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의 목적은 무엇일까?라고 생각하면서 영화를 보진 않았다. 제목이라는 것은 영화의 전체 맥락을 설명해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영화를 이해하는데 방해물로 작동되기도 한다. 그래서 나의 영화보기는 영화를 보기 전과 본 후에만 영화제목을 머릿속에 남겨둘뿐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기억 속에서 지워버린다.

이 영화는 홍보전략으로서도 연애의 목적은 무엇인가에 대한 다양한 사람들의 서로 다른 정의들을 내세웠다. 그러나 영화를 본 느낌은 연애의 목적은 무엇일까에 대한 궁금증이나 답을 구하려하기 보다는 도대체 왜 연애가 이렇게도 힘든 것일까?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영화는 굉장히 노골적인 대화들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런 노골적인 표현들 때문에 영화의 질이 떨어진다거나 고개를 돌려버리고 싶다고는 평가될 수 없다. 솔직한 감정의 표현과 연애의 진행과정이 잘 녹아들어가 있으면서 남녀가 서로 끌고 당기는 과정이 담겨 있어 오히려 맛깔스럽다. 더군다나 생각지도 못한 반전이 있으니 이건 덤이지 않겠는가? 좀 아쉽다면은 그런 반전을 끝까지 밀고 나가지 못하고 사랑과 연애에 대한 신화적 힘에 굴복해버린 결말이라고 할까? 

그럼,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비애감을 이야기해보자. 이렇다할 연애 한번 못해본 사람으로서 연애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를 하려다보니 조금 낯간지럽다. (아~이런 현실이 오히려 나에겐 비극이다) 남녀가 만나 좋아하는 감정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사건(?)이다. 그런데 세상은 그렇게 감정대로 흘러가도록 놔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문제는 발생한다. 즉 서로 좋아하면 다른 모든 것은 아무 상관이 없다면야 좋겠지만 사회라는 것 속에서 그 감정은 항상 주위와 어떤 관계를 형성할 수밖에 없다. (불륜이라는 것도 결혼제도라는 것이 없다면 성립되지 않을 사랑의 감정이지 않겠는가?) 둘만 존재한다면 무슨 상관이랴만 남녀는 각자의 사회적 위치에서 만나는 것이고, 그 위치가 바로 사랑의 장애물이 된다. 더군다나 사랑이라는 감정은 호르몬의 작용으로 길어야 2년반 정도라니...(영화 속에서는 3개월이냐 3년 이냐로 다툰다)

감정에 충실하다보면 실제로는 우리가 사랑이라는 말하는 것은 항시 한시적이 되고, 또 둘이 똑같이 생겼다 똑같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니, 꽤 복잡해지겠다. (사랑의 감정이 한명이 아니라 이사람 저사람에게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난다면 어떡하겠는가?) 즉, 둘만의 사랑이라는 것도 그리 간단치만은 않은 문제인 것이다. 아무튼 영화 속에서 보여지는 사랑 속에서는 둘만의 문제로 끝나지지 않는다. 조교와 학생의 사랑, 선생과 교생의 사랑은 더군다나 사회적 위치에서 어떤 서열감을 드러내고 있어 더욱 복잡해진다. 즉, 사랑과 함께 힘이 작용하는 균열의 틈이 보인다는 것이다. 둘만의 사랑에서 보이는 틈이 아니라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틈으로 인해 결국 힘의 역학관계로 빠져들게 된다. 그래서 사랑은 끝내 힘에 굴복해 아름다운 종말을 고하지 못하고 처참해진다.

그래서 이 영화는 연애의 목적을 말하기 보다는 연애의 힘듬을 말하는 것이며, 바로 그 힘들다는 것으로 인하여 연애의 목적은 아무것도 아니거나 그 어느 것도 대체할 수 없는 무엇이 되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힘든 연애를 해야만 할 이유는 없을테니까 말이다. 따라서 아무 것도 아닌 것에 또는 세상의 모든 것에 모험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은 연애가 아니라 결혼을 하는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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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06-06 2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귀여운 박해일.. 능글맞은 그 표정이 생각나요..

