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팻 캐바나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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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그녀가 이해된다고, 그녀의 말이 이해된다고, 말할 때, 나를 비난하지 말기를. 나는 그녀가 옳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나는 그녀의 생각이 바르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그녀가 이해된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그녀가 이해된다.

몇 년 동안, 나는 가끔씩 늙은 남편의 죽음에 대해 한 여성 작가가 쓴 글을 떠올릴 때가 있었다. 비탄에 빠져 있으면서도 그녀는 자기 내면에서 ‘난 자유야’라고 나지막하게 속삭이는 진실의 목소리를 들었음을 시인했다. (113쪽)

 

죽어가는 남편, 비탄에 빠져 있으면서도 내면에서 들리는 작은 목소리.

이제, 난 자유야.

그 여성 작가를 이해하는 나. 그녀의 마음이 이해되는 나. 여기의 ‘나’는 ‘내’가 아니다. 지금 내가 뭐라고 말했던가. 아니다. 위의 문장은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내가 쓴 게 아니다. 내가 쓰고 있는 이 글은 무엇이냐? 리뷰냐? 페이퍼냐? 에세이냐? 아니다. 내가 쓰고 있는 이 글은 소설이다. 소설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소설이다.

소설 속의 ‘내’가 말한다.

나는 그녀가 이해된다. 죽어가는 남편을 보고 있는, 비판에 빠져 있는 한 여성, 그 여성의 내면에서 들리는 작은 목소리.

난, 자유다.

 

결혼했다고 해서, 다 사랑을 아는 건 아니다. 하지만, 사랑의 시간이 생활이 되었을 때, 더 큰 신뢰와 더 깊은 실망의 롤러코스터와 같은 시간이 있다. 갈등의 시간을 보내고 난 뒤, 내 옆에 있는 사랑을, 사랑의 눈길을 보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우리는 30년을 함께했다.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서른두살이었고, 그녀가 죽었을 때는 쉰여섯 살이었다. 그녀는 내 삶의 심장이었다. 내 심장의 생명이었다. (111쪽)

 

눈으로 문장을 읽어가다가 여기에서 멈추고 말았다.

그녀는 내 삶의 심장이었다. 내 심장의 생명이었다.

30년을 함께 산 아내를 회상하는 한 남자의 고백이다. 그녀는 내 삶의 심장이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있구나. 사랑에 빠진 또 한 명의 남자가 떠오른다.

 

 

[김대중 자서전]을 읽은 적이 있다. 누구였는지 기억은 안 나는데, 한국사에 정통한 학자가 말하기를, 한국사에 대해 알고 싶으면 이 책을 읽으면 된다고 했다. 한국 현대사의 모든 주요한 사건은 ‘김대중’과 관련이 있다고 했다. 나는야, 김대중 대통령님을 매우 사모하고 사랑하기에 읽기에 큰 어려움이 없었으나, 그 분을 많이 애정하지 않는다면, 책 곳곳에 그 분의 사심 없는 자랑에 맘 상할 수도 있겠다. 예를 들면 이렇다. “(그 어려운 문제를) 내가 가서 바로 해결했다.” “(미국의 주요한 책임자를) 내가 직접 만나 오해를 풀 수 있었다.”

 

[김대중 자서전]의 발행 즈음에 김대중 대통령님의 마지막 일기가 샘플북 형태로 유통된 적이 있었다. 나도 한 권 갖고 있었는데, 사진 한 장 올려보려 찾아보았으나 결국 찾지 못했다. 얇은 샘플북은 잃어버렸는데, 읽었던 글 한 대목은 잊히지 않는다.

 

0월 0일 0요일

오늘은 하루종일 아내와 함께 있었다. 책을 읽고 정원을 둘러보았다. ... 둘만 있으니 정말 좋았다. 아내와 같이 있는게 즐겁다.

