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경제학 필독서 50 - 애덤 스미스부터 토마 피케티까지 경제학 명저 50권을 한 권에 필독서 시리즈 7
톰 버틀러 보던 지음, 서정아 옮김 / 센시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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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책과 마주하다』


세계 경제에 한 획을 그은 인물들을 살펴보고 싶다면, 바로 이 책이다!


애덤 스미스, 토마스 맬서스, 앨프레드 마셜, 토마 피케티 그리고 막스 베버, 경제학 분야에서 최고의 명성과 평판을 가진 인물들을 한데 모은 책으로 각 인물들에 대해 핵심 내용만 추려져 있어 그들의 지혜를 손쉽게 얻을 수 있다.

소개된 책들 모두 경제학 역사의 중요한 장면에서 많은 영향을 끼친 책들이며 이에 대해 더 깊게 파헤치고 싶다면 저자의 원저를 찾아 읽으면 된다.

근래 재테크와 함께 경영서만 치우쳐 읽는 것 같아 선택해 본 경제서이다.


저자, 톰 버틀러 보던은 50권의 고전 시리즈로 유명한 작가이자 큐레이션이다.

1967년 호주에서 태어났으며, 현재 영국 옥스퍼드에서 거주하고 있다. 시드니대학교와 런던정치경제대학교를 졸업했다.

현대인의 삶에 가치와 깊이를 더하는 지식의 안내자 역할을 하고 있는 톰 버틀러 보던은 철학, 경제학, 영성을 망라한 다양한 분야에서 명저들을 가려 뽑은 ‘50권의 고전 시리즈’로 유명하다. 《USA 투데이》는 이런 그를 두고 “이런 종류의 문헌에 대한 진정한 학자”라고 평했다. 현재 이 시리즈는 전 세계 23개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50만 부가 넘게 판매되었다.

참고로 《세계 경제학 필독서 50》은 2018년 북미 최고의 출판 시상식인 엑시엄 비즈니스 북어워드에서 비즈니스 레퍼런스 부문 은상을 수상했다. 또한 이 책의 첫 번째 시리즈인 《내 인생의 탐나는 자기계발 50》은 2004년 미국 벤저민 프랭클린상을 수상하며 미국 주간지 《포워드》 선정 올해의 책이 되었다.




니얼 퍼거슨의 『금융의 지배』 - 끊임없이 진화해온 세계 금융의 역사를 담아내다


니얼 캠벨 더글러스 퍼거슨은 현대 영국의 역사학자로 금융경제사가 전문 분야다. 21세기 최고의 경제사학자로 평가받고 있으며, 폴 크루그먼과 조지 프리드먼의 최대 경쟁자로 꼽힌다. '차이메리카'의 주창자다. 2004년 《타임》 선정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뽑혔다. 대표작 「금융의 지배」는 6부작 TV 다큐멘터리로 각색되었으며, 이 다큐멘터리 시리즈는 2009년 에미상을 수상했다.


2007년 미국인 평균 소득은 3만 4000달러였는데 당시 골드만삭스의 수장인 로이드 블랭크페인은 6800만 달러의 보수를 받았다.

이것만 놓고 봐도 제품과 서비스의 생산만큼 금융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금융 위기가 잦다보니 금융계는 빈곤의 주범으로 인식되어 왔고 역사를 통틀어 사람들은 대부분의 금융업자를 경멸해왔다.

그러나 퍼거슨의 책을 보면 이러한 결론은 잘못되었다고 지적한다.

제이콥 브로노프스키의 「인간의 부상」을 보면, 채권과 채무 등의 금융 혁신이 없었다면 문명 또한 발전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퍼거슨 또한 이에 대해 같은 입장이며 그는 이렇게 말한다.

"역사적인 대현상 뒤에는 항상 금융이라는 비법이 숨어 있었다."

물론 치우쳐진 판단이라는 견해도 있으나 대규모의 금융 위기가 왔어도 금융 혁신이 만들어낸 장점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퍼거슨이 자랐던 지역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은행 업무를 볼 수도 없었고 대출 받기도 어려워 악질 사채업자에게 넘겨지기 일쑤였다고 한다.

'빈곤한 지역은 대부분 금융 기관과 서비스가 부재한 곳이다.', 이것이 퍼거슨의 결론이었다.


"금융의 역사에서 채권의 탄생은 은행의 신용 대출 고안에 이어 두 번째로 중요한 혁신이었다."

중세 초기, 이탈리아의 최대 혁신은 바로 채권이었다.

정부가 발행하는 채권은 시민에게 돈을 빌려주고 그 대가로 얼마간의 이자를 받는 것이었다.

이렇게 형성된 자금으로 학교, 병원 등을 짓고 군부대를 창설하는 등 전쟁 자금으로 사용되었다.

19세기 로스차일드 가문이 채권시장에 뛰어들어 각국의 전쟁 자금을 지원함으로써 많은 재산을 축적하게 되었었다.

채권은 종이 형태의 자산인지라 채권을 보유한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곳 어디에서든 구매가 가능하니 부유층이 도시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채권시장은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다.

국가의 신용도가 판가름 났고 정부가 투자자에게 치러야 할 이자율은 물론 신용 비용까지 결정되는 곳이었다.


한 가지 더 살펴보자면, 보험 역시 금융 역사상 가장 큰 혁신의 산물이었다.

초창기 보험은 도박과 다를 바 없지만 이는 발전을 거듭하게 된다.

최초의 현대식 보험을 만든 사람은 스코틀랜드 장로교의 목사 로버트 월리스와 알렉산더 웹스터, 수학자 콜린 매클로린이다.

한 목사가 세상을 떠나고 남은 유가족들이 너무 어렵게 살자 이들은 성직자의 유가족을 도울 방도를 찾다가 '스코틀랜드 성직자 과부 기금'을 만들어 성직자들에게 보험료를 받아 이를 투자하고 기금의 수익은 사망한 성직자의 유가족에게 연금 형태로 지급하겠다는 구상을 세운 것이다.

이렇게 스코티시 위도우즈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후 영국과 미국에서 비슷한 기금이 대거 생겨났고 보험 가입은 안정된 중산층이라는 표식이 되었다.

현재 전세계적으로 빠른 인구 고령화와 연금 및 건강보험 자금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즉, 훗날 제대로 보호받고 보장받을 수 있을지 모르기에 보험은 필수가 된 것이다.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의 『대폭락 1929』 - 금융 역사상 가장 최악의 사건을 다룬 경제 역사서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는 캐나다 출신의 미국 경제학자로 20세기를 대표하는 진보적 경제학자 중 한 명이다. 케네디 대통령 때는 인도 대사를 지냈으며, 루스벨트 때부터 클린턴 때까지 대통령 자문역을 맡는 등 미국 민주당 지도자들의 사고와 노선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케네디 대통령의 '브레인', 클린턴 대통령의 '경제 교사'라고도 불리었다. 미국 대통령 자유 훈장을 두 번이나 받았다.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이후 많은 책이 출간되었지만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의 「대폭락 1929」는 앞으로도 금융 위기에 참고할 만한 책으로 꼽힌다.

