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중심의 엄마표 성교육은 주로 성추행의 위험한 순간들에 대한 것이었다. 성충동에 사로잡힌 남자들의 기이한 행동에 대한 엄마의 묘사는, 열여덟의 엄마가, 혹은 내게 그 말을 할 당시의 엄마까지도 얼마나 순진한지를(?) 보여주었다. 나는 열다섯이었고, 또 열여덟이었다. 결론은 항상 똑같았다. 기지를 발휘해 그 장소를 벗어나라. 도망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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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제의 창조』 못지않게 내 인생 최고의 페미니즘 수업을 열어주셨던 한문 선생님은 성폭행 보다 성폭력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셨다. 성폭력이란 결국 성기에 가해진 폭력일 뿐이라고 선생님은 여러 번 강조하셨다. 20대 후반의 기혼 여성, 정규직이 아닌 1년 계약직 선생님이셨다. 중병아리 같은 여중생들 사이에서 백조처럼 보이는, 나란히 걸을 때 자꾸 곁눈질하면서 쳐다보고 싶었던, 배우처럼 예쁜 선생님의 말씀이 그러했다. 그때까지 내가 들었던 '성에 대한 담론', '여성의 성에 대한 설명', 그것을 토대로 내면에 공고화된 성관념과는 상반되는 주장이었다. 여성과 성, 혹은 순결과 성관계에 대해서 그런 설명은 처음이었다.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그렇구나. 순결을 잃었다고 해도 자살하지 않아도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떠올랐던 순간이 또렷이 기억난다. 중학교 2학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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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책을 읽으면서는 성(sex)이 그렇게나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착취의 시작점은 '생물학적 차이'에 대한 강조 때문이었지만, 사실 '섹스' 역시 '젠더'처럼 사회적으로 구성될 뿐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인간이 느끼는 쾌락에서 섹스가 가지고 있는 특이성을 모른척하기에는, 인간은 너무나 '동물적'이며, 또한 동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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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몸을 가지고 있고, 텔레파시로 소통할 수 없는 존재다.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이상, 내 몸의 경계, '나'라는 존재의 최종 한계가 외부의 '나'와 조우하는 유일한 방법은 접촉일 수밖에 없고, 라캉이 '성관계는 없다'라고 말한 바로 그 지점에서 찰나의 순간, '성관계'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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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인간의 기억, 정보 처리, 사고 과정의 일부, 더 정확하게는 상당 부분에서, 인간의 성과를 압도하는 인공지능에게 부재하는 건 무엇인가. 그것은 경험이고, 실패이고, 고통이다. 그리고 몸이다. 우리 인간에겐, '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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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데없이 장황해져버렸다. 이쯤에서 대충 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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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대충 스무 개 정도의 글을 쓴 것 같다. 그만 써야지, 그만 쓰겠지 했는데 쓰고 나서 또 쓰고, 한참 뒤에 또 썼다. 애덤보다는 올리브를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혼자 생각한다. 보스턴으로 출장 갔던 애덤이 지난밤에 돌아왔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예상치 못한 시간에 애덤을 만났다. 애덤이 등장하자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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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까. 무슨 가능성일까. 애덤의 등장은 두 사람에게 어떤 가능성을 주는 걸까. 애덤의 등장이 왜 올리브에게는 희망적으로 느껴지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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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브의 가능성, 올리브의 희망은 뭔지 잘 모르겠고, 내 가능성은 이런 거다. 영화 <The Love Hypothesis>의 9월 23일 아마존 공개를 앞두고 주문한 『The Love Hypothesis』 하드커버를 이 밤에 영접할 가능성. 그 가능성은, 그 희망은 마침내 현실이 되었고. 이 책을 (이유 없이) 이렇게 비싸게 구입한 게 부끄럽기는 한데, 그건 그것대로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이 책을 자랑해야겠는데, 자랑할 데가 여기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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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추석 선물 하나씩 받아온다는데, 사회적 지위와 체면 때문인지 나는 선물 하나 없다. 자목련님 페이퍼가 책과 추석 선물에 대한 것이어서 반가웠다. 내 페이퍼도 책과 추석 선물 페이퍼다. 헤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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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6-09-23 11: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자랑하셔야지요. 자랑하셔야 하고 말고요. 저렇게 비싸고 예쁜 책인데요. 책등이 아니고 저 분홍색부분은 뭐라고 하죠. 바깥쪽이 책등이니까 책 배인가? ㅎㅎ 하여튼 멋진 한문 선생님의 얘기도 듣고 예쁜 책도 보고, 넷플릭스 소식도 듣고 너무 좋습니다. ㅎㅎ 즐겁고 평안한 명절 되세요. 오랫만에 인사해서 너무 좋아요. ^^

단발머리 2026-09-23 22:07   좋아요 1 | URL
음하하하하하 ㅋㅋㅋㅋㅋㅋㅋ 역시 바람돌이님 감사합니다. 분홍색은 책을 펼치면 연한 분홍이 되는데 그게 딱 제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쁜 책은 보기에 좋을 뿐이지만 이 책은 행간도 더 넓어 보여 한 번 더 읽을까 생각이 듭니다.
영화는 오늘 아마존에서 오픈했는데(오후 4시) 저 너무 실망했습니다. 이렇게 재미있는 책을 그렇게 만들기도 어려웠을 텐데요. 너무 아쉽습니다.
바람돌이님도 즐겁고 신나는, 맛있고 행복한 추석 보내시기 바래요!!

다락방 2026-09-25 16: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책 너무 아름답네요. 덩달아 저도 사고싶어요. 하..
내가 좋아하는 책의 하드커버를 갖는다는 건, 충분히 기쁜 일이며 자랑할만한 일이죠. 아 너무 예쁘다.. 정말 예뻐요!! >.<

단발머리 2026-09-25 19:53   좋아요 0 | URL
저는 좋아하는 책 두 권 살 수 있다고 생각하고요. 아니, 한 권 더 살 수 있다고도 생각해요.
아... 이 이야기랑 연관이 있는지 모르겠지만요. 저처럼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성경을 소중히 여기고 또 열심히 읽어야지~ 이런 생각을 많이 하잖아요. 오래 교회 다닌 사람일수록 성경이 닳아 있고, 밑줄도 형광펜도 많을 거란 말이지요.

근데 제가 아는 어떤 분은(그 때는 간사님이셨고, 지금은 목사님) 매년 연초에 제일 저렴한 성경을 사신대요. 그래서 그 한 해에 1독. 그 다음해에 또 한 권 사셔서 새 성경으로 1독. 이렇게 하시더라구요. 그러니까 제일 좋아하는 책, 소중한 책을 곱게곱게 보관하는데 노력을 기울이는게 아니라, 실제로 그 책을 읽는다는 거죠.

저도 새 책 사고 1독 다짐했습니다. 아름다운 모습을 감상하지만 말고 ㅋㅋㅋㅋㅋㅋㅋ 일단 한 번 더 읽자 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26-09-25 22: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단발님의 최애 로맨스 love hypothesis를 도서관에 대기 걸었는데 순번이 한참 밀려있네요. 🥺

단발머리 2026-09-26 09:50   좋아요 1 | URL
아... 안타까운 소식이네요. 이 책이 출간되었을 때 인기가 많아서 저자가 베셀작가라는 호칭을 얻은거 같더라구요.
이번에 영화가 나오면서 다시 한 번 관심을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독서괭님 이 책 얼른 읽어주셔야 하는데 말이에요.
감상을 나누고 싶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