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스페셜 <끼니 반란>에서 소개된 간헐적 단식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고 있다. 1일1식의 열풍과 맞물려 가끔씩 단식을 해주는 것이 건강할 수 있다는 생각에 귀가 솔깃해진 것이다. 이번 <끼니 반란>은 당연시 또는 상식이라 생각했던 하루 세끼라는 생각에 대해 의심 내지 의문을 품게 만들었다는 측면에서 그 가치를 높이 사고싶다. 이번 방송으로 인해 무엇을 먹느냐  또는 어떻게 먹느냐에 대한 관심에서 언제 먹느냐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그런데 건강을 위한 이런 다양한 먹는 방법들은 일견 단순하게 생각해볼 수 있는 문제다. 바로 우리 인간이 어떻게 진화해 왔는가를 살펴보면 그 해답이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가끔 먹고 또한 가끔 고기를 먹었을 뿐이다

채식이냐 육식이냐, 생식이냐 화식이냐?  아직도 논란 중인 무엇을 먹을 것인가와 어떻게 먹을 것인가에 이어 이번엔 언제 먹을 것인가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됐다. 그런데 인류가 진화해 온 길을 더듬어 보면 언제 어떻게 무엇을 먹어야 건강해 질 수 있는지를 선택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인간이 인간으로 진화할 수 있었던 것은 불의 발견이 크다. 특히 이 불을 통해 요리를 할 수 있게 되면서 뇌가 폭발적으로 발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요리 본능>이라는 책을 보면 인류가 다른 영장류와 다른 진화의 길을 걷게 된 것을 불을 통한 요리로 보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생식을 고집할 필요가 없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불을 통한 요리라 하더라도 주로 우리는 곡류와 열매, 뿌리, 채소 등을 먹어왔다. 고기는 가끔, 정말 운수좋은 날 사냥에 성공했을 때나 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이런 사냥을 떠나는 남성들은 매끼니를 챙겨먹을 수도 없었을 뿐더러 푸짐하게 먹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즉 완전채식이 아닌 가끔씩 먹는 육식, 그리고 하루 한두끼의 식사가 인간이 걸어온 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하나 주목할 것은 채식이라 하더라도 지금처럼 기름을 많이 먹진 않았다는 것이다. 요리를 할 때 두르는 그 식물성 기름들을 말하는 것이다.

아무튼 현재의 우리 몸은 바로 이런 식사 습관에 맞추어져 왔을 것이다. 그러니 현재 우리의 육류 위주 식습관과 하루 3끼 이상의 과다한 식사시간이 우리 몸을 아프게 만드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반대로 이런 병폐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극단적인 채식과 생식을 고집하는 것도 몸에 무리가 가는 일일지도 모른다. (물론 종교적인 이유나 신념에 의한 이유는 제외다. 건강상의 이유로 택했을 때의 경우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옛날 옛적에 먹던 것과 지금의 것이 같을까

여기서 한가지 더 고려해봐야 할 것이 있다. 예전 사냥을 해서 먹던 고기와 지금 곡물을 먹고 자라는 고기가 같은 것일까? 하는 점이다. 흔히들 말하는 오메가 3와 오메가 6 성분비가 확연히 다르는 등 두 고기의 질이 차이가 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또한 자연에서 자란 채소나 과일의 성분과 농약과 비료를 먹고 자란 식물들의 영양성분도 비교해봐야 할 점이다. 게다가 냉장기술의 발달로 장기간 보관이 가능해지고, 또한 계절을 잊고 나오는 음식들이 제철 노지에서 갓딴 자연식품들과 어떻게 다른지도 살펴봐야 한다. 현재 우리가 먹고 있는 채소와 과일들은 예전 우리 선조들이 먹던 것들보다 무기질, 비타민 등이 적게 함유되었을 가능성말이다. 바로 이 부분 때문에 현재 우리 인류가 자꾸 과식을 하게 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또 한편으론 다양한 채식이 가능해지면서 필수영양소를 대부분 섭취할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 굳이 육식을 해야 하는가도 고려해볼 문제다. 육식에 대한 탐닉이 공장식 축사로 이어지면서 생명경시와 환경오염을 부추기는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풀을 먹이는 생태적 가축기르기로 극복될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렇게만 된다면 꼭 채식만이 건강하면서도 생태적 내지 도덕적 음식섭취법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튼 <끼니 반란>을 통해 우리의 관심사가 무엇을 어떻게 먹을 것인가를 넘어 언제라는 시간이 개입된 건 틀림없어 보인다. 이 세 요소들은 개인이 처한 환경에 따라 다양한 변주가 가능할 것이다. 방송 말미 경고에도 나오듯 청소년이나 임산부의 경우엔 단식이 해가 될 수도 있는 문제다. 나의 처지에 맞추어 알맞은 방법을 찾되 우리 인류의 몸이 어떻게 진화해 왔는가를 생각해 보면 참고가 될 것이다. 

