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의 박물학
다이앤 애커먼 지음, 백영미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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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이 공의 세계에서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사유작용 등 감각작용도 없고, 빛깔과 형상. 소리. 냄새. 맛. 감촉. 비감각적 대상인 원리 등 객관대상도 없으며, 시각의 영역도(청각의 영역, 후각의 영역, 미각의 영역도(청각의 영역, 후각의 영역, 미각의 영역, 촉각의 영역) 사유의 영역등 주관작용도 없느니라.

반야심경의 한 대목이다. 현상이 모두 공이라는 이 생각은 자칫 허무주의로 사람을 빠지게 만들련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 개인적으로 이 대목을 인간의 한계점에 대한 고백으로 이해한다. 물론 오독의 소지가 다분하다.

감각의 박물학이라는 리뷰에 난데없이 반야심경이 왜 튀어나왔는지 궁금할 것이다. 그것은 차츰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해결해가기로 하겠다.

책의 저자는 서문에서 클레오파트라의 쾌락에 대한 집착이 아닌 헬렌 켈러와 같은 감각에 대한 유희를 주장하는듯이 보여진다.

죽음과 강렬한 감각은 인간의 공포인 동시에 특권이다(11쪽)

저자는 감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책을 통해 보여주며, 세상을 한껏 즐기라고 말하고 싶어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책은 온통 감각에 대한 찬양으로 넘쳐난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공감각으로 나뉜 각각의 장은 그 감각들이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만드는지 여러가지 예를 들면서 보여준다. 그러나 또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인간의 감각이 갖고 있는 한계점 들이다. 52쪽에서 말하고 있는 매클린토크 효과라는 것도 인간의 감각이 얼마나 믿을 것이 못되는지에 대한 전적인 증거로 보여진다.

기숙사에서 같은 방을 쓰는 여학생들은 때때로 월경의 주기가 룸메이트를 따라가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상대방의 몸에서 풍기는 체취에 영향을 받아 자신의 월경주기를 잃어버리고 상대방에 맞춰가기 때문에 발생하게 된다. 지금은 상식으로 알고 있지만 지구가 자전하면서 내는 소리의 크기가 너무 커서 우리는 듣지 못하고, 또는 너무 작아서 박쥐만이 듣는 소리도 있다. 눈에 보이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자외선과 적외선의 영역이라는 것이 우리가 볼 수 있는 파장의 범위를 벗어났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 뿐이다. 착시 현상은 또 얼마나 많은가?

인간이 외부 환경을 받아들이는 여러가지 감각들이 실은 모순투성이에 잘못된 정보를 들여오기 일쑤다. 따라서 진리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인간의 감각은 어찌보면 믿을만한 것이 못될련지도 모른다. 감각의 절대성을 인정하지 못할뿐더러, 실은 외부 대상 자체들 또한 절대적인 어떤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힘들다. 게다가 이것에 시간마저 개입하기 시작하면 대상은 계속 변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거짓이니, 아무 것도 받아들일 필요가 없을까?

잠시 모든 것을 중단하고 온 몸의 신경을 곤두세워보라. 흘려보냈던 모든 것에 감각을 집중해보자. 실내도 괜찮겠지만 숲 속이라면 더욱 좋을 것이다. 먼저 눈을 감고 소리에 집중해보자. 평소에 들리지 않던 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할 것이다. 마치 꽃이 피어나는 소리마저도 들릴듯한 착각에 빠질련지도 모르겠다. 실내에 있다면 오디오를 틀어놓고 음악에 귀를 기울여도 좋다. 그것들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새삼 느낄수 있을 것이다. 바람에 살랑거리는 촉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며, 어디선가 풍겨오는 꽃냄새에 취할 수 도 있을 것이다. 눈을 뜨면 파란 하늘에 두둥실 떠가는 구름에 취하기도 할 것이며, 나뭇잎의 색깔이 하루하루 어떻게 달라지는지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일상의 모든 것이 다 기쁨으로 충만되는 그 무엇이 될 수 있음을 깨치는 순간, 감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절감한다. 그러나 이 감각이 주는 행복감을 벗어나, 쾌락을 쫓는 순간 향유하던 감각은 이내 덫이 된다. 보다 더 좋은 소리, 보다 더 좋은 색깔에 대한 집착이 사람의 인생을 피폐하게 만들련지도 모른다.

