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빠로? 로빠섹!!
사랑은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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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빠진 로맨스 - 아웃케이스 없음
정가영 감독, 전종서 외 출연 / CJ 엔터테인먼트 / 2022년 9월
평점 :
친구들의 권유(?)로 <연애 빠진 로맨스>를 보았다. 손석구도 처음이거니와 전종서 배우도 처음이다.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배우다, 전종서. 앞으로도 자주 보고 싶지만, 영화를 잘 보지 않는 나로서는 모르겠다. 종서씨, 우리가 언제 어디서 다시 만날지 모르겠지만 만나서 반가웠어요.
영화를 통틀어 제일 중요한 장면, 제일 중요한 대사는 이것일 테다. 섹스도 하고 싶고 대화도 하고 싶어.
그래서 문제는 ‘대화도 되고 섹스도 되는’ 상대를 만나는 것일 텐데, 이건 원래 답이 정해져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대화도 되고 섹스도 되는 상대라.
중매결혼으로 맺어져 평생의 배필과 백년해로를 맞이했던 이전 세대에서는 대화 가능 여부와 섹스 가능 여부를 확인하는 게 불가능했다. 지금은 다른 상황이기는 하다. 결혼 전에 성관계는 물론이요 동거하는 경우도 많이 늘어나고 있으니 말이다. 내가 이런 말 할 처지는 아니지만, 잘 맞는지 아닌지는 해봐야 알 수 있지 않겠나. 짝짓기에 올인하는 세태에 대해 비판적이지만 사람들이 그만큼 짝짓기에 골몰하는 이유가, 우리가 동물이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인간이 체험할 수 있는 극한의 경험 중 하나인 것은 분명하지만 섹스가 이 세상 전부는 아니고. 또 섹스가 극한의 한 지점이라 할지라도, 그 감정과 느낌이 지속되는 시간이 생각보다 짧다는 걸, 우리는 안다. 섹스는 필요하지만 반드시 필요한 건 아니고.
하지만, 대화? 어떤 대화를 말하는 건가?
자기야, 둘째 정해진 체육복 없대. 티셔츠는 검은색 많으니까 트레이닝복 하의만 사면 될 거 같아. 백화점 언제 갈래? 나 혼자 갈까? 같이 가. 목요일에 갈까? 이런 게 대화인가. 이번에 설 선물 뭐로 할까. 과일 보러 마트 한 번 나가보자. 언제 갈까? 이런 게 대화인가.
그 당시 제가 제일 좋아했던 사람은 국어 선생님이었어요. 부모님의 불화 때문에 가정에서는 좀처럼 마음이 편치 않았는데 그래도 학교에 가면 숨을 쉴 수 있었어요. 아, 그랬군요. 힘드셨겠어요. 이런 게 대화인가.
두 사람이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는 장면이 좋았다. 잘 모르는 사람에게 솔직할 수 있고, 나의 과거를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내놓을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다만, 그 사이에 술이 꼭 들어가야 하는지, 내가 모르는 세계이니 뭐라 더하기는 그렇지만, 아무튼 잘 모르겠다.
하지만 두 사람의 이야기를 ‘대화’로 볼 수 있는가에 대해서라면, 술기운을 빌리기는 했으나, 속마음을 진솔하게 털어놓았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대화’를 한 ‘셈’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대화는 언제까지 가능한가. 그 ‘대화’라는 것은, 남녀가 ‘자기 전까지’ 가능하다고 말하는 건 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런 경우가 흔하기는 하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볼 문제는 우리가 나누는 그것이 정말 ‘대화’인가 하는 것이다. 나는 대화에서 중요한 요소가 ‘유머’라고 생각한다. 우스운 이야기 부류의 유머가 아니라, 마주 보며 웃을 수 있는가, 의 의미다.
이것과 관련해서 썼던 지혜로운 친구의 글 중, 한 문단을 그대로 옮겨와 본다. 그 친구에게 말도 안 했는데, 나는 그래도 된다. 우리는 그런 사이다.
나는 자영과 박우리가 자꾸 웃어서 그들의 사랑이 시작될 거라고 생각했다. 내 경우엔 그렇다. 나는 상대가 아무리 웃기다고 얘기해도. 상대를 좋아하지 않으면 전혀 웃지 않는다. 안 웃기다. 졸라 차가운 여자인 것이다. 그러나 상대에 대한 애정이 있다면, 웃긴 얘기를 하지 않아도 웃고 있다. 자영과 박우리가 만날 때마다 웃었다. 내가 잘 웃어서 상대가 내게 '나 되게 웃기지'라고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나는 '응 근데 너 웃겨서 웃은 거 아니고 좋아서 웃은거야' 했다. 나는 좋아서 웃었다. 좋아서. 좋아서, 당신이 웃기려고 한 얘기가 웃겼다. 그런 거다.
(<사랑은 용기>, 다락방님 서재에서, https://blog.aladin.co.kr/fallen77/14238751 )
이 문단은 내가 지금 하려고 하는 이야기와 꼭 닿아 있다. 사람과 사람이 이야기를 나눌 때의 ‘유머’ 혹은 ‘웃음’이란 ‘애정’에 근거한다는 점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고 있다. 맞은편에 앉은 사람이 듣고 있다.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고 있는가. 그 이야기는 어떤 이야기여야 하는가. 그래야 대화라고 할 수 있는가. 이를테면, 나는 읽고 있는 책에 대해 가족들에게 이야기하니까, 임지현의 책을 읽으며 ‘희생자 의식 민족주의’에 대해 말한다. 다들 한 마디씩 보탠다. 그게 대화인가. 친구들을 만나면 한나 아렌트 이야기를 마음껏 해도 된다. (그래서 친구들을 만나야 한다) 내가 이해한 게 맞는지 물어본다. 그리고 네가 이해하는 지점에 대해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게 대화인가. 이것만이 대화인가. 그건 아닌 것 같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교육, 패션, 섹스, 언론, 어떤 주제에 관해서든 자유롭게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사람을 만나, 오래오래 함께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그 사람과의 섹스가 좋다면, 아, 정말 부럽습니다, 하고 인사를 건네고 싶다. 하지만, 그건 정말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허락된 행운이다.
애정에 근거한 대화라면 간혹 그것이 한쪽만의 말이어도 상관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진지하게 상대방의 눈을 바라보고 ‘나름’의 성의를 담아 적절하게 ‘응대’한다면, 그렇다면 설혹 그 이야기가 ‘다르게’ 전해진다 해도, 어떤 경우 전혀 상대에게 전해지지 않는다고 해도, 난 그걸 대화라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애정에 근거해서만 ‘대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대화는 언제든 불가능하다. 애정만이 불가능한 대화를 가능하게 할 수 있으며, 오해를 최소화하고, 이해와 공감을 최대화한다. 애정, 오직 진실한 애정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