하루살이 2006-06-07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기대되는 배우죠.
 

EIDF 프로그램중 사토야마;물의 정원이라는 작품을 보았다. 일본 비와호 근처의 마을을 배경으로 80대 어부로 살아가고 있는 상고로의 1년 간 삶을 보여주고 있다. 자연의 일부로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답게 그려지고 있어 52분 내내 눈이 즐거웠다.

자연의 순환이라고 할 때 대부분 땅을 예로 든다. 똥돼지와 같이 사람의 배설물이나 남은 음식물을 동물이 먹고 그 배설물은 다시 땅에 뿌려져 식물들에게로 돌아가고 사람은 그 식물의 수확을 획득하는 과정 속에서 엔트로피는 증가되지 않은채 사람과 자연이 서로 순환하며 풍족하게 살아가고 있는 모습들 말이다. 물의 정원은 땅의 순환이 아니라 물의 순환을 보여준다. 각 가정마다 연결된 수로, 그리고 수로 안에 관상용으로 기르는 잉어들. 이 잉어와 망둥이 같은 생물들은 가정에서 버려지는 음식찌꺼기를 처리해주는 자연 정화물이다. 이렇게 깨끗하게 걸러진 물은 비와호로 흘러가고 사람들은 그곳에서 풍족한 수산물을 얻는다. 대량으로 포획하지 않고 적당하게 잡아낸 물고기, 그리고 왜가리나 솔개와 나누어 먹는 풍요로움은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복잡하고 시시각각 변해가는 도시인이 바라보기에는 다소 무료할 수도 있겠지만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어른들의 미소 속에서 삶이란 무엇인지 곰곰히 생각하게 만든다. 특히 카메라는 육지와 물을 자유자재로 오가며 그 속에 살아가고 있는 생물들을 아주 가깝게 보여주고 있어 재미도 만만치 않다.

그런데 다큐가 끝나고 감독과의 대화시간에 밝혀진 이야기지만 아름다운 영상 속에서는 다소 자연과 거리가 먼 인간의 손길이 들어가 있었다. 여름이 끝나는 것을 알리는 불꽃놀이가 꼭 인간만이 바라보는 것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에 물위로 올라선 개구리의 눈망을에 비친 불꽃을 보여주는 부분은 환상적이다. 그런데 이 장면은 분명 CG가 아닌 실사이지만, 그 불꽃이 사람이 바라본 불꽃과 같지 않음을 시사하고(편집이 갖는 힘이란 여기서 드러나는데, 이 다큐에서는 개구리의 시선과 사람의 시선이 일치하듯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그 개구리가 사람의 손에 3개월동안 길러진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뱀이 망둥어를 잡아먹는 장면 또한 사람이 키운 뱀을 이용해서 담아냈다.

이 이야기를 듣고서 다시 물의 정원을 돌이켜보니 뱀이 나오는 장면은 그다지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되어지진 않는다. 그저 흥미거리고 내세운 장면을 위해 인공이 가미된다는 점에서 다소 불편한 기분을 느낀다. 개구리가 바라보는 불꽃놀이 장면은 섣불리 판단을 내리기가 어렵다. 다큐의 진행상 그리고 그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꼭은 아니라 하더라도 상당히 필요한 부분인듯 싶다. 그렇다고 해서 자연다큐에 인공적인 가감이 있어야 하는지는 의문이 간다.

