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날. 

첫날 배운 앞만 보고 달리지 말고 좌우를 둘러보라는 것. 멀리 보고 흐름을 읽으라는 것을 명심하다 보니 다른 함정에 빠졌다. 차선을 바꾸기 위해 사이드 미러를 쳐다보다 앞을 보는 것을 간혹 잊어버린 것이다. 옆 차선으로 안전하게 가기 위해 쳐다본다는 것이 오히려 지금 가고 있는 차선의 앞 차와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되 그것은 참고사항일 뿐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항상 시선은 앞을 주시해야 하는 것이다. 가고자 하는 길을 잊어버리고 눈앞의 목적만을 향해 달리다간 꽈당 충돌할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  

브레이크는 제동 즉 멈춘다는  뜻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연수강사는 브레이크는 정지가 아니라 속도조절임을 강조했다. 액셀도 마찬가지다. 액셀도 속도조절이고 브레이크도 속도조절인 것이다. 다만 더 빠르게이냐 느리게이냐의 차이일뿐. 운전은 속도조절의 능력을 갖추는 일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가끔 인생에 브레이크가 걸렸다고 말한다. 절망에 빠져 한치 앞도 움직이지 못할 것 같은 상황. 좌절하고 움츠려들며 한없는 자기 연민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멈춰 선 것이 아니다. 다만 속도를 늦췄을 뿐이다. 인생의 흐름에 과속을 막아준 일이기도 하다. 잠시 천천히 간다 해도 다시 액셀을 밟으면 된다. 늦게 도착한다 해도 좌절하지 않고 끝내 도착하는 것이 중요하다. 

브레이크도 액셀도 모두 속도조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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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전. 운전학원에서 하루 20분씩 속성으로 딱 나흘. 그리고 응시한 면허시험에 덜컥 합격해버렸다. 그 이후로 핸들 잡은 적이 한번도 없으니 이건 면허를 따나 마나한 일. 다른 사람이 운전한 차만 타고 다니다 보니 너무 편했다. 가끔, 정말 가끔 운전할 줄 알았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뿐. 귀찮고 성가신 마음에 운전석에 앉진 않았다. 그러나, 이젠 더이상 미룰 수 없게 됐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 일뿐더러 행동의 아버지였던 셈이다. 

아무튼 운전을 배우기로 결심(우습지 않은가. 운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고 쥐어준 면허증이 실제론 아무 것도 보장해 주지 못하니 말이다)하고 나서 도로연수를 신청했다. 시간당 2만원씩 10시간 20만원의 수강료. 아깝다면 아깝겠지만 차가 없는 상황에서 배우려면 별 수 없다. 또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도. 더군다나 아는 사람들은 옆에서 운전을 가르쳐주는 걸 꺼려한다. 자신의 숨겨진 성격이 확 드러날까봐. 

첫날. 액셀과 브레이크, 깜박이와 미등, 전조등 정도의 기본적인 기계 작동만 알아둔 채 바로 운전에 들어갔다. 14년 장롱인데 괜찮나요? 그냥 가세요. 제가 옆에서 보고 있으니까 겁내지 말고.  

조금은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액셀을 밟았다. 좌우 폭이 전혀 가늠되지 않을뿐더러 사이드 미러는 커녕 계기판 조차 흘끗 마음대로 쳐다보지 못할 정도였다. 정말 말 그대로 앞만 보고 달린다. 좌우를 둘러볼 여유가 없다. 인생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내가 걸어가는 길에 자신이 없고, 자꾸만 주저주저 하다보면 자신의 바로 앞만 쳐다보며 가는 삶을 살아갈련지도 모른다. 주위를 둘러보고 넓은 시야를 갖기 위해서는 많은 경험과 이를 토대로 한 자신감을 필요로 할 것이다.  

또 하나. 앞만 보고 가더라도 멀리 바라보아야 한다. 저멀리 신호등이나 교통상황 등 흐름을 먼저 읽고서 운전을 해야 방어 운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당장 눈앞의 상황만을 대처하다가는 갑작스러운 일이 발생했을 때 꼼짝못하게 될 수도 있다. 흐름을 읽는 눈. 이것은 인생에 있어서도 중요하다. 흐름을 읽지 못하면 도태될 가능성이 높다. 앞서가지 못하더라도 뒤처지지 않기 위해선 세상의 흐믈을 읽을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운전, 참 어렵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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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독 - Alpha Dog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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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독은 실제 미국에서 일어났던 납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영화는 납치된 아이를 목격한 사람들이 수십명에 달했는데도 불구하고 소년의 죽음을 막지 못했음을 보여주고 있다(영화는 목격자를 차례대로 순서를 매기면서 보여준다). 그것은 납치가 우리가 생각하는 감금의 형태가 아니라 단순히 소꿉장난 같은 모습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그 심각성을 알아채지 못했기 때문이고, 이런 평온하고 유쾌한 아이들 장난같은 모습으로 인해 결말은 보다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무엇이 이토록 젊은이들의 미래를 꼬이도록 만든 것일까

