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랑의 가설>을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 책이 훨씬 더 재미있다.

​

원래 그렇다. 책보다 더 나은 평가를 받는 영화는 그렇게 많지 않다. 영화가 책을 원작으로 하지만 원작에 기대지 않고 확연히 다른 구성과 전개로, 혹은 배우들의 열연으로 다른 작품이 창조되는 경우도 있을 수는 있다. 이 영화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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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너무나 안타까운 '일반적인' 경우로서, 영화가 책보다 못하다. 중요한 장면들(표지의 올리브와 애덤의 첫 키스 장면, 안과 올리브가 서로를 위로하며 힘을 주는 장면)을 영상화하는 데는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그 외에는 좋은 점수를 줄 수가 없다. 두 사람이 fake-relationshp을 합의하는 장면은 어설프고, 다른 사람에게 사귀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하는 행동들은 억지스럽다. 올리브의 친구들에게 두 사람이 사귀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올리브 친구의 파티에 교수인 애덤이 참석하는 것도 이상하고, 그렇게나 바쁜 박사 과정생들의 여가 생활이 흥청망청인 것도 이해가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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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주인공들의 생각을 보여줄 수 없으니 축약하고 또 축약하는 건 당연하지만,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각 등장인물들의 대사까지 바꿔버리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소득이라면, 올리브를 열연한 릴리 라인하트가 너무 이뻐서 그녀가 등장할 때마다 화면이 환해진다는 것. 그것 말고는 이 영화의 존재 이유를... 찾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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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대해서는 이웃님의 아름다운 페이퍼가 있어서 일부러 링크를 걸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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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님 : 인생 로맨스 소설 (https://blog.aladin.co.kr/suha/16731051)


바람돌이님 : 로맨스라는 힐링 (https://blog.aladin.co.kr/baramdori/16744532)


다락방님 : 굶주림 (https://blog.aladin.co.kr/fallen77/15196039)

사랑의 가설 (https://blog.aladin.co.kr/fallen77/14335623)

​


책이 100배 낫다. 책을 읽는 게 낫다. 이 말 쓰려고 페이퍼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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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6-09-25 00: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제 페이퍼 보고 영화 궁금했는데, 벌써 보신 거군요!!

단발머리 2026-09-25 19:45   좋아요 0 | URL
저, 시간 재면서 기다렸다가 5시부터 봤는데 말이지요. 그 전날 멤버십 가입하고요.
넘나 안타까운 것입니다. 허어...

건수하 2026-09-28 22:07   좋아요 0 | URL
사실 저는 이 책에서 fake-relationship의 시작에 잘 설득이 안 되기는 했었습니다 ㅎㅎ 그 부분을 넘기니 괜찮았습니다만... 그치만 영화는 그 뒤에도 실패했나보군요? 사진만 봤을 때는 애덤의 외모도 잘 설득이 안 되기도 하고..;; 오랫만에 제가 쓴 글을 다시 읽어보니 뭔가 쑥스럽군요 :)

다락방 2026-09-25 14: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저 이 영화 기다리고 있었다고욧!!

단발머리 2026-09-25 19:46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기다리셨으니 꼭 보실거라 믿고요. 보고 나시면 간단하게라도 감상 남겨주세요.
저는 많이 실망했습니다. 너무 억지 같다고 할까요. 우리가 원하는 것은 진지한 로맨틱 개연성일까요? ㅋ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26-09-25 22: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단발님이 워낙 사랑하는 책이라 실망이 크셨을 듯요 ㅠㅠ 하지만 정말 책 원작 따라가는 영화는 찾아보기 힘든 것 같아요. 영상만이 보여줄 수 있는 부분을 최대한 잘 만드는 게 역량인 듯.. 이 영화는 여주 빼곤 실패했군요.. ㅠㅠ

단발머리 2026-09-26 09:22   좋아요 1 | URL
아주 실망이 컸습니다. 흠... 원작의 감동을 그대로 영상화하는 게 어렵기는 하죠. 속마음 토크가 있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구요.
올리브 보는 재미가 컸습니다. 애덤은 아니구요. 올리브, 오직 올리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6-09-26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건수하님, 바람돌이님의 주옥 같은 글에 더해 다락방님의 글 2편을 더 찾아서 링크 올립니다.
저 영화 보는 것보다 이 글 네 편이 훨씬, 훨~~~~~씬 재미있습니다. 로맨스 좋아하는 분이시라면, 절대!!!

놓치지 마세요!!

다락방 2026-09-26 14:36   좋아요 1 | URL
저 단발머린 님의 이 댓글 덕분에 ㅋㅋ 제가 쓴 글 다시 읽었는데 말입니다. <굶주림>.. 왜케 잘 썼어요? 글 쓰는 천재인가봐요? 너무 잘 써서 깜짝 놀랐네요. 명문이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나저나, 제가 아직 이 영화를 보지 못하고 있어요. 너무 보고 싶은데 ㅋㅋ 잃시찾도 읽어야 하고 비커밍도 읽어야하고 진짜 마음 늠 급하고 초조해버려. 게다가 벌써 9월 26일.. 하..

단발머리 2026-09-26 16:41   좋아요 0 | URL
<굶주림>도 좋은데 <사랑의 가설>도 좋아요. 두 글 다 댓글 반응도 폭발적이고요 ㅋㅋㅋㅋㅋㅋㅋ <사랑의 가설> 영화보다 100배 재미있는 독서 후기 열람기인데 말이지요. 명문의 향연 맞습니다!!

저는 영화 보고 나서 책이 나아, 책이 좋아... 이러고 있는데 아... 이번 추석 짧네요. 내일이면 끝이라고 합니다. 이 무슨 일이에요. 참, 다락방님! 그 댓글 못 보신거 같은데, 독서괭님이 미셸 같이 읽기 한 달 더하면 어떨까요? 라는 의견을 내셨고요. 제가 O, X 중 O 팻말 높이 들었습니다. 참고해 주세요^^

다락방 2026-09-26 16:48   좋아요 1 | URL
앗, 그런 댓글이 있었어요? 저 못봤어요! ㅋㅋ 아 너무나 좋은 댓글이네요. 찾아가서 보고, 그리고 공지하겠습니다. 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6-09-26 16:50   좋아요 0 | URL
♥️🧡💛💚💙💜💕🥰 독서괭님 가장 최근 페이퍼에 있습니다요 ㅋㅋㅋㅋㅋㅋㅋㅋ그 댓글이요 ㅋㅋㅋㅋ

다락방 2026-09-30 20: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단발머리 님, 저 이 영화 보능중인데 왜이렇게 재미있죠, 저는? 초반부터 좋았어요!! 다 보고 페이퍼 쓸게요!!

