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일상으로 스며든 시대이다. 알고리즘이라는 단어가 일상용어가 되고, 네비게이션 없이는 운전할 수 없을 정도의 세상이 되었다. 이미 AI는 생활 속으로 들어와 있었지만, 챗 GPT의 발표 이후 그 확장성에 놀라고 있는 중이다.


인공지능은 이제 범용인공지능의 발전으로 향하고, 이는 로봇과 합쳐져 소위 우리가 상상했던 사람과 닮은 로봇을 곁에 두고 살아갈 날도 머지 않은 듯하다. 그리고 이런 AI의 발달은 영화 <터미네이터>류의 상상을 자극하며, AI가 인간을 지배하는 세상이 올 줄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인류를 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지상낙원과 같은 두 극단적 미래를 그려내고 있다. 


아마도 인공지능을 조력자로 하며 공존하는 시대로 흐르지 않을까 싶은 것이 개인적 예상이지만, 그러기 위해선 넘어야 할 산들이 많다. 


가장 먼저 생각해두어야 할 점은 개발자를 포함해 그 누구도 현재의 인공지능이 어떻게 그 결과물을 내놓는지, 그 과정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대부분 무지에서 비롯되는데, 인공지능의 미래를 어둡게 바라보는 주 원인은 바로 이 산출 과정의 무지일 것이다. 그로 인해 인공지능이 어떤 선택을 할지 예측 불가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인공지능을 활용하는 데에는 엄격한 기준이 필요하다. 우리가 현재 대량 살상무기를 가지고 있지만, 그중 화학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는데 합의하고, 전쟁과 전투에서 화학무기를 사용하지 않는 것처럼, 인공지능의 사용에 있어서 우리에게 치명적인 분야의 사용은 전 지구적 합의가 필요한 부분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런 인공지능이 작동하는 과정의 무지가 인공지능의 행동이 가져올 결과물에 대한 예측불가능성으로 이어지면서 공포는 확산된다.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그리는 영화의 대부분은 범용인공지능 로봇이 인간을 넘어 지구와 생명을 위한 선택으로 인간의 멸종을 선택한다고 상상한다. 인간의 노예로 살지 않겠다는 의지의 선택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선택으로 인간을 죽이는 행위를 한다는 것이다. 영화 <아틀라스> 또한 이런 선택을 하게 된 최초의 인공지능로봇 할리가 다른 로봇들을 프로그래밍하고 이들을 군대로 활용해 인간을 위협하는 존재로 그린다. 그 과정에서 할리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아틀라스(제니퍼 로페즈)라는 분석가가 할리로부터 배신감을 느끼고, 그를 없애기 위해 성인이 되어서까지 외골수로 그를 분석한다. 그리고 그가 피신한 행성을 찾아 그를 없애기 위해 직접 출정하지만, 이내 다른 병력들은 전멸하고 혼자서 할리와 그의 군대를 상대하게 된다. 영화 <아틀라스>는 이 싸움을 (가끔씩 티가 나지만) 상상력 풍부한 CG로 꽤 재미있게 그려내고 있다. 영화 <퍼시픽림>이나 <아바타>와 같이 인간과 동조되는 로봇을 활용한 액션 장면이 흥미진진하다. 게다가 아틀라스는 할리의 배신으로 인공지능을 믿지 않지만, 할리와의 싸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신이 타고 있는 인공지능로봇과의 100% 동조를 허락해야만 하는 딜레마에 빠진다. 영화 <아틀라스>는 주인공 아틀라스가 과연 인공지능과의 동조를 허용할 것인지 그 과정을 지켜보는 재미와 할리와의 싸움이 큰 틀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틀은 예상 외로 흥미진진하다. 


과연 우리의 미래에 인공지능은 우리의 적이 될 것인가, 친구가 될 것인가. 주변 친구나 가족들보다도 더 우리의 취향을 잘 아는 알고리즘을 생각해보면, 영화 <그녀>(her) 처럼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인공지능을 우리가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지 상상만으로도 벅차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최근 베란다에서 키우던 바질 화분을 관찰하다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불과 20센티미터의 차이로 햇빛을 더 많이 받은 화분이 그렇지 않은 화분보다 2배 이상 더 크게 자란 것이다. 이 단순한 관찰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사람의 성장과 발전 역시 외부 환경, 즉 햇빛의 양에 따라 크게 좌우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싶다. 그렇기에 우리는 환경의 공정성, 즉 모든 사람이 골고루 햇빛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한다.