반야심경은 바로 이런 욕에 대한 경계심이라고 보여진다. 있는 그대로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기쁨으로 충만시킬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게 없는 상태. 비록 그것이 거짓된 것이라거나 비틀어져서 들어오는 정보일지라도, 그것이 그렇게 들어온 것임을 알고 있는 상태라면, 그것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진리 또한 내 몸 속에 있음을 깨우치게 되지는 않을까?

지금 이렇게 키보드를 치고 있는 손가락의 감각 하나하나에서 기쁨을 느낀다면 세상은 온통 기쁨 투성이지 않겠는가? 눈이 멀고 귀가 먼 헬렌켈러가 세상을 행복과 기쁨으로 받아들였듯 세상을 대한다면 색즉시공, 공즉시색인 이 세상이 색즉시복福공즉시행幸이 되지 않을까  감히 상상해본다. 내 몸의 감각이 그렇게 소중하며, 그 감각의 대상들이 또한 소중한 것들이니, 어찌 세상의 모든 것을 사랑하지 않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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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년마다 도봉산이나 북한산에선 추락사고가 일어난다. 얼핏 듣기론 일주일인가 한달에 두명 이상은 사망으로 이어진다고 한 것 같다. 이런 사고의 대부분은 위험지대라거나 접근금지라고 표시된 지역에서 최소한의 안전장비도 없이 오르는 경우다. 아마도 이렇게 오르는 사람들은 자신이 죽을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설마 하는 생각에 올랐을 것이다. 죽을 줄 알면서도 라는 것은 오를 때 느끼는 짜릿함의 강도를 극점에까지 끌어다준다. 하지만 이런 극도의 긴장은 아주 짧았을 때만이 그 효과가 극대화된다. 계속되는 긴장은 오히려 죽음에 대한 생각을 무디게 하고, 신경쇠약을 가져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아무도 가보지 못한 남극의 도달불능점을 향해 가고 있다. 그것이 죽음을 건 도박임을 알지만, 이들은 갈수밖에 없다. 극중 송강호가 이야기하듯 그네들은 바로 그런 곳에 갔을 때만이 삶의 희열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왜 그런 곳만을 찾아 떠나가냐고 물어보았자, 멋진 대답을 기대하기는 힘들 것이다. 이것은 마치 마약과 같아, 도저히 멈출 수 없는 흥분을 주기 때문에 점점 더 그 자극의 강도를 높여가야만 한다.