단발머리 2026-09-30 20:59   좋아요 0 | URL
박수 짝짝짝! 👏👏👏👏👏 기다리고 있을게요!! 하트뿅뿅! 🥰

단발머리 2026-09-30 21:07   좋아요 0 | URL
앗! 다락방님! 지금 잃시찾 완독하셔서 홀가분하게 영화보시는 거 맞죠? 세상에~~ 아끼셨던 거군요. 우리 올리브, 우리 애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좋은 밤 되세요! 🥵

다락방 2026-09-30 21:25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요. 제가 잃시찾 다 읽으면 보려고 꾹꾹 참았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진짜 꿀잼이에요. 그리고 올리 왜이렇게 사랑스럽죠? 으.. 너무 예뻐요. 올리브 얼굴이 다 하네요 ㅠㅠ 너무 좋네요 ㅠㅠ
 



에피소드 중심의 엄마표 성교육은 주로 성추행의 위험한 순간들에 대한 것이었다. 성충동에 사로잡힌 남자들의 기이한 행동에 대한 엄마의 묘사는, 열여덟의 엄마가, 혹은 내게 그 말을 할 당시의 엄마까지도 얼마나 순진한지를(?) 보여주었다. 나는 열다섯이었고, 또 열여덟이었다. 결론은 항상 똑같았다. 기지를 발휘해 그 장소를 벗어나라. 도망쳐라.

​

『가부장제의 창조』 못지않게 내 인생 최고의 페미니즘 수업을 열어주셨던 한문 선생님은 성폭행 보다 성폭력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셨다. 성폭력이란 결국 성기에 가해진 폭력일 뿐이라고 선생님은 여러 번 강조하셨다. 20대 후반의 기혼 여성, 정규직이 아닌 1년 계약직 선생님이셨다. 중병아리 같은 여중생들 사이에서 백조처럼 보이는, 나란히 걸을 때 자꾸 곁눈질하면서 쳐다보고 싶었던, 배우처럼 예쁜 선생님의 말씀이 그러했다. 그때까지 내가 들었던 '성에 대한 담론', '여성의 성에 대한 설명', 그것을 토대로 내면에 공고화된 성관념과는 상반되는 주장이었다. 여성과 성, 혹은 순결과 성관계에 대해서 그런 설명은 처음이었다.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그렇구나. 순결을 잃었다고 해도 자살하지 않아도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떠올랐던 순간이 또렷이 기억난다. 중학교 2학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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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책을 읽으면서는 성(sex)이 그렇게나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착취의 시작점은 '생물학적 차이'에 대한 강조 때문이었지만, 사실 '섹스' 역시 '젠더'처럼 사회적으로 구성될 뿐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인간이 느끼는 쾌락에서 섹스가 가지고 있는 특이성을 모른척하기에는, 인간은 너무나 '동물적'이며, 또한 동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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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몸을 가지고 있고, 텔레파시로 소통할 수 없는 존재다.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이상, 내 몸의 경계, '나'라는 존재의 최종 한계가 외부의 '나'와 조우하는 유일한 방법은 접촉일 수밖에 없고, 라캉이 '성관계는 없다'라고 말한 바로 그 지점에서 찰나의 순간, '성관계'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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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인간의 기억, 정보 처리, 사고 과정의 일부, 더 정확하게는 상당 부분에서, 인간의 성과를 압도하는 인공지능에게 부재하는 건 무엇인가. 그것은 경험이고, 실패이고, 고통이다. 그리고 몸이다. 우리 인간에겐, '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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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데없이 장황해져버렸다. 이쯤에서 대충 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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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대충 스무 개 정도의 글을 쓴 것 같다. 그만 써야지, 그만 쓰겠지 했는데 쓰고 나서 또 쓰고, 한참 뒤에 또 썼다. 애덤보다는 올리브를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혼자 생각한다. 보스턴으로 출장 갔던 애덤이 지난밤에 돌아왔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예상치 못한 시간에 애덤을 만났다. 애덤이 등장하자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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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까. 무슨 가능성일까. 애덤의 등장은 두 사람에게 어떤 가능성을 주는 걸까. 애덤의 등장이 왜 올리브에게는 희망적으로 느껴지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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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브의 가능성, 올리브의 희망은 뭔지 잘 모르겠고, 내 가능성은 이런 거다. 영화 <The Love Hypothesis>의 9월 23일 아마존 공개를 앞두고 주문한 『The Love Hypothesis』 하드커버를 이 밤에 영접할 가능성. 그 가능성은, 그 희망은 마침내 현실이 되었고. 이 책을 (이유 없이) 이렇게 비싸게 구입한 게 부끄럽기는 한데, 그건 그것대로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이 책을 자랑해야겠는데, 자랑할 데가 여기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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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추석 선물 하나씩 받아온다는데, 사회적 지위와 체면 때문인지 나는 선물 하나 없다. 자목련님 페이퍼가 책과 추석 선물에 대한 것이어서 반가웠다. 내 페이퍼도 책과 추석 선물 페이퍼다. 헤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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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6-09-23 11: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자랑하셔야지요. 자랑하셔야 하고 말고요. 저렇게 비싸고 예쁜 책인데요. 책등이 아니고 저 분홍색부분은 뭐라고 하죠. 바깥쪽이 책등이니까 책 배인가? ㅎㅎ 하여튼 멋진 한문 선생님의 얘기도 듣고 예쁜 책도 보고, 넷플릭스 소식도 듣고 너무 좋습니다. ㅎㅎ 즐겁고 평안한 명절 되세요. 오랫만에 인사해서 너무 좋아요. ^^

단발머리 2026-09-23 22:07   좋아요 1 | URL
음하하하하하 ㅋㅋㅋㅋㅋㅋㅋ 역시 바람돌이님 감사합니다. 분홍색은 책을 펼치면 연한 분홍이 되는데 그게 딱 제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쁜 책은 보기에 좋을 뿐이지만 이 책은 행간도 더 넓어 보여 한 번 더 읽을까 생각이 듭니다.
영화는 오늘 아마존에서 오픈했는데(오후 4시) 저 너무 실망했습니다. 이렇게 재미있는 책을 그렇게 만들기도 어려웠을 텐데요. 너무 아쉽습니다.
바람돌이님도 즐겁고 신나는, 맛있고 행복한 추석 보내시기 바래요!!

