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다정한 대만이라니

대학 때 가장 가까웠던 친구가 사는 나라 대만. 덕분에 기억이 가물거릴 만큼 오래된 추억인데도 ‘대만’이라는 단어만 들으면 신베이터우 온천 사이에 자연친화적인 도서관 건물과 단수이의 노을 그리고 주밍 미술관의 군중미술까지 다양한 모습의 대만이 아른거린다. 단 한 번뿐이었던 여행인데도 그정도인데 10년 동안 17번이나 다녀온 이수지(리슈)님의 대만 여행기라니 표지만 봐도 정말 기대되었다.

이 책은 맛있는 음식을 먹고 유명한 곳을 방문한 기록에 그치지 않는다. 여행을 함께하거나 우연히 마주친 사람들과 나눈 일상에서 느꼈던 다양한 감정과 생각, 그리고 그 속에서 만들어낸 스토리도 꾹꾹 눌러 담아냈다. 7쪽

그중에서 저자가 엄마와 함께 떠난 여행을 다룬 내용에서 정말 격하게 그리고 아프게 공감했다. 내가 보고 좋았던 것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은 당연하다. 다만 그 마음이 너무 크다보니 정작 상대방이 원하는 바를 놓치기 쉬운데 가족에게는 더 크게 작용하는 것 같다. 엄마와 오키나와를 떠났을 때, 무리하게 일정을 계획한 탓에 엄마는 중도에 지치고 힘들어하셨다. 정말이지 엄마와 떠나는 혹은 누군가를 위한 여행이라면, ‘내가 사랑하는 대만이 아니라 엄마가 사랑하게 될 대만이어야’(39쪽) 하는 것을 이제는 나도 알게 되었다. 그런가하면 저자가 남자친구와 떠난 ‘무계획’여행에 관한 내용도 와닿았다. 평소에 잘 챙겨서 떠나는 저자와 달리 남자친구는 이렇다할 계획 없이 떠났지만 오히려 느긋하게 도시를 즐기고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면서 ‘무계획이 계획’(123쪽)인 여행에 호감이 생겼다. 그동안 계획을 잘 세우고 여행을 다니는 편이었고, 출산 이후 아이랑 떠날 때에는 더더군다나 이전보다 더 치밀하게 계획을 세웠지만 어쩌면 함께 세우는 계획이 아니라면 둘 모두 편안한 여행이 좋은 것 같다. 단 한 번뿐인 대만 여행에서 기대보다 훨씬 많은 것을 경험했기에 아쉬움이 덜하긴 하지만 유독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는데 다름아닌 ‘아리산’을 다녀오지 못한 점이었다. 친구도 그 당시에 꼭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지만 일정을 더 미룰 수가 없어 포기했던 그 아리산을 저자는 ‘남자친구가 생기면 꼭 함께 가보고 싶었던(188쪽)’ 여행지라며 소개해주었다. 사진도 함께 책에 실려있는데 저자의 경험과 사진을 보고 있자니 그때 무리를 해서라도 다녀왔어야 했었나 싶기도 하다. 저자의 여행에 대한 추억과 동행자들의 이야기도 좋았지만 현지에서 우연하게 만난 사람들과 함께 했던 내용들도 비슷한 경험을 했던 여행자라면 나처럼 추억에 한참을 잠겨 있게 될 만큼 즐겁게 읽었다. 반면 대만의 현재와 과거를 다루는 부분에서는 단순히 먹고 즐기기만 한 여행책은 아니라는 지점을 다시금 생각하게 만들었다.

가끔 친구들에게 대만민국인이 되고 싶다는 농담 반 진담 반 소리를 내뱉는다. (…)
서류상으로는 바뀐 것 하나 없는 대한민국국민이지만, 언제든 일상처럼 오가며 반겨줄 사람들이 있는 내 세상이 하나 더 생겼다. 251쪽

자주 여행을 다닌다고 해서 무조건 내가 어려울 때 도움을 주는 현지인들과의 우호적으로 관계가 발전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두 번 다시 만날 일이 없으니 좋지 않은 경험들이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할 수도 있는데 ‘대만민국인’이 되고 싶다는 저자의 바람이 아마도 그들에게도 잘 전달되었지 않을까. 다시 대만을 찾게 된다면 가장 높은 타워가 아니라 그곳을 바라다볼 수 있는 곳을 오를 것이고, 아주 저렴하지만 제대로 힐링인 온천수에 발을 담궈보고 싶다. 특히나 그때만큼은 꼭 비 오는 날의 아리산을 만나고 싶다.