 

 

정확한 내용은 아니겠지만,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이 일기를 쓰실 무렵에 김대중 대통령의 나이가 83세이시다. 결혼 생활 50년 이상이다. 이휘호 여사는 아내이자 정치적 동지로서 각별한 사람이었던 것은 확실하지만, 아내와의 하루, 아내와의 시간을 이렇게도 행복해 하는 사람을, 나는 본 적이 없다. 아내를 이리도 사랑하는 사람을, 아내를 이리도 애정하는 사람을 나는, 본 적이 없다.

여기, 이 사람을 빼고 말이다.

나는 단순하게, 그리고 철저하게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랬던 건 내게 행운이자 악운이었다. 일찍이 내 머릿 속에 떠오른 말들이 있었다. ‘내가 무엇을 하건, 무엇을 하지 않건 모든 면에서 아내가 그립다.’ 이 말은 내가 어디에 있고, 내가 누구인가를 확인하기 위해 나 스스로에게 반복했던 말 중 하나였다. (134쪽)

 

자신보다 그 사람을 더 사랑하는, 자신보다 그 사람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이런 사랑이 있다.

아내가 어떤 식으로든 살아 있는 한, 그녀는 내 기억 속에 살아 있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물론 아내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 속에도 생생히 살아 있다. 그러나 나는 아내를 기억하는 가장 주된 사람이다. 만약 그녀가 어디엔가 존재한다면, 그녀는 내 안에 내면화되어 존재한다.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었다. 마찬가지로 내가 자살을 할 수 없는 이유 또한 그러했고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내가 자살하면 나 자신만이 아니라 아내까지 죽이는 일이 되기 때문이었다. (148쪽)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이는 주로 아내와 함게하는 것을 의미했다. 나 혼자서 하길 좋아했던 것에 대해 말하자면, 나중에 아내에게 그것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는 즐거움이 얼마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 것 말고 이제 내가 하고 싶은 게 무엇일까? (133쪽)

 

30년을 함께 하고도, 더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함께 하고 싶은 두 사람 사이에 있는 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이 맞다. 슬픈 진실은, 모든 사랑 이야기는 잠재적으로 비탄의 이야기(60쪽)라는 것이다. 우주가 제 할 일을 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받아들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더 슬픈 건, 그렇게도 어렵고 힘든 일을 그 사람 없이 해내야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을, 혼자 헤쳐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 가장 외롭고, 슬픈 일을 말이다.

더 힘든 건, 긴 시간을 함께 해왔던 친구들마저, 오랜 우정을 나눈 친구들마저, 그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친구들은 어서 아픔을 털고 일어서라고 한다. 아내의 이름을 부르며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그를 외면한다. 힘들어하는 그를 채근한다. 일부 친구들과는 절교하는 상황에까지 이른다. 이제 그만 울음을 그치라는, 이제 그만 일상으로 돌아오라는 이 쉬운 말들은, 심장을 잃은 그에게 너무나도 가혹하고 잔인하다.

아내를 땅에 묻고 돌아온 지 한 주가 지났을 때 받은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내게 묻는다.

“그래, 어떻게 지내? 주말 도보여행 떠나나?”

나는 1~2초 정도 수화기에 대고 고함을 지른 후 전화를 끊는다. 그건 안 된다. 주말 도보여행은 내 삶이 평탄했던 시절, 아내와 함께 했던 일이다. (123-4쪽)

 

연애편지를 받은 적이 있었다. 나는 연애는 많이 못 해봤는데, 그에 비해 연애 편지는 많이 받았다. 사과 한 박스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꽤~~ 된다고 수줍게 밝혀본다. 15장짜리 연애편지를 받았는데, 읽는데도 한참이 걸렸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서 온 것이 아니기에, 남의 연애 편지 대하듯, 그래에?? 하면서 성의 없이 읽어내려가고 있었다. 아, 나는 그 때 얼마나 철없었는지. 나는 다른 사람의 마음도 내 마음처럼 소중하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다른 사람을 목적으로 한 내 감정만 중요한 줄 알았지, 나를 목적으로 한 다른 사람의 감정에 대해서는 별다른 감흥을 받지 못했다. 나는 그런 철없는 10대였다.

