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를 위한 촛불이 되리라 - 무식한 영웅의 생활 속 음양 이야기
이상문 지음 / 정신세계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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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따로 물따로 음양식사법을 주장한 저자의 에세이 집이다. 못다한 이야기들을 써내려간 책이라 건강과 관련한 직접적인 정보를 원하는 사람들에겐 그다지 실용적인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책은 아니다. 이미 저자의 전작들을 읽고 그의 주장을 실천해본 사람들이 저자를 보다 더 잘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밥따로 물따로에서 중병에 걸린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실천사항은 1일 2식에 밥과 물을 따로 먹는 것이다. 아침과 저녁에 국이나 찌개없이 밥을 먹고 낮에는 물 한모금 밥한술 뜨지 않으며, 물은 오직 저녁을 먹은 후 2시간 후에만 먹으라는 처방은 굉장히 간단하고 쉬워보이지만 또한 실천하기가 결코 만만치 않은 방법이다. (물론 중병이지도 않고, 사회생활을 해 나가야 하는 나로서는 점심을 굶는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 건강지키기를 위한 기본적인 방법으로서 1일 3식에 밥과 물을 따로 먹는 방법 정도로 한번 실천해 보리라 마음은 먹어 보았다. 하지만 이것 또한 굉장히 어렵다.) 왜 밥과 물을 따로 먹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로 고체 음식은 양의 성격을 띠고 있어 낮에, 물은 음이라 저녁에 먹어야 한다는 설명이나, 기타 신체적 변화에 대한 이야기는 상식과는 조금 떨어져 있어 이해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게다가 영적인 이야기나, 외계 생명체에 대한 이야기는 다소 황당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건강에 대한 실천적 요소를 뛰어넘어 영적인 문제로 접근하다보면, 결국 종교적 색채를 띠고, 점차 사이비화 되어지지 않을까 우려되는 부분이 없지 않으나, 저자 또한 이것을 감지하고, 몸에 대한 것만을 이야기하려 한다는 점에서 안도의 숨을 내쉰다. 또한 세상은 상식으로만 이해되어지는 것도 아니고, 상식이라는 것도 세월에 따라 변해간다는 점을 상기해본다면, 몸소 실천해보고 그 변화를 체크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으리라 본다. 실천 방법이 경제적 부담이 되는 것도 아니고, 희귀한 행동을 요하는 것도 아니니, 몸의 변화를 느껴보고 싶다면 한번쯤 도전해볼만한 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 도전은 밥 한끼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우쳐주기 때문이다. 철저한 감식(소식이 아니다)방법에 따라서 오랜 세월(7년) 동안 차근히 몸에 변화를 주는 방법으로서 최종적으로는 3일에 1끼 정도(물론 목표는 안 먹고도 살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로 거뜬히 생활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실제로 일간신문에도 소개되어진 사람들의 실례로 이렇게 살아가는게 결코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에 놀라게 된다.

밥 한끼.

인류학 속에 등장하는 원주민들의 풍토 속에서도 잔치에서 먹는 것은 절대 빠지지 않는다. 남에게 은혜를 베푸는 행위나, 좀더 친숙해지기 위한 행동 중에 음식은 필수다. 굶는 것의 서러움, 배부름이 주는 안위. 식욕은 그야말로 인간 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욕망이지 않을까 싶다. 그러다 보니, 시도 때도 없이 사람들은 먹어대기 시작했고, 현대인에게 비만은 무엇보다도 인류를 위협하는 가장 두려운 질병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밥따로 물따로의 실천은 일체의 간식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리고 감식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근원적인 욕망의 제한을 그 전제로 하기 때문에 쉽지가 않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우리네 삶이 이토록 강퍅하고,  서로 물고 뜯는 이유는 보다 더 많이 먹고자 하는 이유 ‹š문이지 않은가 싶다.(극도록 단순하게 생각해보면) 만약 우리가 먹고 사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면 우리는 얼마나 평화로울수 있으며,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련지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다. 바로 그런 측면에서 감식은 세상의 평화를 향한 촛불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이유때문에 아주 간단하게 생각되어지면서도 아주 어려운 실천방법이기도 한 것이다. 이것을 진리라고 말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으나, 이 방법 또한 간단하고, 바로 우리 가까이에 있다는 점에서, 욕망의 억제를 통해 욕망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한다는 점에서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을듯 하다. 내 몸의 간단한 실천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 될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가져본다. 물론 이 책이 세상을 변화시키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몸의 건강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욕망의 통제가 가져올 수 있는 변화를 생각해보면 상상만으로도 행복하다.

