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롭게 읽은 책입니다.

서지학(書誌學)을 전문으로 하는 학자가 아니라 소설을 쓰시는 작가께서 책소개를 해주셔서 책만으로 느낄수 없는 여백을 메꿔주시는 역할을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책도 책에 관한 책이고, 근세와 근대시기에 멀게는 13세기 가깝게는 20세기 초까지 서구에 알려지지 않았던 조선을 그들 입장에서 서술한 책을 소개한 겁니다.

따라서 소개시켜 준 책들이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든지 기본적으로 유럽중심주의(Eurocentrism)와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들의 목적이 측량이든 탐험이든 선교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유럽인들은 태생적으로 13세기에 있었던 몽골의 침략에 대한 공포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의 속도와 무자비함으로 그들이 몽골인들을 야만인(Barbarian)으로 보고 있었고 중세이후 터키를 포함한 서아시아 지역을 유럽에 비해 낙후된 지역으로 보고 있습니다.

모르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편견과 무지가 결합해 자신들의 기독교 문화이외의 문화를 폄하하고 야만으로 취급하는 문화우월주의 내지는 백인 우월주의( white supremacy)를 발전시켜 온 겁니다.

기본적으로 이런 시각은 영미권의 저작에 기본적으로 들어가 있는 그들만의 시각입니다.

21세기인 현재도 그러할진데 대항해의 시대인 17-18세기와 식민지 확장에 전념하던 19세기는 그 강도가 더 쎘고 편견도 대단했습니다.

이 책을 관통하는 중요한 공통점은 오랜 옛날 즉 14-18세기에는 예수회(Jesuit)를 비롯한 카톨릭 신부들과 상인들이 아시아와의 접촉을 선도했다면 19세기는 개신교 선교사들과 외교관 상인 군인들이 아시아의 이권을 노리는데 선봉을 선 것인데 거의 일관되게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아시아와 유럽 의 교류에 참여해 온 것으로 보입니다.

책에 관한 책인만큼 책 자체의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는데, 라틴어, 프랑스어, 이태리어 등으로 쓰여진 초기 판본들이 유실되거나 축약 혹은 편역되어 영어번역본으로 수세기가 지난 뒤에 출판되거나, 원본이 유실되어 필사본으로 전해지다가 역시 수세기가 지나 출판되거나 아예 출판 자체가 되지 않고 원고상태로 수세기동안 도서관에 처박혀 있거나 흩어져 있던 원고들을 모아 번역하고 출판이 되는 등 고서들만이 가지는 사연들이 눈길을 끕니다.

수백년이 지난 이야기가 분실되거나 폐지로 없어지지 않고 유럽이나 미국땅이 아닌 한국의 도서관에 소장될 수 있는 건 한편으로는 기적이라고 불러도 무방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런면에서 신간서적의 출판도 중요하지만 중고서점에서 팔거나 도서관에서 소장하는 고서적을 볼 수 있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래된 책을 보면 느끼는 것이지만 당대의 현실을 분석하고 기록한 책이 지금은 역사의 일부가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이책에도 언급하고 있듯 개인의 문집이나 편지 그리고 당시 나온 잡지를 보면 글쓴이의 생활은 물론 감정까지도 날 것으로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에 역사서나 사회과학서의 분석을 뛰어넘는 원래의 삶을 그대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역사에 있어 어떤 특정 사건이나 전쟁 등을 직접 목격하거나 경험한 것을 기록한 일기나 회고록 등은 사료가 포함하지 못하는 현실의 ‘생생함’을 느낄 수 있게 해줘 매우 중요한 자료이기도 합니다.


이 책에서 언급한 책 중 특히 몽골관련해서 유럽에서 14세기 경 출판된 책들 중에는 과거 여기에서 소개한 책들이 있습니다.

몽골제국기행 (까치,2015)

두권의 중세 유럽의 몽골여행기가 한국어판에서 합쳐져 나온 번역본이지만 이런 책을 한국어로 접힐 수 있는 건 그래도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구한말 조선을 방문했던 영국여류화가의 화집 역시 번역본과 연구서가 출간되어 있습니다.

조선을 찿은 서양의 세여인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2013)

영국화가 엘리자베스 키스의 올드 코리아 완전복원판 ( 책과함께,2020)

구한말 조선을 애정어린 시각으로 바라보고 기록했던 여류화가의 작품을 볼 수 있어 사진집과는 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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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 당시 청와대 정책실에서 부동산 정책을 담당했던 세종대 김수현 교수의 책입니다.

2022년 10월 출판된 책이고,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실패했다고 여당 일각에서 주장하고 나오는 터라 어떤 마음으로 판자촌에 대한 책을 썼을까에 대한 궁금증이 있었습니다.

