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와 여자는 다르다. 생물학적으로 눈에 보이는 차이 뿐만 아니라 언어의 사용에서도 차이가 있다. MBC스페셜 <남자의 말 여자의 말>에선 남자와 여자가 어떻게 다른지 한가지 실험을 통해 보여준다. 한번도 얼굴을 본 적이 없는 남자끼리, 또 여자끼리 6명씩 자리를 함께 한 후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도록 했다. 여자들은 주제를 다양하게 바꿔가면서 수다를 떨었고, 남자들은 꿀먹은 벙어리에 가깝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말을 듣지 않는 남자 지도를 읽지 못하는 여자> 등등 남자와 여자가 다르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책들도 많다. 이러한 차이는 어렸을 때부터 나타난다. 또 책 <아이의 사생활>은 아이들을 대상으로 남녀의 차이를 알아본 시험을 통해 언어에선 여성이, 공간감각은 남성이 앞서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럼 도대체 남녀간의 이런 차이는 왜 발생한 걸까. 

가장 그럴듯한 이유를 들자면 인간이 사냥, 수렵생활을 하던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남자는 사냥을 하고 여자는 육아와 채집 생활을 하던 시대로 말이다. 사냥을 하는 남자는 한가지 사냥 목표만을 향해 몇일이고 말없이 집중해야만 한다. 반면 여자는 아이를 키우면서 열매나 뿌리 등을 캐기 위해 서로 정보를 나누며 다양한 살림살이를 한다. 이런 행동은 뇌의 발달에도 영향을 미쳐, 언어를 말할 때 남자는 왼쪽 뇌만 여자는 양쪽 뇌를 모두 사용하도록 진화하게 됐다.  

뇌의 사용부위가 다르다는 것은 여러가지 뜻을 내포한다. 영화를 보고 있는 남자에게 말을 걸어봤자 전혀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 친구들과 전화 통화를 하면서도 TV를 시청하고 빨래를 개는 게 가능한 여자들. 남자들의 대화는 결론을 이끌어내야만 하고, 여자들의 대화는 공감을 필요로 한다는 것 등등. 그래서 때로는 서로 말을 거는 행위로부터 상처를 받기도 한다. 

남자와 여자가 다툼없이 서로를 배려할 수 있기 위해선 이러한 남녀 차이를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남자, 또는 그 여자가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를, 정말 별달라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안다는 것으로부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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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 똥은 향긋하다. 구린내가 나지 않는다. 향기의 비밀은 똥을 구성하는 인돌이라는 구성 성분에 있다. 인돌의 성분이 적을 때 자스민과 같은 향을 내뿜는다. 하지만 인돌의 성분이 어느 수준을 넘어서 많아지면 지독한 냄새를 풍긴다. 코끼리 똥은 적은 인돌 덕분에 향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 향은 사자들의 성 호르몬과 비슷하다고 한다. 그래서 코끼리 똥을 본 사자들은 몸에 비비기도 하고 심지어 핥기도 한다.  

지난 11일 법정스님이 입적했다. 무소유라는 책을 통해 알려진 법정스님은 가시는 길마저 향기를 뿜는다. 법정스님이 말한 무소유는 아무 것도 갖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꼭 필요한 것만 가지고 기꺼이 나눠 쓰는 것이 무소유다. 마치 코끼리 똥의 인돌같이 필요한 것만 가질 때는 그 사람에게서 향이 날 것이요, 필요한 것 이상을 소유할 땐 고약한 냄새가 날 터이다. 그렇다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꼭 필요한 것들은 무엇일까.(사용가치와 교환가치에 대해서도 곰곰히 생각해본다) 법정스님의 다비식이 치러진 비가 오는 일요일. 곰곰히 생각해본다. 향기로운 사람으로 남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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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럿거스대 엘리자베스 트라이코미 박사팀이 불평등을 못참는 뇌 보상회로의 활동을 기능성자기공명영상촬영장치로 촬영한 논문을 영국 학술지 네이처에 발표했다. 지금까지 심리학 실험으로만 증명돼 왔던 인간 심리의 기제가 뇌의 영역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눈으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겠다.  