영화는 점점 도달불능점을 향해가는 6명의 남자들을 보여준다. 이것은 죽음에의 항해다. 그래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짜릿함이 주는 기쁨과, 그런 역경을 함께 해쳐가고 있다는 동질감의 극치를 기대했을련지도 모른다. 하지만 죽음은 다가오지 않고, 죽음에의 두려움만 나날이 커져간다. 그래서 어느 순간 죽음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쾌락의 칼날은 무뎌지고, 오히려 그것은 광기로 드러난다. 그러나 영화는 송강호의 광기를 그저 살풀이로 설명하려고 든다. 그런데 또 문제는 살풀이라고 설명하려 들면서 한쪽에다 다른 이유를 덧붙여놓고, 과연 이걸까 저걸까 혼돈시키려 한다는 데 있다. 85년전 영국 탐험대의 일기장, 그리고 아직까지 떠돌고 있는 그들의 영혼이 있음을 암시하면서, 점차 하나둘씩 죽어가는 탐험대들의 죽음에 대해 물음표를 남겨놓는다. 이들의 죽음이 무모한 인간의 도전때문인지, 죽은 자들의 원한인지 영화는 설명해주지 않는다. 그러면 마치, 관객들이 스스로 생각하며, 그 원인에 대해 각자 나름대로 해석해갈 것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불친절함은 불친절을 당하는 대상이 기대했던 친절에 배신당한 충격에 왜? 라는 의문을 품어야 효과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잘못된 불친절은 그 대상에게 오직 분노만을 낳게 만든다. 영화는 오직 분노만을 가져오게 만들었다. 그 분노는 해외 로케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세트를 보는 것마냥 관람시간 내내 눈구경만 해야 함으로써 찾아오는 눈의 피로감이며, 인간이 어떻게 광기를 드러낼 수 있도록 변해가는지 지켜보는 즐거움보다는 느닷없는 광기와 갈등상황의 무미건조함으로 말미암은 지루함으로 인해서이다. 남극일기 첫 장에 쓰여진 인간의 탐욕이 가져다주는 지옥이라는 글자는 인간의 어떤 탐욕을 말하는 것인지조차 알지 못하겠다. 이미 지옥임이 뻔한 도달불능점에서 그것이 지옥인 것은 인간의 탐욕이라고 말함으로써 또 한번 관객을 우롱하고 있다. 송강호의 목표에 대한 집착은 오히려 씻김굿인것처럼 그려놓고 그것이 탐욕이었기에 그곳이 지옥으로 변했다는 설명은 얼토당토않다.

이것저것 마구마구 뒤죽박죽으로 놓여진 그물코들은 벼리가 없기에 재미라는 월척을 잡아채지 못했다. 지루한 영화, 하마터면 잠들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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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해진 세계, 가난해진 사람들
다니엘 코엔 지음, 주명철 옮김 / 시유시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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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5월 30일) 프랑스에서는 유로 헌법이 국민투표에 의해 부결됐다. 프랑스 국민들은 유로헌법이 통과함으로써 유럽이 하나가 되면, 값싼 노동력의 동구권 노동자가 대거 유입됨으로써 그나 저나 높은 실업률이 더욱 높아질 것이라고 우려하는 것 같다. 즉 세계화로 인한 직격탄이 노동자들에게 쏟아짐으로써 선혈이 낭자할듯 하니 국민이 하나되어 세계화를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다수를 지배하고 있는듯한 모습이다. (세계화라는 용어의 정의가 다소 혼란스럽게 다가오는 부분이다. 저자가 말하는 세계화와 현재 논의되고 있는 세계화와는 다소 차이가 있는듯하다.)

저자는 이 책이 쓰여질 당시인 10여년 전부터 이런 생각은 세계화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주장해 왔다. 개인적으로 나 또한 세계화를 거부하는 입장에서 저자의 주장은 상당히 당혹감을 안겨준다. 저자의 주장이 프랑스 국민들에게 어느 정도 이해되어지고, 설득력을 지녔다면, 아마도 이 투표의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대중이라는 것이 과연 정보를 획득하고, 분석하며 이성적 판단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감성적 판단을 하는 것인지는 논외로 하고, 앞으로 계속될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여러 나라들의 국민투표의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도 사뭇 궁금하다. 

아무튼 저자가 대중들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주장과는 정반대로 세상이 향해가고 있긴 하지만, 일단 저자의 주장을 한 번 들어볼만한 값어치는 있을듯하여 계속 읽어나가 보기로 하겠다.

책의 제목 <부유해진 세계, 가난해진 사람들>은 마치 세계화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드러내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저자는 이것이 세계화의 문제는 아니라고 말한다. 세계화가 불평등을 초래하는 것이 아니라, 불평등이 세계화를 초래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원인과 결과가, 실제로는 결과가 원인이고, 원인이 결과인 경우가 있음을 지적하며, 불평등 또한 인과관계의 잘못된 추정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예로는 신석기 인류가 정착을 하게 된 것이 식량부족으로 인한 농경사회로의 진입때문이 아니라, 정착후 종교정신과 맞물려 농경사회로 진입했다는 학설을 내놓고 있다. 정착촌과 곡식의 흔적중 어는 것이 더 오래되었는가 하는 과학적 증거물을 내놓고 있다)