인간이 자연의 일부로서 아름답게 살아간다는 것이 자연에 어떤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자연의 순환을 거스르지 않는 삶은 인공 그 자체를 완전히 거부하는 것도 물론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런 모습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순수함을 잃는 것은 옳은 일일까?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인위는 어디까지 허용할 수 있단 말인가? 개인적으로 효과의 극대화를 위한 작위성은 실제 자연이나 인간의 삶을 오역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지양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인위적 아름다움이 빠져 혹시라도 재미가 반감되어져 사람들이 보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는냐고 반문한다면, 글쎄 아직 그런 질문에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상과 현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커다란 벽이 존재하는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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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핑하기 위해 태어났다 - 텔레토비에서 해피밀까지, 키즈 산업은 어떻게 아이들을 지배하게 되었나
줄리엣 B. 쇼어 지음, 정준희 옮김 / 해냄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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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아이는 커녕 결혼도 하지 않은 내가 이 책에 관심을 갖게된 것은 무엇때문일까? 아마도 스트레스를 간혹 대형할인마트에서 먹을것 사들이는 재미로 푸는 나 자신에 대해 한심해하던 것을 떠올렸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물론 이 책은 표지의 사진이 보여주듯 키즈마케팅을 중심으로 쓰여져 있다. 하지만 쇼핑중독의 문제가 꼭 어린이들만의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한번쯤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이 책이 전체 연령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어린이만을 집중적으로 다룬 이유는 아마도 <유년기의 자연화>라는 측면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인듯 싶다. 발달이론 중 하나인 <토들러 단계>에서 자연화란 사회적으로 습득된 특징이 인간의 본성처럼 여겨지는 상황을 의미한다. 즉 현대사회에서 아이들의 소비욕은 타고난 본성으로 간주되고 있다.(65쪽)

그러나 사실 소비라는 것은 본성이 아니다. 하지만 본성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으면서도, 자본주의에 편입되어 어렸을적부터 훈련되어져 자라는 아이들에게 그것은 사회적 문화적 교육에 의한 것이라고 누가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소비는 특히 영상매체를 통해 이루어지는 마케팅의 그물망에서 벗어나지 못해 그 욕구가 커지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텔레비전을 장시간 시청한 사람들일수록 지출이 높고 저축이 낮다는 통계(95쪽)를 통해서 유추해볼 수 있다. 텔레비전속에 비처지는 간접광고와 직접광고는 영아들이 광고와 프로그램과의 차이점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트윈세대에게는 끝없이 그 욕구를 부추긴다는 점에서, 단순히 어른들의 솔선수범으로 낭비를 줄인다거나, 불량식품이나 장난감으로부터 도망칠 수는 없다는 것에 현실의 문제점이 있다. 즉 아이들은 <조르기>를 통해서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하고, 어른들은 그 조르기를 이겨내지 못하고 아이들에게 항복하기 마련인 것이다.

소비욕구가 증대하는 것, 즉 소비문화 심취가 위험한 것은 우울증, 불안증, 자부심 저하, 심신증의 중대한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가정의 경제적 형편과 텔레비전 시청 시간, 소비문화와 부모 자식간의 관계, 심리적 복지의 문제는 단순한 연관관계가 아니라, 인과관계라는 점에서 눈여겨보아야 한다. 즉 소비문화 심취는 우울하고 불안하고 자부심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소비문화에 심취함으로써 우울하고 불안하고 자부심이 부족해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이 글의 처음으로 돌아가 가끔 스트레스를 쇼핑으로 푼다는 나의 생각은 어찌보면 그 인과관계가 거꾸로인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할듯싶다. 쇼핑으로 만족하기 보다는 오히려 점차 그 심리적 불만족의 정도가 심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염두해두어야만 할지도...

이런 심리적 복지 측면에서 만족과 행복의 열쇠는 보다 많이 획득하는 것보다 보다 적게 바라는 데 있다.(242쪽) 문제는 마케터들이 미디어를 통해 보다 많이 획득하라고 부추긴다는데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런 물질주의적 가치관에 물들어 강력히 찬성하게 되고, 그 정도가 강할 수록 삶의 질은 낮아질 가능성이 높아진다.(243쪽) 또한 이런 물질주의적 가치관을 지닌 청소년들이 음주와 흡연, 마약 복용에 보다 쉽게 빠진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결과들 또한 많이 나타나고 있다. 또한 이것이 더욱 큰 문제점으로 다가올 수 있는 것은 물질주의와 무능력이 서로 악순환 관계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244쪽)

이런 문제점들은 직접 상품 마케팅을 담당하는 전문가들 또한 인식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런 일이 멈추지 않고 계속되는 것은 업계의 도덕적 무책임에 있다.(261쪽) 광고대행사들은 기업고객들에게 정면으로 맞서지 못하고, 기업들도 도덕적 책임감이 부족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매출을 올려야 한다는 중압감은 어린이들의 이익에 기여하고자 하는 바람을 항상 압도하고 있다.(262쪽)

