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거울 - 파국의 14세기, 흑사병, 백년전쟁, 그리고 움트는 혁명
바바라 터크먼 지음, 박중서 옮김 / 원더박스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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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거울 서평
바바라 터크먼의 <먼 거울>은 14세기 유럽의 역사가 중심이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오히려 역사적 사실보다도 마치 어제 뉴스에서 본 듯한 기시감이었다. 처음에는 흑사병과 백년전쟁, 교황권의 분열 같은 굵직한 사건들을 쉽게 정리할 수 있겠구나 싶었지만 신기하게도 600여 년 전 사람들이 살아가던 방식과 고민이 지금의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 놀라웠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인 ‘먼 거울‘은 단순히 먼 과거를 비추는 거울이 아니라,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의미로 다가왔다. 저자 바바라 터크먼은 방대한 사료를 바탕으로 14세기 유럽을 복원하지만, 연대기식 역사 서술에 머무르지 않는다. 실존 인물인 앙게랑 드 쿠시 7세를 중심축으로 전쟁과 정치, 종교, 귀족 사회와 민중의 삶을 하나의 이야기처럼 풀어낸다. 덕분에 푸아티에 전투나 흑사병, 아비뇽 유수와 같은 역사적 사건들이 시험을 위해 외워야 하는 연표가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들의 선택과 갈등으로 다가온다. 개인적으로는 흑사병 이후 노동력을 둘러싼 사회의 변화가 인상적이었다. 전염병으로 노동자가 부족해지자 더 높은 임금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법으로 막고, 기존 임금을 유지하도록 강제하며, 심지어 더 나은 조건을 찾아 직장을 옮기는 일까지 처벌했다는 기록은 놀라웠다. 노동자의 권리보다 사회 질서와 경제 안정을 우선하려는 국가의 모습은 시대가 달라져도 반복되는 현실처럼 느껴졌다. 또한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기보다 구걸을 선택한 사람들‘을 비난하는 기록 역시 오늘날 복지와 노동을 둘러싼 사회적 논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시대는 달라도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1349년 잉글랜드에서 모든 사람에게 1347년과 똑같은 봉급을 받고 일하도록 의무화하는 법령을 공표했다. 일하기를 거부하는 경우를 대비해 처벌도 마련되었고, 고용자가 더 높은 봉급을 찾아 현재 고용 장소를 떠나는 것이나 고용주가 더 높은 봉급을 제안하는 것 역시 처벌 대상이었다. (…) 여기서는 더 높은 임금을 요구하는 노동자만이 아니라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기보다는 차라리 게으르게 구걸하는 편을” 선택한 사람들을 특히 비판했다. 273쪽

흑사병 이후 죄의식을 씻기 위해 수많은 순례자가 로마로 몰려들었다는 부분도 기억에 남는데 실제 희년마다 전대사를 받으려고 신자들이 성지를 찾아다니는 모습이 바로 떠올라서 ‘예나 지금이나’라는 표현이 바로 떠올랐다. 다만 당시에는 신앙과 희망을 찾아 수천 명이 이동했지만, 정작 도시에는 식량과 자원이 부족했고 폐허가 된 성당들이 남아 있었다는 부분이 다르다고 볼 수 있다. 그런가하면 현실과 다른 기록된 내용만으로는 농민들의 삶을 제대로 알 수 없는 까닭도 등장한다. 기록 자체가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은 역사란 결국 기록을 남길 수 있었던 사람들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일깨워 준다. 역사가 완전한 진실이라기보다 남겨진 흔적을 통해 재구성되는 이야기라는 사실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특히 다시 찾아온 제2차 페스트는 사람들에게 더 큰 공포를 느끼게 하여 그야말로 ‘흉흉한 사회 분위기’가 야기할 수 있는 여러가지 의심과 허황된 일련의 문제들은 최근 우리가 경험했던 감염병의 기억과도 자연스럽게 겹쳐졌다. 전염병은 끝났지만 사회가 곧바로 정상으로 돌아오지는 않았고, 사람들은 불안과 갈등을 안은 채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책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교회 통합 시도나 정치적 개혁 역시 마찬가지다. 모두가 필요성을 인정하지만 이해관계와 권력 다툼 때문에 번번이 좌절되는 모습은 오늘날 국제정치나 사회 개혁을 떠올리게 한다. 시대는 달라졌지만 협력보다 경쟁이 앞서고, 공동의 이익보다 각자의 이해관계가 우선되는 모습은 놀라울 정도로 익숙했다.

