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stella.K > [펌]내 인생을 바꿀 한 장의 누드사진



위 사진의 주인공은 랜스 암스트롱이라는 자전거 선수입니다.
부시(-_ㅡ;)가 주지사를 했던 텍사스주에서 태어난 미국 선수입니다.
집이 그리 풍족하지 않아 몸뚱이 하나로 돈을 벌기위해 철인3종 경기를 시작했고 나중에는 사이클에 전념하면서, 93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쥐는 등 촉망받는 엘리트선수의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1996년에 고환암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것도 이미 암세포가 온 몸에, 심지어 뇌에까지, 퍼진 말기상태였지요. 생존률 3%라는 극악한 진단까지 받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뇌수술을 비롯한 종양절제술과 고통스러운 항암치료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암 말기에 이르러 환자들이 겪는 고통은 상상을 초월한다고 합니다. 오죽하면 시인 김남주는 "내 고환을 끊어내 바위에 놓고 짓이겨 버리고 싶을 정도"라고 표현을 했겠습니까. 그래서 병원에서는 말기암환자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마약류의 약물을 이용하기도 한다더군요. 뿐만 아니라 항암치료에 수반되는 고통도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견디기 힘들다는데 암스트롱은 그런 모든 고통을 의연히 이겨내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자전거 핸들을 붙잡고 세계 최고 권위의 프랑스전역자전거일주대회(뚜르 데 프랑스)에 도전합니다. 그 대회는 자전거선수들이 가장 고통스러워하면서 또 가장 영광스러워 하는대회입니다. 몇 주에 걸쳐 자전거 하나로 프랑스 전역을 질주해야하는 죽음의 레이스. 목숨을 부지하는 것조차 간당간당해 보이던 랜스암스트롱이 그 위대한 대회에 도전하는 모습을 본 주치의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기적이었다,고 인터뷰를 했을 정도입니다.
 
결국 랜스암스트롱은 1999년 대회에서 우승을 한 이래, 지난해 2003년까지 내리 우승함으로써 대회 5연패라는 전인미답의 금자탑을 세웠습니다. 얀 율리히라는 아름다운 2인자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긴 했지만 아무튼 대단하고 대단하고 또 대단합니다.

 
 
--- 정말 그렇군요. 그의 굽은 등은 안장 위의 시간을 대변해주는 듯 합니다. 바람의 저항을 피해 진화한것처럼 변한 모습. 저의 몸의 어떤 부분이 과연 저렇게 변모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2005-02-02 16: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루살이 2005-02-02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워낙 인색하다보니... 펑펑 퍼오고, 팡팡 추천하고 그래야 할텐데. 돈드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인심 쓰는게 어려워서야. 쯧쯧.
 
오체 불만족
오토다케 히로타다 지음, 전경빈 옮김 / 창해 / 2001년 3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확실히 기억나진 않지만 몇 년 전 TV에서 화제가 됐던, 사지가 없는 청년의 인생기다. 이미 그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지금 이 책을 읽는 이유는 순전히 다치바나 다카시 때문이다. 그가 픽션보다 재미있는 논픽션을 말하면서 언급되어졌던 책들 중 한국에 소개되어진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책이다. 그래서 그가 생각하는 재미있는 책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성격의 것인지가 궁금해서 읽게됐다. 그리고 읽고 난 느낌은 그래도 소설이 더 재미있지 않나?라는 생각??!! (난 지적 호기심보다는 쾌감에 대한 욕구가 더 큰가 보다)

그렇다고 이 책이 재미없다는 것은 아니다. 신체적 장애에도 불구하고 구김살없이 자라난 모습, 그리고 그를 보통사람처럼 키워낸 부모님들, 정말 대단하다고 여겨진다. 특히 사지가 없는 오토다케를 평범한 아이처럼 대하는 어머니는 능청맞다기 보다는 그로 인해 오히려 눈물을 자극하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어디 눈물뿐이던가? 느닷없는 폭소를 터뜨리게도 만드는 그 가족들의 낙천성에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장애는 불편하다. 그러나 불행하지는 않다라는 헬렌 켈러의 말대로 오토다케의 삶은 결코 불행하지 않다. 하지만 대다수의 장애인들은 불편하면서도 불행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일본은 물론 한국도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모든 나라가 다 똑같은 상황 속에 처해 있는 것은 아니다. 오토다케가 미국을 방문하면서 느꼈던 것처럼 불편함마저 극복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노력으로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구별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선 그의 말처럼 장애인을 동정의 눈길로 바라보는 무의식의 습관을 버려야 가능하다.