아무튼 14장을 다 읽고, 마지막 장이었다. 15장째 장에는 다른 이야기 없이, 편지지 가운데에 이문열의 문장만이 덩그라니 놓여 있었다. 정확히는 아니지만, 대략 이런 뜻의 문장이었던 것 같다.

“이 세상에는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심장을 가진 사람도 있다. - 이문열

내가 그런 사람이야.“

나는 허걱, 하고 놀랐고, 어머, 하고 무서웠다. 책에서나 보던 그런 사랑이었다. 이미, 나는 그런 사랑을 하고 있었음에도, 나역시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심장 때문에 몸져 누워 신음했음에도, 또 다른 사랑, 한 사람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심장의 사랑이 나를 향하고 있음을 알았을 때, 나는 놀라고 말았다. 그리고 무서웠다.

그저께 청소기를 돌리는데 그 편지가 생각났다. 한 사람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심장으로 나를 사랑한다던 그 사람은 지금도 나를 사랑하고 있을까? 만약, 내가 그 사람과 결혼했었다면, 나는 그 사람에게서 ‘줄리언 반스가 아내에게 바치는 것과 같은 순정의 사랑’을 받고 있을까? .....

그 사람을 무시해서도, 그 사랑을 가벼히 보아서도 아니지만, 난,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그 사람은 지금의 나를, 내 남편처럼 사랑해주지 못할 것이다. 그 사람이 하나의 심장으로 사랑한다던, 10대의 나는, 피아노 치는 ‘나’이고, 노래 부르는 ‘나’이고, 웃고 있는 ‘나’일 테다. 건강한 ‘나’이고, 정도된 ‘나’일 테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국적불명, 정체불명의 이상한 김치찌개를 내놓는 ‘나’이고, 와이셔츠를 다려놓지 않아 영상 9도에 “반팔입고 가세요~” 하는 ‘나’이고, “자기야, 내 생일에 뭐 사줄거야?”라며 아이처럼 채근하는 ‘나’이다. 본능과 욕망이 가감없이 보여지는 ‘나’이다.

2001년에 결혼했으니, 올해로 결혼생활 14년째다. 다시 한 번 굳히 밝히자면, 저기 위의 모든 문장들은 소설 속의 문장이고, 그 문장 속의 ‘나’는 현재의 ‘나’, 지금의 ‘나’가 아니다.

나는, 사랑을 믿는다.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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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4-10-25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편지를 받아 보셨다니... 놀랍군요.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심장을 가진 사람으로 사는 게 행복할까요, 불행할까요?

저는 말이죠, 결국 부부애밖에 안 남을 거라고 봐요. (나중에 자식들은 다 분가하게 되어 있고요)
제 선배가 남편과 이혼하려 했는데 남편이 이상 증세가 보여 병원에 입원하게 되니 이혼을 접더라고요.
큰 병 걸린 남편을 버릴 수 없대요. 어떻게 자기 혼자 잘 살 수 있느냐는 거죠.
그러고 잘 살다가 남편이 세상을 떠났는데 지금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몰라요.
그게 부부라고 봐요.
버리고 싶을 만큼 열정 없고 버리고 싶을 만큼 밉다가도 병에 걸려 누워 있다고 하면 달려가게 만드는 것, 그게 부부라고 봐요. 그 끈끈한 정을 부부애라고 봐요. 연애 시작할 때 느끼는 뜨거운 사랑보다 더 신뢰할 만한 사랑이죠.

단발머리 2014-10-27 08:31   좋아요 0 | URL
네... 전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심장을 가진다는게 행복한 일일거라고 생각했었어요. 10대에는요.
그런데, 지금은 그게 가능한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좀 무섭기도... 하구요.