수백 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인간 사회의 본질은 크게 변하지 않았고, 그래서 과거를 이해하는 일은 결국 현재를 이해하는 일이라는 가정하에 중세의 주요 사건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역사서인 동시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거울처럼 다가왔다. #먼거울 #바바라터크먼 @wonderbox_p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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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의 습관 - 작은 시작으로 압도적 변화를 만드는 행동 공식
로버트 마우어 지음, 장원철 옮김 / 북모먼트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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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마우어, 최소한의 습관 #북모먼트
새해가 되면 우리는 늘 새로운 목표를 세운다. 운동을 시작하겠다, 책을 더 많이 읽겠다, 미뤄왔던 일을 해내겠다며 마음을 다잡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처음의 의욕은 사라지고, 어느 순간 또다시 같은 결심을 반복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왜 우리는 변화하고 싶어 하면서도 늘 같은 자리에서 멈추게 될까?
저자는 그 이유를 의지력 부족에서 찾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변화를 시도하는 방식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더 강한 마음을 먹고, 더 큰 목표를 세우고, 더 많은 노력을 쏟아부으려 할수록 우리의 뇌는 그것을 부담과 위협으로 받아들인다. 결국 시작하기도 전에 지치거나, 잠시 성공하더라도 오래 지속하지 못한다. 저자가 제안하는 해결책은 의외로 단순하다. “너무 쉬워서 실패할 수 없는 작은 행동”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책에서 말하는 ‘스몰 스텝(Small Step) 전략’은 거창한 변화를 요구하지 않는다. 하루 1분 걷기, 15초 동안 원하는 모습을 상상하기, 아주 작은 질문 하나 던지기처럼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최소한의 행동을 제안한다. 처음에는 이것이 과연 변화를 만들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사소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저자는 바로 그 사소함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변화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만큼 작아야 뇌가 저항하지 않고, 반복을 통해 자연스럽게 새로운 습관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184쪽의 “도전은 아무 저항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사소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문장이 특히 마음에 남은 이유는 그동안 내가 변화를 대하는 방식과 정반대였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바꾸고 싶을 때마다 나는 늘 큰 계획을 세웠다.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한 번에 완벽하게 해내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현실의 나는 이미 해야 할 일도 많고, 매일의 에너지도 한정되어 있다. 그런 상황에서 “더 크게 도전하라”, “더 강하게 노력하라”는 말은 때때로 용기가 되기보다 또 다른 부담이 되곤 했다.

책 속 사례들을 보면서 변화가 어려웠던 이유는 내가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라, 처음부터 너무 높은 문턱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동을 시작하려면 매일 한 시간씩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공부를 시작하려면 완벽한 계획부터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얼마나 크게 시작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쉽게 계속할 수 있느냐였다.

특히 “작게 물을수록 크게 바뀐다”는 부분도 기억에 남는다. “왜 나는 이렇게 못할까?”라는 질문은 나를 위축시키지만, “오늘 5분 동안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은 행동할 수 있는 방향을 만들어준다. 작은 질문은 작은 행동으로 이어지고, 작은 행동은 결국 삶의 방향을 바꾸는 힘이 된다.

