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그래서, 너는 페미니스트야?"하고 물었을 때, 나는 명동의 하동관 곰탕 속으로 잠수할 기세로 한 숟가락을 가득 퍼 입에 밥과 고기를 넣고 있었다. "음, 음. 나는 페미니스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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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1학년 때, 열일곱 살에 이 친구를 만났다. 대학을 가고, 연애를 하고,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퇴사를 하고,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가 만나고 또 만났다는 건 서로를 좋아한다는 뜻이고. 친구가 "너, 페미니스트야?"하고 물었을 때, 나는 안전하다. 나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배척당하지 않을 것이고, 설명을 강요당하지 않을 것이다. 미움받지 않을 것이고 해고당하지 않을 것이며, 살인 협박을 받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안전한다. 그래서, 나는 '응.'이라고 답할 수 있다. 각성한 20대 여성, 페미니즘 책을 이만큼이나 읽었어도 삶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며 가차 없이 나를 질책하는 20대 여성과 마주 앉았을 때와는 사뭇 다르다.
주위의 가까운 여성들, 친구들, 교회 집사님들, 아이가 어릴 때 알게 된 아이 친구 엄마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때, 나는 페미니즘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는다. 그건 모두 다 아는 비밀과 같다. 아는 사람은 이미 알고 있지만, 모르는 사람은 알고 싶어하지 않는 이야기다. 나는 말하지 않는다.
시집 이야기, 시어머니 이야기, 남편 이야기, 그리고 돌봄을 당연한 것으로 요청하는 엄마에 대해 폭발하는 경우에만 한 마디를 보탠다. 근데, 그게... 그게 보니깐 안 그런 사람이 없는 것 같아. 모두 다 그런 것 같고. 난 예전에는 우리나라가 유교문화권이라서 유독 그런 줄 알았는데(여기에선 남존여비), 그것도 아닌 것 같아. 그러면서 리베카 솔닛의 이야기를 덧붙인다. 세계 최고의 나라, 지상 왕국 미국 여성들의 부상 원인 1위가 교통 사고가 아니라, 현 남편, 전 남편, 현 남친, 구 남친의 폭행이라는 걸. 다들 놀란다.
여성이 하나의 계급으로서 인류 문화의 시작이 여성 혐오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이건 4시간, 혹은 5시간이 필요한 주제다. 대화를 독식하는 것도 폭력이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없다. 페데리치, 달라 코스타 이야기도 할 수 없다. 역시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앞의 이 친구는, 나를 좋아하는, 나를 귀히 여기는 사람이고. 내 친구는 내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고, 그리고 우리는 단둘이다.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남편의 임금에는 너의 무임금 노동이 '포함'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 체제는 일부를 억압함으로써 굴러가고 있다고 말한다. 친구는 내가 한 말을 그대로 따라한다. 그리고는, 천천히 말한다.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들어 봤어.
내 친구는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일등 신붓감'이다. 못하는 일이 없다. 주부에게 요청되는 그 모든 걸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짜증 내지 않으면서 쉽게 빠르게 집안일을 해내고, 맛있는 음식을 내놓고, 사교육 없이 아이를 가르치고, 부업까지 하고 있다. 친구의 남편은 다정하고, 친구의 말을 잘 듣는다. 만약 행복하다면, 지금의 상태에 만족한다면, 난 더 이상의 이야기를 할 수가 없다.
가부장제 이성애 가정을 이상화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그로 인해 남성들이 얻게 되는 집단적 이익, 특혜와 특권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하지만, 자주... 그 제도와 억압의 굴레 속에 살아가는, 그중 일부를 인정하는 나 자신을 부인하지 않으면서 '바른 말'을 한다는 것이 모순처럼 느껴지기는 한다. 20대 여성의 뼈아픈 충고는 옳다.
가사노동임금 관련 저자들과 활동가들은 재생산 영역이 정치적으로 중요하며 가사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반자본주의 투쟁의 중심에 있다고 역설했다. 이들은 가사 노동이 자본 재생산에 반드시 필요하며 이를 붕괴시킬 잠재력이 있다고 서술했다. 이 운동의 핵심 요구는 무임금이나 저임금 상태에 있는 재생산 노동에 대해 자본주의 국가가 임금을 지불하라는 것이었다. 이들은 모든 재생산 노동에 임금을 지급할 경우 자본주의가 이윤을 낼 수 없다는 점을 이런 식으로 보여주려고 했다.(25-6쪽)
여성학자 캐시 워크스 Kathi Weeks가 말하듯이, 노동 행위에는 존재론적 실체를 만드는 효과가 있다. 즉 노동 행위가 주체를 존재하게 한다. 주체는 기억, 욕망, 습관을 통해 안정된 실체로 드러난다. 이런 것들은 어떤 유형의 노동을 능숙하게 반복하면서 내면화된다. 주체는 사회적으로 성립된 자아를 사회보다 앞선 진정한 것으로 경험하게 된다. 감정노동의 경우에 특히 그렇다. (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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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있다. 잘 읽을 수 있을 테지만, 잘 쓸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내 안의 모순과 낙담을 하소연 없이 풀어내고 싶다. 집에 아무도 없어 조금만 더 읽고 싶은데, 밤 되기 전에 청소기 돌려야 한다. 오후 6시 49분이니까. 서두르자.
청소기 마저 돌리고 큰애가 사온 김밥과 호떡을 먹었다. 이제 점심 설거지가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