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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모리슨의 말 -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의 생애 처음과 마지막 인터뷰 ㅣ 마음산책의 '말' 시리즈
토니 모리슨 지음, 이다희 옮김 / 마음산책 / 2024년 12월
평점 :
토니 모리슨 뽐뿌의 제 1요소는 바로 이 사진. 출처는 수이님.
토니 모리슨 뽐뿌의 제2요소는 바로 이 100자평. 출처는 유수님.
모리슨의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빗발치는 궁금증은 적나라한 응시와 동시에 어떻게 이런 거리를 유지하는지, 에 대한 것이었고 이 책을 읽으면서 일정 부분 해소되었다. 다만 인간적으로 여전히 궁금하다. 극단을 다루면서도 그에 시달리지 않고 의연하게 지켜내는 인간애에 대해서. 내가 오독한 게 아니라면 작가는 그것이야말로 예술의 영역이라 내내 힘주어 말하고 있다. (출처: 유수님 100자평)
나도 그게 궁금했다. 유수님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적나라한 응시와 동시에 거리를 유지하는 것',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그게 궁금했다.
온 세상이 다 아는 아프리칸-아메리칸 여성의 삶. 흑인 남성과 백인 여성, 그리고 그 위에 백인 남성을 지배자로 두고 살아야 했던 삶. 역사 속에 아로새겨진 고통과 슬픔을. 그 억울함을, 토니 모리슨은 어떻게 잊었던 걸까. 어떻게 이겨낸 걸까.
젠더, 계급, 인종은 복합적으로 작동한다. 어느 한 가지 요소가 다른 한 가지를 압도하는 환경이 조성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여러 요소가 복합적으로 교차해 작용한다. 젠더와 인종이라는 측면, 특별히 흑인 여성의 입장에 대해서는 『여성, 인종, 계급』을 읽고 정리한 적이 있다. (흑인 여성과 선택의 문제: https://blog.aladin.co.kr/798187174/14364842)
토니 모리슨의 말을 따라 읽다가, 그녀가 예술의 영역에서 이루어낸 바로 그것을 자신의 삶에서 이미 완성했음을 확인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로 여기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로 여기 있고 떠나기 전에 존중받을 만한 일, 남을 돌보는 일을 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 누군가를 돌보는 일, 타인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일은 아주 흥미롭고 까다로우며 지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 무척 힘든 일입니다.
한편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자신을 희생자의 위치에 놓는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위험한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45쪽)
그러니깐, 토니 모리슨은 어떻게 그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순수한 피해자라는 옷을 과감히 벗어 던지고, 자신의 맨얼굴만으로 나설 수 있었을까. 원망하지 않으면서. 아무도 원망하지 않으면서도 고결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아픔과 고통에 직면할 수 있었을까. 그러니깐, 어떻게. 어떻게 그녀에게는 그 일이 가능했을까.
이런 인용이, 이런 접합이 적당한지 잘 모르겠다. 최근에 읽고 있는 책이라 이 책의 구절이 떠오르기도 했지만, 나는 미국에서 아프리칸-아메리칸의 삶을 이해하는데 이것만큼 적절한 이론이 없을거라 생각한다.
권력은 획득할 수 있는, 손에 넣을 수 있는,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지점에서 진행되는 게임 속에서 행사되는 것이다. 권력관계는 다른 여러 관계에 내재해 있다. 경제 과정, 지식의 전수 관계, 성적 관계의 모든 요소에 그것은 존재한다. 권력은 그때마다 그것이 발생하는 장소에서 작용하고, 직접적으로 무엇인가를 산출한다. 권력은 아래로부터 온다. 위로부터만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체의 모든 곳에서 작동하는 다양한 "역학 관계" 그 자체다. (『야전과 영원』, 621쪽)
백인은 흑인을 지배했고, 이는 노예제도라는 가장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말하는 가축쯤으로 여겼기에 흑인에 대한 정신적, 육체적 강탈이 가능했다. 하지만, 백인은 흑인을 지배함과 동시에, 흑인의 영향 아래에 있었다. 백인은 가능한 모든 물리적 수단을 동원해 흑인을 억압했지만, 동시에 흑인을 무서워했고, 두려워했다. 흑인은 백인이 자신들의 노동력에 기대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자라는 걸 알았고, 협상과 타협을 통해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문화를 만들어냈다. 권력은 위로부터 오지만, 아래로부터'도' 온다.