1950년대 미국의 주식시장은 투자 열풍이 조성되어 '행복, 무너질 수 없는 시스템, 신의 편애, 내부 정보 확보, 금융 방면의 이례적인 재능 덕분에 일하지 않고도 부자가 될 운명이라는' 사람들의 믿음이 공통된 특징으로 나타났고 이는 반복되는 투기 경향을 낳았다.

그 결과, 투기했던 이들은 생활과 생계에 처참한 결말을 안고 말았었다.

당시 상황을 지켜보던 갤브레이스는 정부가 규제와 통화정책을 통해 해로운 요인들을 예방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정부는 이 의무를 실천하지 않고 방치해두었다고 말했다.

갤브레이스의 책은 1929년 주식시장 붕괴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만약 증시 안정을 위한 제도가 정비된다면 증시가 붕괴하더라도 대공황 같은 사태는 일어나지 않으리라 보고 있다.


1920년대 생산성과 고용률의 상승으로 기업의 이익 또한 상승 곡선을 보였다. 주가는 기업 이익을 반영해 1927년부터 꾸준히 상승하기 시작했으나 1928년 초에 들어 기저 가치와 따로 놀기 시작했으며 '환상으로의 대대적인 도피'가 일어났다고 그는 설명했다.

시장 거품의 원인은 저금리다.

유럽 각국에서 높은 금리를 노리고 미국으로 몰렸던 시기였는데 이렇다보니 미국의 통화 당국은 금리를 낮게 유지해야 한다는 일종의 책임감을 느끼게 된다.

이처럼 미국이 저금리를 유지함에 따라 미국인들은 싼값에 빌린 증거금으로 주식에 투자해 높은 수익을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갤브레이스는 이 통설을 받아들이진 않았다.

"이전에도 오랫동안 신용이 풍부하고, 심지어 1927~1929년보다 훨씬 더 저렴했던 시기가 있었으나 그런 시기에도 투기는 무시할 만한 수준이었다."

은행을 비롯해 금융 회사가 맹목적인 신뢰를 받았으며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갖게 되었었다.

끊임없이 상승곡선을 탈 것이라 확신을 심어주며 부추기니 1929년에 이르기까지 매달 4억 달러의 대출이 증가했다고 한다.

뉴욕증권거래소뿐만 아니라 소규모 증권 거래소조차 호황을 누렸다.

수많은 여성들도 생애 처음으로 주식을 사고 문화계와 예술계에서도 단연 화두에 오른 주제는 주식이었다.

당시 내부자 거래를 금지하는 법이 없다보니 시장 조작과 주자 조작 또한 일상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올라가는 게 순식간이었듯이 내려오는 것 또한 순식간이었다.

1920년대의 상승장이 1929년 9월 3일 종말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알다시피 이 붕괴는 하루에 멈추지 않고 몇 주간 계속 되었다.

처음에는 저평가된 주식을 낚았다고 믿었는데 10월 21일 오후에 안정세를 되찾았다.

그 주 '검은 목요일'이 되자 모두가 앞다퉈 주식을 내다 팔려 했고 심리적인 측면의 진정한 붕괴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같은 날, 저명한 금융인들이 시장 안정화를 위해 모이자 사람들은 낙관적인 전망을 내다보게 된다.

하지만 그 다음 주 월요일, '진정한 재앙이 시작'되었다. 이틀동안 대대적인 투매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 후 사흘간 뉴욕증권거래소가 안정을 위해 문을 닫았는데도 매도 주문은 쌓여만 갔다.

특히 투자신탁이 가장 큰 타격을 입어 투자자들은 폰지사기에 가까운 손해를 보았다.

현 주식이 휴지 조각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들은 우량 증권까지 팔아치웠고 시장은 더 침체되었다.

사람들은 하루빨리 사그라들기를 바랐지만 주식시장은 향후 2년 동안 계속 하락했다.

당시 후버 대통령이 경제가 회복되고 있다는 희망적인 말을 계속 발표했지만 이와 달리 경제 사정은 더 침체될 뿐이었다.

1932년, 미국 GDP는 1929년의 3분의 1 수준이었고 대폭락 이후에 찾아온 대공황은 약 10년이나 계속되었다.

주식 광풍의 원인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갤브레이스는 몇 가지 원인을 들었다.

먼저 미국 경제의 구조적 약점 때문에 대폭락이 더 파괴적인 악영향을 끼쳤다고 분석했다.

특히 극심한 소득 불평등이 그 원인이라 지적했는데, 당시 미국 개인 소득 합계에서 5퍼센트의 고소득자들이 번 돈이 차지하는 비중은 3분의 1에 달했다고 한다.

경제의 건전성이 고소득자들의 막대한 투자와 소비지출에 좌우되었는데, 대폭락이 닥치자 이러한 투자와 지출이 급감되어 그 영향이 더 컸던 것이었다.

잘못된 은행 시스템도 원인이었다. 은행 한 곳이 파산하면 다른 은행의 자산이 동결되는 구조라 사람들이 거래 은행에서 예금을 인출하는 현상이 발생했던 것이다.

덧붙여 형편없는 경제 지식도 원인으로 꼽았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흑자 예산에 대한 이지가 타당했겠지만 대폭락 직후에는 실업률 감소와 전반적인 빈곤 완화에 필요한 정부의 추가 지출에 제동이 걸렸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플레이션을 두려워했는데 사실 미국의 대외 지수가 더 큰 문제였다.

1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의 무역 흑자는 엄청났다. 유럽이 무역 대금 결제와 채무 상환에 금을 사용하면서 유럽에서 금이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는데 미국은 수입을 늘리는 방식으로 대처했지만 결과적으로 수출 감소는 경기 침체를 유발시키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부실한 기업 구조로 인해 투자신탁과 지주회사가 득세하는 상황을 펼쳐지게 만든 것도 원인이었다.

차입금을 과도하게 끌어다 쓴 이들은 투자보다 배당금 지급에 역점을 두었는데 같은 금융 회사들은 주가에 타격을 입기라도 하면 파산하거나 갑작스런 지출 삭감을 감행해야만 했다.

그 결과 디플레이션 악순환까지 더해졌다.


그의 연구가 지금까지도 인정받는 이유는 역사적 기억에 대한 그의 통찰때문이다.

당시 엄청난 고통과 충격을 안아줬다지만 사람들은 생각보다 쉽게 잊는다.

1960년대 이후 시장에서는 나쁜 관행이 상당수 부활했고 글래머 주식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2007년 금융 위기 이후 경제학 교훈 자체를 생각해 봐야 한다며 경제사 또한 커리큘럼에 포함해야 한다는 이견도 있었다.

갤브레이스는 최고의 스승은 경제 이론이 아닌 경험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부자를 더 큰 부자로 만들어 주는 곳, 그곳은 돈으로 무엇이든 살 수 있다.