저자는 먼저 전 세계에서 가난한 국가들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분석한다. 아프리카를 예로 들며, 그곳은 여성에 대한 착취, 농촌에 대한 착취, 엘리트 집단의 부정부패로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반면 아시아 4용이 성장한 배경에는 절약의 정신, 투자와 노동을 통한 무역 수출정책이 빛을 발한 것이라고 분석한다. 세계가 아닌 한 국가를 바라보았을 때 10,20년 전 보다 계층간 수입차가 훨씬 벌어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 일반적인 견해와는 다른 생각을 내비치고 있다. 세계화와 3차산업의 발달로 인해 일자리가 줄어들고, 값싼 노동력이 들어오게 됨으러써 선진국의 경우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있다고 하지만, 이것은 착각일 뿐이라는 것이다. 선진국, 여기에서는 프랑스가, 후진국들과의 무역이 전체 무역량의 3%를 겨우 차지할뿐이며, 노동력의 유입또한 그 수준정도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값싼 노동력의 유입이 일자리를 줄어들게 만들다거나, 빈부격차를 크게 한다는 것이 말이 안된다는 것이다.  또한 전체 일자리수도 없어지는것만큼 새로운 일자리가 창출되고 있기 때문에(물론 조금 못 미치기는 하지만) 실업률이 높아질수밖에 없다는 것도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빈부격차와 일자리 부족은 <선별적 짝짓기> 때문에 이루어진다고 저자는 보고 있다. 선별적 짝짓기란 예를 들자면, 조용필이 공연을 할 때 최고의 세션과, 최고의 음향, 최고의 무대팀을 이용해 최고의 공연을 만들어내어, 수익을 창출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즉, 최고는 최고끼리 모여서 자신들의 일을 만들어가고, 나머지는 나머지대로 짝을 지어 일을 해 나간다는 것이다. 최고의 짝들은 나머지 그룹이 자신들의 자리를 넘보지 못하게 만들며, 점차 그 수익의 차이를 벌려간다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예전처럼 하나의 큰 조직이 모든 것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부분부분 쪼개진 것들이 하나로 모여 일을 진행해 나갈 수 있는 생산조건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런 근거로는 마이클 크레머의 오-링 이론을 들고 있다. 원과 같은 연결고리들로 이루어져서 하나의 커다란 생산품을 만드는, 따라서 포드주의는 이제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는 화석이라는 생각이다. 이러한 선별적 짝짓기는 단순히 국가 내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세계로 향하며 이것이 바로 세계화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즉 불평등이 공고화 되고, 이것이 세계로 확대되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불평등을 없애기 위해선 대중들이 정치적 견해를 가지고, 정치적 지도자들 또한 정치적 도덕성을 회복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정치적 견해를 가진 대중들이 정치적 행동을 행하지 않는한, 언젠가는 이런 불평등의 확대가 혁명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것이 저자의 생각인듯 싶다.

저자의 생각들과 근거가 기존의 관념들을 깨뜨리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을 띠워준다는 점에서 책을 상당히 흥미롭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저자가 성장률에 집착하고 있으며, 이러한 성장이 실제적인 생산증대로 인한 부의 창출이 아니라, 세계적 투기 집단의 투기를 통한 단순한 화폐의 창출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점이다. 또한 불평등의 완화라는 생각에만 집착한 나머지, 자본주의 체제의 속성인 끝없는 경쟁을 강요하는 사회체계 자체에 대해서는 어떤 비판도 없어 보인다. 인간적 삶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철학적 고찰없이 일단 커져가는 불평등과 불신의 추세만을 늦춰보자는 미봉책이 아닐까 염려스럽다. 물론 지금 당장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미봉책일지도 모르긴 하지만 말이다. 인간적 삶을 향한 단계적 실천행위로서, 초입에서 이루어져야 할 행동양식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저자의 주장을 무리없이 받아들을수도 있을듯하다.