먼저 건물이나 운송수단이 장애인도 편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애시당초 만들어졌다면 우리가 그들을 위해 휠체어를 옮겨주어야 한다거나 하는 등의 어떤 도움을 주어야만 하는 대상으로 그들을 바라볼 필요가 없다. 그들도 우리와 똑같이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는데 무슨 도움이 필요하겠는가? (사회 내 직업의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일터이다.) 어떤 동정이 끼어들겠는가? 또 하나, 낯선 것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소수에 대한 다수의 횡포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와 조금 다른 것에 당황해하며 어떻게 행동해야 할 지를 모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난처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저 구성원의 일부로 다양성을 인정하고, 일상 속에서 평범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할 뿐이다. 그것은 어렸을 때부터의 철저한 교육을 바탕으로 했을 때 가능한 일일 것이다.

다행히도 정말 다행히도 오토다케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은 다들 마음씨가 따뜻했던 모양이다. 그가 장애에 대해 생각하고 그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성인이 다 될 무렵에서야 했을 정도이니 말이다. 어떻게 보면 현실 속이라기 보다는 동화 속 상상의 세계에서 살지 않았나 싶을 정도다. 그렇다고 그가 전혀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때론 눈물을 흘리기도 했지만 아이들과 선생님의 순수한 배려가 그를 당당한 사회의 일원으로 만들어주었다.

사회라는 울타리 속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그림자 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힘없는 소수들이 존재한다. 그들을 우리의 곁에 세워두기 위해선 오토다케를 둘러싼 사람들이 보여주듯이 살아가면 될 것이다.  즉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결코 동정심이 아닌 것이다. 나와 조금 다른 것에 대한 포용의 능력은 장애와 편견을 훨씬 뛰어넘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 - 다치바나 식 독서론, 독서술, 서재론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이언숙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다치바나라는 이 사람은 솔직히 말해 사람이 아닌 것 같다. 주간지 기자라는 경력이 그를 이런 완벽주의자로 만들어 놓지 않았나 라는 생각도 든다.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리포터를 쓰기 전, 그것에 대한 사전정보를 완벽하다 싶을 정도로 철저하게 공부한다. (이것은 인터뷰의 대상으로보터 보다 상세한 설명을, 또는 감추어진 것들을 끌어내기 위한 방편이 되기도 한다)책꽃이 한 단을 다 차지하고도 넘을 정도의 책(대략 몇 백권 이상의 책)을 읽고나서야 인터뷰를 행하는 자세는 사람을 대하는 것을 직업으로 갖는 사람이 배워야 할 자세라고 여겨진다. 심지어 자신의 원고료가 60만원일 때, 준비하는 책 값만으로도 60만원을 훌쩍 넘겨버릴 정도이니 말이다.

다치바나의 이런 책읽기 습관으로 인해 그가 소장하고 있는 책만으로도 한 건물을 다 차지한다. 친구의 도움으로 책을 보관하기 위한 고양이 건물이라는 것을 짓고, 지하에서 지상 3층까지 온통 책으로 가득찬 하나의 세상을 만들어간 사람. 그 사람의 책 읽기에 대한 자세는 다음과 같다.

먼저 알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개론서를 3권이상 구입한다. 이것은 한 대상에 대한 편견이나 선입견을 없애기 위한 방편으로서 시각이 서로 다른 책을 구입해야 한다. 어떤 개론서가 좋은 책인지는 책의 증판, 증쇄를 보면 대강 알 수 있다는 세세한 정보까지 주고 있다. 그리고 개론서를 읽어가면서 흥미로운 부분이나 궁금증이 확대된 부분에 대한 전문서적을 구입해 읽는다. 만약 이런 책을 읽는 도중 도저히 읽어나갈 수 없을 때는 그 이유가 무엇이든 당장 그만둔다. 그리고 책을 구입할 때는 서점을 한군데만 둘러보지 말고 여러 군데를 둘러본 후 무슨 책을 살 것인지 결정하라.  등등등.

그런데 다치바나의 책은 픽션을 제외한다. 픽션보다 더 흥미로운 일들이 실제 생활 속에서 벌어지는데 굳이 픽션을 읽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 그의 변이다. 물론 다치바나는 인간이라는 것이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동물이며, 자신은 특히 그 호기심이라는 측면에서 유달리 욕구가 크기 때문에 그것을 채우기 위한 책읽기가 무척이나 재미있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첨가한다. 텔레비젼이나 영화 보는 것보다 책 읽는다는 것 그 자체가 재미있기에 가능한 일이리라. 그렇다고 그가 문학에 전혀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알고보면 그는 이미 어린 시절에 대부분 고전이라고 부르는 문학서적들을 다 읽어버렸다. 남들이 평생 읽어도 다 못읽을 정도의 문학서적을 이미 다 읽고 난 이후이기에 부릴 수 있는 배짱이지 않나 싶기도 하다. 그리고 논픽션의 재미에 푹 빠져 있기 때문에 최근 나오는 현대소설들을 읽을 여유를 갖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 옳은 설명일듯싶다.