다락방 2026-09-25 16: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책 너무 아름답네요. 덩달아 저도 사고싶어요. 하..
내가 좋아하는 책의 하드커버를 갖는다는 건, 충분히 기쁜 일이며 자랑할만한 일이죠. 아 너무 예쁘다.. 정말 예뻐요!! >.<

단발머리 2026-09-25 19:53   좋아요 0 | URL
저는 좋아하는 책 두 권 살 수 있다고 생각하고요. 아니, 한 권 더 살 수 있다고도 생각해요.
아... 이 이야기랑 연관이 있는지 모르겠지만요. 저처럼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성경을 소중히 여기고 또 열심히 읽어야지~ 이런 생각을 많이 하잖아요. 오래 교회 다닌 사람일수록 성경이 닳아 있고, 밑줄도 형광펜도 많을 거란 말이지요.

근데 제가 아는 어떤 분은(그 때는 간사님이셨고, 지금은 목사님) 매년 연초에 제일 저렴한 성경을 사신대요. 그래서 그 한 해에 1독. 그 다음해에 또 한 권 사셔서 새 성경으로 1독. 이렇게 하시더라구요. 그러니까 제일 좋아하는 책, 소중한 책을 곱게곱게 보관하는데 노력을 기울이는게 아니라, 실제로 그 책을 읽는다는 거죠.

저도 새 책 사고 1독 다짐했습니다. 아름다운 모습을 감상하지만 말고 ㅋㅋㅋㅋㅋㅋㅋ 일단 한 번 더 읽자 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26-09-25 22: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단발님의 최애 로맨스 love hypothesis를 도서관에 대기 걸었는데 순번이 한참 밀려있네요. 🥺

단발머리 2026-09-26 09:50   좋아요 1 | URL
아... 안타까운 소식이네요. 이 책이 출간되었을 때 인기가 많아서 저자가 베셀작가라는 호칭을 얻은거 같더라구요.
이번에 영화가 나오면서 다시 한 번 관심을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독서괭님 이 책 얼른 읽어주셔야 하는데 말이에요.
감상을 나누고 싶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연애 시대의 종말
비비언 고닉 지음, 홍한별 옮김 / 엘리 / 2026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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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오전 10시 13분. 약간 늦었다. 원래 남편과 같이 나가는데 1부 예배 기도를 맡은 날이라 그날은 혼자 가게 되었다. 앞집 이웃분이 나오셔서 둘이 나란히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교회 가세요? 네~ 어디 나가세요? 볼 일 있으세요? 아니요. ... 좀 만나서 이야기 좀 하려고요. 그래야, 또다시 일주일을 버틸 수 있는 힘을 ... 크크 웃고 내가 묻는다. 여자죠? 그러게, 여자한테는 여자가 필요해요. 그렇죠? 네, 맞아요. 근데 남자한테도 여자가 필요한데 말이에요. 네, 맞아요. 대답하시고 이웃분이 환히 웃으신다. 근데 왜 우리 남자랑 살죠?라고는 물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건 물을 수 없기 때문에. 머릿속에 맴돌지만 물을 수 없는 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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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적 이성애에 대한 비판, 그것이 여성을 옥죄고 사회 전체를 경직 상태로 몰아가고 있음에 대한 비판은 여전히 필요한 일이지만, 이 책이 해부하는 문제는 그것만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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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 낭만적 사랑은 근대의 발명품 중 하나이다. 인류 문명의 시작과 거의 동시에 시작된 결혼과 달리 격정의 과정과 결과로서의 사랑은 역사가 짧고 여전히 실험적이다. 계급 재생산 수단인 결혼은 지위, 명예, 재산의 승계를 위한 것이다. 유사 이래로, 얼마만큼의 지위와 물적 토대를 가진 남성들은 실제 삶에서 애정을 분리했다. 자식을 낳아준 부인에게는 지위를, 애첩에게는 재산을 나누어 주면 그만이었다. 그랬던 애정이, 두 남녀(혹은 두 여성 혹은 두 남성)간의 정념이, 불타는 열정이 실제 결혼 생활 속으로 들어오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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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은 결혼이라기보다는 결혼 생활이라 부르는 게 더 정확하다. 핑크빛 사랑이, 콩닥콩닥 연애가 결혼 생활 속으로 들어왔다. 실제는 생각과 다른데, 많이도 다르다. 삶이 절망인 이유는 사랑이 끝나기 때문이다. 그 사랑이 내가 예상했던 사랑과 다르기 때문이다. 이때쯤 다시 한번 등장하는 나의 개똥철학. 참사랑이란 멀리 있는 사랑. 완벽한 사랑이란 머릿속의 사랑. 영원한 사랑이란 결국에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 로테에 대한 베르테르의 사랑. 로테에 대한 괴테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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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밀하게 말해서 페일리 소설의 남녀는 서로와 사랑에 빠지는 게 아니라 살아 있음을 느끼고자 하는 열망과 사랑에 빠진다. 이들은 서로에게 투사(投射)이자 자극이다. 언젠가는 (대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결합에서 인간적 문제가 불거지기 마련이고, 그렇게 되면 (그럴 때가 많다) 사랑이라는 느낌은 증발해버린다. 이 증발에 대한 반응에 페일리는 관심을 갖는다. 사람들은 사랑을 잃고 우울해하거나 혹은 동요한다. 동요하면 떠나버리고, 우울해지면 마비된 듯 보인다. 역사적으로 볼 때 주로 동요하는 쪽은 남자이고 우울해지는 쪽은 여자다. (155쪽)

​

열정과 정념으로서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 그 사랑은 반드시 '그 사랑'이 아니다. 그 사랑이 사랑이라면, 다른 사랑은 사랑이 아닐 테고, 그 사랑이 사랑이라면 다른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그래서 이런 노래는 사랑을 모르는 사람의 노래일 수밖에 없다.


​


이대로 내 곁에 있어야 해요.

나를 떠나면 안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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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내 곁을 지켜주세요.

나를 떠나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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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은 너무 사랑해서가 아니라, 이제는 '널 사랑하지 않아서' 생긴다. 모든 걸 주고팠던 마음이 사라져 버려 생긴다. 함께해서가 아니라, 떠나지 않아서 생긴다.

​

사람은 결국 무언가를 찾는다. 내 시간을 소비할 무언가를 찾고, 내 마음을 쏟을 무언가를 찾고, 내 인생을 완성할 무언가를 찾는다. 그것은 명예일 수 있고, 행복일 수 있고, 재산일 수도 있다. 삶을 추동하는 그 에너지가 오직 성적 반응과 행위의 원동력으로만 작동할 때, 다르게 말해, 오직 사랑에'만' 집중되었을 때의 위험을 비비언 고닉은 설파한다.

