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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엔스 (무선본) -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인간 역사의 대담하고 위대한 질문 ㅣ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조현욱 옮김, 이태수 감수 / 김영사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시작하게 된 건 순전히 이 작은 책 때문이다.
알라딘 책박스 속 샘플북을 모두 읽는 건 아닌데, 이 책은 빨간색이 눈길을 끌었던가, 아니면 ‘사피엔스’라는 글자가 눈에 띄었던가, 그도 저도 아니면 ‘빨간색’의 ‘사피엔스’ 때문인가, 표지를 보고 끌려서 읽기 시작했고, 샘플북을 다 읽은 후로는 도서관에서 대출을 해서 이어 읽었다.
제일 먼저 인지혁명.
내가 인간 진화를 전제로 한 저자의 주장을 사실로서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와 상관없이, 저자는 사람들이 흔히 범하는 오류의 하나로 인간종을 모두 단일 계보라 이해하는 거라고 주장한다. 예컨대, 에르가스터-에렉투스-네안데르탈인-호모 사피엔스의 직선 모델로 진화가 진행되었다고 사람들이 오해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교과서에 친절하게 그림까지 곁들인 설명으로 이런 직선 모델로 배운 것 같은데 말이다.) 유럽과 서부아시아의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네안데르 골짜기에서 온 사람), 아시아의 좀 더 동쪽 지역에 살던 ‘호모 에렉투스’(똑바로 선 사람), 인도네시아 자밤 섬의 ‘호모 솔로엔시스’(솔로 계곡에서 온 사람), 인도네시아의 플로레스섬의 작은 사람들 ‘호모 플로레시엔시스’(플로레스인), 시베리아 데니소바 동굴 근처에 살던 ‘호모 데니소바’, ‘호모 루돌펜시스’(루돌프 호수에서 온 사람), ‘호모 에르가스터’(일하는 사람), 그리고 우리 종 ‘호모 사피엔스’(슬기로운 사람)가 공존했다고 것이다.
여기에서 이상한 점은 옛날에 여러 종이 살았다는 사실이 아니라 오히려 지금 딱 한 종만 있다는 사실이다. (26쪽)
동시에 비슷한 지역에서 같이 살았던 적어도 6개의 인간종 가운데 우리 종 호모 사피엔스만 현재까지 살아남은 이유는 무엇일까? 튼튼하고 머리가 좋으며 추위에 잘 견뎠던 네안데르탈인은 어째서 우리 종의 맹공격을 버텨내지 못했을까? 저자가 추측하는 호모 사피엔스의 세계 정복의 도구는 이런 논쟁을 가능하게 하는 것, 즉 언어이다.(41쪽)
인지혁명이란 약 7만 년 전부터 3만년 전 사이에 출현한 새로운 사고방식과 의사소통 방식을 말한다. ... 이를 통해 우연히 일어난 유전자 돌연변이가 사피엔스의 뇌의 배선 일부를 바꿨다는 것이다. 그 덕분에 전에 없던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으며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언어를 사용해서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44쪽)
놀라울 정도로 유연한 인간의 언어가 세상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을 때, 공통의 관심주제에 대한 의견 교환으로 대규모 협력이 가능해졌을 때, 허구를 통한 집단적 상상이 이루어졌을 때, 사피엔스는 수없이 많은 이방인들과 매우 유연하게 협력할 수 있었으며, 수십만 명이 거주하는 도시, 수억 명을 지배하는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원시인류의 행동 패턴이 수십만 년간 고정되어 있던 데 비해 사피엔스는 불과 10년 내지 20년 만에도 사회구조, 인간관계의 속성, 경제활동을 비롯한 수많은 행태들을 바꿀 수 있었던 것 역시 사피엔스의 인지혁명의 결과이자 사피엔스만의 최대 강점이다.(62쪽)
즉, 우리 인간종과 일대일, 십대십으로 보면 감각, 정서, 가족 간 유대 같은 요소는 매우 당황스러울 정도로 침팬지와 비슷하나 개체수 150명이라는 임계치를 초과할 때부터, 그리고 그 숫자가 1천 ~ 2천 명이 되면, 그 차이가 엄청나게 벌어진다는 것이다. 우리와 침팬지의 진정한 차이는 수많은 개인과 가족과 집단을 결속하는 가공의 접착제에 있다는 것이다.(67쪽)
진화를 전제로 인간이 유인원을 넘어설 수 있었던 이유, 그 중에서도 사피엔스가 다른 인간종을 압도하고 지구별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던 건 유연한 언어의 사용과 허구의 세계를 인지하는 상상력 때문이라고 보면 되겠다.