결국 부부애라는 말씀에 많이 공감합니다. 12살, 9살도 벌써 독립을 준비하더라구요.
저는 신랑이 많이 밉지는 않으니까, 미운정 빼고 고운정으로만 해야 되나요? ㅋㅎ
그런 사랑이 더 신뢰할 만한 사랑이라는것에 동의합니다.

2014-10-25 18: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0-27 08: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0-26 14: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0-27 08: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부모로 산다는 것 - 잃어버리는 많은 것들 그래도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
제니퍼 시니어 지음, 이경식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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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성인 10명 중 7명은 가장 후회되는 일로 학창 시절에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은 것’을 꼽는다고 한다. 나는 ‘대학에 다닐 때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 고등학교 때 공부를 열심히 했다기보다는 대학에 다닐 때 워낙 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 말고 후회되는 일이 한 가지 더 있는데, 그건 아무런 ‘대책 없이’ 첫째 아이를 낳았던 일이다. 나는 아주 일찍 결혼한 케이스가 아니고, 결혼 전에 아이를 낳은 케이스도 아니다. 다만, 나는 아무런 ‘정보 없이’ 아이를 낳은 케이스다. 임신했을 때는 각 개월별로 산모의 변화와 태아의 발달 단계에 대해 훤히 알고 있었지만, 막상 아이를 낳은 후에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아이를 쳐다보고, 아이를 돌보기에도 벅찼다.

아기는 새로운 세상이다.

새로운 우주, 그 자체다.

텔레비전에서 연예인들이 아기들와의 일상을 이웃집처럼 가감 없이 보여줄 때, 뭐, 저리 호들갑을 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새로운 우주 그 자체인 자신의 아기가 얼마나 특별하고, 얼마나 예쁘게 보일련지, 일면 이해가 된다.

과거는 돌이킬 수 없고, 흘러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하지만, 만약 그럴 수 있다면, 다시 시간을 돌이킬 수 있다면, 나는 첫 아이의 3살 때로 돌아가고 싶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그 애에게 더 많은 노래를 불러주고 싶다. 더 많이 그 애의 손을 잡아주고 싶다. 그 애를 더 많이 업어주고, 더 많이 안아주고 싶다. 생각해보니 굳이 돌아갈 필요가 없겠다. 그 아이는 나와 비슷할 정도로 키가 훌쩍 자랐지만, 아직은 내 옆을 좋아하고, 아직은 내 손을 뿌리치지 않으며, 아직은 내가 그 애에게 해줄 일이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책을 보니, 유아기는 어디까지나 예선경기라고 한다. 사춘기, 결선경기가 곧 시작된다.

적어도 (아빠들은) 아이들이 어릴 때는 자기들의 자유 시간을 더 적극적으로 지키고 누리려고 한다. 하지만 아빠들이 이렇게 한다고 해서 이들이 자기 아내들보다 아이를 덜 사랑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살아갈 운명에 대해서 관심을 덜 가진다는 뜻도 아니다. (153쪽)

 

나는 스스로를 ‘날라리 주부’, ‘모성 결핍 엄마’로 규정한다. 실제로도 그렇다. 나는 가정생활에 큰 취미가 없고, 모성이 부족하며, 결정적으로 게으르다. 게으름이야말로 나의 날라리 주부 생활의 모토, ‘무엇이든 설렁 설렁’을 일관되게 유지하게 하는 근간이다. 그래도 나는 내가 ‘엄마’인줄 알았다. 그런데 이 부분을 읽다가는, 무릎을 쳤다.

“아, 나는 ‘엄마’가 아니라, ‘아빠’구나!”

자신의 자유 시간을 적극적으로 지키고 누리려고 노력하는 아빠, 그런 아빠 같은 엄마, 내가 그런 엄마다. (사실, 어제 밤에도 3M을 남겨두고 밤외출을 감행했다.) 그런 엄마라 하더라도 내 남편보다 아이를 덜 사랑한다는 뜻은 아니다, 라고 저자가 말해준다. 맞다. 사실이다. 이렇게 말해줘서 고맙다.