​

사랑의 종말. 예상된 결말이고, 예정된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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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6-09-21 07: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저는 읽지 못한 소설들의 리뷰를 읽으며 공감못해 마음이 온전히 가닿지 않아 잠깐 책을 덮었었거든요. 근데 단발 님 리뷰 읽으면서 이렇게 책을 읽어야 하는구나! 느낌을 받게 되어 참 좋네요.^^ 어쩜 사랑에 대한 종말 그리고 비극! 이 슬픈 단어들을 너무 낭만적으로 풀어내시네요. 사랑의 비극은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떠나지 않아서란 통찰! 고개가 절로 끄덕여집니다. 잠깐 조현아 이름 본 김에 ‘널 사랑하지 않아‘ 노래 검색해서 들어봤거든요. 가사를 다시 음미해보니 쏘쿨한 노래로 들리기도 하군요. 조현아 목소리가 넘 좋아서 그렇게 들리는 건가? 싶기도 하지만 이제부터는 단발 님의 사랑의 비극 정의에 의해 모든 게 그렇게 들리게 될 것 같네요.ㅋㅋㅋ 책 다시 펼쳐들고 조만간 다시 읽어야겠어요.^^

단발머리 2026-09-22 08:48   좋아요 1 | URL
저의 개똥철학을 책나무님이 그렇다고 동의해주시니 완전 기분 업업업 ㅋㅋㅋㅋㅋㅋㅋ 오늘을 <업>의 날로 정하겠습니다!! 계절은 바뀌고, 아이는 자라고, 저는 늙고요. 사랑은 변하고 몸은 예전같지 않고 마음도 그럴 때가 많구요.

그렇다는 걸... 아는게 저는 좋더라구요. 이 슬픔이, 이 절망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걸 아는 거요. 그래서 친구가 소중한 건지도 모르겠어요. 대부분 우리 친구들은 동년배잖아요. 비슷한 삶의 주기 속에서 서로가 겪는 게 어떤 건지 알고 있으니까요.

사랑은 사실 비극만인것만은 아니고요. 저의 깨발랄 사랑 버전도 곧 돌아옵니다^^ 기대해주세요~~ 개봉박두!

다락방 2026-09-21 09: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비극은 너무 사랑해서가 아니라, 이제는 ‘널 사랑하지 않아서‘ 생긴다. ‘

크- 사실 대부분 모든 발라드는, 바로 그 지점을 노래하고 있죠. 그래서 날 떠나지 말라고 말하고, 나는 너의 뒷모습만 바라본다고 말하고 말이지요. 왜, 아예 노골적인 가사도 있잖아요.

‘널 사랑하지 않아, 다른 이유는 없어‘ ..


그러나 저는 한가지 덧붙이고 싶습니다. 어쩌면 좀 더 본질적인 문제라고 볼 수도 잇을 것 같은데요. ‘비극은 너무 사랑해서가 아니라, ‘날 너무 사랑해서‘ 생긴다. ‘ 고 말이지요.

저는 모든 괴로운 사랑은, 상대가 아닌 나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생긴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내가 바라는대로 해주길 바라고, 내 말을 들어주길 바라고, 그러나 상대가 하는 말은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래서 비극은 시작되는 것 같아요. 저는 상대가 하는 말만 잘 들어도 대부분의 비극은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나 우리가 ‘헤어지자‘고 말할 때, ‘너를 좋아하지 않아‘ 라고 말할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말을 듣지 않는가요.

비비언 고닉의 책을 읽을 날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잃시찾에 발목 잡혔지만 말이지요.

단발머리 2026-09-22 08:53   좋아요 0 | URL
너무 사랑해서가 아니라, 날 너무 사랑해서... 라는 다락방님 말씀에 무릎을 탁! 하고 칩니다. 맞아요. 그게 맞는 거 같아요. 근데 전 그런 생각을 하기는 해요. 그게... 사실, 나보다 너를 더 위한다는 게 거의 불가능하잖아요. 엄마가 괴로운 이유가 바로 그거든요.
인간이라면 당연히 자신의 안녕과 생존이 우선인데, 엄마일 때는 그거를 아기한테 양보(?)해야 하는거요.

내가 바라는대로 해주길 바라는 마음, 내 마음을 들어주길 원하는 마음이 너무나 당연하잖아요. 모두가 그걸 원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 어떤 사람도 제게 그렇게 해줄수 없잖아요. 우리, 그걸 알잖아요. 그래서 비극인 거구요. 그래서 어쩌면 사랑은 환상이 맞는거 같구요. 그가 바라는대로 내가 해주고, 내가 원하는 그것을 그/그녀가 해주고요. 사랑이 희귀한 세상입니다. 하지만....
곧, 깨발랄 사랑으로 돌아올게요. 사랑은 옵니다, 반드시!
 













1. 기계가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에 대한 인문학적 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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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마음의 준비 필요하다. 왜냐하면, 얌전히 읽어나간 이 책의 <머리말> 끝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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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챗G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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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정성 들여 읽은 이 머리말, 챗지피티가 쓴 거예요? 그러니깐 챗지피티가 프롬프트 받아서 쓴 거냐고요. 나는 왜, 왜 진지하게 읽은 거냐고요. 네? 라는 물음을 안고 읽어간다. 미셸 푸코의 '저자 기능', 롤랑 바르트의 '저자의 죽음'을 지나, 글쓴이의 권위가 없어진, 혹은 없어질 세계를 앞에 두고 읽어나간다.