 

치기와 오기

치기란 어리고 유치한 기분이나 감정을 말한다. 그렇다면 어리고 유치하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미래를 내다보지 않고 결과에 대해 아무 생각도 없는 상태라고 할 수 있겠다. 다시말해 즉흥적인 상황대처인 셈이다. 반면 오기는 어떤가. 오기란 다가올 결말을 알면서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자세로 행동하는 자세일 것이다. 치기는 가지치기 당하듯 언젠가 떨쳐내야 할 감정이지만 오기는 불러오기처럼 때때로 내면 깊숙히 감추어두었던 마음을 밖으로 끄집어내야만 하는 상태이다.

영화 속 납치는 전혀 계획적이지 않다. 납치를 한 아이들이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 지 몰라 오히려 당황해한다. 치기였던 것이다. 그런데 아무도 그들의 치기어린 행동에 대해 따끔한 경고를 던지지 못한다. 그 과정 속에서 치기는 두려움을 증폭시킨다. 뒤죽박죽 되어버린 미래가 이성적인 판단을 흐리도록 만든 것이다. 치기가 치기로 끝나지 않고 비극으로 치닫기 시작하는 대목이다.  

아이들의 치기가 극단적인 결말을 가져온 이유는 무엇일까. 부모의 사랑이 부족했기 때문인가. 아니면 반대로 과보호 때문인가(각각 다른 아이의 부모로 나온 브루스 윌리스와 샤론 스톤의 조금은 추레한 모습과 일품 연기는 또다른 영화의 재미이다). 마약과 총이라는 매개물이 치기를 증폭시킨 것인가. 아마 이 모든 것이 아이들의 치기를 조장했을 것이다. 이 치기어린 모습 밑에 감추어진 중산층의 따분함 또한 우리는 무시할 수 없다.  

미래를 꿈꾸는 것. 혹 그것이 치기 대신 오기 부릴 줄 아는 아이들을 만들어 줄 수 있는 방법일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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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럼독 밀리어네어 - Slumdog Millionaire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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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것 빼놓고 다 안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모르는 것 빼놓곤 다 아는거. 그래서 만약에 다 아는 문제만 퀴즈로 나온다면 물론 다 맞힐 것이다. 퀴즈왕은 식은 죽 먹기인 셈.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이야기를 한마디로 줄인다면 퀴즈왕이 된 억세게 운 좋은 인도 빈민가 출신 청년의 우여곡절이라고 해야할까.  

붐베이에서 자란 형제의 서로 다른 인생역정과 사랑이야기를 담은 이 영화는 그 희비극의 결말이 판타지처럼 느껴진다. 주인공인 동생 자말의 해피엔딩은 그야말로 영화가 제시한 퀴즈의 정답처럼  '영화이니까 가능한 이야기'이다. 반면 형의 인생은 인도의 현실을 대변하고 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영화는 자말에게 집중하고 있지만 실은 형이 걸어간 길이야말로 또다른 영화보기의 한 방법일 수 있다.  

퀴즈의 정답을 맞힐 수 있었던 것이 과거 자신이 겪었던 운명적 순간들과 얽혀져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명 과정 속에서 드러난 인도의 현실은 그야말로 참혹하다. 종교전쟁으로 죽음으로 내몰린 부모와 아이들을 구걸시키도록 만들기 위해 눈을 멀게하는 폭력배, 여자아이를 돈벌이의 수단으로만 여기는 남자들, 부동산 재벌이 된 악덕 조직폭력배 두목, 하층민에 대한 편견에 휩싸인 퀴즈 진행자와 경찰 등등.  

자말과 함께 고난을 맛본 형은 소년가장이라는 위치가 주는 압박감에 자말과 다른 가치관으로 인생의 길을 선택한다. 동생을 살리기 위해 애썼던 그가 한순간 동생마저 저버린 것은 그가 부도덕하기 때문이 아니라 환경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그의 마음 속에 살아있는 도덕심은 결국 그를 비극으로 몰고 간다.  

