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천의 공부 - 어떻게 배우며 살 것인가
최재천.안희경 지음 / 김영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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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 딸내미가 묻는다.

"아빠, 지구의 암석 종류와 성질을 왜 알아야 돼? 그리고 수학은 왜 하는거야?"

ㅋ 자기가 힘들어 하는 과목에 대해서만 왜?라는 질문을 갖는 거 아니야? 라는 의구심과 함께 뭐라고 답해야 할지 순간 막막했다. 

뭐, 정해진 답은 있다. 

"네가 발 딛고 있는 지구라는 땅 덩어리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수학은 문제를 푸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의 논리적 사고를 키우는 것이 중요해"

전혀 설득력이 없지만, 일단 물음에 대한 두루뭉술한 답은 된다.^^;;;

솔직히 전혀 관심도 없고, 삶을 살아가는데 도움도 주지 못하는 지식을 배우고 익혀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좋은 점수를 얻고 좋은 대학에 가서 좋은 직장에 취직하고자.....

아? 그런데 다른 사람에게 '좋은' 것이 내게도 '좋은' 것일까?

 

아무튼 일단 생존을 위해서라도 공부는 필요하다. 아무 것도 배우지 않는다면 생존하는 것 조차 어렵다. 횡단보도를 어떻게 건너야 할지, 음식은 어떤 것을 먹어야 할 지부터 시작해 세상의 많은 지식을 살기 위해서는 배워야 한다. 그리고 '살기 위해서' 너머에 '함께' 살기 위해서는 더 공부할 것이 많아진다. 공부를 나누는 법 마저도 공부해야 한다. 아무튼 인간적 삶은 공부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인간적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어떤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할까.


책 <최재천의 공부>는 우리 시대 통섭의 대가 최재천 교수가 자신이 살아온 과정 속에서 해왔던 공부와 앞으로의 세대에게 필요한 공부가 무엇인지를 안희경 저널리스트와 대담한 내용을 담고 있다. 십분 공감하는 내용이 많지만, 현재의 제도 아래에서 진짜 삶에 필요한 공부가 가능할까?라는 의구심은 더욱 커진다. 앞으로의 세대에게는 20세기에 했던 공부의 내용과 방법이 전혀 도움을 줄 것 같지 않은데도 대한민국의 교육 현실은 좀처럼 바뀔 기미가 없다. 과연 지금과 같은 방식의 공부가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책임질 수 있을까.    


딸내미에게 학교 성적보다는 이것 저것 많이 경험해보고 부딪쳐 보라고 이야기 하지만, 내향적 성격의 아이에겐 이런 시도가 오히려 더 어려울 지도 모른다. 공부는 온 몸으로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은 확고하지만 아이의 학업 성취도와 성적엔 어쩔 수 없이 관심을 갖게 된다. <최재천의 공부>에서 말하는 공부의 자세가 현실의 아이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과연 우리의 아이들과 함께 삶의 공부를 실행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최재천의 공부>가 말하는 공부의 의미와 자세에 대해선 우리의 다음 세대와 함께 고민하고 해결해 가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공부가 힘들어도 즐거운 일이 되기를 희망해 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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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영화 <하이재킹>은 1971년 발생했던 대한항공 F27기 납북 미수사건을 바탕으로 제작됐다. 등장인물이 조금 다르고, 실제 범행을 저질렀던 테러범이 사건 당시 죽으면서 사건을 일으킨 동기가 밝혀지지 않았지만, 영화 속에서는 연좌제로 남한에서 고통받는 삶을 사는 것이 죽음보다 못하다는 범죄의 동기를 밝히며 사건을 재현한다. 

영화 <하이재킹>은 범인인 용대(여진구)와 부기장 전태인(하정우)의 대결에 집중하고, 그외 인물들의 서사는 최대한 생략하고 있다. 이런 단순명료함이 영화의 강점으로 작용한다. 한눈 팔지 않고 끝까지 여객기 납치라는 사건에 집중하게 만든다. 영화 <비상선언>이 다양한 인간군상을 표현하려다 길을 잃고 헤맨 것을 타산지석으로 삼은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 그런데 연좌제도 사라진 지금 이 시점에서 50여 년 전 발생했던 사건을 영화로 만든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굳이 의미를 찾지 말고 재미만 추구하면 되려나. 하기야 실제 사건이 워낙 영화 같은 사건이었으니, 말 그대로 영화화해 보고 싶다는 욕심은 생겼을 법도 하다.  