#이토록다정한대만이라니 #이수지 #대만여행 #푸른향기 #협찬
@prunbook @taiwanlixi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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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태임 화가 첫 에세이. 색채 환상곡🎨

기호와 문자로 소통되는 언어의 영역과 시각과 감성을 통해 전달되는 감동의 파장에 관해 고려해 볼 때, 본인에게 색채란 전통의 틀에 고정된 구조의 극복이자 나아가 억압으로부터의 구원을 뜻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색을 고르는 일이란 즐거움인 동시에 억제되었던 욕구의 해방이다. 72쪽

하태임 화가의 『색채 환상곡』은 작가 이전에 한 여성으로서의 삶을 들여다보게 하는 책이기도 하지만, 시각적 아름다움 너머에서 오랜 시간 컬러 밴드를 반복해 그려온 이유와 그 반복이 만들어내는 미묘한 차이를 그녀의 작업노트와 여러 인터뷰와 전시관련 글을 통해 들을 수 있는 통로이기도 하다. 솔직히 말하면, 저자의 작품을 이전부터 좋아했으면서도 그녀의 작업을 ‘하나의 색 위에 또 다른 색을 덧입히는 참으로 고단한 작업’으로만 오해하고 있었다. 이 책은 그런 나의 착각과 무지를 하나씩 짚어내며, 색을 대하는 태도 자체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저자의 말처럼, 하나의 색이 지니는 의미는 각자가 살아온 기억과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르게 읽힌다. 흔히 블루를 우울의 색이라 부르지만, 저자에게 블루는 오히려 따뜻한 색이다. 핑크 또한 소녀적 감상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을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화해와 관용의 색으로 확장된다. 그 대목을 읽으며 자연스레 나 자신에게 묻게 된다. 내게 블루는 어떤 기억의 색이었는지, 핑크는 어떤 시절을 통과해 왔는지, 그리고 지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색은 무엇인지.

색을 더하는 그 사이사이의 틈새 시간에 책을 읽고 사유를 이어간다는 저자의 고백처럼, 나 역시 그녀의 문장과 문장 사이에 나의 생각을 끼워 넣는다. 한 아이의 엄마로서, 아내로서, 그리고 여전히 누군가의 딸로서 살아가며 겹겹이 쌓아온 감정들이 색처럼 겹쳐진다. 저자의 사적인 이야기를 읽는 것도 좋았지만, 첫 스승이자 멘토였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특히 마음에 오래 남았다. 어머니와의 관계보다 아버지와의 기억이 더 선명한 딸이기에, 유년 시절 아버지와 함께했던 시간들이 자연스레 겹쳐졌다. 저자처럼 그 관계가 변함없이 이어지지 못했기에, 오히려 더 애틋하게 호출되는 기억일지도 모르겠다.

Green to green.
색을 지칭하는 단어는 너무도 한정적이다.
내가 생각하는 그린과 당신이 생각하는 그린은 수많은 경험과 기억의 차이들이 중첩되어 있다.
젤 좋아하는 색
누가 내게 물으면 난 아직도 연두색이라고 말한다. 99쪽

문장을 읽으며 색이란 결국 삶의 요약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자신의 작업방식이 이미 칠해진 색을 다른 색으로 ‘지우는 것’처럼 느꼈던 시기도 있었다고 말했다. 작품 뿐 아니라 삶의 태도에 있어 살아온 시간 속에서 생긴 얼룩과 고통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또 다른 색을 얹으며 조금씩 다른 화면으로 나아가는 일. 지운다는 말이 은폐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모든 것이 변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처럼 느껴졌다. 색 위에 색이 놓이며 작품이 완성되어 가는 과정은, 실존적으로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책 속 여러 장면 중 언급하고픈 또 다른 이야기는 오로라 여행에 관한 것이다. 아이슬란드를 다녀온 독자라면 반색할 만한 내용일텐데 내가 그 이야기에 마음이 끌린 이유는 기대했던 장엄한 오로라를 마주하지 못했을 때의 저자의 태도였다.