그동안 제가 읽은 도시와 주거에 대한 책들이 대부분 아파트에 촛점이 맞춰졌던 것에 비해 이 책은 서울의 ‘판자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제가 어릴 때만 해도 근처에 미아동, 삼양동 ‘달동네’ 근처에 살아서 외관으로나마 판자촌이 어떤 곳인지 경험했었고, 특히 장위동의 산동네는 어렸을 때 자주 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파트에서 생활한 것이 성인이 된 이후였으니 어렸을 때는 마당이 있는 일반주택이나 판자집이나 개량주택 등이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지금은 사라진 판자촌의 모습은 고(故) 김기찬 작가의 사진집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아래의 두 사진집을 보시면 마포, 서대문, 서울역 주위의 판자촌이 어떠했는지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골목안 풍경 30년 ,1968-2001 (눈빛, 2009)

골목 안, 넓은 세상 ( 서울역사박물관,2010)


1960년대부터 경제개발을 위해 농업을 포기하고 공업발전에 중점을 둔 불균형 발전전략을 채택한 당시 박정희 군부세력은 급속한 경제발전을 위해 싼 노동력이 필요했고, 이 싼 노동력은 결국 농촌을 떠나 서울에 온 이들이 담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급속한 공업회에 따른 도시의 팽창과 농촌의 축소는 이촌향도(離村向都) 현상을 낳았고 당시 만성 재정부족에 시달리던 정부는 농촌을 떠나 서울에 정착한 이들이 살 수 밖에 없었던 열악한 판자촌을 그냥 묵인했습니다.

싼노동력이 필요하지만 돈이 없으니 어쩔 수 없었던 겁니다.

하지만 이후 판자촌을 양성화해 주거문제를 해결하던 정부는 이후 도시미관을 이유로 판자촌들을 서울의 외곽으로 내보내는 정책을 실시합니다.

박정희 정권 말기 벌어진 ‘광주대단지 사건(1971)이 그 대표적인 사건입니다. 판자집 철거민들을 서울시 외곽으로 보냈지만 상하수도와 전기 등과 같은 기본적인 인프라도 갖춰놓지 않은 체 사람들을 천막집으로 내모는 일을 당시 공무원들이 했던 겁니다. 야만적이고 몰상식하죠.

이후 정부는 해야할 재정투입을 하지 않고 판자촌을 철거하고 용적율을 높인 중산층 아파트로 개발을 하는 ’합동재개발‘정책을 펴서 판자촌을 없애버립니다.

사실상 건설회사에 특혜를 주는 이 정책은 용적율을 높여 기존 거주자들을 수용하고 남은 아파트를 외부에 분양해 이익을 취하는 방식으로 귝공유지를 무단 점유해 아주 작은 공간에 살았던 판자집을 철거하고 넓은 공간을 만들어 비싸게 분양하는 건설사는 아주 쉽게 돈을 벌 수 있었고 정부는 국공유지 매각하고 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2000년 초를 강타햤던 ’뉴타운‘열풍은 토목으로 잔뼈가 굵은 이명박 서울시장이 시행했던 개발사업으로 예전 판자촌 재개발 방식을 다세대 주택, 빌라촌에 적용한 것입니다.

국공유지에 무단 점유해 살던 판자집과는 달리 이미 수많은 사람들의 재산권과 소유권이 얽혀있는 주택가 빌라촌을 개발해서 아파트를 올리겠다는 뉴타운 개발 방식은 성공하기 어려운 방식이었지만 당시 한나라당에서 정치적으로 밀어부친 정책이었습니다.
이 정책은 무리한 추진과 2008년 닥친 금융위기와 부동산 시장 폭락으로 결국 실패하고 맙니다.

끊임없이 용적율을 넓혀야 하고 끊임없이 부듕산 가격이 올라야하며 원 거주자가 끊임없이 내쫓겨야 하는 부동산 정책이 사회적으로 긍정적일 수가 없습니다.

최근 1970-80년대 지어진 아파트들을 철거하고 새 아파트를 짓는데 대부분 20층이상 35층까지 고층으로 지어집니다. 과거의 아파트가 낮은 건 5층애서부터 높아야 19층 정도인 걸 감안하면 여전히 건설사들이 용적율 높이기를 고수하며 수익을 가져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지금 지어진 아파트가 다시 재건축되면 또 35층보다 더 높은 건물로 지어져야 한다는 말로 이해됩니다.
아파트 가격도 올라야 하고요.

하지만 인구가 자연감소로 돌어선 한국에서 과연 건설사들의 이러한 수익모델을 지속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부는 건설시장애서 세금만 걷어갈 게 아니라 건설사가 독식하는 수익을 줄이고 공공주택을 더 많이 공급해야 할 것입니다. 제가 보기애 청년층의 출산파업은 지극히 현실적 합리적 판단입니다.