미국 상위 1%는 전체 부의 43%를 차지하고 있는데, 2008년 미국에 금융 위기가 닥쳤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한 보험회사 CEO는 승승장구했다고 한다.

왜일까? 금융 위기 속에서 미래를 걱정한 사람들이 너도 나도 든 것이 보험이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불안을 먹고 자란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돈이 세상을 지배하는 지금, 자본주의는 돈의 제국이다.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돈이기에 모두가 돈을 원한다.

돈이 행복을 좌우할 수 없다해도 돈은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수단이다.

추위, 더위, 비바람 등을 막고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공간인 집이 언제부터인가 꿈이자 희망이 되어버렸다.

주식과 재테크에 올인하려는 사람들도 돈을 갈구하기 때문에 뛰어드는 것이다.


이렇듯 돈의 제국을 간파하려면 배워야 한다.

금융의 흐름은 물론 지금의 경제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역사들이 있었는데, 이 책은 경제학 역사의 중요한 장면마다 많은 영향을 끼친 책들이다.

순서 상관없이 읽어도 무관하고 깊이 알고 싶다면 언급되어 있는 각 저자의 원저를 찾아서 읽으면 된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 지 모르는 이들에게 큰 역할이 되어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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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3-06-22 1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교에서 경제학을 배우면 시험이 걱정될 것 같긴 한데,
그래도 꼭 배워야 하는 것이 금융과 법률 같아요.
잘 모르고 살아도 살 수 있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 같거든요.
잘읽었습니다.
하나의책장님, 감기 빨리 좋아지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시원한 하루 보내세요.^^
 
한국 프랜차이즈, 기본에서 다시 생각하다
이수덕 지음 / 지식과감성#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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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책과 마주하다』

한국 프랜차이즈 시장의 문제와 개선 방향을 체계적이고 통찰력 있게 분석한 국내 최초 통합적인 프랜차이즈 이론서이다.
14가지의 프랜차이즈 관련 이론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한국 프랜차이즈 시장에서 나타나는 현상과 문제를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저자, 이수덕은 9년간 일했던 해외영업부를 그만두고 2006년 패션 프랜차이즈 가맹본부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열정과 자신감만으로 시작한 가맹사업은 2년 만에 참담하게 실패하였다.
창업 실패는 저자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저자는 재기를 위해 오픈마켓 사업을 하면서 매장창업의 전문지식을 공부하고 관련된 자격증들을 취득하였다. 이후 저자는 창업 강의, 소상공인 컨설팅, 중개업, 가맹거래사 업무를 하였다. 특히 약 6년간 외식 가맹본부에서 개설, 전략기획, 운영, 마케팅의 일을 하였고 본부장의 직책으로 퇴사하였다.
퇴사 후 저자는 ‘옳은방향’을 설립하고 프랜차이즈 사업과 소상공인 창업에 관한 교육, 코칭, 컨설팅을 하고 있다. 주요 일은 프랜차이즈 사업과 브랜드 전략기획, 가맹본부 경영 컨설팅 및 임직원의 역량 강화, 정보공개서 등 컨설팅과 교육이다. 그리고 독립창업자에 대한 상권분석, 매장 계약론, 매장 브랜딩과 마케팅, 상가임대차보호법 등의 창업교육도 병행하고 있다.
저자는 경영학 박사로서 현재 세종대학교 대학원에서 프랜차이즈와 소상공인창업 과정의 겸임교수로도 재직 중이다.




프랜차이즈 사업의 시작과 성립

세상의 모든 자원은 공급이 제한되어 있어 이는 곧 자원부족으로 이어진다.
경제적 개념에서 자원부족은 상황에 따라 절대적, 상대적 부족일 수 있는데 기업은 자원들을 이용해 계속 성장해 나가야만 한다.
기업의 경영자원 부족은 부족한 내부 자원을 공급해 줄 수 있는 적합한 거래상대방을 찾게 하는데, 이는 기업과 기업 혹은 거래당사자들이 거래관계를 맺게 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된다.
자원들의 안정적 확보는 모든 기업들의, 국가들의 생존전략이다.
그래서 기업은 저렴한 비용에 효율적으로 부족한 경영자원을 공급받기 위해 끝없이 고민하는 것이다.
한편으론 기업의 경영자원 부족은 기업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역량의 부족함을 채우고 보완하기 위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개발하고 경영을 혁신하려는 주체적인 노력을 하기 때문이다.

프랜차이즈 자원부족 이론은 두 가지의 중요한 가정들을 가지고 있다.
첫째, 사업 초기 경영자원이 부족한 가맹본부는 빠른 사업확장을 위해 가맹점의 자원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것이다.
둘째, 사업이 성장하면 가맹본부는 가맹점의 자원들에 대한 필요성이 줄어들어 가맹본부는 더 높은 사업성과를 위해 사업확장 방식을 가맹점 중심에서 직영점 체제로 점차 전환한다는 것이다.

가맹본부가 성장하여 시장에서 어느정도 인지도를 가지게 되었다면 사업 초기 부족한 자원들을 성장과정에서 충분히 보충하였기에 가맹점의 자원들이 필요하지 않게 된다.
조직 규모가 커졌다면 시장에서 자립할 수 있고 금융권 등을 통해 언제든지 필요한 자금을 조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매장 소유방식은 이익 규모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인데 가맹본부는 직영점 확장방식이 가맹점 확장방식보다 더 유리하다고 판단한다.
임계점에 도달한 가맹본부는 기존 사업방식의 한계를 느껴 이를 극복하기 위해 직영점 확장방식을 고려하게 되는데 이때 표준적 운영에서 이탈한 가맹점들을 가맹사업에서 배제하게 된다.
급속히 증가한 가맹점의 수만큼 실패한 가맹점의 수도 증가하긴 마찬가지다.
이때 가맹본부는 가맹점들의 실패 이유를 시스템의 자체 결함이 아닌 운영방침을 잘 따르지 않고 표준적 운영을 하지 못한 개별 가맹점의 운영실패로 간주한다.
당연히 가맹점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가맹점들은 가맹본부 혹은 프랜차이즈 시스템의 자체적 결함과 경쟁력 부족이 원인이라고 강조한다.
이렇듯 실패 원인에 대해 의견 차이가 있다 보니 두 당사자의 해결책 또한 차이가 발생한다.
가맹본부는 미래의 가맹점에 대한 실패를 줄이기 위해 표준적 운영에 대해 강력한 감시를 하는데, 기존 가맹점들은 이에 대해 불만을 표한다.
그리하여 가맹본부는 개선된 시스템 도입과정에서 발생하는 모니터링 비용 증가, 기존 혹은 신규 가맹점들과의 갈등, 가맹점과의 분쟁 및 법률적 문제의 책임을 부담하기보다 이를 회피하기 위해 기존 가맹점 확장방식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다.
즉, 가맹본부가 단순히 높은 성과만을 위해 직영점 확장방식으로 전환하려는 것은 아니다.
프랜차이즈 자원부족 이론은 한국 프랜차이즈 시장에서 많이 알려진 이론이지만 매우 제한된 관점으로 이해되고 있다.
성공한 가맹본부가 직영점 확장방식으로 전환한다는 두번째 예측이 현실과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쨌든 프랜차이즈 자원부족 이론은 프랜차이즈와 관련된 이론들의 뿌리이자 출발점이 된다고 할 순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성장 스토리가 가맹본부 입장에만 치우쳐 있지 않고 가맹점의 관점에서도 어떤 사업적 고민이 있는지 묘사되어 있다는 점이다.