(세계화나 경제 체제에 대한 깊은 이해없이, 현실에 대한 구체적 돋보기도 들이대지 않은채 오직 꿈만 거창한 망상가의 지껄임이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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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워즈의 마지막 편. 물론 시간의 순서대로라면 3편이 정답이겠지만, 아무튼 이로써 스타워즈라는 영화의 마지막 문이 닫혔다. 스타워즈를 그렇게 재미있게 본 편은 아니지만, 항상 첨단을 달려가는 그래픽에 대한 동경과, 음향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 개봉관을 찾아가는 습관이 어느덧 들어있어 또다시 지켜보게 됐다. 이번에도 몇 천가지의 그래픽 기술이 동원되었다는데, 에피소드 2와 별반 다른 모습을 찾기는 힘들다. 어떻게 보면 그래픽이 보여줄 수 있는 어떤 한계점에 다다른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물론 이런 한계점을 넘어서는 영화들이 꼭 나타나긴 하지만, 이번 에피소드3는 이렇다 할 비약이나 새로움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닌 것같다. 다만 이야기가 완결됨으로써 갖게 되는 스타워즈 시리즈의 전체적인 완성도라는 측면에서 지켜볼만한 구석이 다소 있다.

뭐니뭐니해도 이번 3편이 갖는 매력은 다스베이더가 어떻게 탄생되는가 였을 것이다. 다른 할리우드 영화와는 달리 악한이 태생적 악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극한 선에서 악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다룬다는 점에서 꽤 궁금증을 자아냈다. 전편의 내용을 다소 잊어먹고, 줄거리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있지 않은 상태에서도 영화를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감독이 이미 관객이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를 알고 그것에 충실한 덕분이라 여겨진다.

아나킨이 다스베이더로 변해가는 모습은 한 순간으로 표현된다. 갈등의 모습이 조금 비쳐지다가 일단 자신이 선택한 길로 접어든 이상 더 이상 갈등은 존재하지 않는다.(스포일러가 될 듯 하여 자세하게 언급할 순 없지만) 즉 악으로의 비등점을 넘어선 순간, 다시는 선에로의 갈등이 생겨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소 실망감을 안겨주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그가 그럴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동정과 함께, 일단 선택한 순간 자기변명이 됐든 무엇이 됐든 자신의 행동을 올바르다 생각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것도 다소 이해가 된다.

그런데 오히려 생뚱맞게도 영화의 초점인 다스베이더로의 변신보다는 공화국과 분리주의, 그리고 제다이라는 집단과 제국이라는 또 다른 이야기 얼개가 재미를 더했다. 영화를 보면서 자꾸 장이모우의 <영웅>이 생각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리라. 영웅에서는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서 진시황의 암살을 도모했던 자객들이 모두 그 앞에서 칼을 내려놓는다. 천하가 통일이 되면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는 제국주의적 발상과 힘에 대한 동경을 심어주었던 영웅은, 마치 스타워즈의 시스와 닮아 있었다. 그렇다면 제다이는 아무래도 이연걸과 양조위 등과 같은 자객으로 표현할 수도 있을련지 모르겠다. 물론 시스의 최종 목적이 과연 평화였는지, 권력이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나킨을 유혹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제국적 힘이었던 것만큼은 확실해보인다. 이에 정면대응한 오비완이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반역이라며 아나킨을 비난하는 장면은 <영웅>의 찝찝한 기분을 다소 덜어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포스가 애시당초 선의 측면만 가지고 있었다면 아무 문제도 없었을 것을, 힘은 항상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세상이 오직 선과 악으로만 구별된다면야 아무 문제가 없을테지만 선과 악이 섞여 있고, 때론 선이 악이 되고, 악이 선이 되기도 하며, 선과 악의 구분점이 이동하기도 한다. 따라서 포스라는 초자연적 힘 자체가 빛과 어둠이라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기는 오히려 힘들듯 하다.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사용하며,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는냐가 그 양면성을 드러내 보일뿐인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포스의 힘을 깨우친다는 것은 악으로부터뿐만 아니라 선으로부터서도 한발짝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보기도 한다. 다스베이더로 변신한 아나킨이 오히려 진정한 포스의 힘에 더 근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다만 그는 사랑에 눈이 멀어, 복수심에 불타고, 탐욕에 대한 집착에 얽매여 있어 한단계 도약을 못이루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제다이들은 오히려 이런 측면에서, 즉 자신들이 어둡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한 완전한 이해에 도달하지 못하고, 그저 피하려고만 한다는 점에서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는 유혹의 선상에 놓여져 있는듯이 보인다. 아나킨 또한 바로 그 유혹의 선상에서 한발을 다른 곳으로 옮겼을 뿐일지도.