까칠한 그녀는 오늘도 내게 등을 돌렸다. 구름 너머 어딘가엔 분명히 존재하고 있을 그녀. 나는 오늘도 그 존재를 믿는다. 눈에 담지 못한 장면은 마음에 새긴다. 그렇게 나는, 오로라의 흔적을 가슴에 품고 이곳을 떠난다. 147쪽

보지 못했음에도 믿고, 소유하지 못했음에도 품고 가는 방식. 책을 읽으며 느낀 저자의 담대함은 단순히 ‘쿨하다’는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웠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시간, 완전히 방전되었을 때 스스로를 회복시키는 방식, 그리고 끝내 자신이 정한 방향을 품고 가는 태도까지. 그 모든 장면이 나를 오래 흔들었다. 특히 미술 교습소를 운영하던 이야기를 읽으며, 자신이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을 끝내 해내는 단단함까지! 덕분에 내가 가진 색과 방식으로 때로는 지우고 쌓아가면서 조금씩 완성되는 중이라고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우주서평단 #색채환상곡 #하태임 #프로방스 @hataeim

★ 북스타그램_우주 @woojoos_story 모집, 프로방스출판사 도서 지원으로
우주서평단에서 함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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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꽁 얼어붙은 한강 위로 고양이가 걸어갑니다 - 김주하 앵커가 단단한 목소리로 전하는 위로
김주하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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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단순히 한 유명인의 불행을 들추어보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가장 깊은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어떻게 한 줌의 빛을 발견하고, 그 빛을 다른 이를 위한 등불로 밝히기로 결심했는지에 대한 한 여성의 투쟁기입니다. 프롤로그 중에서

한 여성의 투쟁기라고 쓰여 있었다. 그가 왜 한 사람이나 언론인이 아닌 여성이라고 썼는지는 내용을 읽으며 바로 나온다. 여성에게 있어 가부장제와 결혼이 얼마나 큰 위험부담을 가지고 있는지, 설사 행복하게 안락한 듯 보여도 그 안에서 끊임없이 울고 울어야 한다는 것을 나도 결혼하고 출산하기 전까진 알지 못했다. 오히려 강하게 밀어붙이는 듯한 여성운동이 과하게 느껴졌을 정도니 말 다 했다. 저자에게는 무슨 시련이 있었을까. 우선 남성 위주의 방송국에서 살아남았다는 것, 그것도 자신이 직접 세팅까지 마친 폼을 빼앗겼을 때도 자신이 이룬 것과 변화시킨 것이 무엇인지, 작은 서운함보다 큰 것을 바라보았다는 점은 여전히 놀랍고 존경스러웠다. 많은 여성 언론인의 상황을 어깨에 짊어져야 했다는 표현이 조금도 과장처럼 들리지 않았다. 또 저자가 ‘결혼을 잘못해서’라고 말하는 것도 억울한 감이 있다.

“보통 이혼의 사유는 외도, 폭력, 사치, 마약, 도박, 알코올 등 6가지로 나뉘는데 이렇게 모든 게 다 들어간 경우는 처음 봅니다.” 178쪽

책을 읽으면서 저자가 겪은 기구함만을 바라보기엔 극복하는 과정에서 배울 수 있는 부분들이 정말 많았다. 또, 매 순간순간 등장하는 사회학 및 심리학 용어와 마치 사례처럼 등장하는 상황도 큰 도움이 되었다. 특히 참고 스스로를 원망하고 하늘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서사 재구성’이라는 심리학 용어를 언급하며 피해자로만 머물지 않겠다고 각오하는 부분에서는 저자의 바람처럼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어려움에 놓인 분들이 읽고 용기를 가지실 수 있으면 좋겠다.

역경을 이겨낸 ‘생존자’로서 자신의 이야기를 새롭게 써 내려가는 과정을 말하는데 이혼소송은 나에게 바로 이 서사를 재구성하는 첫걸음이었다. 나는 더 이상 숨거나 회피하지 않고, 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기로 결심했다. 222쪽