가맹본부와 가맹점의 거래관계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관계 특성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거래특유투자와 거래관계의 공정성의 문제이다.
프랜차이즈 사업방식은 다른 사업방식과 달리 가맹본부의 '보이지 않는 힘'인 거래특유투자의 특징이 강하다. 그리고 프랜차이즈 공정성의 문제는 프랜차이즈 브랜드와 소비자 사이에서 존재하면서도 가맹본부와 가맹점 간의 거래관계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다.




가맹본부와 가맹점 간의 상생협력을 위해서는 프랜차이즈 사회교환 이론이 철학적 기반이 되어야 한다.
상호 이익 존중을 바탕으로 가맹본부는 상대방의 비용지출과 경영적 노력에 대해 미래에 어떠한 형태로든 보상한다는 의무감과 책임감을 꼭 가져야 한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서로를 위해 균형 있게 맞추려는 노력을 한다면 결국은 상생의 결말을 맞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가맹본부만 상생협력 해야 하는 것일까?
가맹점은 프랜차이즈 시스템이 제공하는 혜택과 이익에 대해 가맹본부에게 보상으로 되돌려 주려는 경영적 실천이 필요하다.
즉, 보상의 실체는 가맹금이고 보상의 행동은 매장운영에 제 역할을 다 해낸다는 의미이다.

매우 체계적으로 설명되어 있어 가맹본부와 가맹점의 이해관계부터 갈등 그리고 해결점까지 파악할 수 있어 프랜차이즈 기본서라 말할 수 있겠다.
각 주제별로 등장하는 경영 이론은 사례도 매우 구체적이어서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역시 무언가를 시작하려 할 때 기본적인 '배움'은 필수적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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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과 인간 - 사도세자의 죽음과 조선 왕실, 개정증보판
정병설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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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책과 마주하다』



조선과 관련된 역사책을 여럿 읽다가 사도세자의 죽음을 중심으로 18세기 궁궐사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책을 발견하게 되었다.

사도세자의 탄생부터 성장 과정 그리고 죽음, 그의 죽음 이후 영조의 반응과 정조의 역사 왜곡, 나아가 순조 때 혜경궁이 『한중록』을 집필하는 과정까지 세세하게 구성되어 있어 꽤 흥미로웠지 않았나 싶다.

참고로 오래 전 출간되었지만 이번에 새롭게 개정되어 오류를 바로잡고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한 새로운 내용을 보강했다고 한다.


저자, 정병설은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이다.

『완월회맹연』과 같은 한글고전소설로부터 출발하여 다양한 문학작품을 통해 조선시대의 인간과 문화를 탐구해 왔다. 기생의 삶과 문학을 다룬 『나는 기생이다』(문학동네, 2007), 그림과 소설의 관계를 연구한 『구운몽도』(문학동네, 2010), 음담에 나타난 저층 문화의 성격을 밝힌 『조선의 음담패설』(예옥, 2010), 사도세자의 죽음을 통해 조선정치사의 이면을 살핀 『권력과 인간』(문학동네, 2012), 조선 후기 천주교 수용을 다룬 『죽음을 넘어서』(민음사, 2014) 외에 『조선시대 소설의 생산과 유통』(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6), 『한국고전문학수업 수업』(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9), 『혜빈궁일기』(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20) 등의 책을 펴냈으며, 『한중록』과 『구운몽』을 새롭게 해석하고 번역한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현재 한국 문화의 위상과 성격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Ⅰ 사도세자의 어른들


1694년에 태어난 영조는 여든세 살까지 살며 역대 임금 중 재위 기간이 53년으로 가장 길다.

삼십 년 이상 지켜본 혜경궁은 영조의 성격을 상찰민속이라 표현하며 세세히 신경쓰는 것은 거의 병적이라고 했다.

(상찰민속이란, 꼼꼼히 살피면서 동시에 재빠르다라는 뜻이다.)

죽음과 관련된 말은 거의 사용하지 않을 정도로 죽음을 극도로 두려워했다는 영조는 사람을 죽이거나 불길한 말을 들으면 양치질을 하고 귀를 씻었다고 한다.

심지어 영조는 좋은 일 혹은 좋지 않은 일을 할 때에 드나드는 문이 달랐다.

그래서 혜경궁이 영조가 사도세자를 만나러 경화문으로 들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불길한 일이 생길 것이라 이미 알아차렸다고 한다.

생사, 내외, 호오, 애증을 엄격하게 가르고 철저히 행했다는 것으로 보아 영조는 편집증을 가지고 있지 않았나 짐짓 추측해볼 수 있다.


그 누구도 권위에 도전할 수 없고 뜻 또한 거를 수 없는 자리, 바로 절대권력을 가진 자리이다.

그러나 유교사회인 조선에서 유일하게 거스를 수 있는 또하나의 절대권력이 있었으니 바로 부모다.

효를 중시하는 유교는 아무리 임금이라 해도 부모의 말과 뜻을 거스를 순 없다.

대개 왕이 서거한 후에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주니, 살아 있는 임금의 부모는 임금의 어머니나 할머니이다.

임금이 너무 어릴 경우에는 대비가 나서 어른이 될 때까지 대신 통치하기도 했는데, 수렴청정은 세조비 정희왕후부터 익종비 신정왕후에 이르기까지 일곱 차례에 걸쳐 행해졌다.

아무런 권력 기반도 없었지만 불안한 왕자 시절을 보냈던 영조를 왕세제로 만들고 대권을 전한 이가 있었으니, 바로 영조의 어머니 인원왕후다.

인원왕후는 영조의 생모는 아니지만 엄연히 영조의 어머니였다.

숙종에게는 세 부인이 있었다. 인경왕후, 인현왕후 그리고 인원왕후다.

1701년 8월, 인현왕후가 죽고 10월에는 장희빈이 사약을 받게 되자 중궁전이 공석이 되었는데, 이를 비울 수 없어 숙종은 결혼을 서둘렀고 이듬해 10월 인원왕후가 궁으로 들어오게 된다.

당시 숙종은 마흔두 살이었고 인원왕후는 열여섯 살이었다.

인원왕후는 후사를 얻지 못했지만 장희빈의 아들이었던 경종에게 왕권을 넘기는 중요한 역할을 도맡았다.

