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난 주에 <여자아이 기억>을 읽었다


제일 먼저 읽은 에르노는 <얼어붙은 여자>이고, <탐닉><단순한 열정>을 이어 읽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같은 사건의 다른 서술이고, <탐닉>이 에스프레소, <단순한 열정>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다. 아아를 먼저 마셨어야 했는데, 에스프레소 먼저 마시는 바람에 나는 참 고생이 많았다.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는 읽다가 힘들어서(치매에 걸려 기억을 잃어가는 엄마를 보살피는 딸의 이야기) 포기한 책이고, 다시 펴기 어려울 것 같다. 다음으로 읽을 에르노는 <젊은 남자>인데 목차를 살펴보니 프랑스어 원서가 수록되어 있다고 한다. 저는 필요 없는데. 저는 있거든요, 프랑스어 원서. 친구가 파리 다녀오면서 사 왔거든요, 그래서 있거든요. (읽지도 못하면서 자랑 그만!)  

 

 


1958년의 여자아이. 자신을 그 여자아이로 호명하며, 에르노는 기억을 새롭게 만들어간다. “이 책을 쓰기 전에는 죽을 수 없다던 작가의 고백대로 자신의 과거에 맞선다. 숨기지 않고, 감추지 않는다. 이 책에서 제일 눈에 띄는 대목은 계급 탈출에 한 걸음씩 다가서는 어린 소녀 아르노에 대한 서술이다.


 

여왕의 자부심을 지니고. 자신이 1등을 한다는 사실이나-그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마리아 성찬회 소속 교장선생님으로부터 '기숙학교의 영광'이라고 불린다는 사실보다 수학과 라틴어, 영어, 작문, 문학 등 주변사람 누구도 알지 못하는 걸 배운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우쭐했다. 예외적인 존재라서, 친척들로부터 예외적이라고 인정받기 때문에 자부심을 느꼈다. 노동자인 친척들은 명절 식사를 할 때면 그녀가 배움의 재능을 누구로부터 물려받았는지 궁금해하곤 한다. (33)

 


1등을 도맡아 하는, 기숙학교의 영광. 누굴 닮아 이렇게 공부를 잘하는 건지 궁금해하는 친척들에게 둘러싸인 삶에 대해 생각한다. 탈출하고 싶은 욕망과 탈출이 가능할 것 같은 상황에 대한 인식이 1958년의 아르노를 얼마나 추동했을지, 감히 상상해본다.

 



전등불이 꺼지고, 누가 댄스 파트너를 바꾸라고 빗자루로 쳐서 신호를 주었을 때, 그녀는 또다시 H의 품에 있게 됐다. 그는 곧장 그녀의 치맛자락을 들추고 자신의 손을 그녀의 팬티 안에 거칠게 집어넣는다. 바로 그 순간, 광포한 기쁨이 그녀를 덮쳤다. 첫날 밤 이후, 3주 동안이나 기다렸던 몸짓에서 비롯된 상상을 초월하는 유린. 그녀 안에는 자신의 가치가 실추된다는 어떤 느낌도 없다. , H에 의해 소유되고, 순결을 빼앗겼으면 하는, 강간의 욕망만큼이나 맹렬하고 단순한, 날것의 - 화학적으로 순수한 욕망 말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다. (97)

 


또 한 부분은 1958년 여자아이의 성적 경험에 대한 묘사다. 그의 표현을 그대로 빌려온다면 단순한, 날것의, 순수한욕망. 그 욕망에 대한 서술은 언제나 맹렬하고, 뜨겁고, 그리고 솔직하다. 솔직함. 불편하다고 느껴질 정도의 솔직함이 그의 문학 전체를 꿰뚫는 중요한 특징이다.





 













그래서 떠올리는 이런 문장.   