한번쯤 내 몸에 대해 돌이켜보도록 하자. 정신과 육체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몸은 그야말로 세상을 바라보는 소중한 자산일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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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석을 보면 참 신기하다. 남극인지 북극인지 가르쳐주지 않아도, 스스로 끌어당긴다. 운명이란 바로 이런 맹목적 끌어당김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클레멘타인이라는 여자가 있다. 욱하는 성격이지만 쾌활하다. 조금 우울증도 있는 것 같고, 상당히 예측하기 힘든 캐릭터다. 조엘이라는 남자가 있다. 누군가에게 먼저 접근하는게 힘든 소심한 남자다. 이 둘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어느새 사랑에 빠진다.

어느날 조엘은 갑자기 일탈을 행한다. 출근 기차를 타지않고 무작정 바다로 간다. 전혀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지만 이 뜻밖의 행동은 클레멘타인과의 만남을 제공한다. 하지만 이것이 첫번째 만남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사실은 그의 과거가 잊혀지는 과정에서 밝혀진다. 

뜻밖의 만남을 통해 키워간 사랑, 하지만 너무나 다른 두 사람은 자주 다툰다. 그리고 그 다툼에 욱해 클레멘타인은 사랑했던 연인의 기억만을 지워주는 치료를 받는다. 조엘은 자신을 모른채 하는 클레멘타인에 당황해하다 사건의 전말을 알게되고 혼자만 괴로워할 수 없게된 조엘 또한 이 치료를 받게 된다. 하지만 점점 자신의 기억이 지워져가는 순간, 아무리 이별의 상처가 크더라도 꼭 간직하고픈 따뜻했던 사랑의 기억이 있었음을 깨닫는다. 기억 속에서 지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 도망가는 조엘. 그의 아픈 과거로 클레멘타인과 함께 망각의 전파를 피해 도망다닌다. 하지만 끝내 사랑의 기억을 모두 잊어버린다. 그것으로 모든 사랑은 끝이 난걸까?

사랑은 지운다고 잊혀지는 것이 아니다. 아니 잊혀진다고 정말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끌림은 마치 자석의 반대극마냥 운명처럼 다가온다. 인연의 끈은 가위로 잘라낸다고 끊어지는 것이 아니다. 결국 만나야 할 사람은 만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뇌 속에 잊혀진 기억이 모든 것을 잊게 했다고 믿어서는 안된다. 사랑에 대한 기억은 온 몸으로 기억되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지워도 지워도 사랑에 대한 대상은 결코 변함이 없다. 그것은 실험을 담당한 교수와 직원 사이에서도 드러난다. 사랑 때문에 괴로운 현실도 그 사랑을 잊는 괴로움보다 더 클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람에 대한 사랑이라는 감정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포함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선물을 준다고 해서, 또 듣고싶은 말을 한다고 해서 마음을 뺏기지는 않는 것이다. 클레멘타인의 기억을 지우는 과정에서 그녀를 사랑하게된 직원이 조엘의 노트를 보고 그녀에게 조엘처럼 대하지만 끝내 사랑을 얻지 못하는 것은 행위 그 자체 이상의 것을 사랑은 필요로 하기 때문일 것이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사랑이 잊혀지는 과정, 그리고 그 사이로 뛰어든 조수, 기억을 지우는 교수와 직원의 사랑 등등 여러갈래 얽혀진 사랑의 미로는 몽환적인 화면을 통해 잘 드러난다. 현재와 과거의 교차, 기억과 실제의 반복은 사랑의 전제조건인 인연을 설명해주는 큰 힘이 되어주고 있다.  시나리오가 훌륭한 것은 물론이려니와 그것을 화면으로 묘사해내는 감독의 탁월한 능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는 뛰어난 작품이다. 끌림은 인력으로 어찌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님을, 처절한 사랑에 대한 기억 지키기를 통해 알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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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06-06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다시 보고 싶어요..
 

영화 <킹콩>을 보면서 금발 미녀에 대한 환상, 마쵸에 대한 꿈, 또는 자연과 문명의 대립을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피터 잭슨이 리메이크한 <킹콩>이다. 나는 피터 잭슨이 감독을 했다는 이유로 <킹콩>을 보았으니 오직, 그것에 대해서만 말해보고 싶다.