병약했던 경종은 즉위하자마자 후계를 정하자는 상소를 받게 되는데 이때 인원왕후가 영조를 후계로 정하자고 지지하였고 영조는 왕세제가 될 수 있었다.

왕세제로서 대리청정을 할 때도 영조는 인원왕후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이후 박상검 사건으로 인해 영조도 위험해지고 경종 또한 자신의 수하를 쳐내기 어려워했지만 단호하게 그들의 처벌을 결행한 사람이 바로 인원왕후였다.

임금이 원치 않거나 하지 못하는 일까지 하는 사람은 조선 천지에 대비밖에 없었으니, 당시 인원왕후가 영조를 위해 나섰던 것이었다.

이렇듯 영조에게 인원왕후는 권력의 전수자이자 생명의 은인인 셈이었다.

인원왕후는 손자인 사도세자를 무척 사랑했다고 전해진다. 물론 사도세자 또한 할머니를 믿고 따랐다고 하는데 당시 인원왕후가 더 오래 살았다면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는 일은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영조에게 첫날밤 소박을 맞았다고 알려진 정성왕후는 서른 살이 넘어서야 왕비가 되었지만 남편의 사랑을 끝내 받지 못해 죽는 날까지 고독했다고 전해진다.

정성왕후의 병세가 심각해졌을 때도 영조는 찾아오지 않았는데 곧 죽을 것 같게 되자 그제야 병소로 왔다고 한다.

그런데 정성왕후에게 말 한마디 건네기는 커녕 아들 사도세자의 흐트러진 옷매무새만 꾸짖었다고 한다.

결국 왕비가 운명하게 되었고 장례 절차를 진행시켜야 하는데 영조는 죽은 아내를 곁에 두고 내인들에게 아내를 만났던 일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다고 한다.

심지어 가장 사랑하는 딸인 화완옹주의 남편인 정치달의 부음이 들려오자 아내의 죽음에 형식적인 슬픔을 표하고 부마의 집에 거동하려 했다고 한다.

승지, 대사간 등이 말리자 영조는 그들을 해임하고 밤에 화완옹주 집에 갔다가 자정이 넘어서야 돌아왔다고 전해진다.

무려 33년이나 왕비의 자리에 있었지만 역사 기록에 따르면 영조가 왕비의 처소를 찾았다는 기록은 단 한 건도 볼 수 없다.

참으로 고독하고 고독했던 정성왕후였다.


1764년 7월 26일, 선희궁 영빈 이씨가 사망하게 된다.

그 날은 아들 사도세자의 삼년상이 끝난 달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마음의 병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원인은 화병이 아니었다.

그해 2월 선희궁은 영조가 정조를 사도세자가 아닌 효장세자의 아들로 삼으라는 전교를 내리자 식음을 전폐했었다.

아들이 죽고 삶의 이유를 잃어버린 선희궁에게 손자 정조라도 보전하여 왕으로 세우기를 바랐지만 손자가 더이상 자기 아들의 아들이 아니게 된 것이었다.

이렇듯 당시 자살을 숨기고 병사로 덮었던 행태로 미뤄보아 선희궁은 자살을 택한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

선희궁은 아들을 죽인 어머니라는 낙인을 가지고 있다.

사도세자가 죽은 날 아침, 선희궁은 영조에게 가 사도세자의 비행을 고했다.

사도세자가 병이 심해 상황 파악은 물론 주위 사람마저도 알아보지 못하니 아들의 대처분을 권한 것이었다.

세자를 죽이려 하는 영조를 보며 신하들은 말렸지만, 선희궁의 말을 들은 영조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었다.

부득이한 사정이 있었다 해도 선희궁이 아들의 죽음을 부추긴 것만은 사실이다.

선희궁의 남은 희망은 오로지 정조였다. 그러나 사도세자의 삼년상이 끝나갈 무렵 정조의 아버지를 사도세자가 아닌 효장세자로 두라는 명령을 받고 삶을 정리했을지 모른다.

훗날 영조와 함께 선희궁의 묘소로 간 세손 정조는 할머니를 이렇게 표현하였다.


할머니께서 소자를 돌봐주신 은혜는 어머니와 다름없으셨고, 세상을 가르치심은 엄한 아버지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할머니의 하늘처럼 크신 덕은 망극하기 그지없었습니다. 1762년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소자가 할머니를 우러러 기댐은 전보다 배나 더했고, 할머니께서 소자를 가련히 여기심도 전날보다 더 심했습니다. 춥지나 않은지, 시장하지나 않은지, 아침저녁으로 한마음으로 살뜰히 돌보셨습니다. 이 모진 목숨이 끊어지지 않고 오늘날까지 살아 있음도, 어느 것이 우리 할머니께서 주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정조, 「영빈이씨제문」)




Ⅱ 사도세자의 광증


사도세자는 처음부터 왕이 될 운명이었다.

영조는 마흔둘의 나이였고 이복형인 효장세자도 죽은 지 이미 칠 년이나 지났으니깐.

그렇게 모두의 신임과 사랑을 받고 태어난 사도세자였지만 영조가 그에게 실망하기 시작한 것은 열 살 전후부터였다.

열 살부터 죽기 직전까지 영조에게 사도세자는 골칫거리 아들이었고 사도세자에게 영조는 무섭고 두려워 피하고 싶은 아버지였다.

그 기간이 이십 년이나 되니 세자의 정신이 온전치 않았다는 말도 이해가 갈 뿐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사도세자는 열다섯 살에 대리청정을 한 다음부터 병이 생겨 그 총기를 잃었다고 한다.

예컨대 병이 발작이라도 하면 내인과 환관을 죽였고 발작이 그치면 후회를 했다고 전해진다.

「영조실록」에 따르면, 영조는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둔 뒤 세자를 동궁의 지위에서 내려 평범한 서인으로 만들었는데 당시 전교에 "비록 미쳤다고는 하지만, 어찌 처분을 하지 않으리오."라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사도세자의 생모인 선희궁이 세자의 비행을 일러바치며 미쳐서 한 행동이니 너그러이 처분해줄 것을 영조에게 당부하지 않았는가.

이후 사도세자가 죽고 난 뒤 장례에서도 영조는 사도세자를 미쳤다고 못박아 말했다고 한다.

「한중록」에 따르면 수시로 깜짝깜짝 놀라며 가슴이 두근거렸다고 하지만 이를 심각한 정신병으로 몰아가기에는 무리가 있다.

혜경궁은 사도세자의 유무죄 여부를 떠나 어느 쪽을 택해도 문제가 생긴다고 했다.

실제로 사도세자에게 죄가 있었다면 정조는 물론 손자인 순조도 결코 임금의 자리에 오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영조가 측근의 꾐에 넘어가 아들을 죽인 것이라면 왕의 판단이 결국은 틀렸음을 인정하는 것이니 즉, 혜경궁의 말처럼 어떤 쪽을 선택하든 결국 문제는 발생한다.