그래서 내가 찾은 해답은 이거다. 그녀가 자유로울 수 있었던 이유는 스스로를 '승리한 사람'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라는 것. 자신들이, 흑인들이 승리했다고 믿었기에,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세계 문화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그녀는 자유로울 수 있었다. 고통을 밟고 일어설 수 있었다. 피해자라는 위치에 멈춰있지 않았다. 누구에게든, 무언가를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요점은 우리가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마침내 승리한 아주 흥미로운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수세기 동안 이곳에서 일어난 일들을 겪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들이 또 있을까요? 우리가 다 죽어 없어졌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아요. 우리의 이야기는 단지 생존의 이야기가 아닌, 상상을 초월하는 번영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그 모든 고초를 겪지 않았다면 어땠을지 생각해 보세요. 그 결과 우리는 지금의 아주 특별한 문화를 갖게 되었고 이것은 토착의 문화입니다. 우리는 이 나라에서 새로운 세계 문화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138쪽)
그녀가 말하는 '우리'에 흑인 남성이 포함된다는 점이 눈에 띈다. 당연하다. 흑인 여성은 그 모든 고통의 시간 속에 흑인 남성들과 함께했다. 아들을 둘 낳아 혼자서 기른 싱글맘의 위치에서, 모성에 대해 비관적이었던 제2물결 페미니즘에 대한 저어되는 마음을, 아이 둘의 엄마인 나도 100퍼센트 이해한다.
식민지 경험, 전쟁 폐허의 땅에서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룩한 한국의 발전 이면에 강요되어왔던 '억척스런 어머니상'이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모성의 신비화에 한결같이 반대한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항상 흑인 남성을 보호해야만 했던(167쪽) 흑인 여성에게 모성이 작동된 방식은 우리의 그것과는 또 다른 역사이고, 그림자일 것이다. 나를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드는 그 아이가 내게 주는 기쁨에 대해서. 두 사람만의 사랑과 숨겨둔 비밀 이야기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은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을 테니. 언제나, 한결같이. 모성은 어려운 문제다. 해답으로서의 사진을 여기에 남겨둔다.
왜 앞에 서서 사진을 찍으신지는 모르겠다. 듬직한 토니 모리슨과 보호해 주고 싶은 그녀의 두 아들이다.
흑인 페미니스트는 스스로를 ‘우머니스트‘라고 불렀습니다. 간극이 있었죠. 둘은 달랐습니다. 역사적으로 흑인 여성은 언제나 남성을 보호했어요. 남자들이 일선에 나가 있었고 죽을 확률이 더 높았거든요. 실제로 저는 이것이 흥미롭다고 생각했습니다. 출판계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 많은 여성이 대학을 가기 위해 가족을 설득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이야기했습니다. 아들은 당연히 공부를 시켰지만 딸은 공부를 하려면 몹시 애를 써야 했어요. - P167
아프리카게 미국인 사회에서는 정반대였습니다. 딸은 공부를 시켰지만 아들은 시키지 않았어요. 딸은 언제든 돌봄노동을 하는 직업을 가질 수 있었거든요. 교사라든가, 간호사라든가. 하지만 아들에게 공부를 시키면 갈등에 직면하거나 꼼짝하지 못하는 상태가 될 수 있었어요. 결코 쉽게 성공할 수가 없었어요. 여러 가지 면에서 그런상황은 이제 바뀌었지만 당시에 우리는 자기를 보존하려는 하나의 유기체 같았어요. - 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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