어찌됐든 운명조차도 거스르고자 하는 힘에 대한 유혹, 그것이 우리를 어디로 흘러가게 할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갑자기 슬퍼진다. 비극은 바로 운명의 장난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아무튼 스타워즈를 아주 좋아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영화는 최초의 3편 즉 루키 쌍둥이들이 어떻게 컸고, 또 아버지인 다스베이더와의 대면이 어떠했는지 다시 한번 보고싶도록 만든다. 아마도 이것은 추억의 힘일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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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어 2005-05-27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꼭 봐야겠다고 벼르고 있으면서도 아직 시간을 내지 못해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말에 꼭 봐야쥐..^^ 제다이들과 영웅의 자객들에 대한 비교, 멋지네요. ^0^
 

5월 18일은 또 다시 지나갔다. 1980년 당시 국민학교 2학년. 광주에 있었지만 기억나는 것은 안타깝게도 아무 것도 없다. 정말로 신기하게도 그 기간동안의 기억은 백지상태다. 대학에 들어와서는 간혹 엉뚱한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 어떤 충격적인 사건으로 말미암아 단기간의 기억만을 잃어버린건 아닌가 하고 말이다. 어머니를 통해서 듣기로는 휴교가 내려진 학교 운동장에서 군인들과 함께 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잘 모르겠다. 내 머릿속에는 1980년 5월이 없으니...

지금 떠올려보건대 국민학교 내내 5월에 대해서 이야기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중학교에 올라가고 나서 친구들끼리 간혹 당시의 기억들을 떠올리며, 마치 자신들이 모험소설 속의 주인공인마냥, 무엇을 보았는지 자랑하느라 떠들썩했던 기억이 있다. 아무래도 이때부터 어느 정도 5월에 대한 이야기들이 사회 속에서 허용되었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싶다.

광주라는 동네는 생각보다 조그맣다. 5.18의 최종 격전지 도청까지 대부분 30분 이내면 걸어서 당도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주요 건물들과 주택단지가 몰려 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아이들의 목격담은 그것이 아이들만의 과장이 섞여들었다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어떤 생생함이 전달됐었다. 한 친구는 도로를 점령하고 달려가는 장갑차 얘기를 했고, 어떤 아이는 자신의 집 담장을 넘어 들어선 대학생을 숨겨준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아리따운 여고생의 잘려진 젖가슴 얘기도 있었으며, 끔찍한 피의 냄새를 떠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나에게는 정말 아무 것도 머리속에서 끄집어낼게 없었다.

