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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똥 민들레 그림책 1
권정생 글, 정승각 그림 / 길벗어린이 / 199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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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엉, 어~엉"

아이가 울며 들어온다. 부모의 눈엔 불똥이 튄다.

"어디서 맞고 들어온거야?" 부모의 훈계가 시작된다. "한대 맞으면 두대 치라고 그랬지"

 

무한 경쟁의 시대, 절대 져서는 안된다. 승자가 모든 걸 갖는 시대에선 오직 이겨야만 한다. 그래야지 살아남는다. 비참해지지 않는다. 그런 시대에 `강아지똥`이라니...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는 이야기라니. 도대체 씨알이나 먹힐 동화일까.

 

그림책 `강아지똥`의 힘은 마이너리티의 반란에 있지 않다. 힘없고 비천한 사람들의 희망찬 모습에 있지 않다. 깨끗함과 더러움, 아름다움과 추함이라는 경계가 허물어지는 인식의 전환에 있다. 똥이 갖고 있는 생태적 힘이 고스란히 동화의 힘이 된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아파트 촌에서 수세식 화장실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똥은 그저 더러운 똥일 뿐이다. 동화책 속에서처럼 민들레를 피우는 훌륭한 거름이 되지 못한다. 똥은 더러운 것이라며 변기의 단추를 눌러 저멀리 보내야만 하는 아이들이 강아지똥의 아름다움을 알 수 있겠는가. 똥이 어떻게 거름이 되어 우리의 입으로 다시 돌아오는지 알 수 있을 때 비로소 강아지똥은 눈을 찡그리며 보는 대상이 아니라 자연의 일부분으로 자연스레 받아들여질 수 있다.

 

우리 사람사는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똥이 흙과 민들레와의 관계성 속에서 아름다운 거름이 되듯, 사람도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다. 이 동화는 예쁘게 화장하고 가꾸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소박하고 진솔된 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을 느끼기엔 시멘트로 둘러싸인 도시는 척박하기만 하다. 강아지똥이 아름다울 수 있는 자연속에서 아이들이 뛰놀수 있는 도시를 꿈꾸기엔 우린 너무 멀리왔을까.

 

강아지똥이 동화책 속 그림처럼 아름답게 느껴질 그날을 꿈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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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은 모두를, 모두는 한 사람을
법정(法頂) 지음 / 문학의숲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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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제행무상(諸行無常),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고 한다. 

그럼, 너무 허무하다고. 그냥 손을 놓아버리고 싶다고.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살아갈 힘이 생긴다고 생각하는 게 바로 불교라고 한다.

모든 현상은 한때입니다. 이 한때에 꺾이지 말아야 합니다. .. 무상하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한때라는 소리입니다. 좋은 일이든 언짢은 일이든 궂은 일이든 모든 것은 한때라고 생각하십시오. 그러면 극복할 수 있는 의지가 생깁니다. 한때이기 때문에 우리가 뛰어넘을 수 있는 용기와 기량이 저절로 생기는 것입니다. 33쪽  

만약 모든게 항상 그렇다면 그것은 살아있는 존재가 아닐지도 모른다. 같은 시간을 되풀이해서 살게된 주인공들이 나오는 영화를 떠올려보라. 처음엔 신과 같은 존재처럼 신나하다가 결국 삶의 의욕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게된다. 변화란 살아가는 것들의 숙명인 셈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변화라는 삶 속에서 휘둘리기 보다는 그 변화를 주체적으로 끌고 가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운명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운명은 결코 녹녹치 않다. 괴로움의 연속이다. 변화에 맞추어 살아가는 것이 이토록 힘든 일일까. 불교는 그 원인을 욕심, 집착에 있다고 본다. 그 욕심과 집착을 끊으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 방법은 8정도(정견 정사:정어 정업정명 정근:정념念 정定)에 있다.  

법정 스님의 강연도 이 큰 틀에서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니다. 아함경의 8정도가 있듯, 책을 읽으며 스님이 강조한 몇가지 단어를 간추려 봤다. 

