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8일은 또 다시 지나갔다. 1980년 당시 국민학교 2학년. 광주에 있었지만 기억나는 것은 안타깝게도 아무 것도 없다. 정말로 신기하게도 그 기간동안의 기억은 백지상태다. 대학에 들어와서는 간혹 엉뚱한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 어떤 충격적인 사건으로 말미암아 단기간의 기억만을 잃어버린건 아닌가 하고 말이다. 어머니를 통해서 듣기로는 휴교가 내려진 학교 운동장에서 군인들과 함께 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잘 모르겠다. 내 머릿속에는 1980년 5월이 없으니...

지금 떠올려보건대 국민학교 내내 5월에 대해서 이야기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중학교에 올라가고 나서 친구들끼리 간혹 당시의 기억들을 떠올리며, 마치 자신들이 모험소설 속의 주인공인마냥, 무엇을 보았는지 자랑하느라 떠들썩했던 기억이 있다. 아무래도 이때부터 어느 정도 5월에 대한 이야기들이 사회 속에서 허용되었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싶다.

광주라는 동네는 생각보다 조그맣다. 5.18의 최종 격전지 도청까지 대부분 30분 이내면 걸어서 당도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주요 건물들과 주택단지가 몰려 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아이들의 목격담은 그것이 아이들만의 과장이 섞여들었다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어떤 생생함이 전달됐었다. 한 친구는 도로를 점령하고 달려가는 장갑차 얘기를 했고, 어떤 아이는 자신의 집 담장을 넘어 들어선 대학생을 숨겨준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아리따운 여고생의 잘려진 젖가슴 얘기도 있었으며, 끔찍한 피의 냄새를 떠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나에게는 정말 아무 것도 머리속에서 끄집어낼게 없었다.

광주는 나에게 그저 백지였다. 하지만 서울로 올라와서 사정은 달라졌다. 대학교 면접 때부터 이것을 실감하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자네는 집에서 무슨 신문을 보는가? 한겨례를 봅니다. 그래, 어디보자, 음, 광주출신이군. 대화는 마치 정해놓은 답을 그저 읽어나가는 것처럼 진행됐다. 이 때부터 사실은 광주라는 라벨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엇인가 다른 의미로 다가서고 있다는 걸 알아챘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것을 의식했기에 내가 바라본 5.18은 조금 삐뚤어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경상도에서 올라온 동기나 선후배들과 얘기를 나누다보면 네가 광주 출신이었냐? 난 광주출신이라면 모두 과격한 줄 알았는데... 라거나 마치 북한사람들을 머리에 뿔난 도깨비로 교육시켰던 반공교육과 똑같이 광주 사람들도 괴물, 도깨비로 생각한(정말이다. 이렇게 생각한 후배들도 있었다) 사람들 속에서 살기도 했다. 지금도 경상도에 살고 계시는 우리네 아버지 세대들은 김대중 씨를 빨갱이라 부르길 서슴지 않고, 전라도를 의혹의 눈길로 바라보고 계신다. 5.18은 그래서 민주화의 진보이기 전에, 분단이 가져다주는 슬픔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개인적으로 부닥쳤던 사람들로부터 비껴가기 위해서였는지는 모르나, 맨 처음 영웅으로 비쳤던 광주의 모습이 점차 나의 가슴 속에서 탈색해가기 시작했다. 특히 군대를 다녀온 이후 유격훈련이라는 것을 받고나서는 광주시민들의 분노가 다르게 다가오기도 했다. 유격훈련 중엔 동지애를 키운다는 이름하에 편을 갈라서 진흙 웅덩이에서 적을 밀어내는 잠깐의 휴식같은 훈련이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놀이 아닌 놀이는 사람의 이성을 마비시킨다. 좀전까지 옆에서 같이 땀 흘리던 동료가 적으로 편이 갈린 순간 머릿속은 온통 그들을 밀어내야 할 하나의 물건일뿐으로 여긴다. 오직 우리 편을 위해 모든 것이 동원된다. 젖먹던 힘까지 알아서 쥐어짜 나오게 된다. 아마도 진 편에 대한 가혹한 얼차려를 피하기 위한 본능이 작동된 탓일지도 모른다.

나는 한때 광주시민들의 항거가 이와 비슷한 경우가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총탄아래 쓰러져가는 옆사람을 보면서 점차 이성을 잃고, 오직 적과 아군으로 나뉜 속에서 아군을 지키고 적을 무너뜨리겠다는 본능만으로 뭉쳐진 집단으로 말이다. 그것을 어떤 숭고함으로 미화시킬 필요는 없는것 아니냐는 자조를 가슴에 품고 있었다. 사람들이 아직도 광주를 무서워하고 있다는 순진한 생각에 사로잡혀서 말이다.

하지만 이제 점차 나이를 먹어가면서, 내가 아직도 광주를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크게 들어차기 시작했다. 광주 사람들이 왜 그렇게 똘똘 뭉쳤을수밖에 없었는가를 이제는 어렴풋이 알 수 있을것 같다. 우리가 이렇게 버티고 있으면, 민주주의 국가의 대표격인 미국이 도와줄 것이라는 희망, 우리나라 곳곳의 지식인과 민중들이 함께 호응해 올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생존이나 분노의 본능이라기 보다는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으로 그렇게 저항했음을 비로소 깨우친다. 마지막 도청에서의 항거는 스스로 선택한 죽음이었음을, 그리고 그 죽음은 열려진 생의 길을 저버리고 택한 숭고한 길이었음을 비로소 알게됐다. 끝까지 버텨보겠다는 오기나, 동지의 죽음을 같이하겠다는 맹목적 동지애를 뛰어넘은 오직 민주주의를 지켜내겠다는 경건함에서 비롯된 죽음이었음을.

그런데 난 왜 그토록 그들이 숭고한 영웅으로 남기보다는 본능에, 감정에 움직이는 인간으로 보여지길 간절히 원했던가? 그리고 왜 이제서야 내가 보이지 않는 두려움의 껍데기를 벗고 그들을 제대로 지켜볼 수 있게된 걸까? 세상이 변해서일까? 내가 변한 것일까?

한편으론 자랑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론 떨쳐버리고 싶었던 광주라는 이름을 이제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듯 하다. 임을 위한 행진곡의 마지막 구절이 비로소 절절하게 다가온다.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그래서 나의 부끄러움은 더욱 커져간다. 이제 이 부끄러움을 어찌 벗으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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