그녀는 자신의 신분만 피해자에서 끌어올린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손길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도 관심을 가졌다. 책 초반부터 기독교인임을 밝혔고, 또 그랬기 때문에 의심을 멈추고 결혼까지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닌 그분을 위한, 이웃을 위한 삶을 택하는데 주저하지 않는 모습에서는 신앙인이 가져야 할 방향성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끝까지 흔들림 없이 저자가 향하는 것은 언론인으로서의 올바른 자세와 미래의 역할이었다. 동시에 사는 동안 결코 멈추지 않을 고통을 견뎌내야 할 인간으로서의 마음가짐이기도 했다. ‘꽁꽁 얼어붙은 한강 위’를 걷던 그녀를 응원하거나 혹은 앞으로 그 길을 어떻게 다른 이들과 연대하며 나아갈지 궁금한 독자라면 꼭 읽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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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철 행복 (사계절 리미티드 에디션) - 가장 알맞은 시절에 건네는 스물네 번의 다정한 안부
김신지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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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만의 연례행사가 생기기를 바라며‘,로 시작되는 <제철행복>.
저자 김신지 작가는 이전에 출간한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와 <기록하기로 했습니다>를 읽었기에 모임에서 2025년 마지막 주제도서로 선정되었다는 톡을 보고 엄청 반가워했었다. 그 기대를 충족하고도 남을 만큼 24절기를 대하는 저자만의 ‘연례행사’는 공감 가는 부분도 있었고, 저자가 대단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으며, 언젠가 꼭 해보고 싶은 부러움이 생기는 내용들도 있었다. 이 세 가지의 주된 내용을 마구마구 섞어가며, 내키는 대로 몇 자 더 적어보겠다.

‘행복이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제철에 있는 거라면, 계절마다 ‘아는 행복’을 다시 한번 느끼며 살고 싶었다. 그 마음은 자연스레 제철을 챙기는 것으로 이어졌다.’ 5쪽

책을 읽기 전에는 느끼지 못했는데 의외로 제철마다 하고 있는 행사까진 아니지만 챙기는 것들이 있었다. 가령 아버지의 그해 첫 과메기는 놓치지 않고 주문해서 보내 드리고 있는데 누군가 이 이야기만 들으면 꽤나 효녀처럼 보이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사실은 이렇게 보내드리게 된 이유가 있었다. 언니와 나 그리고 엄마 모두 지나치게 향이 강하거나 비린 음식을 잘 먹지 못한다. 그렇다 보니 홍어 같은 음식은 늘 아버지 혼자 드셔야 했는데 언젠가 아버지가 과메기도 사 오셔서 드시는데 한 번만 먹어보라고 하시는데도 영 내키질 않았다. 끝까지 먹지 않다가 회사 회식으로 횟집에 갔을 때 맛보기로 과메기가 나온 적이 있었다. 같이 간 분들이 모두 맛있다고 먹어보라길래 계속 거절하기가 어려워 맛을 보았는데, 아핫! 비릿해서 괴로워지기 직전에 알싸하고 매콤한 마늘종과 초장 그리고 아삭거리는 배추에 지나치게 개운해질 즘 치고 들어오는 김의 비릿함과 과메기의 고소함이 어찌나 맛있던지. 아버지가 먹으라 할 때 왜 먹지 않았을까 싶은 아쉬움과 죄송함을 좀 덜어보고자 보내드리기 시작한 게 계속 이어져오고 있다. 다행인 건 아버지가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늘 과메기를 잘 받았다며 단톡방에 인증샷까지 올려주시며 맛있게 드신다는 거다. 책 얘기하다 말고 참 길었다.

서둘러 얼마전 이었던 ‘동지’편 이야기를 이어 하자면, ‘김칫국 토크’ 이거 참 좋아 보였다.

3년 전의 나는 김칫국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 이번 책….. 베스트셀러가 되고 말았어.”
친구는 바통을 이어받아 말했다.
“내 뉴스레터 보고 무려 ㅇㅇ에서 연락이 왔어.”
나머지 한 친구도 넙죽 김칫국 드링킹.
“이직 성공! 연봉 높여서 금융치료 제대로 함. 집에서 너무 멀어서 그게 걱정이야.” 307쪽

아, 이런 김칫국 토크 정말 바람직하고 희망적이지 않은가. 연말에 작년에 비해 달라진 게 없다거나 더 부족했다는 이야기 말고 과하거나 노력 없이 기대만 가지면 안 되지만 그래도 이런 희망적인 이야기를 많이 나눌 수 있었음 좋겠다. 이어서 오늘 내일 엄청 춥다고 하니 ‘대한’편에 대한 이야기로 가보겠다.