다음으로 넘어가기 전에 사촌 얼굴 전격 공개한다. 자세히 보면 진짜 사촌 같은데, 물론 우리 사촌오빠들은 아니다. 특히 가운데 동아시아 지역에 살았던 ‘호모 에렉투스’를 자세히 살펴보기 바란다. 언제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얼굴이다.
두 번째는 농업혁명.
농업혁명은 안락한 새 시대를 열지 못했다. 그러기는커녕, 농부들은 대체로 수렵채집인들보다 더욱 힘들고 불만스럽게 살았다. 수렵채집인들은 그보다 더 활기차고 다양한 방식으로 시간을 보냈고 기아와 질병의 위험이 적었다. 농업혁명 덕분에 인류가 사용할 수 잇는 식량의 총량이 확대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여분의 식량이 곧 더 나은 식사나 더 많은 여유시간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인구폭발과 방자한 엘리트를 낳았다. 평균적인 농부는 평균적인 수렵채집인보다 더 열심히 일했으며 그 대가로 더 열악한 식사를 했다. 농업혁명은 역사상 최대의 사기였다. (124쪽)
‘인간이 밀을 길들인 게 아니라, 밀이 인간을 길들였다’는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는 농업혁명은 더욱 많은 사람들을 더욱 열악한 환경에서 살게 했다.(129쪽) 한 곳에 정착하게 된 인간은 작물화, 가축화를 통해 자신의 먹거리를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겠지만, 실제로 정착한 인간은, 대다수의 농민들은 장시간 노동과 미래에 대한 걱정에 내몰리게 된다. 영구 정착촌에 살면서 식량공급이 늘어나고 인구 또한 폭발적으로 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농경사회에서 최소한 어린이 세 명 중 한 명이 20세가 되기 전에 사망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계속 이전보다 아이를 더 많이 낳았기 때문에 출생률 증가가 사망률 증가를 앞질렀다. 가족을 먹이기 위해 더 열심히 일하고, 늘어난 수입보다 더 빠른 속도로 아이들이 늘어나고, 더 늘어난 아이들을 위해 더 많이, 더 열심히 일했다. 이런 방식의 삶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사람들은 자신의 결정이 가져올 결과를 전체적으로 파악하지 못 했다. “일을 더 열심히 하면 삶이 더 나아지겠지.‘ 계획은 그랬다. (133쪽)
이렇게 해서 축적된 잉여 생산물은 지배자와 엘리트의 출현을 가능하게 했다. 사회 피라미드 꼭대기에 서 있는 자들은 그들 스스로 상상의 질서를 신봉했는데, 기독교, 민주주의, 자본주의 같은 상상의 질서에 그들 먼저 투신함으로써 자신의 지배체제를 공고히 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가공의 믿음이 피지배층에 대한 억압을 강화했다.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조직화하는 질서가 자신들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만드는 주된 요인은 다음과 같은데, 1) 상상의 질서는 물질세계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으며 2) 상상의 질서는 우리 욕망의 형태를 결정하며 3) 상상의 질서는 상호 주관적이라는 믿음이다. 지금 지구를 사는 사람들 수억 명이 공유하는 달러화, 인권, 미국에 대한 개념은 모두 상상 속에만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 개인은 이러한 상호 주관적 존재 앞에 무력할 뿐이다. 이를 변화시키려면 수십억 명의 의식을 동시에 변화시켜야 하며, 그러한 대규모 변화가 가능하려면 정당이나 이념운동, 혹은 종교적 광신집단 같은 복잡한 기구의 도움이 있어야 하며, 그런 일은 오로지 그들이 뭔가 공통의 신화를 공유하고 있을 때 일어난다.(177쪽)