심리학 실험 '최후통첩 게임'은 1999년 인도네시아에서 실제로 행해진 것으로 불평등에 대한 반응이 얼마나 민감한지를 보여주고 있다. 당시 진짜 화폐로 20만 루피아(약 250만원) 를 실험자 한 명에게 건네고, 이 실험자는 다른 실험자에게 배분을 한다. 만약 다른 실험자가 그 배분을 인정하면 둘은 그 배분대로 돈을 갖게 되고, 인정하지 않으면 둘 다 돈을 못받게 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봤을 때 두번째 실험자는 어떻게 배분되더라도 공짜로 얻는 돈이기 때문에 승낙할 가능성이 높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실제론 99대 1이나 98대 2의 불평등한 배분에 대해선 불가를 외치는 사람이 많았다. 자신의 이득을 포기하더라도 불평등을 참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과 비슷한 실험 과정에서 사람의 뇌가 활발히 작용하는 부분을 발견한 것이 이번 미국 럿거스대 박사팀의 논문 내용이라 할 수 있겠다.  

백만장자들의 수입이라거나 유명 스포츠 스타나 영화배우 들의 년간 수입에 입을 쩍 벌리면서도 한탄을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도대체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는냐고 생각하는 기저엔 차이는 인정하지만 그 정도까지의 차이는 인정할 수 없다는, 그것은 불공평하다는 감정이 깔려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과연 어느 정도 수준까지의 불공평함에 대해서 인정하거나 또는 분개하는 것일까. 최후통첩 게임의 경우 몇 대 몇 정도로 나누었을때 최대한 용납 가능한 수준이었을지 궁금해진다. 그리고 그 용납 수준이란 것이 본능적인 것이지, 사회적, 교육적인 환경에 영향을 받아 변화 가능한 것인지도 따져보아야 할 문제이지 않을까. 자본주의라는 체제에서 살던 사람과 공산주의 체제에서 살 던 사람의 기준도 똑같은지 실험해 본다면 유익한 자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자극하는 욕망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불공평을 수긍하는 태도도 유연(?)해지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도시와 농촌, 세대간의 차이는 없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싶다.  

반면 우리는 때론 복불복(1박 2일에서 보여지는 것처럼)을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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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신동이라 불렸던 모짜르트. 그의 생애를 다룬 예술 작품들은 많다. 개인적으로 그중에서도 영화 '아마데우스'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모짜르트라는 이름 이외에도 살리에르라는 이름을 각인시켜 줬기 때문이다. 천재를 뛰어넘을 수 없는 2인자의 시기와 설움을 잘 드러낸 이 영화는 천재를 바라보는 보통 사람들의 시선이 잘 드러나 있다. 또한 모짜르트의 특이한 웃음으로 표현된 천재성은 기행과 아울러 슬픔까지도 묘하게 스며있다.  

뮤지컬 모짜르트는 영화 아마데우스와는 다르다. 뮤지컬은 아마데우스와 그의 아버지의 갈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영주의 보호 아래 안정된 기반 위에서 아마데우스의 능력을 펼쳐보이도록 해 주고자 했던 아버지와 틀에 갇힌 삶보다는 자신의 뜻대로 음악을 펼쳐보고자 했던 아마데우스의 충돌이 뮤지컬을 끌고 간다. 그러나 아쉽게도 부자간의 갈등이 왜 그리도 첨예하게 대립각을 세웠는지를 충분하게 보여주지는 못한다. 다만 화려한 가발과 의상, 무대가 눈을 즐겁게 해주고, 아름다운 선율이 귀를 기쁘게 해준다는 것이 위안이다. 귀에 익숙한 남작부인 신영숙의 '황금별'은 소름을 돋게 만들고, 대주교 역의 민영기가 부른 '모차르트를 찾아라', '어떻게 이런 일이' 등은 가슴을 확 뚫어준다.  

모짜르트의 천재성을 보여주는 어린 모짜르트도 아쉬움이 남는다. 어른이 되어서도 아직 그에게 남아 있는 어린 천재 모짜르트를 보여주고 있긴 하지만 그가 즐거워하거나 반대로 좌절하는 모습이 극렬하게 대비되어 보이지는 않는다. 아마도 영화 아마데우스의 강렬한 웃음 소리가 마음 깊숙히 남아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보였으리라.  