1960년대에는 국고도 비었고, 세금을 걷을 수 없어 민간 건설사에 도심재개발을 맡겼다면 경상수지 흑자로 국고가 충분한 현재에도 60여년 전 정책을 지속하는 정부와 국토교통부는 나태하거나 현 정책에 이권이 걸려 바꾸기 어렵다는 것 이외에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부동산 시장에 공공성이 이렇게 심각하게 저해되는 경우가 미국이외에 어떤 부동산 시장이 있을지 의문입니다.

편안히 쉴 집도 없고 고용도 불안정한데 아기를 어떻게 낳고 기를 수 있나요?

인구가 계속 줄어들면 건설사들도 수요부족으로 도산할 가성이 커집니다. 미분양 아파트를 정부한테 사라고 할 게 아니라 수요가 줄어들면 가격을 내리는 것이 정석이지요. 이런 면에서 건설사들은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주장할 자격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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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전국이야기 5 - 오월쟁패, 춘추 질서의 해체 춘추전국이야기 5
공원국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중국의 남부, 즉 중국의 강남(江南)지역을 둘러싸고 패자(霸者)인 초(楚)나라와 그 패권에 도전하는 오( 吳)나라와 월( 越)나라의 쟁투를 그린 이야기가 이 책의 주요 내용입니다.

특히 춘추시대의 패권국인 초(楚)와 진( 晉)나라의 힘이 약해진 틈을 타 남방의 오랑캐 국가인 오(吳)와 월(越)나라가 서로 싸우는 이야기로 특히 오나라 왕 부차(夫差)는 능력에 걸맞지 않게 초나라를 무너뜨리고 중원의 패권귝이 되려고 합니다. 하지만 강국 초나라는 수도가 함락되는 수모를 겪고도 다시 부활하고 오나라는 월나라 왕 구천 (句踐)에 의해 멸망당합니다.

춘추의 질서는 말기가 되자 무너지기 시작해 전쟁의 규칙, 즉 초상을 당한 나라를 공격하지 않는다거나, 칼받이로 포로를 전쟁터로 보내지 않는 것과. 같은 최소한의 교전 규칙이 사라지게 됩니다.

전쟁은 승자와 패자만 있을 뿐이고 이기기 위해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며 오로지 힘이 있는 국가만이 살아남는 살벌한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원칙이 서서히 자리잡습니다.

특히 남방의 오랑캐를 자처한 월( 越)나라의 재상 범려(范蠡)는 월나라는 중원(中原)의 의리가 지킬 이유가 없는 금수(禽獸)와 같은 이들이라고 자평하기도 했습니다.

이미 언급한 월나라의 왕, 구천과 오나라의 왕 부차이외에도 오나라가 패권국 초나라에 도전할 수 있는 기틀을 만든 책사 오자서(伍子胥)가 이 책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이 이야기는 초평왕( 楚平王)에게 아버지와 형을 잃은 초나라 사람 오자서(伍子胥)가 원한을 품고 오나라에서 복수를 준비하고 끝내 복수하는 복수극이야기이며, 오나라의 왕 합려(闔閭)의 아들 부차(夫差)에게 굴욕을 당했던 월나라 왕 구천(句踐)이 오나라를 멸망시키며 복수를 하는 또 한편의 복수극을 품고 있습니다.

처절한 복수를 위해 인간이 얼마나 굴욕적인 상황을 감내할 수 있는지 그리고 마침내 한 인간에 대한 원한을 어떻게 복수로 보여주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춘추시대의 질서가 무너져가는 살벌한 전쟁을 배경으로 복수극을 극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책은 마치 무협지를 보듯 술술 잘 읽힙니다.

중국 고대의 전쟁사를 좌전, 국어, 사기 등 사서들에서 나온 이야기를 근거로 다시 재구성한 작가의 능력에 감사를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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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공부하신 방통대 일본학과 강상규 교수의 조선정치사 연구서입니다.

종장을 포함해 총 7장 598쪽의 벽돌책입니다.

조선건국부터 고종 재위당시 갑신정변 (甲申政變,1884)까지의 시기를 다루는 이 책은 전에 읽었던 ‘고종의 미관파천 시도와 한미관계( 경인문화사,2021)’의 참고도서 중 한권이었습니다.

특정한 시기, 즉 19세기 고종 재위시기를 좁게 다루지 않고 조선 건국기와 조선 중. 후기를 다룬 이유는 조선정치의
특성을 파악하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때문에 덧붙여진 것입니다.

