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을 정리하다가 찾았는데 새 책인 줄 알았다. 그렇게나 아껴서 읽었던가. 『Becoming Jane』의 제인은 제인 오스틴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라고 하는데 동명의 영화와 같은 내용이다. 동네 유지의 조카 위즐리는 가난한 목사의 딸 제인에게 호감을 표시하고, 어머니를 포함한 가족들은 은근히 제인이 청혼을 받아들이기를 원한다. 하지만 제인의 마음은 잠시 시골에 내려온 도시 남자 톰 르프로이에게 가 있다. 내 글을 무시하는 듯하지만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남자. 내 글에 진심인 남자. 내 글의 가능성을 알아봐 주는 남자. 말이 통하는 남자.
제인과 톰은 그들의 인생을 걸고 도박을 감행하지만, 그 일은 결국 실패로 돌아간다. 두 사람 중 한 사람만이라도 경제적인 압박에서 벗어났더라면 둘의 사랑은 이루어졌을 것이다. 제인에게 넉넉한 지참금이 있었더라면 그녀는 기꺼이 톰의 가족을 부양했을 것이다. 직장 상사이자 후원자인 삼촌의 돈을 받지 않아도 되었더라면, 톰은 망설임 없이 제인을 아내로 맞았을 것이다. 하지만, 제인에게는 돈이 없었고, 톰에게는 돈이 필요했다. 두 사람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했고, 제인은 톰을 돌려보낸다. 둘의 사랑이 다른 사람들을 망치게 할 수 없다는 말과 함께.
고통이 인내를 낳는다던가 고통을 통해 자기를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은, 고통에서 벗어난 후에야 할 수 있는 말들이다. 고통의 회오라기 한 가운데서는 고통을 견디는 일 말고 다른 일을 할 수 없다. 난 삼촌에게 저항할 수 없어요, 난 가족들을 모른 척 할 수 없어요, 라고 톰이 말했던 그 밤의 고통은 제인만의 것이다. 그 고통을 살아내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은 없다. 그렇게 두 사람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했고, 그즈음 제인 오스틴은 두 쌍의 남녀 주인공에게 해피 엔딩을 선사하는 소설 『오만과 편견』의 집필을 시작한다. 그래서 오늘의 문장.
Neither Jane Austen nor her sister Cassandra ever married. Jane completed six very successful books before dying at the age of forty-one.
관련이 없어 보이는 두 문장이 나란히 연결되어 있다. 결혼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인 오스틴이 훌륭한 소설을 남길 수 있었던 건 아닐 것이다. 어찌 되었든 그녀는 썼을 것이고, 그리고 소설을 완성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의 도피를 만류했던 카산드라의 말, “글 쓰는 건 어떻게 할 거니?”라는 말 역시 진실의 한쪽 면이다. 톰과의 결혼. 농장의 갖가지 일들. 아이가 여섯 혹은 일곱. 10여 년에 가까운 임신, 출산, 수유, 육아. 그 많은 식구를 먹이고, 씻기고, 재우고. 다시 먹이고 씻기고 재우고. 『오만과 편견』의 엘리자베스는 가사노동에 지쳐 예전의 총명함을 모두 잃어버리고 동네의 그저 그런 아줌마가 되어간다. 나도 한때는 그랬었지, 라고 말하는 사람이.
다음 주가 부활절이고 그래서 이번 주는 고난주간이다. (하여) 새벽에는 교회에 다녀왔다. 신디사이저를 칠 때는 그렇지 않은데 피아노 앞에 앉으면 자꾸 긴장하게 된다. 어제는 아주 어려운 곡도 아닌데 오랜만이라 그런지 더 긴장이 돼서 반지를 빼 가방에 넣어두었다. 집에 돌아와 아침 준비해서 식구들을 다 내보내고 은행에 갈 일이 있어 정류장으로 걸어가는데 왼손 네 번째 손가락을 더듬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반지가 없다. 아, 반지는 가방에 있다.
남편이 연애할 때 사준 반지, 좋은 반지도 비싼 반지도 편한 반지도 아닌데. 오래되어서, 시간이 이만큼 흘러서 이제는 내 몸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 반지가 있었던 자리, 반지가 남긴 흔적을 자꾸 더듬는다. 익숙해진 것에서 무언가 하나, 작은 것 하나를 바꾸려고 할 때, 자꾸 의기소침해지는 내가 여기에 있다. 반지의 흔적을 더듬는 나,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 오늘의 일을 자꾸 내일로 미루는 나.
익숙한 것에서 작은 것 하나를 바꾸려 하고 있다. 반지의 흔적을 더듬는 일을 그만두려 하고 있다. 요즘 책을 많이 못 읽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