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피엔스』, 『사피엔스: 그래픽 히스토리(Vol 2. 문명의 기둥』를 읽고 사람들이 제일 많이 말하는 대목은 여기가 아닐까 한다. '인간이 밀을 재배한 것이 아니라, 밀이 인간을 재배했다, 혹은 지배했다.' 인간은 '밀'의 지배 아래로 스스로 걸어 들어갔다.

『호모 데우스』에서 사람들이 어느 지점을 제일 많이 이야기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게 인상 깊었던 부분은 요기다. 진화론의 일정 부분, 이를테면 공통 조상설에 대해 긍정하는 기독교인으로서 밑줄을 그을 수밖에 없었던 바로 그 부분.
뱀은 우리의 시조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거역하라고 우리를 유혹하는 존재이다. 애니미즘을 믿는 사람들은 인간도 동물일 뿐이라고 생각한 반면, 성경은 인간이 특별한 창조물이며 우리 안의 동물성을 인정하는 것은 곧 신의 권능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자신들이 실제로 파충류에서 진화했음을 알았을 때, 근대 인류는 신을 거역하고 신의 말에 더는 귀 기울이지 않았으며, 신의 존재를 더 이상 믿지 않았다.(『호모 데우스』, 115쪽)
그리고, 지구의 여러 문제에 대한 답을 내놓는 것 같은 이 책,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에서는 이 부분에 밑줄을 그었더란다.
내가 깨달은 가장 중요한 것은, 내 고통의 가장 깊은 원천은 나 자신의 정신 패턴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뭔가를 바라는데 그것이 나타나지 않을 때, 내 정신은 고통을 일으키는 것으로 반응한다. 고통은 외부 세계의 객관적 조건이 아니다. 나 자신의 정신이 일으키는 정신적 반응이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더한 고통의 발생을 그치는 첫걸음이다.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472쪽)
인간 존재가 유기체임을, 물질임을, 그렇게나 강조하던 사람이, 종교의 해악에 대해 '객관적'인 어조로 '과학적' 태도로 비판하던 사람이 결론처럼 하는 바로 이런 말. 고통의 원천은 나 자신의 정신 패턴에 있다. 동양적인 사고방식, 불교에 근거한 이러한 사고방식에 익숙한 동양인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이 깨달음이 그의 삶을 추동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되었다. 널리 알려졌다시피, 유발 하라리는 매일 명상할 뿐만 아니라, 1년에 몇 개월 이상 휴가를 내어 명상 공동체에 들어간다. 명상하기 위해서. 정신 패턴의 일정 부분을 다스리기 위해서다. 물질만능주의의 이 시대에 그는 그 누구보다 '형이상학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
넥서스는 99쪽까지 읽었다. 이 책을 통해 하고 싶은 중요한 이야기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정리해두고 싶어서 일단 적어본다.
그러니까, 이런 주장. 많은 정보가 곧 진실은 아니라는 주장은 옳다.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하고 부유한 나라의 부자 중 한 명이며 대통령인 트럼프는 그 누구보다 거짓말을 많이 한다. 그러면서 입에 달고 사는 말이 이거다. "페이크 뉴스가 가장 큰 문제이다."

최근에 공개된 영상에서는 휴머노이드인 아메카가 거울을 보며 자기 인식을 하는 장면이 있다. 그것이 실리콘 의식의 반영인지, 아니면 거울을 보았을 때 사람의 반응, 정확히는 거울을 처음 본 아기의 반응과 비슷하게 프로그래밍되어 있는 것인지 알 수는 없다. 이제 정보의 발달은, 컴퓨터의 발달은, AI의 혁신은 여기까지 도달했다.
인간과 지구, 세계에 대한 인공지능의 정보는 이미 축적된 인류 역사의 '사실들'에 바탕을 둔다. 그럴 경우, 그 인공지능은 여성 혐오적, 인종 차별적 생각을 가지고 있을 확률이 매우 높다. 인류 역사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또한, 평범한 대부분의 사람들보다는 일부의, 극소수의 '위대한(?)' 사람들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으며, 자본주의의 발전과 타락의 지점에서 인간의 효용을 '생산성'에 둘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한가. 인간의 가치는 '생산성'에 있는가.