영화는 형을 통해 현실에 적응하는 삶도 또는 현실을 뛰어넘으려는 삶도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마치 로또 같은 한방만을 기대하는 행운만을 바랄 수밖에 없음을 동생을 통해 웅변하고 있는 셈이다(영화의 해피엔딩을 해피엔딩으로 보지 못하는 것도 병이다). 9000만 인도의 하층민들이 퀴즈왕에 열광한 것은 바로 그 이유때문일 것이다(세계 10대 재벌에 인도가 가장 많다. 그들은 불굴의 도전정신으로 부를 창출했다. 마치 적립한 돈을 모두 잃을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고서 계속 퀴즈에 도전하는 자말처럼. 그러나 그 길이 누구에게나 가능한 길은 아니다. 영화 속 형이 바로 방증이다).  

벼락맞을 확률보다 낮아도 누군가는 벼락맞듯 행운을 거머쥔다. 우리는 그 행운이 나에게 떨어지기만을 바란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영화에서나 일어나는 일이다. 영화는 눈감고 싶은 현실을 담아내면서도 유쾌하게 농담 한마디를 건네며 끝을 맺는다. 우리는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 왔고 아마 또 그렇게 살아갈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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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낭소리 - Old Partner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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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을 함께 한 소와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대한민국을 들쑤셨다. 독립영화의 지루함이나 난해함이라는 편견을 뛰어넘어 사람들에게 사랑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KBS의 <인간시대>를 연상케하는 내용과 영화적 재미를 느끼도록 만든 편집과 영상이 어우러져 눈물을 뽑아낸 데에는 이땅의 아버지들이 온몸으로 보여준 헌신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옆에서 묵묵히 아버지를 견뎌낸 소가 진한 감동을 전한다. 그리고 그 감동이 힘을 얻는 것은 바로 우리의 아버지들이 바로 모든 아들들의 소였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자각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속도에 대해 

다큐 속에서는 유독 속도에 대한 은유를 내비치는 영상들이 많다. 할아버지를 태운 수레를 끌고 느릿느릿 걸어가는 소를 배경으로 그 앞길에선 오토바이가 씽하고 지나간다. 손으로 모내기하고 있는 할아버지의 논 뒤로 이앙기의 속도는 더욱 빨라보인다. 추수 장면도 마찬가지다. 낫으로 일일이 벼를 베는 할아버지와는 상대도 안되는 빠르기로 콤바인이 지나간다. 할아버지는 넋두리로 "알갱이를 많이 떨어뜨리지 않으려면 낫으로 베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결국 콤바인의 힘을 빌린다. 그나마 자식들의 성의라고나 할까. 그렇게 아버지의 속도는 결국 사라져간다. 

생명에 대해 

그래도 더디가는 걸음 속에선 생명이 살아 숨쉰다. 영화 속 인서트 컷 속에선 생명에 대한 찬가가 엿보인다. 개구리를 비롯해 논에서 살고 있는 생명들의 아름다움은 결코 말로써는 표현할 수 없다. 이것은 모두 할아버지의 고집 덕분이다. 농약을 쓰지 않고 농사를 짓는다는 것의 참뜻을 보여 주고 있다. 소위 친환경, 유기농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힘든 과정을 통해 탄생하는 것인지 또한 지켜볼 수 있다. 할머니의 한탄과 볼멘소리가 결코 엄살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렇기에 할아버지의 고집이 더더욱 존경스러워진다.  

삶에 대해 

토사구팽.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는 버려지는 법. 자식들은 할아버지에게 다 늙어 소용없는 소를 팔라고 한다. 물론 토사구팽의 마음은 아닐 것이다. 할아버지가 불편한 몸으로 일을 하는 것이 안쓰러워서였다. 소가 없으면 일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구동성으로 소를 팔라 한 것이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죽을 때까지 일을 손에서 놓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이땅의 아버지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오직 그것만이 전부라고 배웠으니까. 그럼, 아버지들의 피와 살을 먹고 자란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마음 한구석이 서늘하지만 그래도 너무나도 우직했던 소의 눈물을 흘리고 싶진 않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떠나는 길, 웃으며 갈 수 있는 그런 삶을 배워야 하는 시대가 온 것은 아닐까. 실은 그래서 필요한 것이 생명이요 느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영화는 '헌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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