한편으론 먹는 방법이 개인의 건강을 넘어 인류의 건강에 대한 관심까지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바로 먹을거리를 얻는 방법에 대한 고민말이다. 우리가 무엇을 먹고 있는지는 알고 먹었으면 좋겠다는 뜻이다. 동학이 말하듯 우리 생명은 다른 생명을 먹고 그 고귀함을 이어가는 존재이지 않는가. 생명을 먹는다는 생각을 잊어버리게 만드는, 공산품마냥 생산되는 현재의 먹을거리에 대한 성찰도 함께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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틱낫한 스님은 우리가 유기농부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과일이나 채소를 가꾸는 농부들처럼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가꾸는 농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초제를 뿌려 잡초를 제거하는 관행농이 아니라 거름을 주며 풀 한포기포기마다 손길을 주는 유기농부처럼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두려움이나 절망, 증오같은 감정을 애써 억누르거나 감추려할 필요는 없다. 또는 애써 그러한 감정들이 없는척, 태연한척 가장할 필요도 없다. 두려움, 절망, 증오, 화를 잘 다스려 거름으로 바꾸어 사랑이 피어나게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부정적이라 여기는 감정들도 바로 우리의 감정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잘 달래고 쓰다듬고 안아주어 사랑의 거름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자각이 중요하다. 호흡과 보행을 자각하는 수행을 통해 우리의 감정도 자각할 수 있는 능력을 쌓을 수 있다. 자각은 집중과 통찰로 이어져 결국 남을 사랑하고 이해하고 용서하는 마음을 갖도록 할 것이다.

그렇다. 사랑을 꽃피우려는 우리는 감정의 유기농부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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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의 몸과 인문학 - 동의보감의 눈으로 세상을 보다
고미숙 지음 / 북드라망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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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이란 무엇인가? ... 삶이 왜곡되면 생리적 리듬도 어긋나게 마련이다. 가족을 지키기 위한 전쟁도, 지순한 사랑의 파토스도 삶에 대한 통찰로 이어지지 않으면 다 병이 된다. .. 건강은 삶에 대한 지혜와 분리될 수 없다. 인도의 아유르베다 의학은 병을 지혜의 결핍으로 정의한다. 동의보감의 의학적 비전인 양생술은 원칙적으로 유불도 삼교회통을 추구한다. 그리고 그 수행의 핵심은 비움이다. 무지와 탐착이야말로 만병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양생술이란 무지로부터의 자유, 곧 내 안에 있는 지혜를 일깨우는 과정이기도 하다. 지혜의 핵심은 소통이다. ... 소통하지 않는 삶은 그 자체로 병이다.

 

아프고 괴로우면 그때 비로소 세상과 타인이 보인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인들이 앓는 마음의 병은 놀랍게도 그 반대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불행해 왜 사람들은 나만 미워할까 등등. 오직 자신만을 바라본다. 다른 사람의 고통과 불행은 안중에도 없다. 그만큼 타인의 삶에 무관심하다. 더 정확히는 타인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역지사지라는 윤리가 사라져버렸다. 대신 타인의 시선을 사로잡겠다는 인정욕망은 하늘을 찌른다.

 

불행을 위해 태어나는 인간은 없다. 생명의 본질은 비극이 아니라 명랑함이다. ... 존재 안에서 생명의 리듬을 찾아내고, 그걸 통해 사회적 표상과 통념을 날려 버리는 능력, 그것이 곧 유머요 명랑함이다.

 

연애와 성욕으로 이루어진 홈 파인 회로를 벗어나려면 혹은 가족이 타자들의 공동체가 되려면, 무엇보다 우정과 신의라는 가치의 복원이 절실하다. 그런 점에서 우정은 윤리적 덕목을 넘어 정치적 명제에 해당한다.