 


솔직함은 모든 천재성의 근원이다.                      – 뵈르네 (<프로이트를 위하여>, 66)



이 문장은 츠바이크가 <성격 초상>이라는 챕터에서 프로이트를 설명하며 인용한 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들은 성적인 행위로 출현(?)한 것이 아니라는 듯, ‘이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양식이라는 듯, 프로이트 동시대인들은 모두 성을 언급하지 않는 방식으로, 성을 대했다. 프로이트는 빅토리아 시대의 정신적 모순이 성의 억압과 관련되었음을 알아챘고, 그것에 대해 선배 의사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다만 말하지 못했을 뿐이다. 모두 알고 있되, 아무도 말하지 않는 그 이야기를, 프로이트는 꺼냈다. 시작했다.

 


모르는 체하지 말고 확인하라는 것이다. 돌아가지 말고 들어가라는 것이다. 눈 돌리지 말고 깊이 들여다보라는 것이다. 외투를 입히지 말고 벌거벗기라는 것이다. (<프로이트를 위하여>, 60)

 



솔직함이 천재성의 근원이라는 문장을 읽으며 나는 세 명의 친구를 떠올렸다. 자연스러운, 너무나 자연스러운 사고 과정이었다.

 


 

친구 A는 솔직함 그 자체다. 그를 좋아하는, 그의 글을 좋아하는 모든 사람은 그의 솔직함을 사랑한다. 그의 솔직함은 아무도 모르는 은밀한 혹은 숨겨진 음흉한 솔직함이 아니다. 그의 솔직함은 언제나 신나고 명랑하다. 짧지 않은 시간 그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내 경험으로 그의 솔직함은 그의 정직함과 짝을 이룬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도 솔직한 사람이라서, 자신에게조차 정직한 사람이라서, 그는 가끔 괴롭고 힘들어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솔직-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솔직함이 천재의 특징이라는 걸 위 문장을 통해 확인하기 전, 나는 솔직함이 작가의 특징이라 생각했다. 작가인 그를 보면서 그런 생각에 더욱 큰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는 솔직함의 마스코트, 솔직함 세계의 여왕벌 같은 존재이다.

 


친구 B는 인간의 희로애락에 비켜서지 않고 솔직하게 맞선다. 인간은 부족한 존재이고, 사랑스럽지만 동시에 골치 아픈 존재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인간 욕망에 대한 그의 솔직한 언설, 그의 솔직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다 보면, , 그래도 다시 한번, 을 외치며 그의 다정한 말에 동조하게 된다. 다시금 사람을, 인간을 사랑하게 된다.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진정한 인류애의 화신, 아니 진정한 인류애의 운동 여신 되시겠다.

 


친구 C의 솔직함은 자기 응시 분야(?)에서 제일 빛을 발한다. 나는, 내가 데리고 사는 나, 를 사실은 잘 알지 못한다. 일정 정도 사랑하며, 일정 정도 모른 척 한다. 그것이 답이라고 얼버무릴 때가 많고, 아니어도 그렇다고 거짓말을 할 때도 있다. 그의 자기 직면은 치열하고 그의 자기 인식은 조금의 빈틈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는 눈을 깜빡이지 않고 자기의 말로 솔직하게, 자기를 마주 바라본다. 푸코의 현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요즘에 더욱 그러하다.

 


나는 내 자신이 천재 쪽에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고, 또 앞으로도 그럴 일이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천재의 특징이 솔직함 뿐일 수는 없겠지만, 솔직함이 천재의 특징인 것은 확실해 보이는데, 내게는 그런 솔직함이 없다. 나는 좀 느리고, 자기 보호 본능이 강하고, 눈치를 많이 보는 스타일이다. 솔직해지기 어려운 성격적 특징을 참 많이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런 내게도 볕 뜰 날이 있었으니. 천재의 특징을 소유한 이 사람들이 모두 다 내 친구라는 사실.

 

 















어떤 종류의 친구라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자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그들의 영향을 받는다. 우리 중 누가 사랑하는 이들의 인정을 염두에 두지 않을 채 말하고 행동하는가다른 사람의 동의는 일종의 두 번째 양심이 아닌가?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의지하도록 태어났고 우리의 행복은 다른 사람의 손에 쥐어져 있다우리라는 인물의 형태는 주위 사람들에 의해 주조되며색을 부여한다우리의 감정이 부모의 영향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진리의 발견>, 94-5)

 



아니 에르노를 앞에 두고 나를 비출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분은 너무 멀리 계시고, 나의 존재를 모르시며(흑흑), 그의 친구가 되기는 더더욱 어렵…... 하지만 내게는 나를 비춰주는 거울이 자그마치 3개나 있으니, 나는 천재는 아니지만, 천재의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고, 이미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에.