청빈(맑은 가난), 자유, 사랑과 신의, 지혜와 자비, 덕, 친절, 주인노릇, 단순함 

거창한 이야기가 아니다. 주위에서 자주 듣는 단어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단어들이 가슴을 울리는 것은 스님의 입에서 나온 소리이기 때문일 것이다. 교과서에 나오는 고리타분한 도덕적 언사도, 공염불도 아니기 때문이다. 스님이 입적하시기 전까지 그가 살아온 행적들이 이 단어들을 더욱 빛나게 한다. 돈에 쪼들려, 돈을 쫓아 허겁지겁 뛰어가던 발걸음을 멈추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리고 찬찬히 그 발걸음을 돌아보게 만든다.  

난, 지금 세상에 주인 노릇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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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청빈 

맑은 가난인 청빈, 맑은 가난이란 많이 갖고자 하는 욕망을 스스로, 자주적으로 억제하는 일입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더 바라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맑은 가난은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고, 불필요한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갖고자 하는 욕망을 스스로 억제하기 때문에 더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21쪽 

2. 자유 

출가는 무엇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에 이르는 길입니다. 인간은 본디 자유로운 존재이며, 존재의 궁극적인 목표도 자유입니다. 물질,온갖 관계, 심지어 자신이 따르는 종교로부터도 자유로워지는 일입니다. 60쪽 

3. 사랑과 신의 

인간의 아름다움은 사랑과 신의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부드럽고 따뜻한 마음을 이웃과 나누는 일입니다. 66쪽 

4. 지혜와 자비 

지혜와 자비는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진정으로 지혜를 체험했다면 그것이 자비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89쪽  

5. 덕

덕은 나누는 일입니다. 101쪽 

6. 친절 

우리는 만나는 대상에게 한결같이 친절해야 합니다. 234쪽 

7. 주인 노릇 

종교적인 사람은 순간순간 중심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무슨 일을 하며 어떻게 살든 간에, 그 자리에서 중심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면 당당하게 사는 것입니다. 어디에서나 주인 노릇하라는 것입니다. 그럼 그 자리가 바로 법계, 진리의 세계입니다. 소도구나 부속품으로써 살지 말고 중심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308쪽 

8. 단순함 

단순한 것이 본질적인 것입니다. 단순함이란 무엇인가?... 단순해지기 위해서는 가진 것이 적어야 하고, 불필요한 관계가 정리되어야 합니다. 문득 홀로 있게 된다는 것은 모처럼 자신에게 명상의 문이 열릴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음을 의미합니다. 그때 조용히 혼자서 자기 삶을 되돌아보십시오.  3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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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함의 진리, 모든 것은 변화한다. 어떤 것도 고정되어 있지 않다. 27쪽
 

분별과 집착을 떠난 마음이 곧 도량이라는 것입니다. 29쪽 

사람은 무엇에 쫓겨서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자주적인 삶이 아닙니다. 36쪽 

자신의 존재를 억지로 꾸미지 말라는 뜻입니다. 있는 그대로가 좋다는 것입니다. 42쪽 

괴로움의 원인은 집착입니다. 출가란 집착의 집, 욕망의 집에서 벗어나는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행이 필요합니다. 일상의 굴레에서 벗어나 다른 세상으로 간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 여행을 통해 비본질적이고 일상적인 삶을 주기적으로 털어내야 합니다. 53쪽 

출가는 안정된 삶을 뛰어넘어 충만한 삶에 이르려는 것입니다. 안정과 편안함은 타성의 늪입니다. 쉼 없는 탈출과 새로운 시작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변화가 없이는 죽은 존재입니다. 59쪽 
 

똑같이 되풀이되는 삶은 무익합니다. 69쪽 
 

아쉬움과 부족함을 무르면 고마움을 알 길이 없습니다....무엇보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움켜잡기보다는 쓰다듬을 줄 알아야 합니다. 105쪽 

인간의 가장 큰 병은 자신을 기준으로 삼는 데 있습니다.112쪽  

기도는 삼업, 말과 생각과 행동을 맑히는 일입니다. 127쪽 

진리란 별것이 아니라 지금 이렇게 존재하고 있는 모든 사물 그대로라는 소식입니다. 134쪽 

타인과의 교감을 통해서, 정을 나눔으로써 마음이 열립니다.... 행복은 마음의 평화를 통해서 싹이 틉니다. 153쪽 

게으름은 최대의 악덕입니다. 게으르면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습니다. 196쪽  

자기 생각과 마음의 흐름을 지켜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을 맑히는 기본적인 훈련입니다. 238쪽 
 

