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껴서 조금씩 읽었는데, 그렇게 아꼈는데 결국 다 읽었다. 팬의 입장으로서는, 책이 너무 얇아서 그런 거라고 선생님을 탓하고 싶다. 저녁 9시 반. 자리에 앉아 책 펴면 눈 앞이 뿌옇고 잠이 쏟아지려고 할 때(9시 반부터 졸린 사람) 선생님 책을 읽었다. 눈이 커졌다. 아침에 1차 등교 완료시키고 2차 온라인 등교 사이 시간에 식탁에 앉아 선생님 책을 읽었다. 원래 성경 읽는 시간인데, 예수님 이해해 주시리라 믿는다. 천지 만물이 고요한 시간, 경건한 자세로 앉아 읽었다. 머리가 상쾌했다.
여러 번, 선생님은 자신이 읽은 책의 저자들을 ‘부럽다’고 하셨다. 어딜 감히. 나는 선생님이 부럽지 않고, 부러울 수 없다. 선생님에 대한 내 마음이 진심인 만큼 이 말도 진심이다. 빨래를 널면서 생각한다. 이런 사람이, 이렇게 쓰는 사람이 왜 대학교수일 수 없을까. 왜 선생님을 모셔간 대학이 하나도 없을까. 교수 중에 선생님처럼 읽는 사람이, 쓸 수 있는 사람이 대체 있기는 한 걸까. 아침부터 생각은 ‘음모론’으로 치우쳐지고, 어쩌면 그건 음모가 아니라 구조 때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면, 털지도 않은 빨래를 건조대에 축축 걸쳐 놓는다. 될 대로 돼라.
읽어야 할 책을 ‘읽고 싶어요’에 넣어둔다. 그리고, 다시 읽어야 한다. 책에는 한 줄도 긋지 못했다. 두 번쯤 읽은 후에, 필요할 때마다 꺼내 읽어야 하니까. 처음 읽을 때 줄 치는 호사를 부려서는 안 된다, 선생님 책에는.
『세상과 나 사이』 는 도서관에서 진즉 빌려다 놓았고(책 빌리는데 진심인 편), 전에 읽었던 마리 루티의 책 『나는 과학이 말하는 성차별이 불편합니다』와 『남근선망과 내 안의 나쁜 감정들』을 꺼내 놓았다. 한 번 읽은 책의 내용은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최근에서야 알게 됐다. 아니, 확실히 알게 됐다.
볕은 따뜻한데 바람은 차고. 시간은 부족한데 책은 쌓여만 간다.
독자로서 나는 이 책과 어느 정도 소통했고, 이해했고, 공감했다. 질병, 돌봄, 노년, 그리고 죽음에 관한 ‘나의 경험’을 정확히 써주어 고마웠다. 나 역시 "페미니즘을 끝없이 펼쳐진 언어, 해석, 정치학의 들판이라고 생각하다가, 내가 그 들판을 계속 달려갈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그 들판에도 무섭고 인기 없는 장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희경, 저자 소개) ;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_메이 외, 65쪽)
나는 나 자신을 포함해 아픔을 호소하는 사람에게 공감과 위로 대신 이렇게 말한다. "타인에게 이해를 구하지 마세요.", "안 아픈 사람을 배려하세요(아픈 사람이 주변에 있으면 안 아픈 사람은 피해 의식에 시달리기 쉽다).", "주문으로 ‘감사합니다’를 반복하세요."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_엄기호, 89쪽)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지식은 근대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자신의 앎을 상대화하는 것이 이 시대 가장 중요한 지식 혁명이다. 그러나 남녀에 대한 통념은 완고하다 못해 자연의 질서처럼 인식되고 있다. (아내 가뭄_애너벨 크랩, 1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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