 


나는 충분히, 안온히, 편안하게. 다른 책을 읽으리. 또 다른 책을 읽으리.





댓글(27) 먼댓글(0) 좋아요(4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냥 2023-04-13 22:5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님의 친구 A와 C 왜 제 눈앞에 있는 거 같죠? 특히 A 그 친구분은 음식한테 진짜 진솔하시더라고요! 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3-04-13 22:55   좋아요 3 | URL
솔직함이 인간을 넘어 사물에까지 투영되는 놀라운 기술의 소유자여서 그런 거 아닐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3-04-13 23:00   좋아요 2 | URL
지금도 아쥬 솔직하게 치킨을 마주하고 있을걸요…

단발머리 2023-04-13 23:06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 아니에요 지금은 꿈속에서 스펙터클 드라마를 솔직모드로 찍고 계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악의 길> 땡투 저에요. 솔직하게 알려드립니다!

다락방 2023-04-14 07:44   좋아요 3 | URL
A는 어제 23:00 경 단발머리 님 말씀대로 스펙터클한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세계무슨 뮤직페스티벌에 출연은 하지 않은채로 곡만 보냈는데 대상을 타버려서 금상을 잔나비에게 넘겨준...

이만 총총.

단발머리 2023-04-14 08:46   좋아요 0 | URL
아니!!!!!! 잔나비 그 분은 제가 어디 조용한 데서 둘이서만 한 번 만나자고 그렇게 연락을 했는데도 콧방귀도 안 뀌시더만 어제밤에 다녀갔다고요? 이런순!!!

난티나무 2023-04-14 02: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친구 A B C 모두 넘나 알 것 같아요!!! 눈에 어른거림!!!!! ㅎㅎㅎㅎ

저는 그럼 아아부터 마셔야 겠습니다!

잠자냥 2023-04-14 08:44   좋아요 2 | URL
A하고 C는 직접 만나셔서 더 잘 아는 친구 ㅋㅋㅋㅋ

단발머리 2023-04-14 08:49   좋아요 4 | URL
난티나무님 / B님도 직접 만나신 난티나무님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러고 보니 프랑스에 사시는 분 맞나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님 / 저는.... 아직도 기회를 보고 있습니다. (은오님 생각하며 나홀로 질척모드)

잠자냥 2023-04-14 09:17   좋아요 4 | URL
단발 님/ 나타나지도 않는 은오 님 존재감 대단하네요. ㅋㅋㅋㅋ 게다가 이제 다들 저만 보면 은오 님 이야기해 ㅋㅋㅋㅋㅋ 이게 고도의 작전인가. 은오의 서동요 작전?! ㅋㅋㅋㅋㅋ

은오 2023-04-14 23:08   좋아요 2 | URL
다들 이렇게 응원하는데 결혼도 안해주고......

단발머리 2023-04-14 23:15   좋아요 2 | URL
아이구야 배야 ㅋㅋㅋㅋ 은오님, 밥은 먹고 다녀요? 언제와요, 언제 와!
잠자냥님이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단 말예요 @@

은오 2023-04-15 18:14   좋아요 3 | URL
고럼요!!!! 저 곧 올게요 방학 전에 옵니다!! 이제 좀 여유가 생겼어요 ㅋㅋㅋㅋㅋ 요새는 기절 안하고 책읽다가 잡니다 후후 >< 근데 잠자냥님은 저 없이도 허전함 없이 잘 살고 계신 것 같은데 아닐까요...? 🥺

단발머리 2023-04-15 20:43   좋아요 1 | URL
은오님 / 설마 그럴리가요. 잠자냥님이 잠시 은오님을 잊으려 해도 말입니다. 다른 분들이 잠자냥님에게 은오님 이야기를 한다는 거 아닙니까....... 기다리고 계실거라고 생각해요. 은오님 놀릴 날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ㅋㅋㅋㅋㅋㅋㅋ

자목련 2023-04-14 09:2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참 좋은 글!
좋다는 말로는 많이 아쉽습니다. 저도 A B C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아요. 그 친구들의 우정이 부럽습니다. 댓글은 잼나고요~~

단발머리 2023-04-14 10:05   좋아요 2 | URL
좋다고 해주시니 제가 더 좋아요!