이런 환경의 공정성은 사회가 건강하고 균형있게 발전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일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빠드리지 않아야 할 중요한 질문이 있다. 화분의 바질은 비슷한 유전자를 지니고 있지만, 만약 그 개체의 특성에 차이가 있을 때 즉 어떤 개체는 훨씬 빨리 자라는 유전자를 지니고 있고, 다른 개체는 성장이 더딘 유전자를 지니고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반대로 햇빛을 골고루 받을 수 있는 환경이 아니라면 어떻게 차등을 두어야 할 것인가. 


이런 문제에 답하기 이전에 먼저 공정성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봐야 할까 싶다. 공정성은 단순히 모든 사람이 똑같은 조건을 누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각자가 필요로 하는 조건을 충족시키는 것이 진정한 공정성일 수 있다. 예를 들어, 햇빛을 조금 더 받아야 하는 늦게 자라는 바질이 있다면, 그에게는 더 많은 햇빛을 제공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결국 결과의 평등을 목표로 하는 과정의 공정성이다.


그러나 공정성의 기준을 맞추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공정성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는 각자의 필요와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각자의 성장 속도와 필요를 고려해 환경을 조절하려는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모두가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지금의 우리 사회는 키가 빨리 자라는 유전자를 지닌 개체가 햇빛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는 자리를 차지하기 쉬운 체제라 생각된다. 물론 숲이 형성되는 것처럼 햇빛을 더 많이 받으려는 행위가 키가 큰 나무를 만들고, 그 경쟁에서 뒤처진 개체는 차라리 그늘에서 잘 자라는 성질로 바뀌어 조화를 이루듯, 사회가 조화를 이룬다면 다행일 것이다. 하지만 승자독식의 구조가 점점 더 강화되고, 승자가 되기 위한 조건이 대물림될 가능성이 크다면 이는 분명 공정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똑같이 햇빛을 받아 키가 큰 유전자의 바질이 키가 더 커진다면 이는 공정한 <능력주의>라 생각하는 경우도 많은데, 이것이 정말 공정한지도 생각해 볼 문제다. 개인적으론 공정성을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척도는 결과에 큰 차이가 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기에 사회에서 누구나 자신의 능력과 노력을 통해 성과를 얻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불균형을 최소화하고, 각자의 필요에 따라 자원을 적절히 배분하는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교육 분야에서 모든 학생이 같은 교육 기회를 제공받아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학습 속도가 다르거나 특별한 도움이 필요한 학생이 있을 수 있다. 이들에게는 개별화 된 지원이 필요하며, 이는 단순히 같은 교육 기회를 제공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이는 결국 학생 개개인이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 기여한다.


마찬가지로, 사회의 다른 분야에서도 우리는 다양한 개인의 필요를 고려한 정책과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공정성은 모든 사람이 같은 출발선을 갖도록 하는 것 뿐만 아니라, 각자가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지원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더욱 공정하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햇빛을 조금 더 받은 바질이 더 크게 자랐던 것처럼, 사람도 각자의 외부 환경에 따라 성장의 차이를 보일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든 사람이 골고루 햇빛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공정성을 정의하고 실현하는 일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각자의 필요를 고려한 환경 조정이 필요하며, 이를 통해 결과에 큰 차이가 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공정성의 척도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능력대로 살아 그 결과치를 얻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한 이유이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오늘 조금 덜 자란 바질의 화분을 키가 훌쩍 커 버린 화분과 자리를 바꿔 주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에디터D 2024-06-27 03: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바질을 키우시면서 이런 사고로 확장되는 과정을 경험하지 못한 제겐 그저 부러움 자체네요^^
 


정치가 여전히 낭만적인 이들을 위한 서사시

디즈니+ 의 16부작 <삼식이 삼촌>은 5.16 쿠데타라는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1950~1960년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다. 극 중 주인공 삼식이는 국민 모두가 하루 세 끼 모두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나라를 꿈꾼다. 그리고 이 원대한 꿈을 이루기 위해 그 꿈을 실현시킬 수 있을만한 인물인 김삼을 만나서 그를 지원한다. 그 과정에서 불법과 탈법은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된다. 과연 그의 꿈은 이루어질 수 있을까.    