 

마을은 공동체의 최소단위다. 마을을 움직이는 동력은 제도나 시스템이 아니다. 자치와 자율이다. 전자가 경제적 자립에 관한 것이라면, 후자는 윤리적 주권에 대한 것이다. 가족의 울타리를 벗어나는 길, 가족주의의 늪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이것뿐이다. 121

 

잠을 잘 자기 위해서도 그렇지만, 특히 집중력이 생기려면 청심을 유지해야 한다. 부질없는 욕심을 덜어내야 한다는 뜻이다. 동의보감은 말한다. 심이 고요하면 신명과 통하여 문 밖을 나가지 않아도 천하를 알고 창밖을 보지 않아도 하늘의 도를 알게 된다. 그때 비로소 존재의 무게중심을 오롯이 걸게 된다. 마음을 비운 채 온몸으로 터득하는 것, 그것이 공부이자 곧 쿵푸다. 136

 

언어는 자신과의 소통이자 타자와의 능동적 교감행위이다. 이 소통과 교감의 욕망이 서사를 구성한다. 그러므로 서사는 그 자체로 집합적이다. 여기서는 다다익선의 법칙이 아니라 각자의 개성과 차이가 더 핵심이다. 타자들의 시끌벅적한 향연, 그것이 곧 서사적 네트워크요 길이다. 따라서 이 길 위에선 늘 유머가 생성된다. 유머는 단순한 웃음이 아니라 기존의 통념과 질서에 균열을 일으키는 역설 혹은 아이러니다. 이 전복적 여정 위에서 또 다시 삶의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다. 고로, 서사와 유머야말로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는 최고의 다리다. 169

 

평생 돈을 벌기 위한 노동을 하고 섹스와 번식 이외에 어떤 삶의 기쁨도 누릴 수 없었던 노예의 삶이 그토록 그립단 말인가? 또 사랑과 연애만 잘 되면 생로병사의 근원적 문제가 풀릴 수 있다고 믿는가? 그렇지 않다.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삶을 규정하는 그 같은 전제를 바꾸지 않고서 좋은 팔자란 결단코 불가능하다. 그 안에서는 모든 것을 다 가져도 결핍 아니면 공허다. 상처뿐인 영광 혹은 팔자. 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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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의 몸과 인문학 - 동의보감의 눈으로 세상을 보다
고미숙 지음 / 북드라망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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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저 세상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마냥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에도 각자의 독특한 방식이 있게 마련이다. '나는 아무런 방식없이 살아간다'는 무방식도 하나의 방식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 방식이 죽을 때까지 고정된 것은 아니다. 수십년을 한결같이 살 수도 있지만 순간순간 방식이 변할 수도 있다. 다만 이러한 방식에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관여되고 있을 뿐이다.

고전평론가 고미숙이 동의보감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이야기를 썼다. <몸과 인문학>이라는 책에서는 성형, 연애, 가족, 드라마, 영화 등등 일상 속 모습들이 동의보감이라는 안경을 쓰고 비쳐진다. 그런데 그 모습들이 어딘지 모르게 병들어 있는 상태다. 동의보감이 말하는 건강과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은 말한다 "건강이란 무엇인가? ... 삶이 왜곡되면 생리적 리듬도 어긋나게 마련이다. 가족을 지키기 위한 전쟁도, 지순한 사랑의 파토스도 삶에 대한 통찰로 이어지지 않으면 다 병이 된다. .. 건강은 삶에 대한 지혜와 분리될 수 없다. 인도의 아유르베다 의학은 병을 지혜의 결핍으로 정의한다. 동의보감의 의학적 비전인 양생술은 원칙적으로 유불도 삼교회통을 추구한다. 그리고 그 수행의 핵심은 비움이다. 무지와 탐착이야말로 만병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양생술이란 무지로부터의 자유, 곧 내 안에 있는 지혜를 일깨우는 과정이기도 하다. 지혜의 핵심은 소통이다. ... 소통하지 않는 삶은 그 자체로 병이다."

 

이런, 또 소통이다. 정치권을 강타하고 있는 소통의 문제가 건강의 관점에서도 말썽이다. 소통의 부재라는 한탄은 결국 사회적으로 병이 들어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개인 또한 마찬가지로 병마에 시달리고 있다. 한없이 채우려고 하는 욕망들로 들끓어 있기에 소통의 공간이 부재한 것이다.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꽉꽉 채우려다 보니 욕망의 변비가 생겨 얼굴엔 일그러진 표정들 뿐이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비움이고 그 비움은 바로 명랑에서 시작될 수 있다. 이것은 고미숙이 줄곧 이야기해 왔던 박지원과 임꺽정, 그리고 동의보감으로 이어지는 서사와 유머라는 문맥과 상통한다.