과잉 양육이라는 현상이 미래에 대한 혼란과 불안이라는 새로운 심리 상태를 반영한다. 다가올 미래에 제대로 준비할 수 있도록 아이들을 완벽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오늘날 중산층의 확고한 믿음이다. (204쪽)

 

부모가 하는 모든 일은 아이들을 위한 것이다. 부모는 이제 더 이상 가족을 위해서 혹은 가족의 범위를 넘어서는 보다 넓은 세상을 위해서 자기 아이를 키우지 않는다. 오로지 아이들만을 위한 목적으로 아이들을 키운다. (216쪽)

 

어린이에 대한 현대적 개념이 정립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이다. 이전까지만 해도 어린이는 가정의 주된 ‘수입원’의 하나였다. 어린이는 쉽게 무시당했고, 학교가 아닌 일터로 내몰렸다. 그게 당연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오로지 아이들만을 위한 목적으로 아이들은 키워진다.’ 미국 중산층의 자녀에 대한 집중도가 한국과 별반 다르지 않아 오히려 어색하다. 아이의 학업은 물론이고 취미생활 전반까지도 관리하는 부모 모습이 보인다. 다른 점을 찾아본다면, 교육 전쟁의 전면에 엄마가 나서는 한국과는 달리, 미국에서는 부모가 이 일에 모두 나선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한국보다는 특기활동 중 ‘체육 활동’에 대한 투자비용과 시간이 많다는 것이다.

오로지 아이들만을 위한 목적으로 아이들을 키울 때, 그런 과정과 결과가 아이들 스스로에게 이로울 것인가. 아이를 키우는 부모에게 이로울 것인가. 가정의 주된 수입원에서 주된 지출원이 되어버린 아이들, 이 아이들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는 중산층 부모가 있다. 아이들 위주의 삶, 아이들 위주의 식사, 아이들 위주의 생활. 이것이 옳은가. 아이와 부모 모두에게 이로울 것인가.

스타인버그는, 아이가 맞는 사춘기는 일이든 취미든 간에 집 바깥의 어떤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은 부모에게 특히 가혹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아이가 자기 곁에서 멀어져 갈 때 자기 관심을 따로 쏟을 수 있는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중략)

“결정적인 변수는 일반적으로 예상하듯이 어떤 부모가 양육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이느냐 아니냐 하는 게 아니었다. 부모가 양육과 관련이 없는 다른 어떤 것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이고 있는가의 문제였다.” (323-4쪽)

 

사춘기 전초전을 맞이하며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긴다. 양육과 관련이 없는 다른 일이 내게 있는가. 아이들과 관련이 없는 다른 일, 가정과 상관이 없는 다른 일, 그런 일들이 내게 있는가, 그런 이야기가 내게 있는가.

행복해지고 싶으면 무언가를 해야 한다. 주일학교에서 어린이를 가르치는 소박한 것이 될 수도 있고, 정부 권력에 비폭력 저항을 하는 거대한 것이 될 수도 있다. 암을 치료하기 위해서 머리를 쓰는 활동을 할 수도 있고 등산을 하는 육체적인 활동을 할 수도 있다. 그림을 그릴 수도 있다. 그리고 17세기 초 영국 시인인 벤 존슨이 일곱 살 아들을 위한 엘레지에서 썼던 것처럼 ‘내 최고의 시’인 아이를 키울 수도 있다. (418쪽)

 