피터 잭슨에게 기대한건 환타지일 것이다. 머릿 속에서 그려진 이야기가 어떻게 화면에 펼쳐질지가 최대 관심사인 것이다. 과연 킹콩은 어떤 모습을 하고 어떤 모험이 화려한 영상 속에 담겨질지가 흥미로웠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변은 찬사와 실망 양 쪽 다이다.

3시간짜리 대작, 그냥 느낀 인상대로 말하자면 1시간은 지루, 1시간은 흥미진진, 1시간은 평범하다고 할까? 누군가는 타이타닉, 쥬라기 공원 등등의 짬뽕이라고도 표현하는데 얼핏 그럴만도 하다고 생각된다. 먼저 흥미진진했던 중간 1시간에 대해 이야기하면, 정말 엄청나다라고 밖에 표현을 못하겠다. 공룡과 킹콩과의 대결은 물론이거니와 사방에서 쏟아지는 원시생물들과의 혈투는 숨을 턱 막히게 만들 정도로 화려하다. 긴장이라는 것은 놓였다 조였다 했을 때 그 극에 도달할 터인데, 이건 계속되는 초긴장 속에서도 극도의 흥분을 감추지 못하게 만들 정도다. 마치 내가 엄청안 액션 게임의 한 현장 속에 들어와 있는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다.

하지만 감독은 너무 많은 욕심을 부린게 아닌가 생각된다. 액션의 화려함뿐만 아니라 드라마적 감동도 놓치지 않으려 한 것이 오히려 독이 되지 않았나 싶다. 우린 매스컴을 통해 수많은 죽음을 접한다. 하지만 그 사건 사고 속의 죽음이 나라는 개인에게 슬픔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들과 시간을 함께 보내지도 않았고, 그들의 속사정 또한 아무 것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감독은 결말의 슬픔을 담보하기 위해 초반 너무 많은 설명을 하려한다. 킹콩과의 만남 이전의 영화 속 감독과 배우, 작가가 처한 상황을 그려보이기 위해 헛된 시간을 낭비한 듯이 보인다. 왜냐하면, 그것은 감독의 의도와는 달리 영화 종반 킹콩의 죽음 앞에서도 결코 눈물이 흐르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입부의 기나긴 설명은 너무나 지리해져버리고, 뉴욕의 도심 속 난장판은 이미 해골섬의 결투에 놀란 사람들에게 더 이상 자극을 가져오지 못한다. 그리고 굳이 오리지널과 비교할 필요는 없으나, 킹콩의 맥박이 점차 약해지는 소리로 눈물샘을 자극했던 예전 영화에 비해 오락거리로 비쳐진, 거대한 인형이 되어버린 킹콩은 그다지 슬퍼보이지가 않는다. 다만 킹콩의 풍부한 표정만이 조금 위안을 줄 뿐이다.

물론 슬픔보다 그런 오락거리로 치부되어진 킹콩의 모습에서 어떤 아이러니를 느낄 수도 있으나, 너무나 시끌벅적했던 죽음 전의 상황으로 인해 그저 3시간 동안 자리에 처박혀 얼얼해진 엉덩이만 들썩여볼 뿐이다.  물론 영화가 게임과 같을 수는 없다는 점에서 조금 이해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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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면서 깨닫는 것은 삶이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고없이 찾아오는 많은 것들로 인하여 꿈은 항상 꿈으로 그치고 마는 경우가 태반이다. 농경시대의 삶은 생노병사의 흐름이 급변하는 경우가 별로 없어서-물론 제도적 변화나 국가의 흥망으로 인한 구조적 문제를 제외하고- 예측가능한 테두리내에서 행동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도시를 한번 둘러보자. 사방에 죽음의 냄새가 깔려있고, 사랑 또한 공기 속에 부유하고 있다. 누구나 어느 순간 느닷없는 사랑과 죽음 앞에 당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음~ 이건 마치 무슨 보험 광고 같기도 하다. 실은 그렇다. 이 시대는 보험을 필요로 하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갑자기 닥칠지 모르는 무엇인가를 대비해서 어떤 준비를 해 두어야지만 살아갈 수 있는 시대인 것이다.