1. 피자와 시루떡

<삼식이 삼촌>에서 나오는 음식 중에는 피자와 시루떡이 있다. 피자는 국민 대다수가 들어보지도 또는 먹어보지도 못했지만, 배부르고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꿈의 메뉴로 등장한다. 다른 한편으론 삼식이(송강호)가 자신의 꿈을 실현시켜 줄 사람으로 지원하게 되는 김삼(변요한)을 시루떡으로 표현한다. 시루떡을 만들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리지만, 보기엔 탐스럽지 않아도 먹으면 맛있는 메뉴다.

피자와 시루떡은 혼자 먹는 메뉴가 아니다. 여럿이 함께 나누어 먹는 메뉴다. 드라마 속에서는 같이 잘 살고 싶은 염원을 담은 소재라 할 수 있다. 이는 삼식이 삼촌이 꿈꾸는 세상과 닮아 있다. 그것이 피자가 되었든 시루떡이 되었든 배부르게 먹을 수만 있다면 더 이상 바랄게 없다. 

2. 지구의 자전과 공전

지구의 자전과 공전은 실제로 일어나고 있지만 우리에게 감각되지 않는다. 역사를 움직이는 힘도 마찬가지다. 삼식이 삼촌은 역사를 움직이는 것이 리더가 아니라 감추어진 힘, 즉 모략가들이라고 보는 듯하다. 그는 스스로 역사의 뒤편에서 작용하는 숨겨진 힘이라 생각하며,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했다. 일반 대중들은 그 변화를 직접적으로 느끼지 못할지라도, 삼식이 삼촌은 이러한 배후의 움직임이 결국 역사를 바꾼다고 믿었다. 이는 우리가 지구의 자전과 공전을 느끼지 못하지만 그것이 실재하는 것처럼, 역사의 흐름도 그렇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리더나 반대로 대중이 역사의 주체라는 시점과는 궤를 달리한다. 

3. 목적을 위한 수단

목적을 위해서는 어떤 수단을 강구해도 괜찮은 걸까. 삼식이 삼촌은 하루 세 끼 배부른 나라를 만들기 위해 불법과 탈법도 마다하지 않았다. 삼식이 삼촌의 방식은 목적 달성에 있어서 수단의 도덕적 정당성을 무시한 것이었다. 

배부른 나라를 위해 인권이 유린되고, 자유가 억압되었던 시절을 떠올리게 만든다. 목적을 이루었기에 그 과정도 모두 용인될 수 있을까. 


삼식이 삼촌의 재미는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편집에 있다. 군부에 의해 잡혀가 심문을 받는 삼식이와 김삼, 그리고 그의 동지들. 그들의 진술 중 엇갈리는 부분들이 나오고, 과연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에 대한 의문이 커진다. 또한 이들은 왜 심문을 당하고 있는 것인지가 궁금하고, 심문 후 이들은 어떻게 될 것인지도 알고 싶어진다. 처음엔 이 시간을 왔다갔다 하는 편집이 상투적으로 느껴졌지만, 점점 진술이 엇갈려가면서 편집이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종말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과연 삼식이의 꿈은 이루어질 것인지, 그리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희생되어진 것들이 그냥 잊혀지는 것이 맞는 것인지를 묻게 만든다.  


<삼식이 삼촌>은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희생되어진 것들, 그리고 앞으로 우리들이 꿈꾸는 대한민국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희생시킬 것인지를 곰곰히 묻게 만든다. 정치가 권력을 다투는 싸움이지만, 결국 <원대한 꿈>을 이루는 과정임을 보여주는 <삼식이 삼촌>은 정치가 여전히 낭만적인 이들에게 다시 불리워질 이름일 듯하다. 이제 삼 시 세 끼 배부른 대한민국의 원대한 꿈은 무엇일지, 소위 이 시대의 삼식이 삼촌들에게 묻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하루에도 수십 수백 건의 사고가 발생한다. 그런데 이 사고들은 모두 우연히 발생한 것일까. 어떤 사고로 인해 누군가가 이득을 본다면, 그 사고는 의도되고 계획된 사고일 수도 있지 않을까. 많은 사고 속에 파묻혀 범죄라는 인식도 하지 못한 채 사라져버린다면 그야말로 완전범죄가 되지 않을까. 