겨울의 어원을 옛말 ‘겻다’로 보는데, ‘겻다’는 ‘머무르다’, ‘집에 있다’라는 뜻을 품고 있다. 그건 곧 겨울을 보내기에 가장 아늑한 아지트는 역시 집이란 말이겠지. (…)
겨울은 모름지기 시집의 계절이니까 좋아하는 시집들을 쌓아두고 읽는다. 327쪽

집에 머물러야 할 추위에 아이와 여행을 앞두고 있다. 집을 지키겠다는 명목으로 남편은 집에 남는다고 하는데 크게 걱정은 안된다. 지난 제주여행을 아들과 둘이서도 잘 해냈기 때문에 아이도 나도 은근 둘만의 여행을 기대하는 부분도 있고 무엇보다 약간의 거리와 이따금 짧은 헤어짐은 관계를 더 좋게 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 끝으로 모임에서 공통적으로 나온 감상평은, ‘이 책은 한 번 읽고 마는 것이 아니라 소장해서 매 절기마다 읽어야 한다, 선물하기에 정말 좋은 책이다’ 였으므로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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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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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에게 위안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런 여자는 내 세대에서 끝이다




<남극> 뒷표지에 적힌 위의 두 문장을 읽고 멈칫할 수도 있다. 영화화 되어 키건의 작품을 널리 알려준 <맡겨진 소녀>에서 느꼈던 감성을, 마찬가지로 동명의 영화의 원작이 된 <이처럼 사소한 것들> 에서 폭력은 덤덤하게 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고, 반면 반드시 존재했어야 할 정의가 사라진 곳에 많은 희생이 염려되는 선의에 대해 생각케 했었다. 그런데 <남극>은 표제작 부터가 심상치 않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는 여성이 남편 아닌 다른 남자와의 관계를 떠올린다는 설정에서 시작하는 이 소설을 보며 상황은 다르지만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잠시 떠올리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키 큰 풀숲의 사랑>은 작가의 작품을 왜 계속 찾아 읽게 되는가의 대한 답을 깨달았던 작품이었다.


그들은 가끔 얕은 잠에 빠졌지만 코딜리아는 의사의 손목에서 금시계가 째깍거리는, 돌이킬 수 없는 소리를 항상 의식했다. 째깍, 째깍, 째깍.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그녀는 그 시계가 미웠다. 49쪽


코딜리아는 결혼하여 가정이 있는 의사를 만나고 있었다. 의사와 코딜리아는 서로 좋아했고, 함께 있을 때 그들은 행복했지만 완전한 행복은 아니었다. 위의 발췌문에서 알 수 있듯 그저 흐를 뿐인 시계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할 만큼 코딜리아는 자신의 사랑이 자유롭지도 떳떳하지도 못하다는 것을 알았다. 단순히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하다고 ‘시계를 미워하거나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까지 일으키긴 어렵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의사가 코딜리아에게 갈 수 없는 이유가 아이 때문이었을까. 의사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아이를 생각해서 가정으로 ‘돌아’간다고 말한다. 아마 아이가 있는 안정된 가정으로 자신이 돌아가고 싶었던건 아닐까 싶다. 누군가의 말처럼 여행이란 어쨌거나 불편할 수 밖에 없음에도 떠나는 이유가 ‘돌아’올 곳이 있기 때문이란 말처럼 외도도 그런게 아닐까. 후반부에 등장하는 <폭풍>은 앞서 등장한 작품들의 부분 부분을 이어 받은 느낌이 들었는데 단어가 가지고 있는 분위기가 감각에 있어서는 <남극>을 떠올리게 했고,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꿈꾸는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 속에서 궁금증을 유발시키는 분위기는 이전에 읽었던 작품에서 기쁘게 고통스러워 하던 부분이었다. 동시에 다음 차례에서 만나게 될 <화상>을 암시하는 문장도 등장하는데 한참을 그 연결고리에 대해 고민하기도 했었다.


내가 다 컸다고 마지막으로 말한 남자는 화상을 입었다. 어머니는 화상처럼 나쁜 건 없다고 항상 말했다. 123쪽


하지만 이런저런 고통과 폭력에서도 잘 버티던 내 손이 페이지 넘기는 것을 멈추게 만든 것은 <여권 수프>를 읽을 때 였다. 잃어버리는 것은 크고 작음과 관계없이 사람을 절망으로 끌어내린다. 역자는 각 작품마다 뇌리에 각인되는 장면들이 있었다고 말했는데 개인적으로는 <여권 수프>의 마지막 문장을 잊지 못할 것 같다.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 3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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