ABC 괜히 썼나 싶습니다. 다들 누군지 아시는 분위기 ㅋㅋㅋㅋㅋ 관계란 서로 좋아해야 하기도 하고 일정 정도는 노력도 필요한데 제게 어찌 이런 행운이 찾아왔는지 모르겠습니다. 댓글 대잔치는 계속 이어집니다^^

그레이스 2023-04-14 09:3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목 너무 멋져요!
저도 아니 에르노 계속 읽어야 하는데, 자극 받고 갑니다~♡

단발머리 2023-04-14 10:06   좋아요 3 | URL
뵈르네의 말이라는데요. 처음 읽을 때 ‘뜨악!‘하는 충격과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레이스님의 에르노 읽기 너무 기대됩니다. 그레이스님은 시작하시면 쭉 연달아 읽으시니 명품 페이퍼도 따라올테고요!

2023-04-14 09: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4-14 10: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4-14 1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4-14 12: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람돌이 2023-04-14 14:5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아니 에르노는 우리 단발님을 모르지만, 다른 천재인 A, B,C님이 모두 단발님을 알고, 사랑하고 있으니 어쩌면 진짜 천재는 단발님인지도..... 저는 단발님도 저기에 D로 넣으라고 하고싶어요. 단발님의 글은 항상 저에게 책을 넓고도 깊게 읽는게 무언지 알려주시는걸요. ^^

공쟝쟝 2023-04-14 19:13   좋아요 5 | URL
어후 제가 하고 싶은 말이네요. ABC 모두 친구인 D야 말로 친구천재이시다.

단발머리 2023-04-15 20:53   좋아요 0 | URL
에구 ㅋㅋㅋㅋㅋㅋ 바람돌이님! 칭찬천재 바람돌이님! 전 천재는 이미 틀린 몸이지만 D도 넣으라는 그 말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오래오래 기억할게요. 감사합니다!!!

공쟝쟝 2023-04-14 19:19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제가 방금까지 일을 하면서 정희진 매거진 이번호 후반부를 듣지 않았겠습니까? <지루한 섹스신....>에서 진짜 빵 터져가지구... 저 아니 에르노 더 읽어야겠어요. 아!! 내가 완전 좁게 읽었어ㅋㅋㅋㅋ 전 아니 에르노를 읽겠어요!!! 라고... 수이님한테 다시 댓글을 달고 올까 하다가 그냥 여기다가 댓글 답니다. 아니 에르노... 멋있네요.. 그리고.. 희진샘... 이번 팟캐스트 진짜 너무 재밌어서 행복했는 데...
여기 이 글 보니까 왜 나 또 이렇게 행복하냐.
저는 진짜 똑똑한 여자가 너무 좋아요. 똑똑한 여자들 너무 좋아한다. 내가 그녀들을 좋아할 수록 나도 똑똑해진다... 🤦‍♀️🤦‍♀️

단발머리 2023-04-16 08:17   좋아요 0 | URL
아니 에르노 완전 멋지죠. 전 <얼어붙은 여자> 읽고 반했답니다 ㅋㅋㅋㅋㅋㅋ 근데 많이는 못 읽었네요. 차근차근 벽돌깨기 심정으로 읽어볼까 합니다. 이번호 <지루한 섹스신.......> 너무 재미있었어요. 음... 전 그녀가 그를 사랑한다는 사실 자체가 불만이었거든요. 선생님의 해석에 완전 하트 샘솟았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푸틴 좋아하는 남자라니 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