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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드 오브 타임 - 브라이언 그린이 말하는 세상의 시작과 진화, 그리고 끝
브라이언 그린 지음, 박병철 옮김 / 와이즈베리 / 2021년 2월
평점 :
곤란한 일이 생겼을 때였다. 머리 속 생각을 떨쳐내려 아무리 노력해도 불가능했다. 할 수 있는 방법을 차례로 시도하며 활활 타오르던 마음이 좀 수그러들었을 때. 그 때, 우주로 나갔다. 우주, 그 자체를 생각했다. 이 광대한 우주 속, 숱하게 많은 은하계. 구석 은하계의 구석, 그 한쪽 귀퉁이 태양계 속의 지구를 머리 속에 그렸다. 그 지구 속의 내 모습이 얼마나 작을지 생각했다. 달에서 볼 때 지구가 얼마나 작을지 상상했다. 한반도는, 서울은, 그리고 나는. 내 안의 그 고민과 갈등은, 어쩌면 생각보다 훨씬 더 작은 것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 자신을 우주로 보내 버림으로써, 지구를 떠남으로써 나는 문제를 다르게 바라보려 했다.
주변에 무언가 물질이라 부를 만한 것을 발견한다면 그 자체로 기뻐해야 한다. 생명체는 지구에서만 발견되는 아주 특별한 물질이다. 내 주위에 생명체가 있다면 이것은 놀라워해야 할 일이다. 더구나 그 수많은 생명체 가운데 나와 같은 종을 만나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 다른 인간을 사랑해야만 하는 우주론적 이유이다. (『김상욱의 과학 공부』, 13쪽)
며칠 전 한겨레 연재 기사에 김상욱 교수의 인터뷰가 소개되었던데 김상욱 교수의 여러 저서 속 수많은 문장 가운데 기자가 이 부분을 발췌한 것을 보았다. 그 때. 내가 우주로 가고자 했을 때, 인간에게 실망했을 때, 그리고 미움이 내 안에 차오를 때 내가 의지했던 문장들이다. 이 넓은 우주 가운데, 생명체로서 만난 존재를 사랑하자. 나와 같은 종으로 만난 것을 환영하자. 반가워하자. 다시, 사랑하자. 4-5년전 일이다. 그 때와 지금 나의 생각이 크게 달라진 것 같지는 않지만, 그 때는 나름대로 힘들고 고생스러웠다. 이제서야, 이만큼 시간이 흐른 지금에서야 ‘그래, 그럴 수 있지’라고 말할 수 있게 됐다. 우주에 다녀온 뒤에야 나는 그렇게 말할 수 있게 됐다.
대선 결과가 확정되고 암울하고 속상했던 그 날 밤. 나는 또 우주로 가기로 했다. 서울을 떠나, 대한민국을 떠나, 한반도를 떠나, 지구를 떠나 우주로 가 보기로 했다. 책이 도착하자마자 다른 일을 접어두고 이 책만 읽었다. 제일 좋아하는 두꺼운 색연필을 꺼내 놓고 줄을 치며 읽었다. 누워있을 때도 언제든 볼 수 있게 바로 옆에 책을 놓아 두었고, 외출할 일이 있을 때는 많이 읽지 못할게 뻔한데도 굳이 책을 들고 나갔다. 그렇게 우주 속을 거닐면서 시간을 보냈다. 우주 속에서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게 했다.