아무튼 그의 전방위적 호기심 추구와 철저한 준비라는 태도는 존경하고 싶다. 식지않는 열정을 가지고 대상을 맞이하는 그의 모습에서 사물을 또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생각해본다. 부끄럼없이 당당하기 위해선 해야 할 일들이 참 많을듯 싶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icaru 2005-01-27 1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논픽션의 재미에 푹 빠져 있기 때문에 최근 나오는 현대소설들을 읽을 여유를 갖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 옳은 설명일듯싶다. 정말 그게 옳을 설명일 듯 싶네요~ 픽션을 그렇게 일축할 거 까지야 없지 않나 싶더라고요...

저 책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그거였어요... 어떤 책이든...핵심적인 내용은 5분안에...정리해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지진부진늘여붙여 리뷰를 급조해내던 저에게 딱 일침이었죠..

하루살이 2005-01-27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짧은 대화로 책의 중심내용을 집어낼 수 있는 능력, 이영표의 헛다리 짚기처럼 변두리 이야기로 책을 읽지 않은 다른 사람들을 현혹하지 말고, 바로 과녁을 꿰뚫을 수 있어야 할텐데요...
 

다치바나 다카시의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중엔 오토마톤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오토마톤이라는 것은 마치 자동판매기처럼 우리 몸이 기억하고 있는 무의식적 행동들을 가르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자전거 타기나 자동차 운전을 배운 뒤, 자전거 또는 자동차를 운전할 때 우리는 전혀 자신의 행동을 의식하지 못한채 페달을 밟거나 핸들을 조정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이렇게 운전해야 한다는 의식적인 상태없이 몸은 알아서 그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체득된 기술들로 인해 이젠 자전거를 타면서 또는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그 이외의 다른 행동들을 쉽게 행할 수 있게 된다. 즉 운전하면서 대화를 나눈다거나 라디오 방송에 귀를 기울인다거나 등등. 그리고 바로 이 부분에서 자신이라는 정체성을 확대할 수 있는 영역이 생겨난다고 한다. 즉 학습 등을 통해서 오토마톤의 영역을 넓혀가고 배운것이 오토마톤, 즉 무의식에 가깝도록 체득된 후에는 또 다른 것들을 배워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오토마톤이라는 부분을 읽다보니 문득 바로 이 지점이 명상이 끼어들 수 있는 부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토마톤의 영역, 즉 무의식적인 행동들을 의식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이 바로 명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말이다. 숨쉬는 것, 걷는 것 등 의식하지 못하고 행해지는 것들을 찬찬히 바라보며 마음 속에 새기다 보면 참 신비롭다는 생각이 든다. 당연하게 생각되던 것들이 당연시 여겨지지 않음으로써 주는 그 신비로움이 주는 충격은 참 신선하다. 그리고 바로 그 신선한 충격이 행복감을 가져다 준다. 즉 정체성의 확대라는 지식에 대한 욕구가 즐거움을 주듯, 명상 또한 확대보다는 기존의 것에 대한 깊은 시선으로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듯하다.

따라서 우리가 오토마톤의 영역을 넓히는 것과 함께 오토마톤의 영역을 들여다보는 것 또한 필요하지 않는가 생각된다. 그랬을 때 진정한 자아에 대한 정체성의 확립과 함께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 감히 상상해본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icaru 2005-01-26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의식적인 행동들을 의식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이 바로 명상...

님의 이런 통찰은 하루 아침에 이뤄진게 아니겠죠...
또..감탄하다가...갑니다~

하루살이 2005-01-26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천은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의식적으로 바라보는 것 자체를 또한 무의식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경지에 올라야 그래도 명상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무의식적 명상은 오토마톤과는 다른 것이겠죠? ^^
 
천사와 악마 1
댄 브라운 지음, 양선아 옮김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4년 9월
평점 :
절판


영화보다 재미있는 책.