 

고미숙은 말한다. "불행을 위해 태어나는 인간은 없다. 생명의 본질은 비극이 아니라 명랑함이다. ... 존재 안에서 생명의 리듬을 찾아내고, 그걸 통해 사회적 표상과 통념을 날려 버리는 능력, 그것이 곧 유머요 명랑함이다."

 

생명이 가장 두려워하고 피하고자 하는 것은 죽음이다. 그런데 그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는 생명들이 있다. 바로 슬픔과 고통 때문이다. 그렇기에 살아간다는 것은 일단 슬픔과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욕망일 수도 있겠다. 그러한 욕망의 표현이 바로 명랑함일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명랑한 사람들과 함께 하고자 한다. 명랑함은 곧 소통의 전제조건이 될 수도 있다. 비로소 건강함으로 가는 길이 시작되는 것이다.  

  

언어는 자신과의 소통이자 타자와의 능동적 교감행위이다. 이 소통과 교감의 욕망이 서사를 구성한다. 그러므로 서사는 그 자체로 집합적이다. 여기서는 다다익선의 법칙이 아니라 각자의 개성과 차이가 더 핵심이다. 타자들의 시끌벅적한 향연, 그것이 곧 서사적 네트워크요 길이다. 따라서 이 길 위에선 늘 유머가 생성된다. 유머는 단순한 웃음이 아니라 기존의 통념과 질서에 균열을 일으키는 역설 혹은 아이러니다. 이 전복적 여정 위에서 또 다시 삶의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다. 고로, 서사와 유머야말로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는 최고의 다리다. 169쪽

 

한마디로 웃기는 이야기 좀 하며(만들어가며) 명랑하게 살아보자. 그런데 도통 그게 쉬운 일이 아니다. 혹시 마음억은 대로 잘 되지 않는다면 건강을 위해 아침운동을 하듯 이제부터 명랑운동을 시작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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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고 싶었던 세계 - 하버드대 종신교수 석지영의 예술.인생.법
석지영 지음, 송연수 옮김 / 북하우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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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서울 출생. 아메리칸발레학교에서 발레리나를 꿈꾸었으며, 줄리아드 예비학교에서 피아노를 전공했다. 영재학교 헌터스쿨을 졸업하고 예일대에 입학하여 프랑스문학을 공부했으며, 마셜 장학금의 지원을 받아 영국 옥스퍼드대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1999)를 받았다. 이후 법의 매력을 발견하여 하버드법대(2002)에서 법을 전공했다. 미국 대법원 법률서기, 뉴욕 맨해튼검찰청 검사로 재직했다. 법률교육에 대한 열정으로 교수직에 지원했고, 2006년 한국계 최초로 허버드법대 교수에 임용되었다. 그리고 4년 만인 2010년 교수단 심사를 만장일치로 통과, 아시아여성 최초로 하버드법대 종신교수로 선출되었다. 현재 하버드법대에서 법률교육에 대한 창의적인 교수법과 새로운 발상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상은 석지영 교수에 대한 프로필이다. 아마도 사람들은 예일대, 옥스퍼드대, 하버드대학이라는 그녀의 스펙에 입을 다물지 못할 것이다. 스펙만이 살 길인 것처럼, 벽돌을 쌓듯 쌓고 또 쌓고자 하는 젊은이들에겐 거의 신과 같은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또한 그렇게 아이를 기르고자 하는 부모들에겐 가히 경외할만한 롤모델일 수도 있겠다. 이 책이 쓰여진 배경도 한국사람들의 요구에 의해서라고 하지 않던가. 이땅의 부모들이 그녀가 어떻게 살아왔으며, 어떻게 공부했는지 알고싶어하자 그녀가 펜을 든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어본 부모들 또는 청년들은 좌절하리라. 만약 석지영 교수가 한국에서 자랐다면 결코 이루어낼 수 없는 스펙이었음을 깨우치게 될테니까 말이다.