가난의 의미를 새롭게 되새겨 볼 때가 되었습니다. 주어진 가난이 아니라 선택해야 할 가난입니다. 그것은 빈곤이 아니라 아름다운 절제입니다.  320쪽  
 

종교란 무엇입니까? 종교학자들은 거창하게 이야기하지만, 종교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더 말할 것도 없이 선한 마음입니다. 강물처럼 살아서 끝없이 흐르는 자비심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자신이 지니고 있는 그 자비심을 순간순간 남에게 펼치는 일입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이고 수행입니다. 337쪽  
 

사람은 활발해야 합니다.자신의 견해로 생각해야 합니다. 자신의 지혜에 의지해 스스로 판단해야 합니다. 뜻을 담아서 이야기해야 합니다. 탐구하는 노력을 하고 창조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에리히 프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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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cina 2011-11-12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삶을 살아라. 새겼답니다. 에리히 프롬의 말씀에도 동감합니다. 좋은 글 여전히 아름답게 써 주고 계심에 감사합니다~ 하루살이님. (^.^)!
 

SBS 스페셜 짝 3부는 부부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만든 다큐였다. 연애는 꿈이요 결혼은 실재라는 말로 흔히들 결혼생활의 팍팍함을 말하곤 한다. 실제 대한민국에서는 1시간에 14쌍의 부부가 이혼도장을 찍는다고 한다. 결혼 전 목숨을 바칠 정도로 사랑했던 사람이 결혼 후 철천지 원수가 되는 것이 도대체 어떤 이유 때문일까.  

다큐에서는 정서적, 그러니까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결혼한 사람들이 좀비형으로 변해갈 위험성을 갖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실제 많은 부부들의 생활은 그야말로 좀비처럼 하루 온종일 말 한마디 주고받지 않을 정도다. 아직도 사랑하는 감정이 남아있음에도 손길이 스치는 것에 소스라칠 정도로 놀라는 모습 속에서 남남 보다 더 못할 듯 느껴지기도 한다. 도대체 어쩌다 이 모양이 됐단 말인가. 

수십년을 함께 산 노부부들이나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변화를 직시하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꿈에서 깨란 소리다. 연애에서 결혼으로 넘어가면 환경부터가 변한다. 그렇게 변화된 환경에 맞추어 살아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연애시절때 꿈꾸던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좀비형 부부의 대부분은 환상과 현실의 격차 속에 갇혀버린 사람들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양보하고 있다고 자위하며,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있다고 자부하며, 묵묵히 고통을 이겨낸다. 행복한 가정은 멀게만 느껴진다. 그러나 부부가 된 순간, 환경도 변하고, 나도 변하고, 배우자도 변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새로운 출발을 해야한다. 전문가들은 그래야지만 행복이 저 멀리 도망가지 않는다고 말한다. 

개인적인 생각으론 그 변화의 중심에 자기를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가족을 위해, 배우자를 위해 희생한다는 생각이 자꾸만 불행의 구렁텅이로 밀어넣는 것같다. 다큐에서 보여진 나름 행복해 보이는 부부(아내는 밸리댄스 전문가, 남편은 은행 부지점장)는 다소 이기적이라 보여질 만큼 자아 완성을 첫번째로 두었다. 그리고 그 완성의 과정에서 힘든 일에 부닥칠 때면 배우자에게 서로 기대며 도움을 주었다. 자기가 행복할 때 가족도 행복하다는 생각, 그리고 자기의 행복을 위한 길에 희생을 강요하지 않고 윤활유가 되어주는 상대가 바로 짝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지만 짝과 함께 있을 때 행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잠시 내 곁에 있는 짝을 생각해본다. 그리고 혹시나 짝에게 희생을 강요하며-자발적 희생까지 포함해- 살고 있는 것은 아니었는지 자문해본다. 그토록 사랑하는 짝과 함께 있으니 행복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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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한 시대가 열리고 과학이 아무리 발전을 해도 생명에 대한 비밀을 밝히는 것은 아직도 멀기만하다. 최근 뇌과학이 각광을 받고 있지만 여전히 뇌의 작동은 신비라는 이름을 빼앗기지 않았다. 신체 작용의 비밀 중 또하나 잠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추론만 가능할 뿐 정확한 작동기제는 밝혀지지 않았다. 도대체 동물들은 왜 잠을 자야만 하는 것일까. 그리고 잠은 어떤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것일까. 잠을 자며 꿈을 꾸는 것은 왜일까.... 