이 책은 단순히 습관을 만드는 방법만 알려주는 것이 아니다. 변화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바꾸게 한다. 우리는 흔히 목표를 이루기 위해 자신을 몰아붙여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저자는 오히려 자신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방식이 더 오래가는 변화를 만든다고 말한다. 작은 성공 경험이 쌓이면 자신감이 생기고, 그 자신감은 다시 더 큰 변화를 가능하게 한다.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마음이 편안했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특별한 사람만이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생각을 내려놓게 한다. 거대한 목표와 강한 의지가 아니라,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행동 하나가 시작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어쩌면 삶을 바꾸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자신을 몰아세우는 것이 아니라, 계속 움직일 수 있을 만큼 작게 시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변화를 꿈꾸지만 늘 작심삼일로 끝났던 사람이라면 이 책이 새로운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완벽한 시작이 아니다. 실패하기 어려운 작은 시작, 그리고 그것을 반복하는 힘이다.

#최소한의습관 #로버트마우어 #습관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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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럴 앰비션 - 이기적 야망의 종말
뤼트허르 브레흐만 지음, 이정민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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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트허르 브레흐만의 <모럴 앰비션>은 개인의 성공과 사회적 기여 사이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다. 저자는 오늘날 많은 인재들이 높은 연봉과 안정적인 지위를 좇는 데 집중하는 반면, 인류가 직면한 거대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자신의 역량을 충분히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 ‘선한 야망(Moral Ambition)’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지극히 평범한 회사에서 평범한 임원으로 살던 사람도 어느 날 문득 사망률이 가장 높은 질병을 퇴치하는 데 앞장설 수 있다. 일단 선한 야망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나면 삶과 커리어를 변화시킬 수 있다. 171쪽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이상주의와 현실주의를 균형 있게 결합했다는 점이다. 브레흐만은 단순히 착하게 살라고 권유하지 않는다. 오히려 야망 자체를 부정하지 않고, 그 방향을 개인적 성공에서 사회적 가치 창출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역사 속 개혁가와 사회운동가들의 사례를 소개하며, 한 사람의 결단이 얼마나 큰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 보여준다.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독자에게 직접 행동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많은 자기계발서가 개인의 성취와 행복에 초점을 맞추는 데 비해, 이 책은 “당신의 재능을 어디에 사용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는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직업과 삶의 목표를 사회적 관점에서 재평가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이 책이 무조건 능력있는 사람을 사회에 환원시키자라는 맥락은 아니다. 저자가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다른 하나는, 사회에 변혁을 일으키는 이는 ‘초능력을 가진 자’가 아니라 행동하는 사람,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며 극소수에 가깝다라고 말한다. 다만 일부 독자에게는 저자의 주장이 다소 이상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현실적으로 생계와 책임을 고려해야 하는 상황에서 사회문제 해결을 우선순위에 두라는 메시지가 부담스럽게 다가올 수도 있다. 또한 구조적 문제보다 개인의 선택과 책임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은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저자는 성공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하며,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 개인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하게 만드는 책이다. 


삶을 좀 더 수월하게 해주는 책이 아니라 오히려 더 어렵게 만드는 책, 위로하는 책이 아닌 마찰을 일으키는 책이다. 애초에 읽지 않았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드는 책, 다 읽고 나면 인생을 바꿔야 할 지도 모르는 책이다. 이 책이 바로 그런 책이다. - 프롤로그 중에서


자신의 능력과 야망을 어디에 쏟아야 할지 고민하는 독자라면 한 번쯤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 단순한 자기계발서를 넘어, 삶의 방향과 사회적 책임에 대한 깊은 성찰을 제공하는 작품이다.