 

위의 프로필에서처럼 석교수는 청소년기 피아노와 발레에 빠졌다. 당연히 학교 성적은 우수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예일대에 합격할 수 있었다. 그녀의 능력을 간파하고 인정한 대학 덕분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도록 짜여진 입시 정책 덕분이기도 할 것이다. 한국 같으면 애당초 꿈도 못꿀 결과다. 그렇다고 우린 좌절하고만 있어야 할까. 그녀가 대학에 합격한 것은 미국이라는 사회에서 자란 행운이기도 하지만, 그녀의 열정 또한 크게 작용했음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국제무대에서 명성을 날리는 스타라 하더라도 1번 자세에서 천천히, 공들여 취하는 드미-플리에로 시작하는 매일의 연습을 꾸준히 하지 않으면 몸이 망가질 수밖에 없다. 발레의 모든 것이 기초하고 있는 이런 기본 자세와 테크닉을 익히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다. 하루라도 생략할 수 있는 단계란 없었다. 94쪽

 

우리 모두는 우리의 삶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 선택해야 한다. 가급적이면 우리가 높이 사는 가치와 소망, 그리고 우리가 선호하는 것을 반영하는 선택이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일에 뛰어나고자 하는 이에게 지름길이란 없다는 가장 기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매일, 매주, 매달, 매해, 그 일을 하며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학문이든 과학이든 아니면 예술이든 양육이든, 남녀 구별 없이 다리가 휘청거릴 정도로 엄청난 시간을 투자해야만 매우 높은 수준에서 그 일을 할 수가 있다. 이것은 부인할 수없는  현실이다. 그러므로 당신의 목표가 그렇게 높다면, 당신이 정말 좋아하는 일을 할 것을 권하고 싶다. 259쪽

 

이런 마음가짐이 그녀를 지금의 위치로 이끈 것이다. 괜찮은 스펙을 쌓기 위한 마음가짐이었다면 진작에 그만두었을 것이다. 자기가 사랑한 일, 그것을 향한 도전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녀가 다소 늦은(?) 나이에도 대학 공부를 지속했던 것은 흥미와 열정, 사랑이 함께 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는 일하며 삶을 건사하고 삶을 건사하며 일을 한다. 일과 놀이는 같이 간다. 일이 가끔 놀이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 나는 내 일이 존재하지 않는 행복은 상상하기가 매우 힘들다. .. 우리는 생활하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생활한다. 여기에 공식은 없다. 그저 하고 싶은 일의 추구와 기쁨과 고통과 실망이 함께 어우러지는 일상적인 삶이 있을뿐. 그것은 무척 불완전하다. 우리는 다음날 일어나 다시 생활을 시작한다. .... 그 누구도, 남성도 여성도, 모든것을 가질 수는 없다.   254쪽

 

스펙의 추구, 안정적인 직업, 높은 수입, 풍족한 가정... 이런 계획이 꿈으로 받아들여지는 현실이다. 그러나 그 꿈 속에 열정은 찾아볼 수 없다. 그저 회전목마처럼 빙글빙글 돌 뿐이다. 그렇게 돌다보면 돈이 쏟아지고(많든 적든), 세월은 흘러간다. 그러다 어느 순간 목마는 멈출 것이다. 석교수가 진짜로 대단해보이는 것은 그녀의 스펙이 아니라, 그녀가 지향하는 자유에 있다. 회전목마 바깥으로 걸어나갈 수 있는 자유말이다.

 

내 이야기에서 뭔가 전해진 것이 있기를 바란다. 그것은 성장이 요구하는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내 생의 여정에서 가장 소중한 부분은 점차 커졌던 자유였다. 즉, 생각하고, 일하고, 사랑하고, 놀 자유. 완벽하려고 애쓰는 이가 자유를 느끼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프기만 할 뿐이다! 내가 사랑하는 것을 발전시키는 단련은 매우 보람차다. 하지만 완벽해서가 아니다. 나는 완벽할 수 없다. 내 아이들에게도 바라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여기 다시 석교수의 말을 적어둔다. 인생은 소풍임을 알려준 천상병 시인을 떠올리며. 

 

나는 즐기고자 한다.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노는 것을 열망한다. 일을 놀이로 만들고자 한다. 가능한 한 자주 다른 사람들과 함께 웃으려고 한다. 스스로를 농담거리고 삼고자 한다. 재미는 전염되는 것. 재미만 있다면 아무리 힘든 일도 할 만하다. 재미 없이는 난 살 수 없다. 당신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물어보라. 너무나 재미있어 내 능력껏 시도해 보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 가능하면 그것을 할 수 있도록 추진하라. 그리고 그것을 할 수 있도록 힘껏 노력하라. 2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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