<외출>의 두 남녀는 이런 느닷없이 다가온 사고로 만나게 된다. 외도하는 두 남녀의 각기 다른 남편과 아내로서 만나게 된 두사람은 그야말로 느닷없이 사랑에 빠진다.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닥칠지 모르는 교통사고가 하필이면 외도하는 두 남녀에게 닥침으로써 사랑의 첫 대면을 하게되는 남녀 주인공은 혼돈스럽다. 전혀 준비되지 않은 사실(배우자의 외도)과의 만남은 혼돈이다. 사고로 누운 배우자가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하는 바람과, 살아서 변명이라도 했으면 하는 바람이 지나면 애증도 사라지고, 이해의 폭은 넓어진다. 그러나 이해는 어디까지나 이해이고, 그것이 변치않는 사랑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우연성은 <외출>의 영문제목 April snow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4월에 내리는 눈이란 무엇인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하나의 사건이다. 봄을 좋아하고, 눈을 좋아한다는 주인공의 바람을 한번에 해결시켜버린 4월의 눈은 불가능하다고 여긴 것들이 삶으로 편입되고, 가능하다고 생각한 것들이 한순간에 날아가버린(교통사고로 죽게되는 남자) 삶의 아이러니를 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사랑도 죽음 마냥 결국 누군가에게 아무런 예고없이 닥치는게 현대인의 운명이지 않을까?

그런 장난같은 운명에 우리가 그나마 위로받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동병상련. 같은 일을 같이 겪는 사람들만큼 가까워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사람들도 없다. 언제 어디서 닥칠지 모르는 사고가 주위에 널려있듯이, 특별한 경험의 공유 또한 이미 일상다반사가 되어버렸다. 사랑의 가능성 또한 일상다반사가 되었지만, 헤어짐도 마찬가지이며, 오히려 그것으로부터 초연해지기도 쉬워졌다. 그래서일까, <외출>에서 나타나는 사랑은 뜨겁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냥 흘러가는 바람마냥 세월속으로 따라간다. 하지만 그 잔잔한 흐름이 알 수 없는 애틋함을 가져다준다. 알수 없는 사이, 우리는 서로 위로가 되어준 것일까? 사랑의 종점이 과연 어떻게 될지 여전히 우리는 똑같이 알 수 없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위안은 되어주기를 바랄뿐이다.

그럼에도 아직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눈물을 흘린다는 것이다. 특히 배용준이 흘리는 눈물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 감정의 과잉처럼 느껴진다. 한 순간의 사랑이지만 헤어져야만 하는 사랑의 아픔 때문일걸까? 아니면, 자신도 이런 불륜을 해보니, 아내가 가졌던 그 불안하지만 달콤한 사랑을 이해하게 됐기 때문일까? 즉, 그 이해는 바로 불륜에 대한 이해이며, 따라서 그것은 불륜으로부터 배척당한 자기자신에 대한 존재를 자각하는 것일지도 모르기 때문일지도...

그런 감정의 과잉에 조금 영화보기가 괴로운 것을 제외하면, 영화의 끝맺음은 마음에 와 닿는다.

손예진 : 어디로 가죠?  배용준 : 어디로 갈까요? (눈이 덮힌 겨울 풍경을 배경으로 사랑에 대한 노래가 흘러나오는 엔딩장면은 크레딧의 마지막까지 시선을 사로잡아둔다 )

아무도 알 수 없다. 모든 것은 느닷없이 찾아오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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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06-06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보고 나서 책을 읽었어요. 책이 더 나았다는 기억이 나네요. 배우들의 연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나를 쳐라 - 세상을 치는 경허 스님의 죽비소리!
경허 스님 지음, 한용운 엮음, 석성우 옮김, 김홍희 사진 / 노마드북스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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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비아냥 거리는 투로 '선문답' 이라는 것은 동문서답의 다른 이름일 터이다. 물론 불교에서 선문답은 깨우침을 일으키는 대화일 터이지만 그것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지극히 어렵다는 점이 일상용어에서 조금 다른 의미로 쓰여지는 이유일 것이다.

<나를 쳐라>는 경허 스님(한 세기 전 고승으로 한용운 스님의 스승이기도 함) 의 게송과 일종의 선문답을 실은 책이다. 그래서 상당히 이해하기가 힘들다. 모든 걸 이해하기를 포기하고, 스스럼없이 읽어본다. 책의 말미에는 경허스님의 일대기가 수록되어져 있다. 중간 중간 <나는 사진이다>라는 책을 쓴 김홍희 씨의 사진이 실려있기도 하다.