2. 영화 <하이재킹>은 전태인의 희생정신을 돋보이게 한다. 전투기 조종사일 때도 민간 항공기 승객들의 목숨을 앗아갈 수 없어서 비행기를 격추시키지 않고 납북 되도록 놔둠으로써 강제 전역을 당했다. 항공기 조종사일 때는 승객들의 안전을 위해 자신의 목숨마저도 내거는 용기를 낸다. 그런데 실제 발생했던 1971년의 사건에서도 폭탄을 끌어안고 자신을 희생한 조종사가 있었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다. 과연 이런 희생정신은 어디에서 나올 수 있을까.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상상불가한 일이다. 이들을 기리는 것은 아무리 해도 지나치지 않을 성싶다.


3. 용대가 납북을 결심한 것은 2년 전 발생했던 납북 비행기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보도를 통해 납북을 실행한 범인이 북에서 영웅 대접을 받고, 특히 200만불의 돈을 수령했다는 소식이 용대를 자극한다. 비참하게 사느니 한 번 도박을 걸어보겠다는 심산. 그렇지만 그 와중에 타인의 목숨을 담보로 한다는 비겁함마저 용납되어서는 안될 일일 것이다. 

여기서 개인적으로 주목한 것은 납북 보도의 태도다. 납북을 저지른 이가 영웅이 되고, 덤으로 거액의 돈까지 하사받았다는 것을 굳이 보도할 필요가 있었을까. 이 사실이 어떤 이들을 자극할 수 있는 방아쇠가 될 것이라는 생각은 티끌만큼도 하지 않았을까. 사실만을 보도한다고 해서 자신의 역할을 다 한 것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 사실보도를 통해 어떤 반응이 올 것인지 까지를 고민하고 숙고하고, 토론하는 자세가 필요해 보인다. 요즘 넘쳐나는 언론 매체와 황색 저널리즘을 보면 특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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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도 비슷하고(한 살 차이) 커리어도 크게 차이 나지 않는 두 사람. 21세기 남자 테니스를 이끌고 갔던 나달과 조코비치가 파리 올림픽에서 맞붙었다. 하지만 나달은 부상 이후 최고 기량을 되찾지 못하고 있고, 조코비치는 여전히 최고 기량을 선보이고 있다. 나달은 세계 순위에서 100위권 밖으로 밀려나 있지만 클레이 코트에서 강점이 있다는 것이 변수라면 변수라 할 수 있다. 


드디어 두 선수가 맞붙었고, 1세트는 6-1로 너무나 쉽게 조코비치의 승리로 끝났다. 이어진 2세트에서도 4-0까지 몰린 상황, 많은 사람들이 예상했던 대로 조코비치의 손 쉬운 승리로 끝을 맺는가 싶었다. 하지만 반전이 일어났다. 나달이 한 점 한 점 쫓아가기 시작했다. 4-1에서 4-2, 그리고 4-3까지, 드디어 4-4 동점을 이루었다. 관중들은 긴 랠리가 이어지다 나달이 승리를 거머쥐면 두 손을 번쩍 들고 환호성을 내질렀다. 실제 나달의 모국인 스페인을 응원하는 사람이 많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아마도 '언더독 효과'이지 않을까 싶다. 약자에 대한 응원. 그의 승리를 통해 실패를 수없이 맛보는 평범한 사람들이 성공에 대한 대리만족을 할 수 있다는 쾌감 말이다. 나달에 대한 응원은 더욱 거세어진다. 언더독의 반란은 성공할 수 있을까.


하지만 결국 조코비치의 승리로 경기는 마무리됐다. 조코비치는 나달에 대해 환호성을 지른 관중을 향해 자신에게도 응원을 보내라는 제스처를 보인다. 물론 승리를 거둔 조코비치에게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한 나달을 향한 응원을 거둘 수는 없다. 올림픽에서 볼 수 있는 멋진 경기였다. 그리고 그보다 더 멋지고 감동적인 응원이 있었다. 현실에서는 도외시되거나 내팽개쳐지기 일쑤인 '언더독'들에게도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지고, 응원의 박수를 보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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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화 <더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2023년 제76회 칸 영화제 심사위원대상, 사운드트랙 수상.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 장편국제영화상 및 음향상을 수상했다. 아우슈비츠 유대인 학살 장면은 단 한 컷도 없지만, 그것을 상상하게 만드는 소리로 울림을 주는 영화. 사운드트랙과 음향상을 수상한 이유이기도 하다. 