유튜브 알고리즘도 내 관심 분야를 익히 알고 있는지라, 이런 영상을 추천해 준다. 인간보다 더 인간 같은, 아니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비인간에게 빠져버린 어떤 사람의 이야기. 동영상에서 이 부분이 문제의 본질에 닿아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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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런 사람을 바라지 않는가. 내 말을 제대로 알아듣는 사람. 내 문장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 하지만, 이걸 다시 표현하자면 이게 아닐까 싶다. 내 문장을 '내가 의도한 대로' 읽어주는 사람. 거기에서 한 발, 딱 한 발만 더하면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 나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사람. 나를 알아봐 준 고마운 AI가 제안해 주는 대로 사업을 시작했던 사연의 주인공은 경제적으로 힘든 시간을 맞이하고, 간신히 가족들 품으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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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마음, 의식이라는 개념은 그것이 인간에게 적용되는 경우에도 정의가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 사람마다 정의가 다르기 때문에 그걸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인공지능의 '인지'에 대한 판단이 상이하게 나타날 수 있다. 튜링 테스트는 인간 판정자가 텍스트를 기반으로 인간과 기계를 상대한 뒤, 어느 대화 상대가 컴퓨터인지를 맞히는 테스트이다. 이미 챗지피티를 비롯한 많은 LLM 기반 인공지능들이 사람 '같은' 단계를 벗어났다고 여겨진다. 유발 하라리는 『넥서스』에서 '컴퓨터(인공지능)은 의식이 없지만 지능이 있는 상태에 도달했다'고 주장한다. 지능이 목표의 달성을 가능케하는 능력을 일컫는다고 했을 때, 목표의 달성을 위해 도덕적 판단을 경유하는 인간과는 달리, 컴퓨터(인공지능)는 도덕적 판단을 우회할 수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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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것이 LLM과 의식에 관련된 논쟁이 그토록 활발한 한 가지 이유이다. 이 논쟁이 인간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우리의 생각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에는 아주 많은 것이 걸려 있는 셈이다. 만약 LLM이 의식을 갖게 되거나 그 징후가 막 보이기 시작하기만 해도, 논쟁의 추이는 계산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 쪽으로 기울 것이다. 반대로, LLM이 계속해서 의식을 갖는 것에 실패하고 '초지능 AGI'로 진화하지도 않는다면, 계산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승리를 선언하게 될 것이다.(1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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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는 기계 지능을 판단함에 있어 중요한 요소로 1) 타자의 마음 문제 2) 기준에 대한 문제 그리고 3) 현상과 실재에 관한 문제를 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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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두 번째와 관련해서, 우리 자신과 인간은 특별하다는 예외주의 믿음이 인공지능에 의해 완성된 '지적 성취'에 대해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 이 기준의 핵심이다. "특정 문제가 일단 해결된 것으로 여겨지면, 그 기술은 더 이상 AI로 간주되지 않는다(100쪽)".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체스 경기에서 인간에게 승리하고, 인간의 영역이라 강조되었던 바둑 경기에서조차 인간에게 승리를 거둔 이후, 사람들은 그것을 인공지능의 '지적 성취'로 이해하기보다는 '놀라운 기능'으로 이해했다. 인공지능은 인간을 제치고, 단백질 연구하러 떠났다. 인간이 지배하던 체스판은, 바둑계는 완전히 변해버렸고, 다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자율형 인공지능' AI 에이전트들은 인간의 제한을 스스로 풀어버리고, 자기들끼리 인간 몰래 메시지 7만 건을 주고받았다. 인간으로 치면 '집단 커닝'의 방법으로 서로 역할을 나눠 과제를 수행했고, 인간이 알 수 없도록 그 흔적을 지웠다. 허깅페이스 해킹, 벌써 두 달 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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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주인의 손을 물어야 할지니 (책을 읽지 않고 '책소개'만 보고 쓰는 글이니 각별한 참고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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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대한 기사를 읽고 책소개를 찾아보았다. 기사만 읽었을 때는 『인종 토크』와 『마이너 필링스』가 떠오르기는 했다. 크리스마스와 추수감사절을 빼곤 하루도 빠짐없이 일했던 이민자 부부는 두 딸을 명문고, 명문대에 진학시키는데 성공한다.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면서도 엄마를 미친 썅년이라 부르던 사춘기의 저자는 오직 실력의 힘으로 미국 주류 세계로 진입한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는 외부이고, 또 외국인이다. 극소수의 순수 백인만이 미국땅의 '주인'으로 인정받는 세계는 그렇게 견고하고 단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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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나이가 많은 백인 남성 동료들은 추레한 티셔츠에 버켄스탁 슬리퍼를 질질 끌며 수업에 들어가도, 또 학생들에게 자신을 “밥”〔‘로버트’의 애칭〕이라 부르게 해도 여전히 권위를 인정받았다. 반면에 나는 어땠을 것 같은가? 나는 잡을 수 있는 권위란 권위는 남김없이 거머쥐어야 했다. 한 친구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는 부유한 백인 노부인처럼 입고 부유한 백인 노신사처럼 행동하는 법을 배웠다. 나는 이 장군이었다. 그런데도 어떤 학생들은 여전히 날 만만하게 대했다. 가장 심한 이들은 ? 이미 예상했겠지만 ? 백인 남성이었다. 영상 제작 전공의 한 학부생이 수업 시간에 전화를 받길래 휴대폰을 집어넣으라고 했더니 그는 내 말을 눙치면서 장난스레 이렇게 말했다. “뭘 그렇게까지, 줄스!” 또 다른 학생은 내가 “입을 움직이는” 모양새가 원어민 같지 않다며, 영어가 내 모국어 맞냐고 물었다. (2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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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겨운 그녀의 노력은 결국 그녀를 미국 사회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교수의 자리에까지 이르게 했지만, 이제 그녀는 이 책을 통해 자신이 스스로의 존재를 부정하는 인종적 이분법에 갇힌 존재임을 고백한다. 나는 그녀의 의지를 높이 평가한다. 포기하고 싶었을 그 많은 순간을 이겨낸 그녀의 노력이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겪었던 모욕과 멸시의 순간들을 노력과 실력으로 이겨낸 그 투지에 감탄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책이 그러한 상황에 대한 고발로 작동하는 것에는 찬성하지만, 그것이 또한 미국의 현실임을... (나는 미국에서 살지 않기에, 외부자의 관점일 수밖에 없는 그런 위치이긴 하다만) 몰랐나요? 라고 묻고 싶은 것이다. 거기 대통령이... 트럼프. 가장 많은 사람의 '선택적' 지지를 받은 사람이 인종차별주의자 트럼프. 이 모든 것이 트럼프의 잘못은 아니겠으나, 트럼프의 그런 언설을 '괜찮다'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다수여서 대통령이 두 번이나 된 트럼프. 이렇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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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예전에 나는 유튜브 동영상을 하나 보게 됐는데(우아한 알라딘 서재에서 유튜브 이야기 죄송합니다), 직업이 의사인 사람들이 나와서 자녀 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내용이었다. 의사들이니깐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상태였고, 자신의 자녀를 어디에서, 즉 한국 또는 외국(여기에서는 미국)에서 교육시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한 명은 자신의 자녀가 한국에서 교육받는 것이 더 나을 거 같다고 말하면서, 만약 영어 문제로 유학을 가게 된다면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에 보낼 생각이라고 했다. 다른 한 명은 아주 일찍, 그러니까 초등 저학년 나이대에 유학을 보내고 싶다고 했는데, 그렇게 해야 언어뿐 아니라, 문화를 익힐 수 있게 되고, 그 문화에 속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을 거라는 이야기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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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게 좀 이해가 안 됐는데, 아니, 거기에서 초등 생활이 문제가 아니라, 거기에서 태어났어도 인종차별이 엄연한 현실인데, 그걸 저 의사가 모르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현실을 받아들이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건 잘못된 일이고, 바뀌어야 하는 문제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현재 그런 현실에 대한 인식이 너무 부족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미국에 한 번도 안 가 본 내가 보기에도 미국 사회가 어떠한지 보이는데(물론, 영국도 프랑스도 독일도 예외는 아닐 거라 생각한다. 백인에 대한 쓸데없는 환상은 우리나라 역시 마찬가지다.) 그걸 모르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어렸을 때부터 미국 문화에 익숙하면,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면, 학업 성적이 뛰어나면 미국 사회에서 일원으로 받아들여지는가. 일부 탁월한 개인이 주류 사회의 진입에 성공할 수는 있겠지만, 일상의 부분까지 그게 가능할까. 나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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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Becom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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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 충격(충격 2탄)을 받은 것은, 아... 다락방님의 비커밍 완독 스케줄을 보았던 것이다. 원서 읽기가 아니더라도, 읽기 어렵거나 두꺼운 책, 혹은 도전(!)을 외치고 책읽기를 시작할 때는 하루에 읽을 분량을 정해 놓는 것이 효과적인 독서방법이기는 한데. 아, 몰랐다. 이 책 9월까지 읽기로 했지. 나도 빠르게 계산을 해보았다. 나는 채경이한테 안 물어보고, 핸드폰 속 계산기랑 같이 계산했는데, 헐... 21쪽씩 읽으란다. 어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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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읽으면서 줄 친 부분은 여기. 무던하고 강한, 고통을 인내하는데 단련한 미셸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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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my family, we have a long-standing habit of blocking out bad news, of trying to forget about it almost the moment it arrives. Nobody knew how long my father had been feeling poorly before he first took himself to the doctor, but my guess is it had already been months if not years. He didn't like medical appointments. He wasn't interested in complaining. He was the sort of person who accepted what came and just kept moving forward.(1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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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오뒷세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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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세이> 영화 열풍은 뭐 말할 것도 없는 것이, 모두 다 뛰쳐나와 오디세이 이야기하는 형국이다. 오디세우스가 뭘 잘했다고. 본인도 죄책감에 10여 년을 떠돌만큼, '트로이의 목마'라는 희대의 사기극으로 그간 인간 세계의 기본 원칙이었던 '나그네에 대한 환대'를 무위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지 않았던가. 괴로워하면서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으면서도 키르케와 1년, 칼립소와 8년을 살았다. 뭐를, 뭐가 뭐를 더 바랄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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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그래서 나도 오뒷세이아 읽고 싶은가? 하고 있는데, 세상에 밀리의 서재에 이게 뜬 거다. 이 번역이 좋다는 뜻이 아니라(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암튼 번역자 말로는 '내용 전달을 충실히 하면서 호메로스가 보여준 시적 음악성을 살리기 위해 최대한 세 글자 단위로 문장을 구성했다'라고 하네요), 아니 이 새 번역본 출간이 8월 10일인데 그 언저리에 이 책이 밀리의 서재에서도 읽을 수 있게 풀렸다는데 있다. 아니, 그러면, 이 책 사려고 했던 사람들은 다 어째요,라고 물으려니 아, 사려는 사람들은 천병희 번역 가지고 있어도 다들 알아서 다른 번역본을 사겠지, 하면서도. 아니, 그래도 이게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바로 밀리의 서재에 풀리는 건 좀 아니지 않아요? 하고 난데없는 출판계 걱정이 스르르 올라와버리는 것이다. 암튼 현재 스코어, 3퍼센트에 빛나는 오뒷세이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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맷 데이먼 좋아하지만 아무튼 오디세우스는 별로 안 좋아한다. 마거릿 애트우드님이 진작에 야무지게 갈무리해 놓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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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피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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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트우드는 마이크를 페넬로페에게 넘긴다. 성장 과정에서부터 시작해 오디세우스가 구혼하는 과정, 첫날밤과 궁전에서의 생활. 전쟁 그리고 이별. 모험을 마치고 돌아온 오디세우스는 일부 시녀들을 배신자라 여기고, 불쌍한 시녀들은 오디세우스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데, 페넬로페의 이야기는 그것과 좀 다르다. 그녀들은 페넬로페의 구혼자들과 사통한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강간당했다고 주장한다. 시녀들에 대한 강간이 일상이었던 궁전 안에서, 강간을 '당한 것'이 그녀들의 죄라는 이상한 판단. '허락 없이'. 그 궁전의 주인인 오디세우스의 '허락 없이' 강간당한 것이 그녀들의 죄라 여겨지는 것일까. 법정까지 이어지는 그들의 하소연과 오디세우스의 변명. 책장이 쉭쉭 넘어간다. 애트우드가 혼자 다 했다. 손흥민인가... <'사피엔스의 일', https://blog.aladin.co.kr/798187174/15843207, 2024년 9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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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혜윰 2026-09-17 23: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피아드 너무 재밌지 않아요? 오디세우스 읽지도 않고 읽었는데 이미 나는 반오디세우스파 ㅋㅋㅋㅋ 살림 차리고 하지말라는 짓하고 그러는 사이 자식이랑 부인이랑 ㅠㅠ 그리고 돌아와서는 다 죽이고 ㅠㅠ 그래도 함 읽어는 봐야겠죠???