아이가 백일을 지나면서 잠을 재우는 게 힘들어졌다. 두 눈을 자꾸 비비면서 잠이 온다는 신호를 보내면 잠 재우기에 들어간다. 하지만 어지간해선 도저히 잠을 청하지 않는다. 자꾸 보채며 가끔씩 소리를 지르기도 한다. 안아주지 않으면 발버둥을 친다. 누군가는 손을 탔다고 그러지만 '와서 키워봐라 그런 소리 나오나'라는 말을 꼭 집어 삼키며, 그냥 웃어 넘긴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한달이 넘게 아이의 잠떼와 씨름하다 보니 점차 지쳐간다. 그래도 어쩔 것인가. 잠을 자고 나서의 모습은 그야말로 천사 그 자체인 것을. 천사의 얼굴을 바라보는 게 얼마나 큰 기쁨인지는 말 할 필요가 없을테다. (가끔씩 야근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 잠을 자고 있는 아이의 얼굴을 보면 눈물이 글썽해질 때가 있다. 끝없이 차오르는 어떤 행복감과 충만감으로 말이다. 한편 잠자는 모습을 보고 나갔다 돌아와서도 다시 잠자는 모습만 봐야 한다는 비애감으로 말이다.) 

그런데, 도대체 왜 아이들은 잠떼를 부리는 걸까. 곰곰히 생각해봤다. 정답은 없겠지만 나름 해답을 내려봤다. 우리 신체는 잠이 오면 그 기능이 저하된다. 눈꺼풀도 감기고 손발의 힘도 떨어진다. 하지만 아이는 자신의 신체가 저하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자신을 제어하고 싶은 욕구대로 신체가 따라오지 않는 것에 화가 나는 것이다. 배고프면 울고 기저귀 갈아달라고 울면서 욕망을 채우는 아이가 아니던가. 이 제어에 대한 욕구를 타인에게로 확장한다면 그것은 권력욕이 될 것이다. 세상을 자기 뜻대로 움직여보고 싶은 욕망, 그래서 어른들도 떼를 부린다. 권력욕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찌질한 어른들의 행동은 바로 권력떼인 것이다. 하지만 권력떼를 부리다가 잠잠해진 그들의 얼굴은 결코 천사가 될 수 없기에 세상은 참 슬프다. 제발 떼 좀 부리지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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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방일기
지허 지음, 견동한 그림 / 불광출판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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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들은 여름에 한번 겨울에 한번 안거에 들어간다. (원래는 여름 우기 한번 뭇생명들을 죽이는 것을 피하기 위해 행해졌다) 이 책은 지허 스님이라는 분이 동안거에 들어가기 전부터 끝나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금욕적인 생활의 어려움, 김장 울력, 화두와의 싸움 등등이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으로 보여진다. 현실과는 동떨어진, 속된 세상을 떨쳐버린 곳에서도 지극히 말초적인 욕망(맛있는 걸 먹고 싶고 잠시라도 잠을자고 싶은 욕망 등)에 휩싸인 이들의 모습 속에서 구도자의 길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짐작케 만든다. 또한 이들의 수행이 지극히 개인적이지만 결국 그것이 궁극적으로 이타적 존재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과정임을 깨닫게 해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책이 나에게 '쿵'하고 충격적으로 다가온 것은 다음과 같은 지허 스님의 말씀 때문이다.

이 세상은 유한한가, 무한한가, 또 신은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해서 지금 괴로워하고 있는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 부처님 교설의 의취입니다. ... 인간은 초월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완성될 수 있고 인간의 조건은 조화될 수 있습니다. 불교는 인간의 완성을 위해 선을 내세웠고, 인간은 선을 통하여 완성을 가능케 하고 있습니다. 선은 신비가 아니고 절대자의 조종을 받는 그 어떤 것도 아닙니다. 인간 완성을 위한 길입니다. 즉 열반으로 이르는 길입니다.  108.109쪽 
  

이 글을 읽고 나를 사로잡고 있는 고민 중 세상의 유한성이나 신의 존재성과 같은 고민은 없었는지 돌아보게 만들었다. 즉, 지적 유희에 빠져 허우적대지는 않았는지 생각해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고민이 해결되면 과연 인생의 문제도 해결될 것인지 살펴봤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질문인데도, 그리고 그런 생각도 얼핏 몇번인가는 해봤을 터인데도, 이번처럼 크게 와 닿은 건 무엇때문일까. 이 책과 나와의 인연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실존적 고민과 동떨어진 고민을 놓아두고, 사고의 유희도 잠시 제쳐두자고 생각해본다. 그러면 나에게 남은 실존적 고민은 무엇인가. 새로운 화두를 스스로 던져본다.   