광주는 나에게 그저 백지였다. 하지만 서울로 올라와서 사정은 달라졌다. 대학교 면접 때부터 이것을 실감하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자네는 집에서 무슨 신문을 보는가? 한겨례를 봅니다. 그래, 어디보자, 음, 광주출신이군. 대화는 마치 정해놓은 답을 그저 읽어나가는 것처럼 진행됐다. 이 때부터 사실은 광주라는 라벨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엇인가 다른 의미로 다가서고 있다는 걸 알아챘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것을 의식했기에 내가 바라본 5.18은 조금 삐뚤어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경상도에서 올라온 동기나 선후배들과 얘기를 나누다보면 네가 광주 출신이었냐? 난 광주출신이라면 모두 과격한 줄 알았는데... 라거나 마치 북한사람들을 머리에 뿔난 도깨비로 교육시켰던 반공교육과 똑같이 광주 사람들도 괴물, 도깨비로 생각한(정말이다. 이렇게 생각한 후배들도 있었다) 사람들 속에서 살기도 했다. 지금도 경상도에 살고 계시는 우리네 아버지 세대들은 김대중 씨를 빨갱이라 부르길 서슴지 않고, 전라도를 의혹의 눈길로 바라보고 계신다. 5.18은 그래서 민주화의 진보이기 전에, 분단이 가져다주는 슬픔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개인적으로 부닥쳤던 사람들로부터 비껴가기 위해서였는지는 모르나, 맨 처음 영웅으로 비쳤던 광주의 모습이 점차 나의 가슴 속에서 탈색해가기 시작했다. 특히 군대를 다녀온 이후 유격훈련이라는 것을 받고나서는 광주시민들의 분노가 다르게 다가오기도 했다. 유격훈련 중엔 동지애를 키운다는 이름하에 편을 갈라서 진흙 웅덩이에서 적을 밀어내는 잠깐의 휴식같은 훈련이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놀이 아닌 놀이는 사람의 이성을 마비시킨다. 좀전까지 옆에서 같이 땀 흘리던 동료가 적으로 편이 갈린 순간 머릿속은 온통 그들을 밀어내야 할 하나의 물건일뿐으로 여긴다. 오직 우리 편을 위해 모든 것이 동원된다. 젖먹던 힘까지 알아서 쥐어짜 나오게 된다. 아마도 진 편에 대한 가혹한 얼차려를 피하기 위한 본능이 작동된 탓일지도 모른다.

나는 한때 광주시민들의 항거가 이와 비슷한 경우가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총탄아래 쓰러져가는 옆사람을 보면서 점차 이성을 잃고, 오직 적과 아군으로 나뉜 속에서 아군을 지키고 적을 무너뜨리겠다는 본능만으로 뭉쳐진 집단으로 말이다. 그것을 어떤 숭고함으로 미화시킬 필요는 없는것 아니냐는 자조를 가슴에 품고 있었다. 사람들이 아직도 광주를 무서워하고 있다는 순진한 생각에 사로잡혀서 말이다.

하지만 이제 점차 나이를 먹어가면서, 내가 아직도 광주를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크게 들어차기 시작했다. 광주 사람들이 왜 그렇게 똘똘 뭉쳤을수밖에 없었는가를 이제는 어렴풋이 알 수 있을것 같다. 우리가 이렇게 버티고 있으면, 민주주의 국가의 대표격인 미국이 도와줄 것이라는 희망, 우리나라 곳곳의 지식인과 민중들이 함께 호응해 올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생존이나 분노의 본능이라기 보다는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으로 그렇게 저항했음을 비로소 깨우친다. 마지막 도청에서의 항거는 스스로 선택한 죽음이었음을, 그리고 그 죽음은 열려진 생의 길을 저버리고 택한 숭고한 길이었음을 비로소 알게됐다. 끝까지 버텨보겠다는 오기나, 동지의 죽음을 같이하겠다는 맹목적 동지애를 뛰어넘은 오직 민주주의를 지켜내겠다는 경건함에서 비롯된 죽음이었음을.

그런데 난 왜 그토록 그들이 숭고한 영웅으로 남기보다는 본능에, 감정에 움직이는 인간으로 보여지길 간절히 원했던가? 그리고 왜 이제서야 내가 보이지 않는 두려움의 껍데기를 벗고 그들을 제대로 지켜볼 수 있게된 걸까? 세상이 변해서일까? 내가 변한 것일까?

한편으론 자랑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론 떨쳐버리고 싶었던 광주라는 이름을 이제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듯 하다. 임을 위한 행진곡의 마지막 구절이 비로소 절절하게 다가온다.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그래서 나의 부끄러움은 더욱 커져간다. 이제 이 부끄러움을 어찌 벗으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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