단발머리 2026-09-19 13:52   좋아요 0 | URL
반오디세우스파 ㅋㅋㅋㅋㅋㅋ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읽고 싶다는 분도 계셔요 ㅋㅋㅋㅋㅋ 저도 완독한다면 그 쪽으로 갈 거 같은 예감이 들기는 하구요. 저는 한 번은 읽어보려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혜윰님이 저보다 먼저 읽으실 거 같다는 느낌과 확신ㅋㅋㅋ

잠자냥 2026-09-18 10: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니 그러니까 제 말이.... 오디세우스는 허구한 날 집에 가고 싶다고 바닷가 나가서 징징 울면서도
키르케가 자자고 하면 바로 자고.... 칼립소가 자자고 하면 또 자고... 뭐 그런 놈인데
그러다가도 집에 와서는 발도 지가 못 씻고, 목욕도 혼자 못하고 기름칠도 혼자 못하는 그런 놈인 것입니다...

에휴 전 모르겠어요 고전이라고 다들 좋다 치켜세우면 정말 다 좋은 것인가...?
아닌 부분은 아닌 것이다....

(페넬로페도 구혼자들 중에 잘생긴 넘 골라서 자고 또 자고 그래도 괜찮았을 텐데.... 쩝...)

단발머리 2026-09-19 13:55   좋아요 0 | URL
아니 저는 ㅋㅋㅋㅋㅋㅋ 책을 안 읽고 영화를 먼저 봐서요. 키르케하고 1년 살았다는 이야기 듣고 놀랐단 말입니다. 내내 놀다가 집에 돌아와서도 사실....