아홉 살 때부터 어지럼증을 앓고 있던 사도세자는 혜경궁과 결혼한 이듬해부터 행동이 예사스럽지 않다고 표현되어 있는데, 아마 신경증 초기이자 ADHD를 앓지 않았나 추정해본다.

또한 두 달 가까이 눈이 충혈되는 안질은 어린아이에게서 거의 볼 수 없는 병인지라 안경 착용을 고려했을 정도라고 한다.

세자의 병증은 서서히 진행되었다.

1752년 가을, 정조가 태어나고 궁궐에 홍역이 돌았다.

화협옹주가 홍역으로 죽고 사도세자 또한 병을 이겨내었지만 정성왕후의 환갑을 이틀 앞두고 영조가 전위하겠다고 소동을 일으켰다.

이 혼란 속에 사도세자는 「옥추경」을 읽으면 귀신을 부릴 수 있다는 말을 듣게 되었고 벼락신을 부리기 위해 「옥추경」을 공부했지만 오히려 귀신이 보인다면서 겁을 먹었다고 한다.

홍역으로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세자가 귀신에 빠지고 만 것이었다.




Ⅲ 사도세자의 죽음


1762년 5월 22일, 나경언이 사도세자를 고변한다.

곧 대권을 이어받을 세자가 반역을 한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다.

그리고 누가 감히 세자의 반역을 고발한다는 것일까?

윤급의 겸종인 나경언은 노비는 아니지만 대갓집의 일을 돌봐주는 집사였다.

나경언은 머리를 써 궁궐의 내관들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내용의 고변서를 형조에게 바쳤다.

형조는 이내 영의정에게 알렸고 영의정은 곧장 영조에게 고했던 것이었다.

워낙 엄중한 문제인만큼 영조는 나경언을 직접 심문했는데, 이때 영조를 대면한 나경언은 또 다른 고변서를 꺼내놓았다.

즉, 형조에게 갖다 바친 고변서는 가짜였다.

세자의 죄상을 담은 고변서를 올렸다가 임금과 마주하기도 전에 죽을 것 같으니 미끼를 던졌던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이 고변서로 인해 영조는 물론 온 조정이 세자의 비행을 알게 되었고 영조는 세자를 폐위할 결심을 하게 된다.


임금의 행차는 즉각 혜경궁에게 보고되었었다.

혜경궁은 영조가 어느 문을 통해 들어와 어디로 가는지 촉각을 곤두세웠는데, 경화문을 통해 들어와 선원전으로 갔단 소식에 절망할 수 밖에 없었다.

징크스를 강하게 믿던 영조는 궂은일을 할 때 경화문을 통해 선원전으로 갔는데, 이는 사도세자에 대한 처분이 확실해졌다는 전조였다.

사도세자는 곧장 영조에게 가지 않고 아내를 불러 이별을 고하고 세손 정조의 휘항을 가져다 달라 부탁했다고 한다.

사실 정조의 휘항을 가져다 달라는 것은 온전치 못한 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으나 혜경궁은 아들의 것은 작으니 세자 본인의 것을 쓰라고 답했다.

서로의 말에 대한 오해만 남긴 채 결국 사도세자는 정조의 것을 쓰진 않았다.

휘령전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았다.

세자는 관과 용포를 벗고 사죄하는 뜻에서 돌바닥에 머리를 찧기도 하였지만 영조는 자결하라며 단호하게 요구했다.

세자의 죽음을 막아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세손 정조도 살려달라 간청했으나 안겨 나갈 수밖에 없었고 뒤이어 신하들이 들어와 간청해도 영조는 단호하게 쫓아냈다.

결국 세자는 뒤주에 들어가게 되고 자정이 넘어서야 영조는 세자를 폐위하는 전교를 반포하게 된다.


사도세자의 사인에 대해 세자가 미쳐서 그리되었다는 것과 당쟁에 희생되었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작은 임금인 세자를 일반 죄수처럼 처형할 수 없기에 영조는 자결하라고 명한다.

세자가 칼을 받아들고 목숨을 끊으려 할 때도, 옷을 찢어 목을 매려 할 때도, 돌계단에 머리를 찧어 죽으려 할 때도 신하들이 모두 손으로 막았다.

명목상으로 국정을 대리하는 조선의 최고 권력자인 세자를 그 누구도 손 댈 수 없었다.

무엇보다 세자의 죽음을 목숨 걸고 막지 못했다는 것만으로도 죽음을 도운 역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영조의 처벌을 받을 순 있어도 유교 이념에 따라 용서받겠지만 거꾸로 충신으로 인정받을 수 있기에 세자에 대한 충성심이 있건 없건 모든 신하들이 그의 자결을 막으려 노력했다.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누군가의 지시로 뒤주가 들어오게 된다.

처음에는 저항했지만 결국 순순히 들어갔고 밤이 깊어지자 뚱뚱한 체구에 더위도 많이 타 저도 모르게 뒤주판을 차고 뛰어나왔다고 한다.

소식을 들은 영조는 세자가 깨고 나오지 못하도록 두꺼운 널판을 덧대어 큰못을 치고 동아줄로 뒤주를 꽁꽁 묶었다고 한다.

그렇게 뒤주는 세자의 관이 되어버렸다.

누가 뒤주를 들이게 했는지 알 순 없지만 세자를 죽이고자 한 사람은 뒤주 아이디어를 낸 사람이 아닌 영조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가야금을 연주하다 알게 된 곡이 있는데 바로 「꽃이 피고 지듯이」다.

유명했지만 보지 않았던 영화 「사도」의 OST인데 문득 사도세자에 대해 궁금증이 생겼다.


▶사도세자의 죽음에는 의혹이 있다?

▶뒤주에 갇히는 벌을 거스르지 못하고 순순히 들어가던 사도세자?

▶사도세자를 뒤주에 갇혀 죽였지만 이를 애통해하던 영조?

국사책에서 처음 마주했던 영조와 사도세자 그리고 정조.

어떻게 아버지가 아들을 뒤주에 갇히게 해 죽게 했을까하는 의문만이 머릿속에 가득했었다.

아들의 죽음을 슬피 여겨 내린 시호, 사도는 당시 내게 있어서 매우 아이러니할 수밖에 없었다.

영조와 정조는 업적까지 꿰뚫고 있지만 사도세자에 대해 너무 알지 못하는 것 같아 내막에 대해 파헤져보고자 『권력과 인간』을 펼치게 되었다.


신하 앞에서도 대놓고 꾸짖으며 아들 사도세자를 숨 막히게 만들었던 아버지 영조 그리고 아버지 영조의 꾸짖음 아래 도망치지도 못하고 스트레스에 시달렸던 아들 사도세자.

모두의 관심과 기대 속에서 태어났지만 공부를 싫어해 열 살도 되기 전에 영조를 실망시켰고 학자라기보다 예술가에 가까웠던 그였기에 사도세자는 아버지와 애초에 맞질 않았다.

영조와 사도세자가 조선이 아닌 현대에서 부자관계였다면 극한의 결말로 내몰리진 않았겠지.