상상의 질서를 가능케 하는 종교와 계급, 그리고 인종에 따른 구별은 전 세계적으로 나타난 현상이다. 저자는 알려진 인간 사회에서 최고로 중요한 위계질서에 대해 이야기 하는데, 그게 바로 성별이다. 사람들은 어느 곳에서나 스스로를 남자와 여자로 구분했고 그리고 거의 모든 곳에서 남자가 더 좋은 몫을 차지했다. 적어도 농업혁명 이후로는 그랬는데 농업혁명 이후 대부분의 인간사회가 부계사회라는 것이 그 증거 중의 하나이다. (212쪽)
오랜 시간 동안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로 인식되어, 강간 피해 또한 피해자의 아버지나 남자 형제에 대한 재산권 침탈로 여겨졌다. 어느 남자에게도 속하지 않은 여성을 강간하는 것은 범죄로 취급되지 않았고, 남편이 아내를 강간했다는 생각 자체를 모순으로 여겼다. 남편이 된다는 것은 아내의 성을 완전히 마음으로 할 권리가 있다는 뜻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남성 우위의 사회가 전 세계적으로 일반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남성과 여성과의 생물학적 차이를 문화적, 정치적 차이로까지 발전시킨 생각은 무엇일까? 저자는 남성우위가 가능했던 이유로 꼽히는 근력과 공격성에 대해 논하면서 그것이 진짜 이유가 아닌 이유도 설명한다. 현재로서는 명확한 답을 찾지 못한 이 어려운 과제에 대해 협력 덕분에 성공한 종(사피엔스)에서 협력성이 더 뛰어난 개체(여자)들이 서로 협력한다면 협력성이 더 떨어지는 개체(남성)들을 통제하는 것 또한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질문을 던진다. 역시 여자의 적은 여자다,로 마무리 되어야 하나.
제3부 <인류의 통합>에서는 인간이 창조한 신뢰 시스템 중 유일하게 거의 모든 문화적 간극을 메울 수 있으며, 종교나 사회적 성별, 인종, 연령, 성적 지향을 근거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유일한 신뢰 시스템 화페, ‘돈’에 대해 이야기하고, 전 세계적으로 여러 지역, 여러 민족을 지배했던 제국의 자취가 현재 우리의 삶에까지 미치는 영향에 대해 살펴본다. 폭넓은 종교적 관용을 보이는 다신교도들과는 달리 기독교, 유대교의 일신교도들이 얼마나 과격한 방식으로 자신의 신앙을 강요했는지에 대해서도 살펴본다. 일신교인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와 이신교의 마니교, 조로아스터교에 대한 설명이 풍부하고, 불교의 기원에 대한 해석 역시 흥미롭다.
제4부 <과학혁명>에서 제일 주된 질문은 ‘어째서 유럽인가?로 정하고 싶다. 지난 5백 년간 경이적으로, 유례없이 커져버린 인간의 힘은 인구면에서, 생산한 재화와 용역의 가치면에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인구가 열네 배로 늘어났고, 생산은 240배, 에너지 소비는 115배 늘어났다는 것이며, 이 대부분은 과학의 발전으로 이룩한 것이다. 이토록 놀라운 과학의 발전 중에 저자가 가장 결정적 순간으로 지목한 때는 1945년 7월 16일 오전 5시 29분 45초이다. 정확히 그 때, 미국 과학자들은 앨러머고도 사막에 첫 원자폭탄을 터뜨렸으며, 이 일로 인해 인간은 놀라운 문명을 이룩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파멸시킬 수도 있음을 입증했다.(353쪽)
중국과 이슬람은 실제적으로 활용 가능한 과학 기술과 정보를 이미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유럽에게 뒤처지고 말았을까. 1775년까지도 경제적 난쟁이에 불과했던 유럽이 어떻게 세계 권력의 중심이 될 수 있었을까. 유라시아 변방의 그들이 어떻게 전 세계를 정복하고 1900년에는 세계 경제와 대부분의 땅을 확고히 지배하며 세계 질서와 세계 문화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을까.