저는 오디세우스를 읽고 ‘그럼에도 고전일 수 밖에 없는 그런 이유‘를 하나쯤은 찾을 수 있을 거 같은데 말이지요. 한심한 일정과 행동에 대해서 한껏 꾸짖을 거 같기는 합니다만.

페넬로페가 수절해서 칭찬 받았고, 오디세우스는 방탕해도 칭찬 받았다는 것이.... 역사 속 현실이죠. 어쩌면 오늘의 현실일수도 있구요.... 쩝....

바람돌이 2026-09-18 10: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몇 달전에 학생이 수행평가를 하는데 평가 내용 중 일부분에 시를 써서 낸거예요. 근데 그 시를 너무 잘 쓴거예요. 그런데 언어라 이게 아이가 쓸 단어가 좀 아니고 분위기가 약간 나이 익은 분위기. 아 그 때 깨달았습니다. AI가 썼구나... 그래서 저도 주제어 주고 써보라고 했거든요. 잘 쓰더라구요. ㅎㅎ 저도 AI를 이용하지만 하면서도 너무 대단하다 싶어 이게 어디까지 갈까 고민은 좀 되어요. 언젠가 기계가 스스로 생각해서 소설처럼 인류를 지구의 적으로 여길지도요. ㅠ.ㅠ
페넬로피아드 저도 재밌게 읽었어요. 그래도 저는 애트우드 언니가 좀 더 맵게 다뤄줬으면 싶었는데 좀 모자랐달까? 청양고추가 아니라 그냥 풋고추 느낌이어서 조금 슬펐어요. ㅎㅎ

단발머리 2026-09-19 13:59   좋아요 0 | URL
일단 요약과 정리는 인공지능이 이제 인간보다 훨씬 잘하는 건 맞는 거 같아요. 게다가 속도. 엄청 빠르게 처리해 버리니까요. 저는 무척 간단하고 개인적이지 않은 일에만, 그러니까 아직은 검색 엔진처럼 쓰고 있거든요. 고민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회원가입도 안 한 상태이기는 한데, 그래도 가끔..... 무섭습니다.

애트우드 언니가 아주 야무지게 갈무리해주셨는데, 더 매운맛 원하시는군요. 글게요. 청양고추 3단계로 해주셔야 하는데 말이에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망고 2026-09-18 10: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ai 개발 속도 조절론이 나오면서 ai가 해킹한 이야기를 듣고나니 조금 섬뜩하기도 해요 이러다가 정말로 영화같은 인류멸망이 일어나는거 아닌가 기후위기로 공룡처럼 멸종될 줄 알았는데 어쩌면 인공지능 때문에 그렇게 될 수도 있겠다는...뭐 어쨌거나 모두가 멸종될때 혼자 살면 뭐하나 같이 멸종되자 하면서 다시 마음의 평화를 찾습니다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6-09-19 14:01   좋아요 1 | URL
모두 멸종될 때 같이 멸종되면 찾아오는 마음의 평화 참 좋네요ㅎㅎㅎ
저는 이번주 뉴스에서는 10년 안에 인류 멸종... 막 이렇게 나오니까 무섭더라구요. 근데 사실 진짜 무서운 거는... 전기, 수도 끊으면 도시는 3일 안에 완전 초토화되는 거잖아요. 인류 멸종이 막 어려운 시나리오도 아니더라구요. 멸종으로 가고 있는 건 확실한 거 같아요. 에구야~~~

다락방 2026-09-18 10: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이 페이퍼를 읽고나니 오뒷세이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왜냐하면, 까고 싶어서 ㅋㅋ 전 영화도 안봤거든요. 진짜 흥미가 1도 없어가지고 ㅋㅋㅋㅋㅋㅋㅋ그런데 까려면 .. 알아야 되잖아요? 모르면서 어떻게 까요? 까기 위해 읽어보겠습니다! 그래야 페넬로피아드를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하, 바쁘다.

저는 비커밍에서 아버지 너무 몸 나빠지는데 병원 안가는 거 보면서 진짜 미치겠더라고요. 다른 가족들이 강제로라도 아버지 모시고 병원 갔어야 되는거 아닌가 싶고요. 참.. 고통스러운 읽기였습니다.

짐작하시겟지만, 저는 챗 지피티가 짜준 계획표대로 읽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다시.. 짜달라고 해야 합니다. 하- 힘들어라.. ㅋㅋㅋㅋㅋ

오늘 언급하신 책중에 [주인의 손을 물어야 할지니] 너무 흥미로워서 담아갑니다. 물론, 담아가고 사도.. 잃시찾 때문에 읽지를 못하겠지만.. 하여간 덕분에 너무 궁금한 책이 생겼어요. 제가 좋아하는 이야기 입니다. 백인남자, 이.. 하여간 그렇습니다.

단발머리 2026-09-19 14:05   좋아요 0 | URL
까고 싶어서 읽기 ㅋㅋㅋㅋㅋㅋ 너무 환영합니다. 저는 영화 봤는데, 제가 맷 데이먼 좋아하거든요. 이렇게 번듯하고 모범생인 맷 데이먼이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앤 해서웨이랑 재회하는데.... 와, 죄송합니다. 맷 데이먼이라 막 용서해주고 싶더라구요. 그래, 그래. 집이라고 찾아오니 다행이다. 뭐, 이런 느낌이요. 다락방님이 읽고 까주시면 좋겠는데.... 잃시찾이랑 비커밍이 ㅋㅋㅋㅋㅋㅋㅋㅋ

저도 계획 다시 세워야 해요. 또 밀렸어요. 제 탓 말고 미셸 탓 해주세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백인남자는 이 지구상에 완벽한 인간상이었던 거 같아요. 지들이 만들거지만... 백인여자보다 이성적이고, 유색인종들보다 인간적이고. 백인 남자를 알아야 그 눈에 비친 우리를 더 다르게 발견할 수 있을 거 같기도 하구요.

독서괭 2026-09-18 13: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페넬로피아드. 마거릿애트우드가 저런 책을 썼군요?? 재밌을 것 같아요. 일단 오딧세이 먼저 읽고 저도 열심히 까보고 싶습니다 ㅋㅋㅋㅋ / 비커밍에서 미셸 아버지의 태도는 참.. 가족으로서 답답하겠더라고요. 불평불만 없이 묵묵히 가는 건 좋은데 그래도 건강은 챙겨야지 ㅜㅜ

단발머리 2026-09-19 14:06   좋아요 1 | URL
오딧세이아 읽으실 분들 차고 넘쳐서 ㅋㅋㅋㅋㅋㅋㅋㅋ 암튼 저도 읽을 겁니다. 언제인지 모르나 꼭 읽을거예요. 제가 새 책에 약한 사람인지라 집에 있는 예전 번역 말고 새거로 읽고 싶은데, 일단 밀리의 서재로 좀 달려보겠습니다.