#모럴앰비션 #선한본성 #선의 #이타주의 #휴먼카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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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 포인트 - 그저 행동만 할 수는 없다. 우리는 올바른 말을 해야 한다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혜진 옮김, 배세진 해제 / 우중몽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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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보예 지젝, 《제로 포인트》 완독 리뷰

어둠 속의 사람들을 보기 위하여

> 그리고 어떤 이들은 어둠 속에 있다
> 그리고 어떤 이들은 빛 속에 있다
> 하지만 당신은 빛 속에 있는 이들만 본다
> 어둠 속에 있는 자들은 보지 못한다

— 브레히트, 『서푼짜리 오페라』 마지막 대사

슬라보예 지젝의 《제로 포인트》를 읽으며 가장 오래 남은 것은 이 브레히트의 문장이었다. 지젝은 책 전반에 걸쳐 우리에게 무엇을 보지 못하고 있는지, 그리고 무엇을 제대로 말해야 하는지를 묻는다. 특히 2부에서 다루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은 그 질문이 가장 첨예하게 드러나는 대목이다.

지젝은 이 갈등을 선악의 대결로 환원하지 않는다. 그는 이스라엘 정부의 점령 정책과 정착민 폭력을 비판하는 동시에, 하마스의 끔찍한 공격과 민간인 학살 역시 명확히 규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느 한쪽의 폭력을 다른 쪽의 폭력으로 정당화하는 순간, 우리는 현실을 설명하는 언어를 잃어버리게 된다. 지젝에게 중요한 것은 편을 선택하는 일이 아니라 상황을 정확하게 명명하는 일이다. 특히 현재 가자지구에서 일어나는 암울한 상황을 두고 하마스의 공격을 비판하는 것과 팔레스타인인들의 존엄과 권리를 인정하는 것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반대로 이스라엘의 점령 정책을 비판한다고 해서 민간인을 향한 테러가 정당화될 수도 없다. 오늘날의 진영 논리는 이러한 복합성을 견디지 못한다. 그러나 지젝은 오히려 그 불편한 긴장 속에 머물 것을 요구한다.
2부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대목은 ”행동하라“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올바르게 말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지젝은 사실과 진실을 구분한다. 사실이 정보의 나열이라면 진실은 그 사실들을 가능하게 만든 권력과 이데올로기의 구조를 드러내는 언어다. 그래서 그는 성급한 실천보다 먼저 현실을 왜곡 없이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회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연설을 둘러싼 논란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가 강조한 것은 특정 진영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어떤 비극도 침묵 속에 방치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었다.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개념인 ’제로 포인트‘ 역시 여기서 의미를 얻는다. 지젝이 말하는 제로 포인트는 단순한 위기 상황이 아니다. 기존의 정치적 언어와 도덕적 좌표가 더 이상 현실을 설명하지 못하는 상태, 다시 말해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알 수 없는 역사적 임계점이다. 트럼프 시대의 포퓰리즘, 기술 발전이 만들어낸 새로운 불안, 종교적·민족적 근본주의의 부활, 그리고 전쟁의 확산은 모두 그러한 징후들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사건을 소비하지만 그것을 이해할 개념은 점점 잃어가고 있다.

지젝은 정신분석학과 철학, 정치이론을 넘나들며 이러한 단절된 현상들을 하나의 그림으로 연결한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가 현대 사회의 혼란을 단순한 정치적 실패가 아니라 욕망의 문제로 읽어낸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불안할수록 더 강한 정체성과 더 단순한 답을 원한다. 포퓰리즘과 전통주의가 힘을 얻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지젝은 그러한 회귀가 해답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대중이 기억하는 지젝은 종종 아이러니하고 난해한 사상가다. 그러나 내가 그의 글에서 발견하는 것은 오히려 지적 성실함에 가깝다. 그는 어느 한쪽에 안주하기보다 모두가 불편해하는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다.

《제로 포인트》는 결국 위기의 시대를 진단하는 책이면서 동시에 언어에 대한 책이다.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만이 아니라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를 묻는 책이다. 우리가 서 있는 곳이 왜 ’제로 포인트‘인지, 그리고 그 혼란 속에서도 어떻게 현실을 이해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게 만든다. 책을 덮고 나서도 브레히트의 문장이 오래 남았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확신이 아니라, 현실을 정확하게 말하려는 용기인지도 모른다.