서문에서도 밝혔다시피, 이 책에서 가장 주요하게 다루고자 했던 것은 ‘어떻게 자녀를 양육할 것인가’가 아니다. 오히려 ‘양육이 부모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에 대한 것이다. 양육 활동을 통해, 그 지난하고 지루하며, 기쁘고도 행복한 과정이 부모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한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 주제가 ‘행복’이라는 것은 특히 작가의 통찰을 돋보이게 한다. 행복이 기쁨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 즐거움과 기쁨, 슬픔과 고통, 기대와 환희가 모두 양육의 과정 안에 들어있다는 것, 아이들이 우리의 삶을 복잡하게도 만들지만, 또한 아이들 때문에 우리의 삶이 단순해지기도 한다는 것(434쪽), 우리를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 즉 우리의 어린아이들을 돌보는 과정을 거치면서 아이들을 더 사랑하게 되고, 기쁨을 느끼는 방법을 점점 더 익히고, 그러면서 우리가 성장한다는 것이다. (435쪽)

 

어제는 카레를 만들었다. 일품요리로서 카레만한 게 없는데, 만들기가 쉽고, 영양이 풍부하며, 아이들에게 야채를 먹일 수 있고, 한 번 만들어 두 끼 이상을 해결할 수 있어 그야말로 가정요리계의 초특급 아이템이다. 마침, 그저께는 카레의 강황성분이 손상된 뇌를 치료한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기도 했다. 큰아이가 5살 정도부터 카레를 만들었으니, 대략 8년째다. 한 달에 1-2번 정도 카레를 만들었다고 계산하면, 1년에 20번으로 잡아도 벌써 160번 카레를 만든 셈이다.

커다란 웍에 가득찬 161번째 카레를 보며 생각했다. 그래, 아이들이 다 커서 결혼하고 남편이랑 나만 남으면 이렇게 많이 카레를 만들어도 먹을 사람이 없어서, 오래오래 먹게 될 거야. 아이들이 있으니까, 이렇게 많이 만드는구나. 기쁘고, 감사하다.

내 요리에 별다른 코멘트가 없는 남편은, 역시나 별말없이 카레가 올려진 밥 위에 신김치를 한 조각 올려 맛있게 먹는다. 하지만, 아이들은 카레를 부은 카레라이스를 식탁에 올려놓자마자 둘이 한 목소리로 외쳐댄다.

‘“카레, 싫어~~~~~~~~~~~~~~~~~~~~~~~~!“

내가 말한다.

“알았어, 이제 카레 안 만들게. 근데 이미 만들었으니까,

이건, 먹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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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14-12-02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육아서 리뷰도 유머러스 훈훈하게 쓰시는구랴요~~!!!

단발머리 2014-12-03 08:43   좋아요 0 | URL
헤헤.... 그래요? 육아서 리뷰는 나름 진지하게 쓸려고 하는데요. 반성도 많이 하구요.
근데, 결론은 항상 이렇게 유머로 끝나네요.
쓰시는구랴요!!! 좋아요 ㅎㅎㅎ
 
이미, 서로 알고 있었던 것처럼 문학동네 시인선 57
윤희상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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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여자가 사는 집’, ‘닮다’, ‘김대중주의자’, ‘인화하지 못한 사진’, ‘연학이 형 생각’, ‘아, 김근태’, ‘걸식’, ‘징병검사장에서’. 

가을이라 시를 읽게 된건 아니었지만, 가을에 읽기 좋은 시를 많이 만났다. 다 옮기고 싶지만, 전문을 실어야 하기에 간신히 두 개를 골랐다.

 

영산포 장날

 

광식이네 소 팔러 가는 날입니다

서둘러서 아침밥을 먹고

우리는 광식이네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모두 야단이었습니다

마당에서 광식이 엄마가

소의 고삐를 붙잡고

소에게 억지로 여물을 먹이고 있었습니다

소는 더 먹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렸습니다

여물을 다 먹은 소는 마치 새끼를 밴 것처럼

배가 부풀어올랐습니다

이제 광식이 아버지가 소를 이끌고 문을 나서는데

광식이 엄마가 소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습니다

고생했다 잘 가거라

길에는 아카시아꽃이 환하게 피었습니다

소는 오줌을 싸며 걷고

우리는 그 길을 뒤따라 걸었습니다

읍내에 이르러 광식이 아버지와 소는 우시장으로 가고

우리는 학교로 갔습니다

그날 광식이 아버지는

술에 취했습니다

우리는 아카시아꽃 향에 취했습니다

모두 흔들렸습니다                                   (‘영산포 장날‘ 전문-윤희상)