사도세자를 둘러쌌던 어른들부터 탄생과 성장과정 그리고 죽음까지 지켜보고 나니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난 비운의 인물이 아니었나 싶다.


간혹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해 제기되는 의문 하나가 있으니 뒤주에 갇히게 가는 것은 일종의 벌이지 죽음으로 내몰려는 의도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즉, 영조가 아들을 죽일 뜻이 없었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는 상황 자체를 받아들이기 힘들다보니 모두가 이에 대한 의문을 믿고 싶어한다.

사도세자는 모후인 정성왕후의 영혼이 깃든 휘령전에서 뒤주에 갇혔었는데 영조가 쓴 사도세자의 묘지명을 보면 뒤주는 강서원에 있었다고 표시되어 있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든 다음 영조가 이를 승문원으로 옮기게 했다는 기록도 있는데 영조는 차마 어머니의 영령이 있는 곳에서 아들을 죽게 할 수 없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경희궁으로 돌아가지도 않고 뒤주를 감시했으며 19일 사도세자가 죽음에 이른 시점에 환궁을 했다.

이때 혜경궁은 사도세자가 20일에 죽었다고 추측했는데 영조는 뒤주를 21일에야 열었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으로 볼 때, 세자를 죽일 뜻이 없었다는 영조의 말에는 공감할 수가 없다.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는 단편적이기에 한 사건에 대해 전후사정을 알기 어렵다.

또한 역사 왜곡은 끊임없이 대두되고 있는데 달라진 것은 전혀 없으니 간혹 우리가 배우고 있는 역사가 의문이 들 때도 있다.

유사 역사가 아닌 진짜 역사, 즉, 진정한 역사 교육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해 저자는 우리 학생들을 위해, 우리 역사를 위해 대중 역사서에 대한 본격적인 검토가 필요하며 이는 전문가들이 역사 대중화의 방향을 잡아줘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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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학 답사 일지 - 배움을 찾아 떠난 국문학자의 여행
정병설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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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책과 마주하다』


서울대에서 교양과목을 맡았던 저자가 수업을 위해 답사 다니고 여행하며 썼던 글들을 한데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엮어내었다.

문학과 역사 그리고 여행의 만남이라 읽는 내내 즐거웠다.

무엇보다 국문학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니 이전에 분명 다녀왔던 곳이 모르던 곳인 것마냥 새롭게 느껴졌었다.

그래서인지 관찰자의 시점에 따라 깊이감이 달라짐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저자, 정병설은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이다.

『완월회맹연』과 같은 한글고전소설로부터 출발하여 다양한 문학작품을 통해 조선시대의 인간과 문화를 탐구해 왔다. 기생의 삶과 문학을 다룬 『나는 기생이다』(문학동네, 2007), 그림과 소설의 관계를 연구한 『구운몽도』(문학동네, 2010), 음담에 나타난 저층 문화의 성격을 밝힌 『조선의 음담패설』(예옥, 2010), 사도세자의 죽음을 통해 조선정치사의 이면을 살핀 『권력과 인간』(문학동네, 2012), 조선 후기 천주교 수용을 다룬 『죽음을 넘어서』(민음사, 2014) 외에 『조선시대 소설의 생산과 유통』(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6), 『한국고전문학수업 수업』(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9), 『혜빈궁일기』(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20) 등의 책을 펴냈으며, 『한중록』과 『구운몽』을 새롭게 해석하고 번역한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현재 한국 문화의 위상과 성격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Ⅰ 여행을 향한 갈망


여행은 위대하다. 석가모니의 출가와 성불, 원효의 유학 여행 도중 각성, 연암 박지원의 연행과 북학의 깨달음이 보여주는 것처럼, 인간의 위대한 깨달음 중에 여행에서 비롯된 것이 적지 않다.


한국인은 대대적으로 여행 DNA를 물려받지 않았나 싶다.

전근대 조선 사람들도 넓은 세상을 경험해보고 싶었지만 가까운 중국도 사신단 신분으로 수도 베이징에만 갈 수 있었으며 바다에서 배가 난파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쇄국 상태였던 조선에서 지식인들이 가진 여행에 대한 갈망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 바로 「열하일기」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따르면 중국에 들어서자마자 울고 싶다고 표현했을 정도였으니깐.

박지원은 정식 사신은 아니었지만 팔촌 형인 박명원이 사신이 되자 자제군관의 자격으로 따라갔던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중국 문화에 빠진데다 선배 학자들의 중국여행기를 읽으며 언젠가 떠날 날만을 갈망했으니 울고 싶다고 표현한 부분이 새삼 이해가 간다.


조선시대처럼 폐쇄된 것도 아니지만 여행이 절실하지 않았던 저자는 1993년 신혼여행 때 첫 비행기를 타봤다고 한다.

문학연구자로서 해외 대학에서 선진 학문을 배우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기회가 오지 않았는데 한국까지 찾아와 학문적 교류를 청하는 벗을 만나게 된다.

하버드대학 박사과정에 있던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가 서울대학교 연구생으로 오게 되어 저자의 박사 지도교수이신 이상택 선생님에게 한국고전소설을 함께 읽을 학생을 구해달라고 청하게 된 것이다.

선생님은 카투사 경력이 있는 저자에게 청했지만 처음에는 거절하였는데 결국 그는 제안을 하게 된다.

매주 한 번씩 만나되 저자는 한국문학을 영어로 소개하고 임마누엘은 미국의 중국문학 연구 성과를 한국어로 말하자고.

그 과정에서 깨달은 것도 있었다.

아, 질문이 사람을 빨리 성장시킬 수 있구나!

유대계 미국인인 임마누엘은 유대인의 전통적 질의토론식 학습법인 하브루타가 익숙해서 저자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던 것이었다.

한국 밖 대학을 한 군데도 가보지 못했던 저자였지만, 머릿속에서는 세계 유수의 대학교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그는 말한다.

또한 미숙했지만 그 시절 멀리 찾아온 벗과 만나던 때가 그의 학문적 황금기였다고 덧붙였다.




Ⅱ 옛 서울 나들이


전세계에서 아름다운 도시를 꼽으라면 지리적으로는 단연 '서울'이 으뜸일 것이다.

서울 성내로 들어오면 북악산, 인왕산, 낙산, 남산이 사방을 둘러싸고 청계천이 가운데서 흐르고 있으며, 북한산, 도봉산 같은 명산을 옆에 끼고 한강이 흐르는 수도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때문이다.


조선시대 소설이 전공인 저자는 부전공을 서울로 여긴다고 한다.

나라의 중요한 일이 서울에서 벌어지며 인재 또한 서울로 모이니 문학 역시 서울이 중심이기 때문이다.

지방에서 내세우던 인물도 서울에서 나고 자랐거나 주로 활동한 경우도 많다.

이렇듯 역사 또한 조선사는 결국 서울의 역사이지 지방사는 찾기 어렵다.