2. 독일 장교 루돌프 회스와 그의 아내가 꾸려가는 집과 정원을 영화 내내 보여주지만, 머릿속에서는 이 집의 담 너머 들려오는 총소리와 비명, 굴뚝 연기를 통해 비참한 장면을 떠오르게 만든다. 하지만 너무나 평온하고 지극히 따분할 정도의 일상이 시종일관 비쳐지면서 감독의 의도와는 다르게 개인적으론 비극의 강도가 오히려 덜어진 느낌이다. 물론 많은 이들은 그와 같은 극명한 대조를 통해 비극이 강하게 드러난다고 평하고 있지만.  


3. 이 영화는 그야말로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 '악의 평범성'을 보여주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유대인 학살을 저질렀던 이들이 뿔 달린 악마가 아니라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주장. 상부의 명령에 복종하며 그 일의 도덕성 등을 판단하지 않고 그대로 수행하는 관료적인 사람일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판단력을 잃어버리고 체제에 갇힌 평범한 사람들의 각성이 필요한 셈이다. 하지만 영화 <더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주인공 루돌프는 자신의 행위를 돌아보고 도덕적 판단을 내려, 반성하고 바로잡을 수 있을까. '악의 평범성'이 지닌 한계일 수도 있겠다.  


4. 루돌프의 관심은 상부로부터의 인정과 승진이다. 그래서 유대인 학살을 더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회의를 통해 소각장 설계를 새롭게 하는 등 일중독에 빠져 있다. 그의 아내는 집을 가꾸기 위해 정원을 디자인하고, 풀장을 만들고, 아이를 키우며 자신의 파라다이스를 만들어 간다. 남편의 전근 소식에도 남편 만을 전근지로 보내고, 자신은 이곳에서 아이들과 남겠다는 결의까지 보인다. 이곳의 여인들은 유대인 학살로 남겨진 옷과 장신구 등등에서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서스럼없이 가져온다.  


5. 루돌프 집을 둘러싼 담 너머는 유대인 수용소이자 소각장이다. 이들은 유대인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총소리와 비명은 그저 생활소음에 그친다. 아니 애당초 그들의 귀에 들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이 장면에서 상상력이 중구난방으로 날뛰며,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곳도 담을 치고 담 너머에 소, 돼지, 닭을 키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한다. 조금 도를 지나친 상상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생명을 함부로 다루면서 우리도 모른 척 일상을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사람을 넘어 동물로 그 대상을 확대해 본다. '살상의 평범성'이라고나 해야할까.


6. 루돌프가 아이들을 보트에 태우고 강물을 오가고, 자신은 낚시를 즐긴다. 그런데 강물에서 뼛조각을 발견한다. 강물에 떠다니는 재와 뼈. 물은 담을 넘어 흘러간다. 아무리 눈에 보이지 않게 감추어 놓아도 그 흔적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 루돌프는 황급히 아이들을 보트에 태우고 집으로 돌아와 마치 자신의 범죄를 모두 씻어내리는 냥 온몸을 박박 씻어낸다. 아이들도 재차 씻기고 또 씻긴다. 하지만 강물의 재는 씻겨내려가더라도 그의 죄는 씻겨 내려가지 못했을 것이다.


7. 루돌프 가족을 바라보던 카메라는 갑자기 수용소의 남겨진 신발들을 전시해 놓은 현재의 전시관 모습을 비친다. 순간 편집 사고처럼 느껴질 정도의 이질감. 관리하는 사람들은 이 전시관의 유리를 박박 문질러 닦고, 바닥도 청소한다. 또다시 씻어내는 이미지들. 이번엔 씻음을 통해 과거의 잔혹한 역사가 보여진다. 감추어진 것들이 드러나는 것이다. 죄악은 아무리 담을 쌓아 견고히 감추려 해도 결국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평범한 악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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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화 <콰이어트 플레이스> 시리즈의 스핀오프. 1,2편 보다 앞선 시기로 소리내는 대상을 향해 사냥을 하는 괴생명체의 소동이 시작된 첫날을 그린다. 1,2편의 각본과 감독을 맡았던 존 크랜시스키는 이번 작품의 제작자로 나섰다. 아마도 시즌3 감독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 싶기는 한데. 아무튼 이번 <첫째날>은 배경도 주인공도 모두 다른 별개의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소리가 주는 긴장감과 공포는 약해졌고, 드라마적 요소가 더 짙어졌다. <콰이어트 플레이스>의 최대 강점이 사라져 아쉽다.