#제로포인트 #우중몽 #슬라보예지젝 #철학 #우주클럽_철학방

@woojoos_story 진행으로 우주클럽_철학방에서 함께 읽었습니다
@woojoongmong.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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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의 명상 - 누구나 인생에 한 번쯤 고비가 온다
최훈동 지음 / 시크릿하우스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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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이라는 숫자가 어느새 남의 이야기가 아니게 된 지금, 《오십의 명상》은 유난히 깊게 다가온 책이었다. 젊을 때는 노력하면 대부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마흔 후반에 이르니 몸도 마음도 예전 같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특별히 큰 실패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이유 없이 허무하고, 열심히 살아왔는데도 문득 방향을 잃은 듯한 순간들이 찾아온다. 이 책은 그런 시간을 ‘버텨야 하는 위기’가 아니라 ‘시선을 바꾸어야 하는 고비’라고 말한다.
저자 운강 최훈동 선생은 정신과 전문의이면서 오랜 수행자다. 특히 IMF 시절 삶의 밑바닥까지 내려갔던 경험을 명상으로 극복했다는 이야기는 더욱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그래서인지 책 전반에 흐르는 목소리는 가르치려는 훈계가 아니라, 먼저 흔들리고 아파본 사람이 건네는 다정한 조언에 가깝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명상을 특별한 기술이나 종교적 수행으로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저자는 명상을 ‘지금 이 순간 자신을 알아차리는 일’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늘 타인의 말과 행동에는 민감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는 놓치고 살아간다. 책을 읽으며 나 역시 하루 종일 바쁘게 움직이면서도 내 감정은 제대로 들여다본 적이 얼마나 있었을까 돌아보게 되었다.
특히 “감정은 억눌릴 때 병이 되지만, 비춰질 때 사라진다”는 구절이 오래 남았다. 중년이 되면 감정을 표현하는 것보다 참고 견디는 데 익숙해진다. 가족을 위해, 직장을 위해, 어른답게 행동하기 위해 슬픔과 분노를 덮어두곤 한다. 그런데 이 책은 감정을 없애려 하지 말고 그저 “지금 슬프다”, “지금 화가 난다”라고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하라고 말한다. 놀랍게도 그 단순한 태도가 마음을 훨씬 가볍게 만든다는 사실에 공감했다.
또 하나 좋았던 부분은 실패를 대하는 자세였다. 저자는 시련 앞에서 우리가 보이는 후회, 자책, 원망 같은 반응을 먼저 알아차리고 ‘멈춤’을 실천하라고 이야기한다. 반응을 멈추는 순간 시련은 고통이 아니라 배움이 된다는 말이 마음에 와 닿았다. 살아보니 인생의 문제는 사라지지 않지만, 문제를 바라보는 태도는 분명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조금씩 배우게 된다.
《오십의 명상》은 화려한 성공담이나 즉각적인 변화의 비법을 알려주는 책이 아니다. 대신 삶의 속도를 잠시 늦추고, 자신에게 친절하게 시선을 돌리는 법을 차분히 이야기한다. 정신의학적 통찰과 불교의 지혜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어 종교와 상관없이 읽을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다.
마흔 후반의 내가 이 책을 읽으며 얻은 것은 거창한 깨달음이 아니었다. 다만 흔들리는 마음을 없애려고 애쓰기보다, 그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연습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배웠다. 어쩌면 중년 이후의 삶은 더 강해지는 과정이 아니라, 더 깊이 이해하고 더 부드러워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오십의 명상》은 그 길의 초입에서 조용히 손을 내밀어 주는 책이었다. 마음이 지치고 삶의 방향을 다시 묻고 있는 중년의 독자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탁지북서평모집>을 통해 도서 협찬 받았습니다.


#오십의명상 #운강최운동 #시크릿하우스
#도서협찬 #탁지북

@takjibook 탁지북
@secrethouse_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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