보통은 그 공의 큰 부분을 유럽 과학자들에게 돌린다. 물론 1850년 이래 유럽의 세계 지배가 군사-산업-과학 복합체와 기술의 묘기에 크게 의존했다는 점 역시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한다. ... 민간기술의 중요성도 군사기술 못지않았다. 통조림은 병사들을 먹여 살렸고, 철도와 증기선은 군대와 장비를 수송했다. .... 병참 부문에서의 이 같은 진보는 유럽인의 아프리카 정복에 기관총보다 더욱 중요한 역할을 했다. (397쪽)
그럼에도 의문은 계속되는데, 어째서 영국의 약진에 프랑스, 독일, 미국은 재빨리 그 뒤를 따라갔는데, 중국, 페르시아, 이집트, 오토만 제국은 실패했느냐는 것이다. 근대 초기 유럽은 어떤 잠재력을 개발했기에 근대 후반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서로 보완적인 답으로 저자는 ‘현대 과학’과 ‘자본주의’를 꼽는다.(399쪽)
유럽인은 기술적인 우위를 누리기 전부터도 과학적이고 자본주의적인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러다가 기술의 노다지가 쏟아지기 시작하자, 유럽인들은 다른 누구보다 그것을 잘 부릴 수 있었다. (400쪽)
유럽 제국주의를 다른 모든 제국주의 프로젝트와 구별하는 지점도 바로 여기인데, 유럽인들은 새 영토 뿐 아니라 새 지식을 획득한다는 희망을 가지고 먼 곳으로의 항해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이다. ‘탐험하고 정복한다’는 근대의 사고 방식, 비어있는 지도를 채우겠다는 종교에 가까운 열망,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 방대한 새 영토를 통제하기 위한 정보의 수집의 필요성들이 더 많은 유럽인을 아시아로, 북아메리카로, 남아메리카로 이끌었다. 1405년부터 1433년까지 일곱 차례에 걸쳐 대함대를 이끌고 중국에서 인도양의 먼 곳까지 항해한 정화 제독의 대항해를 통해서도 확인되듯, 유럽은 뛰어난 기술적 우위를 누리지 못했다. 유럽인들이 이례적인 점은 탐험과 정복의 야망이 어느 누구와도 비견할 수 없이 탐욕스러웠다는 데 있다.
탐욕스러운 유럽인들의 도착은 남미의 아즈텍인과 잉카인에게는 외계인의 침공과 같았을 것이다.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첫 항해(1492년)와 코르테스의 멕시코 상륙(1519년) 사이 시기에 스페인인들은 카리브 제도의 섬 대부분을 정복해 일련의 식민지를 건설했다. 정복당한 원주민들에게 식민지는 지상의 지옥이었다. ... 열악한 작업 환경과 정복자의 범선에 무임승차해온 질병 바이러스 탓에 카리브해의 원주민 거의 모두가 20년 만에 사라졌다. (412쪽)
이런 심각한 인종청소가 아즈텍 제국의 바로 코앞에서 일어났지만 코르테스가 제국의 동부 연안에 상륙했을 때 아즈텍인들은 그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들의 비극은 외부세계와의 첫 조우가 하필이면 탐욕스러운 유럽인이었다는 데 있다. 그들은 스페인들을 몰랐다. 다른 생김, 다른 냄새, 거대한 배, 그들이 데려온 커다랗고 무시무시한 동물(말), 빛나는 긴 칼과 뚫을 수 없는 갑옷. 그들을 신이라고 믿는 아즈텍인도 있었고, 악마나 죽은 자의 유령, 강력한 마법사라고 주장한 사람들도 있었다. 아즈텍인들이 머뭇머뭇하는 사이, 처음 도착했을 때 500명의 군인으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던 코르테스는 그동안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아즈텍인들의 내분을 촉발한다. 그 다음부터는 우리 모두 아는 바다.
코르테스가 베라크루스항에 상륙한 지 1세기 만에, 아메리카의 원주민 수는 90퍼센트 가량 줄었다. 주로 침략자들과 함께 유입된 생소한 질병 탓이었다.(417쪽)
코르테스를 모방한 피사로의 잉카 침략도 이와 다르지 않다. 만약 잉카 제국의 피지배 민족들이 멕시코 주민들의 운명을 알았더라면, 침략자들과 함께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했다.
‘자본주의 교리’에서 가장 중요한 문장이라면, 이 문장을 꼽고 싶다.
우리는 이미 모두 스미스의 주장을 당연히 여기는 자본주의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일같이 뉴스에서 이 주제의 변주를 듣는다. 하지만 스미스의 주장 ― 개인적인 수익을 늘리려는 이기적 인간의 욕구는 공동체 부의 기반이다 ― 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혁명적인 아이디어에 속한다. (440쪽)
지금 현재의 우리를, 가장 강력하게 지배하는 도구가 ‘돈’이라는 데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이윤만을 추구하는 자본이 정부의 제재와 감시를 벗어났을 때, 순수하게 ‘이익’만을 위해 봉사할 때,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는 자본주의의 행태에 대해서는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역사가 가르쳐준 그대로다.
