‘중국 도자기 유행을 일으킨 계기가 되었다. 유럽인들은 그동안 선호하던 화려한수출용 채색 도자기 대신에 ‘진짜‘ 중국인들, 혹은 중국 황제들이 쓰던 ‘고급‘ 물건들을선호하기 시작했고 나아가 송나라와 원나라 시대의 순수하고 소박한 도자기를 찾기시작했다. 이것이 서양인들로 하여금 고려청자를 좋아하고 수집하게 한 원류임은 부정할 수 없다. - P89

중국 도자기 수집이 그러했듯이 1880년대 조선 도자기, 특히 그 가운데 고려청자를 선호하고 수집하려는 이들의 취향의 형성은 한두 개의 특별한 이유에서 비롯한것은 아니다. 다양한 관련 요소가 얽혀 있지만 그 가운데서 이미 중국, 넓게는 동양도자기의 원류를 찾고 즐기려는 영국인들의 확장된 수집 취향과 시장의 형성이 전제되었다는 점은 특히 강조하고 싶다. - P90

이렇듯 이왕가박물관은 표면적으로는 조선 왕가의 정통성을 유지하고 대중을위한 교육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곳이었으나 실제로는 고대 예술품을 통해 일본의 식민지 문명화 정책을 드러내기 위한 장이었다. - P127

이러한 소장가들의 면면을 볼 때 당시 고려청자 수집 열풍이 일본의 고위직 관료들과 성공한 기업인, 학자 등 일본 상류층을 중심으로 형성된 계급적 문화임을 알수 있다. 이러한 문화는 당시 일정한 취향을 통해 사회 계급적 정체성을 형성했고,
식민지 조선의 미술품 소장과 감상 문화는 당시 일본에서 유행한 다도 문화의 부활과도 연결된다.  - P133

참고로 러일전쟁 당시 자국인들의 조선 이주 장려는 일본의 주요 정책 중 하나였다. 일본 정부는 조선을 일본인의 제2의 고향으로 만들기 위해 인구 이동을 추진했는데 이것은 곧 식민지에서의 무역, 권력 및 영향력의 확장을 의미했다. 하와이나미국으로 이주한 일본인 대다수가 노동자 계급이었던 것과는 반대로, 식민지 개척자들의 조선 이동은 상업과 해군력의 상징이었다. 따라서 책,기사, 팸플릿 등을 비롯한 여러 매체는 조선으로 이주한 이들을 개척자이자 정착자, 일본의 운명을 짊어진사람으로 묘사하곤 했다. 엘리트 남성의 특권적 관점을 사용하여 일본 제국의 정책과 제도를 구체화했고, 정부 관리 · 군사 지도자 · 부유한 기업가 저명한 작가 및 학자들이 매체의 중심에 소개되었다.  - P139

1900년대 일본인들의 수집 활동은 16세기 다도인들의 특별한 심미안을 이어받았을 뿐만 아니라 서양인들은 알아보지 못하는 조선 미술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자신들이 소개하는 자부심으로 연결되었다. 그런 한편으로 조선시대를 바라보는 일본인들의 부정적인 태도와 조선 예술 쇠망론은 반복적으로 되풀이되고 있었다. 다시말해 이 시기 일본인들은 일본의 과거와 연결된 한국의 고대 미술을 찬양하면서 그것을 보존한다는, 스스로 부여한 일본의 의무는 자신들의 제국주의적 야심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하고 있었다. 일본 지배 계급의 이러한 고려청자 취향은 이왕가박물관에서, ‘고려소‘ 전시에서 그리고 런던의 화이트 시티 전시장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 P143

영국, 나아가 서양에서는 일찍이 먼 바다를 건너온 진귀한 동양의 도자기는 왕실과 귀족들만이 소유할 수 있었고, 이는 곧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다. 또한 아편전쟁을 통해 그 이전까지 침범할 수 없었던 중국 옛 황실의 소장품을 약탈해 온 것은 자신들의 제국적 우위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토 히로부미가 수천 점의 고려청자를 조선 땅에서 싹쓸이하듯 수집했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영국 왕실과 귀족들이 자신들의 궁과 별장의 벽장과 캐비닛을 동양 도자기로 가득 채울 만큼 열광적으로 사들인 것과 비슷해 보인다. 제1장에서 살핀 호랑이 사냥이 그러했듯 일본은 영국을,
영국은 일본을 서로 모방하면서 제국주의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만들어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고려청자를 향한 일본의 제국주의적 애호는 어쩌면 그런 이유로 영국인들에게 쉽고 빠르게 전이되었던 것은 아닐까. - P143

"지난 몇 년 동안 이 지역에서 이루어진 철도 여행의 급속한 발전은 유럽과극서부 지방 서양의 현대 문명과는 다른 것을 찾는 이들을 뭔가 다르고 뭔가 새로우면서도 예스러운 곳으로 안내한다. " - P153

세키노 다다시의 고적 조사가 조선총독부의 관광 정책에 큰 영향을 끼친 점은간과할 수 없다. 서울의 관광 명소로는 철도역과 조선총독부 건물, 통감부 시절 창경궁의 동쪽 부분을 개조한 이왕가박물관과 동물원, 지역 관광 상품 및 기념품 쇼핑을위해 포함한 것으로 짐작되는 일본인 거주지 본정통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뿐만 아니라 경복궁 근정전을 뜻하는 왕궁 접견실도 관광지로 손꼽혔다. 경복궁은 왕궁 RoyalPalace 이라고 지칭되긴 했지만, 1907년 순종이 창경궁으로 이어한 이래 더이상 조선의 왕이 거주하는 궁궐이 아니었다. 관광지 코스 중 하나로 들어간 것을 통해 궁궐이더이상 조선의 위상을 대표하는 기능을 상실하고, 대중의 오락물로 격하되었음을 목격할 수 있다. - P197