먼저 사진부터 이야기 하자면 정결함을 드러냈다고 한마디로 표현하고 싶다. 고즈넉함과 깨끗함이 묻어나는 사진들은 경허스님의 말씀과 잘 어울러진듯 하다. 무엇보다도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책의 중간, 다음 페이지 간격으로 놓아둔 절의 기둥을 찍은 사진이다. 몽타쥬 효과라고 할까? 첫 사진은 뼈대만 남은 기둥 사이로 바다가 펼쳐져 보이지만 책장을 넘기면 그와 똑같은(아주 흡사한) 배열의 기둥 사이로 산이 우뚝 서 있다. 이 두 사진이 주는 감흥은 글로 표현하기에는 좀 무리인듯 싶다. 삶의 무상함이 배어나오는 듯한 인상은 독립된 사진을 통해서는 결코 찾을 수 없으리라 여겨진다.

이 책은 경허 스님이 남겨놓은 대부분의 글들을 모아놓은 것인데, 이별에 대한 싯구가 상당히 많이 눈에 띤다. 이별이라는 것의 대상이 삶인지, 속세인지, 연인인지, 가족인지, 국가인지, 욕에 사로잡힌 나인지는 독자가 판단해야 하겠지만 그 쓸쓸함만은 글 사이 사이 가득하다. 이별 이외에도 특별히 마음이 쓰이는 부분은 건강에 대한 이야기다. 마음 공부를 위해서도 꼭 필요한 건 건강이라는 스님의 말씀은 특별한 선문답이라거나, 게송이라기 보다는 나이드신 어르신께서 젊은 사람들에게 전하는 삶의 충고로 들린다. 건강을 전제로 마음 공부에 전념하라. 마음 공부는 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요, 제일 먼저 행해야 할 것은 화를 내지 않는 일로 여겨진다. 화를 내지 않는 것의 어려움은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쉽게 알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화를 내지 않는 방법은 틱낫한 스님으로부터 한 수 배워도 될 것이다. 왜 내가 이토록 화를 내는지, 그 이유에 대해 곰곰히 들여다봄으로써, 화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경지. 그것은 어찌보면 몸과 마음이 건강해야지 가능한 일이기도 할 터이니와,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만드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를 쳐라>는 나에게 새로운 화두를 하나 던졌다. 내가 받아들인 화두는 '일없이 산다는 것'

자신이 얼마나 많은 일에 치여 사는지를 한번 둘러보라. 사랑하는 사람을 자주 만날 수 없는 것도,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는 것도 모두 무엇 때문인가 돌이켜보자. 또 내가 괴로워하는 것은 무엇때문인지 생각해볼때 일없이 산다는 것은 수많은 의미를 쏟아낸다. 그냥 문자 그대로 일없이 산다는 것의 축복은 물론이려니와 스님이 말씀하신 일없이 산다는 것의 의미를 좇아 천천히 나의 마음속으로 침잠해 들어가보자.

그런데 과연 우리는 일없이 살 수 있겠는가? 내가 나일 수 있기 전에 우리는 이미 일의 포로가 되어있지는 않았는가 반성해볼 일이다. 가끔은 일없이 살아보자. 일없는 가운데 나의 참모습을 들여다보자. 시계 쳇바퀴 돌아가는 모양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과연 가능한 일일지는 모르겠으나 깊은 숲 속에 홀로 놓여진 나를 상상해보자. 아마 견딜 수 없을지도. 그렇게 놓여진 나를 견딜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나를 쳐라. 내 몸이 시퍼렇게 멍이 들어 하늘과 닮을때까지 나를 쳐라. 그래서 고독도 무상함도 모르는, 푸른 하늘에 점점히 흐르는, 가뭇없이 사라지는 구름이 되라. 일없이 나를 쳐라. 배고픔도 이상도 꿈도 모두 잊고 나를 한번 쳐라. 그 몸뚱아리에 무엇이 남아있는가?

삶의 무상함은 슬픔이 아니다. 항상 그러하지 않으니, 항상 그러한 것에 집착할 필요도 없음이요, 그러니 내가 변해가는 것을 막으려 할 필요도 없음일 터이다. 그러니 무엇인가를 애써 지키려하지 말고, 내가 찬찬히 둘러본 마음이 저절로 흘러가는대로 맡겨둘법도 하다. 나를 치니 마음이 흐른다. 아무 것도 머무르지 않음에 기뻐할 날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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