대서양 노예무역은 아프리카인에 대한 인종적 증오에서 생긴 것이 아니다. 주식을 구매한 개인이나 그것을 판매한 중개인, 노예무역 회사의 경영자는 아프리카인에 대해 거의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 인도네시아에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벌인 군사작전에 돈을 댄 것은 자기 자녀를 사랑하고, 자선사업에 돈을 내고, 좋은 음악과 미술을 즐기는 네덜란드의 정직한 시민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자바, 수마트라, 말라카 주민들이 겪는 고통은 중히 여기지 않았다. 지구의 한켠에서 현대 경제가 성장하는 데는 수없이 많은 범죄와 악행이 뒤따랐다. (469쪽)
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 고통받는 것은 흑인들과 제3세계 주민들만이 아니었다. 2차 농업혁명으로 인해 동식물의 기계적 재배, 사육이 일상화된다. 태어나자마자 자동 절단기 속으로 떨어지거나 그냥 쓰레기통에 들어가 질식사하는 수평아리, 가로 25cm, 세로 22cm의 면적위에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고 알을 낳는 산란용 암탉, 유인원을 제외하고 가장 지능과 탐구심이 뛰어난 돼지는 몸을 돌릴 수조차 없는 좁은 우리에서 새끼를 낳고 또 새끼를 낳는다. 젖소는 자신의 대소변 위에서 서고 앉고 잠을 자며 평생 우유를 생산해낸다. 약품을 주입받고 우유를 짜내는 젖통 이상의 취급을 받지 못하는 젖소들. 동물의 주관적 욕구를 무시한 산업화된 농업으로 인해 인간은 더 여유롭고 더 풍족한 삶을 누리는 것 같지만, 현대 기업농이 역사상 가장 큰 범죄를 저지르고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지구 전체의 행복을 평가할 때 오로지 상류층이나 유럽인이나 남자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잘못이다. 인류의 행복만을 고려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잘못일 것이다. (535쪽)
신선한 우유를 좋아하고, 까페라테를 틈날 때마다 마셔대고, 계란후라이를 즐겨 먹고, 소등심을 좋아하는 나도 그에 일조하는 있는 것이라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실천이라는 건 하나다. 덜 먹는 것. 지금보다 조금 덜 먹는 것. 덜 사는 것. 지금보다 조금 덜 사는 것이다.
이제 진짜 마지막이다. 사피엔스의 종말.
우리가 아는 한, 순수한 과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삶은 절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인류는 목적이나 의도 같은 것 없이 진행되는 눈먼 진화과정의 산물이다. 우리의 행동은 뭔가 신성한 우주적 계획의 일부가 아니다. ... 그러므로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부여하는 가치는 그것이 무엇이든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552쪽)
인간의 삶이 절대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 자신의 삶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저자의 말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 두꺼운 책의 결말이 이러하리라고 예상치 못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단오한 어조에 조금 놀랍기는 하다. 절대자, 인간에 대한 믿음, 삶에 대한 의미를 찾는 것 자체가 망상에 빠진 행동이라면, 만약 그렇다면 그 다음은 어쩌면 당연하다. 인간은 영원을 살려고 할 것이다. 사피엔스는 사피엔스의 한계를 넘어서려 할 것이고, 그 새로운 종은 사피엔스가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불리우게 될 것이다.
아직은 오지 않은 미래를 상징하던 2000년은 이미 한참 전에 지나왔다. 그 모든 것이 가능하리라 믿어졌던 2030년도 이제 14년밖에 남지 않았다. 유전정보를 조작해 이 세상에 없었던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어내는 생명공학, 인간과 기계의 결합을 가능케 하는 사이보그 공학, 무생물적 존재(실리콘 의식)의 진화가 바로 우리 눈 앞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의 의식이 작동하는 방식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의식을 가진 존재는 인간인가? 인간이 아닌가? 인간의 의식과 정체성에 대한 너무나 근본적인 이런 질문들은 곧 ‘인간적’이라는 용어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요청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피엔스의 마지막 세대로서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남은 하나의 질문이라면, ‘우리는 무엇이 되고 싶은가?’하는 것이다.(585쪽)
이제 사피엔스는 무엇이 되려 하는가?
우리는 무엇이 되려 하는가?
우리는 무엇이 되고 싶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