2. 영화 <콰이어트 플레이스 첫째날>은 제목처럼 이 이야기의 시작을 알린다. 하지만 궁금증은 거의 풀리지 않는다. 1,2편의 각본가이자 감독이었던 존 크랜시스키가 인터뷰를 통해 "괴생명체는 지구보다 기압이 더 센 곳에서 운석을 타고 지구에 온 존재"라고 밝혔지만, 더 상세한 설명은 전혀 없다. 이번 영화 <첫째날>에서는 다만 운석을 타고 날아온 모습만 살짝 비쳐줄 뿐이다. 궁금증 해소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도대체 왜 지구를 선택해서 왔는지는 이제 시리즈의 마지막 편에서 확인할 수 있으려나?


3. 이번 영화의 주인공은 암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은 환자 사미라다. 그녀는 삶의 의욕이 없지만, 죽기 전 마지막으로 뉴욕 맨해튼 할렘가에 있는 팻시스 피자 한 조각을 먹고자 한다. 죽음 앞에서도 냉소적이었던 그녀가 괴생명체로부터 벗어나 기어코 살고자 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스포일러 있음)

그 피자는 아버지와의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자신을 사랑해줬던 아버지와의 추억을 되새기며 자신의 인생을 매조지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번 영화가 스릴러의 매력을 잃어버리고 휴먼 드라마에 가까워진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전편에서 한적한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하지 않고 시끄럽고 복잡한 대도시 뉴욕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성격을 띠고 있기도 하다. 


4. 가족과 사랑을 담고 있는 피자와 함께 이번 영화가 휴먼 드라마로 흐른 것은 타인에 대한 친절을 표현하고 있어서다. 분수대에서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준다거나, 남자 주인공이 목숨을 무릅쓰고 진통제를 찾아 나서는 장면은 이번 영화가 지향하는 바를 보여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괴생명체 또한 이런 모습을 살짝 보여준다. 지하 터널 속에서 먹잇감(이 먹잇감이 무엇인지도 궁금하다)을 발견한 괴생명체가 소리를 내어 동료들을 부른다. 그리고 그 먹이를 같이 먹는다. 이들 또한 협력을 하는 생명체임을 보여주고 있다. 


5. 겁 많은 남자 주인공 에릭은 로스쿨을 다니기 위해 영국에서 뉴욕으로 온 젊은이다. 홀로 있는 것이 두려운 에릭은 우연히 만난 사미라의 서비스캣 프로도를 만나고, 고양이가 이끄는 곳으로 향하다 사미라를 마주친다. 그 뒤로 에릭은 사미라와 함께 하고자 한다. 겁 많은 그가 용기를 내어 괴생명체의 위협으로부터 탈출하고자 할 수 있었던 것은 사미라와 프로도 덕분이다. 


6. 영화 <콰이어트 플레이스 첫째날>에서는 괴생명체(관객들 사이에서는 데스엔젤이라 불리운다)에 저항하는 모습이 전혀 없다. 맞서 싸우지 못하고 그저 도망치기에 바쁘다. 먹이사슬에서 절대 약자인 셈이다. 지구의 최강 포식자인 인간이 과연 이렇게 피식자로만 남을 것인가? 3편이 기대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7. 사족 : <콰이어트 플레이스 첫째날> 여주인공 사미라는 폐허가 된 서점 앞에서 책을 한 권 집어든다. 그 책은 옥타비아 버틀러의 <새벽>이라는 SF소설이다. 옥타비아 버틀러는 1947년생인 흑인 여성으로 휴고 상과 네뷸러 상은 물론 SF 소설작가로는 최초로 천재상이라고 불리는 맥아더 펠로우십을 수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감독이 이 작가에 대한 오마주로 이 장면을 삽입한 것인지, 아니면 소설 <새벽>이 지구인과 외계생명체와의 합일(?)을 소재로 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앞으로의 영화 전개를 암시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결국 시리즈의 결론이라 할 수 있는 3편이 나와봐야 모든 걸 알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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