시작은 언제나 죽음이다. 죽음을 영혼과 육체의 분리라고 규정했을 때, 부패되어 재배열되는 육체와 달리 영혼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 더 정확히는 영혼의 존재조차 불명확하다. 영혼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육체 내에 영혼의 ‘자리’가 없음을 그 증거로 삼는다. 해부학적 연구 결과가 축적된 상태에서 ‘영혼’이라는 기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또한 진화의 과정 중에 ‘영혼’이 등장했던 순간을 특정할 수 없다는 것도 근거 중의 하나가 된다. 질문은 이어진다. 영혼은 정신과 어떻게 다른가. 영혼과 마인드의 경계는 어디인가. 의식은 어떻게 다른가. 뇌의 인지를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가’. 의식은 무엇인가. 나 자신을 통합된 자아로 인식하는 것을 뇌의 ‘속임’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가. 질문은 이렇게 수렴된다. 나는 누구인가. 여기는 어디인가. 우주의 시작은 어떠한가. 죽음 이후에 우리의 삶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가.
컬럼비아대학교의 물리학과 및 수학과 교수이자 초끈이론에서 중요한 업적을 남긴 이론 물리학자 브라이언 그린도 같은 지점에서 출발한다. 첫 문장이다.
모든 생명은 때가 되면 죽는다. (19쪽)
물리학자로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섬세하고 조심스럽다. 기원과 엔트로피에 대한 탐구가 그렇고 생명과 마음, 언어와 두뇌에 대한 언급이 그러하다.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책 속에서,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총동원해 생명 현상을 설명하려 했던 슈뢰딩거가 자주 언급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론 물리학자이자 수학자, 과학자인 저자가 우주의 저-엔트로피 상태에 대해, 빅뱅 직후 원소량의 변화와 태양계의 기원에 대해, 생명 정보에 존재하는 통일성에 대해, 의식과 스토리텔링에 대해 설명할 때, 세세한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운 평범한 독자조차도 놓칠 수 없는 구체적이고 논거가 확실한 정보가 빼곡하다. 시험 봐야 해서, 외워야 해서 읽는 게 아니고, ‘읽는 행위’ 그 자체로서 즐겁게 읽히는 책이다. 발견의 기쁨이 가득하다. 새로운 지식의 발견 뿐 아니라 내가 얼마나 무식한지를 발견할 수 있어서 그렇다. 의식과 양자물리학에 대한 고찰이 특히 그렇다.
양자계가 외부로부터 자극을 받으면 (자극을 가한 주체가 의식이건, 의식이 없는 도구이건 간에) 양자적 확률 구름이 걷히면서 명확한 하나의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지난 세월 동안 실행된 수많은 실험이 이 관점을 강력하게 지지하고 있다. 따라서 명확한 하나의 현실이 나타나는 것은 의식이 아닌 상호 작용 때문이다. 물론 이것을 증명하거나 반증하려면 의식이 개입되어야 한다. 나의 의식이 개입되지 않으면 결과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양자적 과정에서 의식이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명백하게 다른 두 미스터리의 피상적 구별을 뛰어넘은 정교한 접근법에서도 양자 세계와 의식의 연결 관계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211쪽)
현실과 양자역학의 수학 체계에서 해결의 열쇠가 ‘의식’인 경우 여러 개의 가능성 중 하나만 남기고 나머지의 가능성은 현실에서 지워진다.(211쪽) 하지만 양자역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 육체와 두뇌를 포함한 모든 미시물리학적 과정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저자의 주장은, 의식이 양자역학의 범주 안에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관찰자의 시선 혹은 광자의 개입 이외의 변수가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인지, 동시에 존재하는 두 개의 사실 혹은 진실이 가능하다는 건지, 점점 더 궁금해진다. 입자의 집합으로서의 ‘나’와 자유의지간의 연결 관계에 관한 서술 역시 흥미롭다. 나를 구성하는 입자의 행동이 곧 나의 행동이다. 나를 구성하는 각각의 입자들이 지금의 나, 현재의 나를 구성한다.