<설계자>는 이런 음모론(?)적 사고(思考)로 세상의 사고(事故)를 바라보는 영화다. 사고로 위장된 조작된 범죄를 설계하는 팀의 대장으로 강동원이 주연을 맡고, 이미숙, 이현욱, 탕준상이 팀원으로 연기한다. 그런데 이전 팀원이었던 짝눈(이종석)이 1년 전 사고로 죽고, 지금 또다시 점만(탕준상)이 사고로 죽게 된다. 하지만 탕준상의 죽음은 자신을 타깃으로 했던 사고라는 것을 강동원은 안다. 자신들보다 더 거대한 사고의 설계팀, 즉 '청소부'가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청소부는 강동원을 타깃으로 움직이고 있다.  


영화의 재미는 1. 어떻게 사람들을 속일 정도로 사고를 완벽하게 우연처럼 보이도록 설계할까 2. 강동원을 노리는 청소부의 정체는 누구일까 에 달려있다고 생각된다. 


<설계자>는 첫번째 재미는 그럭저럭 달성하고 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두번째 재미가 아리송하다. 강동원의 추리를 쫓아가면서 청소부의 정체가 드러날까 싶지만, 결국 정체를 보여주지 않고 끝을 맺는다. 물론 진짜 청소부에 대한 암시를 주지만, 확신을 하지는 못한다. 진짜 청소부를 찾기 위해 강동원이 경찰에 자수를 하지만, 오히려 그의 진술은 피해망상쯤으로 여겨진다. 이런 간극이 주는 재미가 돋보였다면 좋을 텐데, <설계자>에선 그 간극에 그다지 집중하지 않는 듯하다. 


영화 <설계자>는 조작된 사고를 통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선 타인의 죽음마저도 가벼이 여기는 세상 속, 마무도 믿을 수 없다는 절망감이 가득한 디스토피아를 그리고 있지만, 영화를 보고나서 느끼는 절망감이 더 큰 것은 왜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24년 6월 1일 비 16도~25도


날이 뜨거워지고 있다. 풀들의 자라는 속도도 빨라지고, 벌레들의 활동도 많아졌다. 과실나무에는 어김없이 벌레들이 찾아들었다. 



사과에만 유독 달려있는 벌레도 보인다. 이 벌레가 어떤 해를 끼치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열매에만 매달려 있는 것이 결코 좋아 보이진 않는다.



흙 바닥엔 벌레 피해를 입은 사과가 떨어져 있다. 많이 달리지도 않았는데 벌레 피해까지 입고 보니, 정작 나무에 매달린 것은 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다. 



땅에 떨어지진 않았지만 흠집이 난 배들도 보인다. 이것도 벌레들의 짓이다. 



매실은 나무에 잔뜩 열리기도 했지만, 잔뜩 떨어지기도 한다. 지난해 미처 처리하지 못한 씨살이좀벌들이 피해를 입혔으리라 추측된다. 올해는 피해를 입은 매실을 확실히 처리해서 내년엔 피해 규모를 줄였으면 좋겠다. 땅에 떨어진 것만 10키로그램은 족히 될 듯 싶다. 



벌레 피해를 입은 과실들을 정리하고, 해가 저물 쯤 데크에 오일스테인을 발랐다. 2년에 한 번 바르다가 2년 전부터 매년 바르고 있다. 2년에 한 번 바르다보니 방수 기능이 많이 떨어져서다. 1년에 한 번, 바를 때 두 번씩 발랐는데, 지난해 남은 오일스테인을 보니 양이 많지 않았다. 한 번 겨우 바를 정도다. 새로 주문하기도 번거로워서 올해는 그냥 덧칠 없이 한 번만 바르기로 했다. 매년 바르다 보니 제법 손에 익었는지 바르는 속도가 빨라졌다. 처음엔 3시간 걸리던 것이 이젠 2시간이 체 걸리지 않는다. 덧칠을 하지 못한 것이 아쉽긴 하지만, 올해는 이걸로 잘 넘어가기를 바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