인간은 유기체이다. 인간은 새것이었다가 나중에는 고장 난다. 우리는 유기체다. 우리는 동물이다. 존재하기 위해 영양분이 필요하고, 이후에 배설해야 한다. 먹어야 하고, 똥 싸야 한다. 새것이었던 우리는 헌 것이 된다. 젊은 육체는 쇠약해지고, 어린 시절의 우리가 그러했던 것처럼 돌봄과 케어가 필요하다.
그런 우리, 유기체인 우리, 금방 헌 것이 되어 버리는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카프카의 『변신』은 흉측한 벌레가 되어 방 안에 갇혀 버린 남자의 이야기다. 이제 돈을 벌 수 없는 그, 누구에게 무엇도 될 수 없는 그. 하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그는 가족들을 위해 일하던, 돈 벌던 사람이 아니었던가. 모든 책을 육아서로 읽었던 때를 지나, 인생의 어느 시점부터 나는 모든 이야기를 '부모-자식'의 이야기로 읽기 시작했는데, 그 출발이 이 소설이다. '나이 든 부모'는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가. 어떤 존재일 수 있으며, 어떤 존재이어야 하는가,의 물음.
나는 아이를 둘 낳았는데, 둘만 낳기 잘했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내 살을 나눈, 내 맘을 절절히 나눌 사람은 둘이면 충분하다고 여긴다. 사실은 둘도 많아서, 내 마음의 많은 부분을 아이들에게 주지 못한 것 같다. 그래서, 어쩌면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내가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생기곤 한다.
부모는 자식을 그렇게 키운다. 살을 내주고, 마음을 내주어서 키운다. 그리고 나를 그렇게 키워줬던 부모는 '아이'가 된다. 서울대학 병원 진료실, 집 앞 내과 의사의 말을 전하는 엄마의 이야기를 한참이나 듣고 있던 의사가 나를 쳐다본다. 도대체 무슨 말이냐는 눈빛으로 내게 묻는다. 하지만 나도 답해줄 수가 없다. 나는 이미 진료실 앞 의자에서 엄마가 의사에게 하려는 말을 전해 들으며 그 말이 도대체 무슨 말이냐며, 이 메모지가 아닌 검사 결과지를 가져왔어야 한다며, 그 중요한 말을 열흘 동안 매일 만난 나에게 왜 하지 않았느냐며 조곤히 따져 물었다. 의사는 내게 설명을 요구한다. 내가 답해야 한다. 나는 내 부모의 보호자이기 때문이다.
민족 신화의 근간은 토템 신앙이다. 신과의 관계를 연결해 주는 존재로서의 동물, 부족의 안위를 지켜주는 존재로서의 동물, 인간과 대화가 가능했던 동물이 '있었다'. 하지만, 동물인 인간은 자신들의 우월성을 강화하기 원했고, 이는 동물을 '말 못 하는 짐승'으로 격하시킴으로써 가능했다. 인간만의 특이성, 말하고 만들고 협동하고 창조하는 인간만의 특이성이 동물 지배를 정당화했다.
AI, 인류의 축적된 정보를 바탕으로 사고하는 AI는 곧 녹슬지 않을, 강력하고 유연한 '신체'를 갖게 될 것이다. 똑똑하고 건강한 휴먼 로봇은 우리 인간을 어떻게 볼 것인가. 자주 먹어야 하고, 휴식을 취해야 하고, 배설해야 하고, 밤에는 취침해야 하는, 그리고 결국에는 늙어서 병약해질 인간을 어떻게 볼 것인가.
우리는, 우리 존재의 쓸모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내 삶의 쓸모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오랜 시간 인간의 친구였던 동물은 역시나 오랜 시간 같이 땀 흘리며 일하는 동료였고, 지금은 스테이크와 달걀로 소비된다. 인간은 동물을 배제함으로써 이 푸른별의 주인으로 등극했다. 나이 든 부모, 이제는 '쓸모없는', 힘이 없으되 여전히 나를 억압할 힘을 가진 늙으신 부모님들을, 인간들은 어떻게 대우하는가. '젊음'에 미친 자본주의 사회에서 늙음의 상징은 어느 것 하나 환영받지 못한다.
자기 존재 증명의 기나긴 여정 속에서, 우리는 여기까지 왔다.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쓸모 아닌 나의 쓸모를, AI에게, 내 아이에게,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