즉,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들의 생계를 위해 필요없는, 또는 해가 되는 제품을 생산하는 업체와, 또한 그것들의 불필요성을 잘 알지만 아이들에게 팔려나가도록 아이들을 이용하는 마케터들을 양산하는 현실에서 진정 우리의 아이들이 행복한 아이들로 자라도록 돕고 싶다면 우리는 지금 당장 텔레비전을 꺼야만 한다. 특히 텔레비전이 위험한 것은 광고를 할 수 있는 독점적 대기업들만이 조작된 이미지로 아이들을 유혹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또한 정보의 홍수 속에 대부분을 차지하는 광고의 물결을 거부하고, 아이들의 일상속에 파고 들어가는 마케팅의 접근을 금지시켜야 한다. 현재 미국처럼 심각하진 않다 하더라도 학교내의 자판기나 학원 등에서 쏟아지는 홍보물로부터 자유롭도록 정책을 만들어가야 하며, 음식이나 장난감 등 잘못된 광고에 대한 제재를 가하도록 압력을 줘야한다. 그리고 제품에 대한 비밀이 없는 공개된 정보를 요구해야 한다. EBS 기획으로 꾸며진 텔레비전과 인간에 대한 기록에서 일주일간 텔레비전을 끄고 살았던 5개국 50가정들이 모두 행복지수가 높아지고, 가족들간의 시간이 많아져 즐거웠다고 말하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실험을 위해 텔레비전을 끄고 살았지만 앞으로도 텔레비전 없이 살고 싶다는 그네들의 소망을 우리도 명심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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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5-09-05 1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하루살이 님을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먹을 것을 사들이면서 스트레스를 푼다는 부분에서 많이 놀랐다는 ^^

지난 주 다큐멘타리페스티벌 프로 중에서 텔레비전 혁명인가 뭐 그런 게 있었는데요... 보셨어요... 그 중에...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지의 오지마을에 텔레비전을 설치하면서 마을 사람들의 변화를 보는 것이었어요. 주로...그 날은 텔레비전의 긍정적인 면을 부각해서 보여 주더군요...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고, 다른 나라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고, 드라마는 너무 재밌고 이런 식으로 포커를 맞추던데... 사실...그들이 텔레비전 보면서 그런 생각은 왜 안 들겠어요... 저렇게 멋지게 옷을 입고 근사한 도심지에서 살고 싶다. 이뻐지고 싶고 멋진 사람을 만나고 싶다. 뭐 이런 생각이요...

하루살이 2005-09-05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저를 잘 모르는데... 흐흑, 저도 가끔 스트레스 풀려고 먹고 있는 제모습에 놀랍니다.
아~그리고 텔레비전이 가져오는 동경이라는 측면에서 <오래된 미래>라는 책이 떠오르네요. 라다르크 사람들이 서구 여행객들과 텔레비전 속에 비쳐진 문명을 보게됨으로써 겪게되는 변화의 모습이 그려져 있죠. 이 책은 그 변화의 과정을 부정적으로 그리고 있답니다.(읽으셨는지도 모를텐데 괜히 아는척 하고 있는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
 
우리 문화의 수수께끼 1
주강현 / 한겨레출판 / 199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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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책을 읽고자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곰곰히 생각해본다. 책장을 다 덮고나서 한참을 아쉬워했다. 원래 생각했던 무엇인가를 만족할만큼 얻지 못한 탓이리라. 그런데 도대체 난 무엇을 기대했던 것이었을까?