한마디로 그렇습니다. 웬만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보다 더 재미있습니다. 이야기의 반전을 예측하면서 순간 당황하게 됩니다. 나의 예측이 맞았노라고 히죽히죽 웃고 있을때 왠지 모를 불안감이 찾아옵니다. 아직도 책은 100쪽 가까이 남겨져 있기에 말입니다. 분명 내 예상대로 이야기는 흘러가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책은 이제 정리할 마지막 몇 쪽만을 남겨놓아야 하는데 말이죠. 정말 거대한 반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숨가쁘게 진행되던 이야기가 차차 정리된다고 여겨지는 순간에도 아직 이야기는 급변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던 거죠.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은 마치 추리소설마냥, 영화 인디아나 존스마냥 흥미진진합니다. 베르니니의 예술품 속에 감추어진 암호들, 그리고 갈릴레오 이후의 일루미나티라는 집단에 대한 궁금증, 물질과 반물질에 대한 이야기가 촘촘하게 얽혀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물론 거기까지도 훌륭합니다. 시간 흘러가는 줄 몰랐고, 다음 내용이 궁금해 잠을 이룰 수가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소설이 말하는 종교와 과학의 대립 또는 통일은 그다지 신선하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과학자들의 세계에 대한 해부가 신의 존재를 증명해줄 것이라는 의견도 이미 오래전에 있었습니다. 또한 신에 대한 신비성을 없애게 될 것이라는 우려도 항상  존재했었죠. 그리고 진화의 속도차에 대한 문제의식도 새삼스러울 것은 없습니다.

인간의 도덕성은 인간의 과학만큼 빨리 진보하지 못했다. 인류는 자신이 소유한 힘에 걸맞게 정신적으로 충분히 진화하지 못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지 않을 무기를 창조한 일이 없었다.(350쪽)

마찬가지죠. 하지만 이것들을 재미있는 이야기로 엮어내 자신이 하고싶은 말을 맘껏 해낸 능력은 정말 탁월하다고 인정해야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아직도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물질의 대칭에 놓여진 반물질의 생성과정, 그리고 반물질 주위로 형성되는 물질들이 빅뱅의 현상과 무에서 유의 창조를 보여준다고 하는데 정말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물질의 무라는 것이 절대 무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에너지든 빛이든 이것은 이미 유입니다. 게다가 반물질을 탄생시키기 위해 입자 가속기를 돌린다든가 전자를 벗겨낸다든가 하는 모든 일련의 과정 또한 어떤 힘의 전제를 필요로 합니다. 즉 절대적인 무에서의 유의 창조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라는 게죠. 제가 신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과학이 끝끝내 해결하지 못할 이 최초의 그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일 수 있으며, 부처일 수도 있으며, 도 일수도 있으며, 스스로 그러한 자연일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라 이름붙이든 그것이 절대적인 무일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 명칭에 따라 그것을 대하는 방식은 달라지겠죠. 신이라 생각하는 사람과 자연이나 도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우주를, 사물을 이해하는 방식의 차이로 나타나 삶의 태도 또한 달라질 것입니다. 바로 그런 부분이 종교라고 불려질 수도 있을 것이고, 철학이라고도 불려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칸트의 안티노미(이율배반)는 솔직하다고 여겨집니다.

'세계는 시작이 있는가 아니면 시작이 없는가’

‘우주는 공간적으로 무한한가, 아니면 한계가 있는가’

‘사후에 정신은 존속하는가 아니면 존속하지 않는가’

부처 또한 마찬가집니다. 이런 형이상학적 질문에 연연하기 보다는 업의 굴레를 벗어날 실천을 중시했죠. 도가도 그렇습니다. 스스로 그러한 자연이기에 우리는 그저 그 말할 수 없는 도를 말할 필요없이 스스로 그러하게 살아가면 되는 것이 아닐까요?

과학과 종교의 대립보다는 도덕성이라는 진화의 속도에 저는 촛점이 맞혀집니다. 무감동은 죽음이라는 저자의 말은 그래서 중요한 것 같습니다. 도덕성은 의무감이라기 보다는 측은지심과 같은 마음의 움직임이 바탕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일테니까요. 두서없이 써 봤습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icaru 2005-01-23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학과 종교의 대립보다는 도덕성의 진화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읽으셨네요...
정말 거대한 반전이 숨어 있었지요... 재밌었어요..
물론 그 재미란게 읽을 때 뿐이지만요...

하루살이 2005-01-24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학과 종교의 양립구도는 개인적으로 허구의 문제라고 봅니다. 다만 도덕성의 진화는 미래 우리네 삶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겠죠. 반물질의 무기화는 물론이거니와 최근의 급진적 유전공학 발전으로 말미암은 배아줄기세포복제, 체세포 복제 등을 어디까지 허용할 수 있을지, 우리의 도덕이나 철학이 절실한 시점인 것 같습니다. 누군가 나도 모르게 나와 똑같은 사람을 만들고 있다면 얼마나 무서운 일이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