지금 나를 괴롭히는 것은 무엇인가. 만약 일이 괴롭다면 그 괴로운 일의 결과물이 다른 이에게 행복을 줄 수 있을까. 괴롭다면서 그 일을 놓치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수단으로서의 일이다면 그 목적은 무엇인가. 생계 때문인가. 생계가 삶의 목적인가. 그렇다면 얼마나 비루한 인생인가. 밥벌이의 지겨움을 말한 김훈의 글이 떠오른다. 정녕 입에 풀칠하는 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미소 지으며 마음에 거리낌없이 행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아무래도 나의 올 동안거 화두는 이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나에게 있어 열반은 아무래도 이 화두를 깨우치는 것에서 그 길을 열어줄 듯하다. 스님들의 치열한 안거생활처럼 화두를 깨우치기 위해 먼저 게으름과 안주부터 벗어던지고 진정한 나를 찾는 길을 떠나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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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나는 숙명의 객체이지만 운명의 주체이다.숙명은 자기 부재의 과거가 관장했지만 운명은 자기 실재의 현재가, 그리고 자신이 관장하는 것이어서 운명을 창조하고 개조할 수 있는 소지는 운명 직전까지 무한히 열려져 있다. 숙명의 필연성을 인식하면 운명의 당위성을 절감하게 된다. 어떠한 상황 하에서도 숙명적인 것을 피하려고 괴로워 할 것이 아니라 이해해야 하며 운명적인 것은 붙잡고 사랑해야 할 뿐이다. 고집의 표상 같은 누더기를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선객이야말로 견성의 문턱에서 문고리를 잡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끝내 운명은 타기될 것이 아니라 파지되어야 함은 선객의 금욕생활이 극한에 이를 수록 절감되는 상황 떄문이다.  35쪽 

중생세계에서 보면 필요성을 주장하면 이유가 되고 타당성을 주장하면 독선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방관자가 된 채 그대로 보고 느끼면서 오직 견성에 매달려 중생계를 탈피하려 한다. 자신이 중생에 머물러 있는 한 모든 판단의 척도가 중생심일 수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불가에서는 시비는 터부로 여기지만 그러나 시비가 그칠 때가 없으니 역시 중생인지라 어쩔 수 없을 뿐이다.  39쪽 

사랑하는 사람을 갖지 말라. 미워하는 사람도 갖지 말라. 사랑하는 사람은 못 만나 괴롭고 미워하는 사람은 자주 만나 괴롭다. 애증을 떠나 단무심으로 살아가라는 교훈이다.  54쪽  

훌륭한 선객일수록 훌륭한 보건자이다. 견성은 절대로 단시일에 가능하지 않고 견성을 시기하는 것이 바로 병마라는 걸 잘 알기 떄문에 섭생에 철저하다. 견성이 생의 초월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생의 조화에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건강한 선객은 부처님처럼 위대해 보이나 병든 선객은 대처승보다 더 추해진다. 화두는 멀리 보내고 비루와 비열의 옷을 입고 약을 찾아 헤멘다. 그는 이미 선객이 아니고 흔히 세상에서 말하는 인간폐물이 되고 만다. 身外가 無物. 차원 높은 정신성 속에서 살아가는 선객일수록 유물적이고 속한적이라고 타기할 게 아니라 화두 다음으로 소중히 음미해야 할 잠언이다.  78쪽 

인간이란 과거의 사실만을 위해 서있는 망두석이 아니라 내일을 살려고 어제의 짐을 내려놓으려는 자세가 있기에 비로소 인간이라고. 93쪽 

불교의 중도는 역의 태극이나 자사의 중용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에도 상통한다. 상극의 초극이야말로 진실로 인간의 가장 긴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비로소 인간의 순화, 지상의 정화가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개개인의 마음에 달려 있을 뿐이다. 개인의 순정한 마음 없이 사회의 복지가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1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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