금줄없이 태어난 세대를 위해 쓰여졌다는 부제가 해답의 실마리를 주는 것 같았다. 나는 비록 금줄없이 태어나긴 했지만 그래도 금줄이란 것을 주위에서 간혹 보면서 자란 세대다. 그래서 어떤 숨겨진, 즉 책 제목의 수수께끼가 말하고 있는 어떤 비의나 감추어진 문화양식들을 책에서 찾아내기를 내심 기대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만약 내가 서울에서 자라고 조금 더 젊은 세대였다면 책의 내용들이 보다 더 새삼스럽게 다가왔을련지도. 하지만 그렇다면 오히려 너무 생소해 현실과 괴리감을 느끼지는 않았을까 괜한 걱정을 해보기도 한다.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굿, 남근과 여근의 풍속, 금줄, 미륵, 흰 옷, 개고기, 숫자 3, 돌하르방, 솟대, 서낭당, 광대, 구멍, 똥돼지 등은 주위에서 어느 정도 보아왔고, 관련된 이야기들도 그럭저럭 들어오던 터라 낯익다. 실은 우리의 문화가 낯익는게 타당한데, 이러한 것들이 점차 사라진다는 점에서 이 책이 쓰여진 이유가 될 터이다. 그러나 무턱대고 사라지는 것에 대한 향수와 복원을 주장할 수는 없다. 세월의 부대낌 속에서 부침은 있게 마련이지 않던가? 따라서 책에서 펼쳐지는 내용은 사라져가는 우리의 문화가 일상에서 뜻하는 바가 무엇이며, 그것이 사라지는 것이 왜 그토록 안타까운지에 대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너무 익숙한 사람이기 ‹š문이었을까? 일상에서 뜻한바는 알겠지만 안타까워해야 할 이유에 대해서는 크게 다가서지 못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문화들이 사라지는 과정이 안타깝고 분명 지켜내야 할 유산이 있다는 것도 확신하지만 말이다. 즉 바로 이 부분이 책을 덮고 나서 느꼈던 막연한 실망감을 불러온 것 같다.

그러나 책장을 덮고 나서도 한참 머릿속에 남겨져 있는 단어 하나가 있다. 바로 침향이다. 수백년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바다에서 떠오르는 나무들. 그 나무가 떠오를 때 세상은 변해있으리라는 기대. 미륵과 함께 현실을 견뎌내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고자 했던 민초들의 소원이 담긴 그 침향들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직도 찾지 못한 침향터를 알려주는 비목들이 한반도 곳곳에 감추어져 있을 것을 생각하면 흥분이 된다. 그리고 머지않은 어느 순간 그 침향이 바다 위로 떠오를 것을 상상해본다. 아직도 세상은 침향을 묻어야 하고, 그 침향이 떠오르기를 기대해야 할만큼 나아갈 길이 멀다. 다만 남몰래 마음 속으로만 간직하던 변혁의 꿈을 이제는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침향의 꿈도 조금은 퇴색되어져 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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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5-09-05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삭혀진 글맛이 나네요~

주강현 하면..
왼손과 오른손이라는 책 생각만... 제가 왼손잡이라..뭐 특별한 이야기가 나올까 싶어서... 그렇지만...흠..내용이 잘 기억이 안 나는 걸로 보아선.. 읽기에 실패했던듯 합니다.

하루살이 2005-09-05 2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내용이 잘 기억안나는게 주강현 씨 글의 특징일지도...(농담? 혹은 진실?)^^
 
당신 인생의 이야기 행복한책읽기 작가선집 1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수학이나  과학이 현실과 멀어진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사는데 지장 없는데 무엇하러 배우는지 모르겠다는 불평도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다. 그냥 잔뜩 숫자가 나열되어 있고, 뜻모를 암호같은 공식만 가득할 뿐 그것이 개인의 삶을 영위하는데 어떤 쓸모가 있을지 도저히 알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원자폭탄이 떨어짐으로 인해 세계대전이 종말을 고하고, 그 이후 세계권력의 재편이나 힘의 싸움에서 핵은 결코 현실과 멀어진 적은 없다. 지금도 그 핵을 에너지로 쓸지, 무기로 쓸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끌고 당기는 국가간의 게임을 하고 있으며 이것은 우리의 생명과도 직결되는 문제다. 그 폭탄의 괴력을 알아챈 것은 물리학이었으며, 따라서 내가 직접 손으로 느끼고 눈으로 보지 않을지라도 수학이나 과학은 삶의 중요한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은 명백하다. 컴퓨터 없는 삶을 상상하기도 힘든 요즘엔 더욱 그 알듯 모를듯한 공식들이 전혀 쓸모없는 어떤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우리의 생활패턴 자체를 완전히 뒤바뀌도록 만드는 그런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런 수학, 과학의 근원적인 힘인 것이다.