임의의 순간에 '나'는 입자의 집합이며, 입자의 특별한 배열을 나타내는 약칭이다(이 배열은 역동적으로 변하고 있지만, 개인의 정체성을 유지할 정도로 충분히 안정적이다. 그러므로 나를 구성하는 입자의 행동이 곧 나의 행동이다. 그 저변에서 물리 법칙이 나의 입자를 제어하고 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의 행동(입자의 거동)은 자유의지와 무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의 특별한 입자 배열(유전자, 단백질, 세포, 뉴런, 연접부의 네트워크 등의 고유한 배열 상태)은 나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반응한다." 라는 거시적 서술이 퇴색되지는 않는다. 당신의 행동과 반응, 생각이 나와 다른 이유는 입자의 배열 상태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224쪽)
신화와 종교의 발생 원인에 대한 부분에서는, 내면에서 겪은 일의 원인을 바깥 세상에서 찾는 인간의 경향을 지적한 부분이 흥미롭다. 지난하고 오랜 기간 축적된 사고 과정 가운데서, 인과론의 사슬을 완벽하게 끊어낸 자유로운 인간이란 존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시적인 불멸이란 부분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하기 어렵다.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예술적 성취를 통해 영원에 이를 수 있다는 주장인데, 물론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은 지금도 살아서 우리의 마음에 심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겠지만, 그의 어떠한 의도와 상관 없이, 즉 그것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기쁨, 통찰과 상관 없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삶은 그 자체로 종결되었다. 우리가 향유하는 감동과 환희, 그리고 고마워하는 마음이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닿지는 않는다. 인간으로서 피할 수 없는 필멸의 삶, 그리고 계속되지 않고 결국 그 끝을 보게 될 우리 우주의 운명. 과학자의 결론은 이러하다.
그렇다. 우리는 무상하기 그지없는 일시적 존재다. 그러나 우리가 존재하는 짧은 시간은 우주의 역사를 통틀어 매우 희귀하고 특별한 시간이다. 이 시간 동안 우리는 자기 성찰을 통해 만물에 가치를 부여하고, 형이상학적 가치를 창출했다. 영원히 변치 않을 유산을 남기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이미 우주의 타임라인을 조망한 우리는 그것이 이룰 수 없는 목표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소규모의 입자들이 모여서 현실을 인지하고,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이 얼마나 단명한 존재인지를 깨닫고,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아름다움을 창조하고, 연결 관계를 확립하고, 우주의 미스터리를 풀었다는 것은 정말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455쪽)
오랫동안 무신론자였다가 나이 든 후에 불가지론자로 바뀐 줄리언 반스의 ‘잘 모르겠다’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나 역시 내가 가진 신념의 범위를 쉽게 벗어나지는 못할 것 같다. 입자의 합으로서의 나와 느끼고 생각하는 나, 통합된 자아로서 기능하고 있는 나. 그런 나에게 가장 험난하고 거친 난제는 무의미성 그리고 무목적성이 아닐까 싶다. 아무 이유 없이, 아무 목적 없이 그냥 이렇게 아름답고 완벽하게 존재하고 있는 이 광대한 우주를, 나는 아무렇지 않게 바라볼 수가 없다. 나의 죽음으로 이 우주는 얼마만큼 종말을 맞게 되겠지만, 그것이 전부라는 이야기는 아직도 내게 낯설다.
존재하지 않는 과거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를 미래 사이에서, 지금 바로 현재가 가장 중요하다는 저자의 말은 과학자가 아닌 인문학자의 말처럼 들린다. 백만장자라면 최첨단 냉동기술로 죽음의 순간을 한동안 유예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우리 평범한 인간에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광활한 우주 속, 먼지보다 작은 우리 인간은 우주의 시작과 죽음의 신비를 밝혀내기 위해 또 다시 한 발을 내딛는다. 지금 당장, 우리가 원하는 혹은 진실에 가까운 답을 찾을 수는 없겠지만 답을 찾으려는 노력을 멈출 수는 없다.
우주에서 돌아왔더니 곧 용산시대가 열린다고 한다. 교통지옥이라 쓰고 용산시대라 읽는다. 다시 우주로 나가야 하나. 브라이언 그린의 다른 책이 있나 찾아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