49다. 이처럼 제국주의자들이 자신들이 지배한 식민지 국가의 풍경과 사람들을 촬영하여 대량 생산, 판매한 사진과 엽서는 근대적 우편 제도와 맞물려 유럽 본국의 대중들에게 이국적인 오리엔트 이미지를 제공하는 동시에 이들을 타자화하고 상투화하여 고정된 스테레오 타입을 만들어 나갔다. - P201

"이상한 복장의 한국 사람들 - 특히 흰 나이트 가운잠옷을 입고, 말털로 만든알약 상자 모자를 쓰고 거리를 활보하는 남자들이 가장 흥미롭다. " - P206

비록 서양 고객의 수요에 맞춰 새롭게 제작되기는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출 가구는 전통 방식의 장식 기법과 디자인, 재료 등을 유지하면서 어디까지나 ‘한국적인 것으로 남아 있기를 요구받았다. 어쩌면 ‘진짜‘ 한국 물건이면서 동시에 서양식 주거 공간 안에서 ‘이국적이고 흥미로운 인테리어 소품이자 가구로 보이기까지해야 하는 딜레마를 출발점부터 품은 채 발전해온 셈이다. - P231

대체품으로 등장한 것이 또 있는데, 바로 조선백자다. 제대로된청자를 구하기 어렵게 되면서 일본인 지식인층을 중심으로 조선백자의 가치를 알아보는 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1920 년대 무렵부터 미술품 수집에 관심을 보인 중산층 컬렉터들 사이에서 고려청자의 대체품으로 조선백자가 부상했다. - P238

이렇게 되자 경성과 도쿄에서 활동하던 야나기와 아사카와 노리타카 그리고 그동생 아사카와 다쿠미 1891~1931 주축으로 한 조선 도자기에 관심을 둔 무리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20세기 일본 역사 연구가 킴 브란트Kim Brand는 이들이 당시 다도 문화를 주도하던, 즉 이 세계에 급부상한 부르주아 계급과 비교하자면 다소불안정한 위치에 있는 예술가·작가·대학생 또는 교사 신분 등의 중산층 지식인이었다고 설명한다." 이 새로운 그룹은 식민지 조선에서의 자신들의 위치를 충분히 활용하고, 서양미술사조와 지식을 흡수하여 당시 ‘수집할 만한 미술‘의 카테고리를 확장하고 변화시키려고 했다. 자본주의적 사치와 쾌락주의적 생활 양식을 대표하게 된당시 다도문화의 권위에 도전하면서 동시에 사치스럽지 않은 소박한 생활 용구와공예품에 가치를 부여했다. 12 - P239

이왕가박물관과 조선총독부박물관은 고려와 신라 시대를 한국 문화의 정점으로 해석했다. 특히 조선총독부박물관은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의 고적조사를 통해 발굴한 불교 미술과 건축 관련 고고학 유물 전시에 초점을 맞췄다. 신라와 고려 시대번성했던 불교 문화와 과거의 예술적 아름다움에 초점을 맞추고, 문화·과학·기술및 건축 표본 전시를 통해 그 의미와 가치를 입증하고 부각함으로써 이왕가박물관과조선총독부박물관은 조선총독부, 나아가 일본 제국주의의 ‘문명화‘ 임무의 성공적인결과물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에게 조선시대는 한국 예술 및 문화의 절정을 지나 문화의 쇠퇴기로 접어든 지 오래인 것으로 치부되었다. - P249

김환기가 백자 항아리와 달의 형상을 연결시킨 정확한 시점을 확인하긴 어렵지만, 1945~1949년 사이에 그는 ‘하얗고‘, ‘크고 둥근 형태의 달의 이미지를 백자 항아리와 연결시켜 달항아리‘란 새로운 미학을 확립해 갔다. 그의 작품 속 달항아리 이미지는 백자가 밤의 달을 대신하고 있는 것으로 1949년 <백자와 꽃에 처음 등장한다. 1952년에는 달과 항아리가 병치되어 <호월>, 즉 항아리와 달이라는 제목처럼 두 대상을 개념적으로 통합했다. 1956년에는 ‘우리 민족의 진정한 얼(예술)은 결국항아리에서 멎었다‘며 한국인의 정신과 아름다움은 백자 항아리로 대표할 수 있다고믿었다. - P266

다시 말해 영국에서 조선백자가 사랑받게 된 배경에는 조선의 도자기를 예술적영감으로 수용하고 재평가한 영국 스튜디오 포터리라는 매우 유용한 촉매자의 역할이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 - P279

다시 말해 조선 도자기는 이 무렵 더이상 작은 틈새 시장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이미 영국, 일본, 한국 수집가들의 요구와 선호도에 따라 그 수요가 늘어나고 있었고 시장 역시 성장하고 있었다.
와일드와 탭을 비롯한 여러 서양의 수집가들이 기증한 조선백자는 1920년대에이미 영국의 어러 박물관 전시장에 등장하기 시작했고, 영국의 스튜디오 포터리 세계에서도 이를 주목하는 시선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었다. 이는 곧 1935년 영국에 도착한 달항아리를, 이미 이들의 세계에서는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의미이기도 하다. - P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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