오이디푸스.엘렉트라.카인 콤플렉스처럼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가족들이 때론 족쇄가 되고 상처가 되기도 한다. 뮤지컬 모짜르트는 이런 가족간의 상처를 드러내고자 한 것처럼 보이지만 아버지의 정체성이 뚜렷하지 않아 그 상처가 좀처럼 애달프게 느껴지지 않는다. 천재성을 지닌 아이를 돈벌이로 이용하려는 아버지와 여리고 여린 아들의 영혼을 지키고자 했던 아버지 사이에서 우왕좌왕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족이 가끔 짐처럼 느껴졌던 이들에겐 한없이 가벼운 상처로 비쳐질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하기에 아버지를 잃은 모짜르트의 눈물 또한 모호할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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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공이 "정치란 무엇입니까?" 라고 물었다. 공자는 "백성이 먹을 양식을 충분하게 하고, 국방력을 갖추며, 백성의 믿음을 얻는 것"이라고 답했다. 이에 자공이 "세 가지 가운데 하나를 뺀다면 무엇을 뺄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자 공자는 '군대'라고 답했다. 나머지 둘 중 하나를 뺀다면 '양식'이라고 답했다. 즉 정치의 근본은 왕과 백성간의 신뢰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선덕여왕이 끝났다. 미실의 죽음 이후 미실에 대적할만한 카리스마가 없어 드라마의 힘이 조금 떨어지긴 했지만 마지막은 장렬했다. 이연걸이 진시황을 죽이기 위해 동료들의 희생으로 10보 앞까지 전진한다는 영화 '영웅'을 연상시키는 비담의 최후가 멋드러졌다. 덕만을 연모하면서도 덕만이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오해를 한 비담. 그 오해는 전적으로 비담의 잘못이다. 그러나 이것은 비담의 잘못이 아니다. 인간으로서 그만큼 갖기 어려운 것이 믿음이기 때문이다. 

선덕여왕에서 덕만은 백성들의 믿음을 얻기 위해 애를 쓴다. 당시 국가의 힘이란 결국 백성의 수와 직결된 것인만큼(군사력 또한 백성이 있어야 가능하고 군사미 또는 식량문제.세금 등을 비롯한 모든 문제가 백성이 있어야 해결될 수 있다는 점에서, 또한 백성이 국경선을 어느 정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었던 시대였다는 점에서) 믿음이 있어야지만 그들을 붙잡아 둘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공자도 믿음을 강조한 것이리라. 그러나 그 믿음이란 것이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도 아니요, 100년 1000년 지속되기도 힘든 것이 아니던가. 백성뿐만 아니라 유신과 비담과의 믿음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나무 하나 옮기면 1000냥을 준다는 믿기 어려운 왕명이 떨어지고 이것을 지킨 백성에게 실제로 1000냥이 주어지면서 임금과 백성간에 신뢰가 생겼다는 고사를 비롯해 많은 옛날 이야기들이 이런 믿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믿음은 항상 설마와 싸운다. 설마는 간혹 사람을 잡는다. 믿음은 사람을 살릴 수 있지만 설마가 사람을 잡은 순간 믿음은 설마에게 칼을 겨눌 수 없다. 설마에게 사로잡힌 사람은 믿음을 가질 수 없다. 설마가 문득 머릿속을 차지하는 순간 우리는 믿음이라는 친구를 잃지 않기 위해 설마를 쫓아내야만 한다. 그런데 이 쫓아내는 힘이 또한 굳건한 믿음에서 비롯된다는 점이 아이러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과 설마 사이에서 방황하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 설마는 간혹 가짜를 물리칠 힘이 되지만 진짜를 멀리하게 되는 우를 범하게 만든다. 반면 믿음은 때론 가짜에게 속아 넘어가고 진짜를 돈독하게 만든다. 그렇기에 믿음이 설마를 완전히 내칠 수 없는 것이리라. 믿음과 설마를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을 때 우리는 사람을 얻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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