 

 

김승재

 

김승재는 나의 친구이다. 서울 장충초등학교 6학년 2반 담

임 선생님이다. 2008년 4월 10일, 집에서 잠을 자다가 갑

자기 죽었다. 오매, 우리집 대들보가 무너져부렀네. 고향

에서 오신 어머니가 영안실에서 밤이 새도록 통곡했다. 장

례를 치르는 동안 내가 죽은 친구의 핸드폰을 가지고 있었

다. 어린 제자로부터 문자메시지가 왔다. 죽은 친구를 강진

의 양지바른 곳에 묻었다. 내가 다른 사람들 몰래, 죽은 친

구에게 읽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 유림이에요.

좋은 나라 가셔서

행복하게 사시고

다음 생에는 꼭 오래 사세요.                      (‘김승재’ 전문 - 윤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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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14 11: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0-14 11: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제인 에어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9
샬럿 브론테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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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책,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제인에어. 1847년 10월 6일이 제인에어 초판 출간일이라 한다. 2014 빼기 1847은 167. 167년 전의 감성이 오늘을 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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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4-10-10 0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인에어가 내인생의 책이군요~^^
다시 읽어봐야지 하면서도 쉽게 잡지 못하고 있어요. ㅠ

단발머리 2014-10-11 16:59   좋아요 0 | URL
네....... 저는 중 1때, 대학교 때, 그리고 회사를 그만두고, 몇 년씩 간격을 두고 일주일은 이 책만 읽어요.
제가 아주 사랑합니다, 이 책을.......................

2014-10-13 2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0-14 11: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icaru 2014-10-14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제인에어,,,,
저는 이 책을 중학교 때 문고본으로 읽었는데요... 이 책을 읽은 후로, 내가 만나는 여중생을 ˝제인에어를 읽은 아이˝와 ˝제인에어를 읽지 않은 아이˝로 나누어 인식했습니다..ㅎ 민음사에서 나온 제인에어는 어떨지,,우아우아... 심호흡 좀 해주공~

단발머리 2014-10-16 09:14   좋아요 0 | URL
오호호~~ 저는 중1때 읽었어요. 언니가 둘인 친구가 이렇게 말하더라구요.

˝너, 제인에어, 진짜 안 읽어봤어?˝

그 애가 icaru님 같아요. 세상은 ˝제인에어를 읽은 아이˝와 ˝제인에어를 읽지 않은 아이˝로 나뉘어진다.
저는 그 때까지 ˝제인에어를 읽지 않은 아이˝였고, ˝제인에어˝를 읽은 후, 그 책이 제 인생의 책이 되었죠.
아, 제인에어 얘기만 한 두 시간정도 할 수 있는데...... ㅋ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메이드 인 공장 - 소설가 김중혁의 입체적인 공장 산책기
김중혁 글.그림 / 한겨레출판 / 2014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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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책의 구매를 결정했을 때는, 이미 저자사인본이 동났을 때고, 나는 신간적립금 1000원에 알사탕 300개를 받았다. 그 날 오후에 이 책의 신간적립금이 2000원이 되었다. 그래도 내가 애정하는 김중혁 작가의 책이기에 아깝지 않다. 흐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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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30 1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9-30 1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9-30 10: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9-30 10: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14-10-01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중혁 팬심으로 속상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알라딘 고객으로선 속상할 수 있죠. 토닥토닥~ ^^

단발머리 2014-10-05 21:42   좋아요 0 | URL
우앙~~~~~~~~~~~~~ 울고 싶어요.
쪼금 슬픈 이야기가 더 있어요. 저 책이 알라딘 베개 해당책이더라구요.
저 어떡해요? 책베개도 필요한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