조선시대 서울은 행정적으로는 서울 성곽 안쪽과 성 바깥 10리까지를 가리킨다. 당시 서울 인구를 20~30만 명 정도로 추산하니, 도성 안쪽에는 20~30만 명 가까운 인구가 살았다고 볼 수 있다. 서울에는 동서남북에 각각 높지 않은 산이 있다. 북에는 북악, 동에는 낙산, 남에는 남산, 서에는 인왕산이다. 서울 성곽은 이 산들을 둘러가며 쌓았다. 각각의 방위마다 중심 성문이 있고 중심 성문 사이에 다시 작은 성문이 하나씩 있다. 그 문들 중 동대문이 가장 크며 남대문 또한 왕래가 많던 중요한 문이다. 서소문과 동소문은 서민의 상업 활동 등 일상생활에 많이 이용되었다.

서울 성내는 청계천에 의해 남북으로 구획되었으니 조선시대에도 일종의 강남과 강북이 존재했던 셈이다. 청계천 주변 종로와 그 이남은 평서민이 많이 사는 상업과 유흥의 거점이었고, 북쪽에는 궁궐과 관청을 출입하는 상층 양반이나 서리, 아전 등이 많이 살았다.


저자에게 북촌은 곧 궁궐 답사나 다름없다.

헌법 재판소 자리에는 고종 때 정승 박규수의 집이 있는데 할아버지인 연암 박지원의 집이기도 하다.

혜경궁 홍씨의 친정 또한 북촌에 있는데 이에 대해 여러 말이 오간다고 한다.

수락산 기슭 벽운동 계곡에 별장이 있다는 말은 불확실하며 오래 머문 흔적 또한 없다고 한다.

다만 저자가 친정집 위치를 추적하며 깨달은 것은 우리가 옛날 사람들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잘 옮겨다니지 않고 한평생 한곳에서 보냈을 것이라는 편견을.

남편인 사도세자가 폐세자된 후 뒤주에 갇히는 벌을 받자 아들 정조와 함께 궁 밖으로 나와야만 했다.

이때 궁궐과 멀지 않은 곳에 친정집이 위치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혜경궁의 후손들은 서울 공예박물관 자리에 있다고 하는데 그녀의 오빠 홍낙인이 남긴 「피음정기」에 따르면 이곳보다 약간 북쪽 언덕 부근에 자리하지 않았나 싶다.

당시 조선시대에서 양반이었다면 서울집, 시골집, 서울 근교의 별장을 가지고 있었어서 북촌 골목골목에 있는 한옥들을 보면 조선시대 최상층 양반의 일상이 묻어나있음을 알 수 있다.


서울 남쪽은 북쪽에 비해 상인이나 서민이 많이 거주해 있었다.

"남대문이 개구멍이요. 인정이 매방울이요. 선혜청이 오 푼이요. 호조가 서 푼이요. 하늘이 돈짝만하고 땅이 맴돈다." _춘향전

남촌 중에도 특히 광통교 주변은 상업 지역이자 문화 구역이었다.

광통교 가에는 그림 가게가 있어 다리에 걸린 그림들이 바람에 흩날리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다고 한다.

광통교 남쪽으로 가면 다동을 다방골이라 불렀는데 그곳에는 기생집이 많았다.

늦은 밤까지 술을 마시고 논 기생과 취객이 다음날 아침까지 일어나지 못하니, 이를 다방골 잠이라고도 불렀다.

갤러리, 술집, 상점이 많은 곳, 즉, 돈과 술 그리고 유흥이 어우러진 곳이 남촌이었다.




초등학교 때, 영어만큼 좋아했던 책이 바로 사회과부도였다.

지도 보는 것이 좋아 여기저기 가보고 싶은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켜보고 깨알같이 써져있는 글들까지 읽으며 뒷부분에 나오는 나라, 수도까지 다 외우곤 했었다.

저자는 세계 지리부도를 보며 세계여행에 대한 꿈을 꾸었다고 하던데 나 또한 책상 위에 놓인 미니 지구본을 떼굴떼굴 굴려가며 여행하는 꿈을 꾸곤 했다.


작년에는 못했지만 못해도 매해 두어 번은 궁 나들이를 다녀온다.

창경궁, 경복궁, 덕수궁, 경희궁을 살펴보다 마음 가는 대로 북촌이나 서촌 혹은 인사동, 명동까지 다녀오곤 한다.

누군가와 함께 걸으며 여유와 힐링을 느끼고자 다녀오는 것인데, 책을 읽고 나니 주제를 정해놓고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으로 바라보며 지나갔던 그곳이 곧 문학과 역사였으며 나들이가 곧 배움의 장이었기 때문이다.


목적지가 분명하지 않아도 걷는 게 참 좋다.

날씨만 허락한다면 저녁 산책은 빼먹지 않을 정도니깐.

근래 다쳐서 오래 못 걷다보니 마당 산책만이 숨통을 틔여주고 있는데 올 가을에는 꼭 다녀와야겠다.

올해 강원도만 전부였던 내게 남원부터 군산, 안동, 광양 그리고 서울 곳곳을 살피며 떠난 인문학적 여행은 꽤나 만족스러운 여행이 되었다.

이러니 내가 책을 끊지 못한다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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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에 누워


언덕에 누워 바다를 보면
빛나는 잔물결 해일 수 없지만
눈만 감으면 떠오르는 얼굴
뵈올 적마다 꼭 한 분이구려


_김영랑





하지 않은 죄


당신은 당신이 한 일보다
하지 않고 남겨둔 일 때문에 괴로울 것이다
해 질 무렵 당신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건 바로 그것

부드러운 말을 잊었다면
편지를 쓰지 않았다면
꽃을 보내지 않았다면
잠자리에 든 당신은 괴로울 것이다

형제의 길 앞에 놓인 돌을 치워주지 않았다면
힘을 주는 몇 마디 조언조차 해주지 못했다면
당신의 문제를 걱정하느라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사랑이 담긴 손길
마음을 끄는 다정한 말투
그것들을 소홀히 대했다면

인생은 너무 짧고 슬픔은 너무 크다
늦게까지 미루는 우리의 느린 연민을 눈감아주기에는
당신은 당신이 한 일보다
하지 않고 남겨둔 일 때문에 괴로울 것이다
해 질 무렵 당신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건 바로 그것


_마가렛 생스터





혼자서


하이얀 티셔츠 차림으로
미루나무 숲길에서 온종일 서성이고 싶은 날은
깊은 산골짜기 새로 돋은 신록 속에 앉아 있어도
안개 자욱 개구리 울음소리 속에 앉아 있어도
귀로는 연신
머언 바다 물결 소리를 듣는답니다

아야, 아야, 아야, 아야,
산 너무 산 너머서
흰 구름 생겨나고 죽어가는 소리를 듣는답니다

바다에는 지금
하얀 돛폭을 세워 떠나가는
돛단배가 한 척.


_나태주




나태주

처음 사는 인생, 누구나 서툴지


"서툰 것이 인생. 부디 당신, 외로워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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