테드 창의 단편집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과학철학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  SF라고만 규정하기에는 무리가 따른 작품도 있어 판타지와 SF가 섞여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듯 싶다. 1+1=2라는 가장 상식적인 생각이 무너진다면 과연 이 세상이 어떻게 보일까? 세상을 구성하는 기본 원리라고 생각했던 것들의 토대가 무너지는 순간 우리는 기우뚱거릴수밖에 없다. 솔직히 나는 그것이 무너지는 바로 그 순간을 상상하는 것조차 힘들다. 하지만 테드 창은 바로 그런 순간들을 포착해 우리의 삶이 어떻게 바뀔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흥미롭다.

특히 페르마의 최단 시간의 원리를 소개하고 있는 <네 인생의 이야기>에서는 우리의 사고가 시간적 흐름 속에서만 가능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기발한 착상을 하고 있다. 즉, 나의 행동이 어떤 원인을 거쳐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결과가 나와 있는 원인적 행동을 취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빛이 물을 통과할때 굴절을 하는데 그 굴절한 빛이 도달한 최종 목적지에 도달하는데 걸린 시간이 최소가 되는 것만큼 굴절하게 된다는 것이다. 빛이 그대로 직진하면 빠르지 않을까 생각하겠지만 물 속에서 빛의 속도는 느려지기 때문에 물 속에서의 거리가 어느 정도 더 짧았을 때 전체 시간이 짧아질 수 있으므로 굴절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나에게 있어 운명론을 떠올리게 만든다. 순차적인 경로를 통한 인생의 흐름이 아니라 이미 도달점이 정해져 있고, 그 도달점을 향한 길마저 정해져 있다는 것. 그 길이 바로 운명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따라서 오히려 빛의 성질인 페르마의 원리대로 살아가지 않는 우리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이미 운명론과는 거리를 둔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할수도 있다는 엉뚱한 생각을 해보게 만든다.

이 외에도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소고>나 <지옥은 신의 부재>같은 경우는 전혀 딱딱하지 않으면서도 굉장히 유쾌한 즐거움을 준다. 특히 <외모...>는 다큐멘터리 기법을 이용해 똑같은 현상에 대해 다양한 사람들의 인터뷰를 옮겨적듯이 써내려가는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사람들의 입장차를 담아내고 있는 것에 감탄하게 된다. 외모에 대한 감상을 없애주는 기계를 착용할 것인지 말것인지에 대한 사람들의 의견들은 어떤 한쪽에 치우침없이 서술하면서도 우리네 사회가 어떻게 잘못 굴러가고 있는지를 통렬하게 보여주고 있다. <라쇼몽>이나 <오!수정>이 기억의 다름을 이야기하고 있긴 하지만 이것 또한 사람들의 처지에 따라 그것을 기억하는 모양새가 달라지는 것에서 재미를 느끼듯, <외모...>가 비록 기억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 입장차가 한 현상을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다양한지, 정말 흥미진진하다.

세상에 굳건하게 버티고 서 있는 사고의 기틀을(그 사고를 규정하는 언어에 대한 소설이 많은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리라) 의심하고 깨뜨려보는 테드 창의 이야기들은 정말 놀랍고 재미있다. 그리고, 그 깨어진 사고의 틀 속에서 현실에 대한 깨우침을 전해준다는 점에서 테드 창은 항상 다음 이야기를 기대하는 작가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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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5-09-16 0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도 무쟈게 사보고 싶네요....아..책이 탑을 그것도 여러개의 탑을 만들어 가고 있는데..(이런 덴장...!)

물만두 2005-08-30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다리게 만드는 매력이 있죠^^

하루살이 2005-08-30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카루님의 탑이 무너지는 순간을 고대하며...
아~그런데 얼마나 기다려야하죠 물만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