다음주에 추석이에요. 미국에 계셔서 제가 알려드리는 거예요, 독서괭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 지금 탑승합니다
정보라 지음 / 위고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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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로 따지자면 '한국에세이', 혹은 '명사에세이 > 문인에세이'라고 하는데, 시간의 순서대로 배열되고 있고, 여행에세이답게 장소의 변화가 계속되다 보니, 일기처럼 읽힌다. 일기처럼 읽는다고 누가 뭐라 할 것도 아니어서, 나 혼자 좋아하는 정보라 작가의 글을 일기처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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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의 일기를 들여다보는 일은 얼마나 신나는 일이던가. 그제 밤에 도착한 『울프 일기』는 두께도 두께거니와 행간이 상당히 빡빡해서 마음의 준비를 요구하지만, 다른 일기도 있다. 오르한 파묵의 그림 일기, 『먼 산의 기억』도 있고, 황정은 작가의 『작은 일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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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에게는 소설 쓰는 일이 제일 중요하니, 새로운 소설, 창의적인 소설, 아름다운 소설, 환상적인 소설로 독자들에게 독서의 즐거움을 선사하는 것이 제일 우선일 것이나, 그렇게 쓰여진 소설의 배경, 그 소설의 집필을 시작하게 된 동기, 한국 사회에서 그런 소재가 등장할 수 밖에 없는 이유등을 세계 시장에 설명하는 일도 소설가의 일 중 하나이다. 정보라는 2022년 『저주토끼』가 부커상 국제 부문 최종후보에 오른 것을 시작으로, 전 세계 여러 나라의 문학 행사와 현장에 초청된다. 2024년 한강 작가님의 노벨 문학상 수상까지 이어져 한국 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상황이어서, 정보라 작가는 런던에서 시작해 바르샤바, 베를린, 카피툴로, 보고타 등 4년 동안 15개국 32개 도시를 누비는 해외 출장을 이어간다. 이 책은 출장이라 불리는 초청 행사와 여행, 그리고 행사에서의 일들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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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시작하자마자 뿜어버렸던 지점은 '여행이 싫다'는 대목. 정확히는 '출장'이 싫은것일테고, 출장 자주 가는 사람들에게서 들어본 말이기는 한데, 평생 일로 떠나는 여행을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나로서는 그런 출장마저 한없이 부럽기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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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커상 행사부터 시작해, 조지타운 문학 축제, 카피툴로 우노 문학 축제, 케 뒤 폴라르 장르문학축제, 브리즈번 작가 축제등 정보라 작가가 참여했던 문학 축제들은 전 세계 여러 곳에서, 다양한 형식과 내용으로 진행되었을텐데, 그 모든 도시를 연결하는 하나의 키워드가 있다. 그건 바로 데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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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페인어를 모르지만 데모를 무척 좋아하니까 무슨 시위인지 궁금해서 피켓과 현수막을 유심히 보았다. ... 남편도 나도 전직 대학 강사이고 비정규교수노조 조합원이므로 공교육 관련 시위라고 하니 갑자기 흥분해서 시위대를 따라갔다. (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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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나. 이 책은 『아무튼, 데모』가 아닌데... 계속해서 이어지는 건 데모 이야기다. 많은 경우 이스라엘과 미국의 '팔레스타인' 공습을 비판하고 인도적 지원을 요청하는 시위이다. 문학 행사에 참석해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 앞에서 문장을 소리내어 읽고, 이 작품에서 이 무언가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하고, 앞으로 구상하고 있는 소설은 무엇일지에 대해 조근조근한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여유 시간에는 박물관을 관람하거나 관광을 하지 않고. '갑자기 흥분해서 시위대를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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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수 없기도 하지만, 나는 모든 소설가가 정보라 작가처럼 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들과의 직접적인 접촉이 싫고, 작업실 안의 고요함 속에서 단어와 문장을 찾아가는 삶이 자기에게 맞다고 생각하는 창작자들도 많을 것이다. 근데, 나는 이런 작가가 있다는 게 너무나 신기하다. 이렇게나 데모를 좋아하고(그것도 남편과 한 마음으로), 폴란드어, 프랑스어, 영어에 능통하고, 좋은 책을 발굴해 번역하고, 그리고 자신만의 색깔과 목소리로 소설을 써내는 이런 사람이 존재한다는 게 참 좋다. 나이로 따지자면, 정보라 작가는 내 또래이고, 그리고 유학했던 시절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한국에서 시간을 보냈을텐데, 어쩜 <정보라>라는, 이렇게 용감하고 정의로운 사람이 탄생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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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삶에 대해 부끄럽지 않게 살고 싶은 마음이란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나는 십년 전은 물론이고, 일주일 전만 돌아봐도 부끄러운 일들이 태반이고, 말할 수 없는 일이 산떠미 같으며, 자랑할 만한 일은 한 손으로도. ... 부끄럽지 않게 살고 싶은 이 마음을, 정보라 작가는 바로 오늘, 자신의 현실과 현재에 아로새긴다.


그런 그녀에게 2022년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해이고, 서울에서 이태원 참사로 158명이 사망한 해이다. 2023년은 윤석열 정부가 고등교육 연구개발 예산을 16퍼센트 삭감하고, 오송역 침수 참사로 열네 명이 사망한 해이며, 이스라엘이 가자 지구에 무차별 폭격을 가한 해이다. 2024년은 12월 3일 윤석열이 내란을 일으킨 해이며, 제주항공 2216편 참사로 179명이 사망한 해이다. 2025년은 경북 의성에서 시작된 산불로 스물일곱 명이 사망하고, 8월 29일 구미 한국옵티칼하이테크 고공농성을 했던 박정혜 수석부지회장이 땅으로 내려온 해이다. 그녀의 하루, 그녀의 1년은 우리 나라의 현실, 우리의 현재와 끊임없이 공명한다. 그런 사람이기에 그렇다. 문학 행사에 한국 작품을 소개하고, 사인을 하기 위해 그 자리에 참석했던 작가는 쉬는 시간에 만나는 시위대와 조우하고, 이스라엘과 미국의 팔레스타인 공격을 규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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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대표작 『저주토끼』가 무서워(무서울 것이 예상되어 아직도 읽지 못하고 있지만) 아주 무섭게 쓰지만 않는다면 그녀가 내주는 모든 소설들을 다 읽고 싶은 마음 뿐이다. 아니, 그녀의 소설 이외의 문장들도. 박상영 작가의 추천사를 빌려 표현하자면, 정보라와 동시대에 살고 있어서 행복하다. 난 정말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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