유교적 예(禮)를 중시하고 다분히 윤리적 기반위에서 정치를 바라보는 조선의 전통적 성리학 기반의 정치는 왕권이 신권에 의해 제약당하는 정치였으며 당시 식자인 유생(儒生)들이 공론정치(公論政治)라는 제도하에서 국왕의 결정사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해 국왕의 통치가 쉽지 않았습니다.

윤리적 유가철학(儒家哲學)만을 공부한 선비와 학자관료들은 유연하기보다 완고하며 세상사에 무관심하였고, 국방과 기술에 대해 무지했습니다. 매우 독선적인데다가 편협하기까지 해서 서세동점(西勢東漸)의 격변의 19세기에 잘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유가를 배운 자신들만이 문명인이고 통상을 요구하러 조선과 접촉온 서양인들은 양이(攘夷)라고 배척하고 세상에 문을 걸어 잠갔습니다.

서양인들은 조선인을 야민인으로 생각하고 교화의 대상으로 삼았고, 조선의 양반과 지배층들은 유교를 배우지 못한 서양인들을 야만인으로 규정해 금수(禽獸 )와 같다고 했습니다.

중국 중원이 만주에 살던 여진족(女眞族)으로 통치권력이 넘어간 이후 조선만이 중화문화(中華 文化 )의 정수를 간직하고 있다고 믿는 조선중화(朝鮮中華)주의가 뿌리깊게 박혀 있어 성리학적 유교 이외의 사상에 대해 포용력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조선 중기이후 정권을 잡아온 노론 벽파(老論僻派) 선비들이 특히 완고했습니다. 고종이 즉위한 이후 수렴첨정을 하던 조대비(趙大妃)가 흥선대원군( 興宣大院君) 과 손을 잡고 당시 서학교도들을 학살한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가 유교국가의 완고함을 보여준 한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병인박해로 프랑스인 신부가 순교하고 천주교도들이 죽자 앙스는 이에 대한 복수를 위해 병인양요(丙寅洋擾)를
일으키고 대원군은 프랑스군을 격퇴합니다. 이일을 계기로 조선의 쇄국정책은 더욱 강고해집니다.

격변기인 19세기 중엽 조선의 통치자였던 흥선대원군과 고종의 통치를 전부 다룬다는 건 물리적으로불가능하고 다만 병인박해의 사례처럼 조선의 근본주의성리학이 너무 유연하지 못하고 뜬구름잡는 주장을 반복해 격변의 시기 변화의 바을 타지 못하게 한 것이 원인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같은 시기 일본이 재빨리 서양의 기술과 제도를 받아들인 건 일본이라는 무사위주의 분권적 사회에 상대적으로 성리학의 영향력이 조선보다 덜한 면도 있었고, 막말부터 일본의 살길은 서양열강보다 먼저 아시아 대륙을 침략해 경제적 이익을 도모해야 한다는 정한론(征韓論)의 영향때문이라고 보입니다.

그리고 주목할 것은 근대사에서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두번의 양요(洋擾), 즉 프랑스와 싸운 병인양요(丙寅洋擾,1866)와 미국과 싸운 신미양요(辛未洋擾,1871) 그리고 청국의 개입을 불러와 최초로 외세개입을 촉발하는 임오군란(壬午軍亂,1882)이 생각보다 매우 중요한 사건인데도 전문적으로 이를 다룬 글이나 책을 본적이 없습니다. 물론 논문을 읽어보지 않아 제가 모를 수도 있지만 말입니다.

대원군의 사실상 (de facto)의 섭정(攝政)이 끝나고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고 개화를 하고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려는 1860-1880년대의 이 시기는 일본이 조선과 중국 대륙을 탐하고 있었으나 아직 구체적으로 정책을 세워 실행하기 전이었고, 서양의 문호개방에 대해 대처를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 조선의 운명이 갈릴 수 있었던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조선후기인 18세기 경부터 청나라를 왕래하며 서양의 여러 문물을 접해왔을텐데 19세기 후반까지 양반과 학자관료들이 고집스럽게 근본주의 성리학에만 매달리고 경제활성화를 위한 정책이나 국방력 강화정책을 쓰지 않은 것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사회가 폐쇄적이어도 외교관들이 청국으로 사행을 다녀오면 지식층에라도 장기적으로 영향을 미쳤을탠데 갑신정변이후까지도 유생들이 경전만을 인용하며 왕의 부국강병책에 반대 상소를 올리는 광경은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장면입니다. 이렇게 현실을 모른 체 허황된 주장만을 내세워 유교가 아닌 모든 것들을 야만으로 간주하는 무모함이 현실적인 부국강병책 실행을 불가능하게 하고 결국 외세를 끌어들이게 되는 선택을 하게 만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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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금융위기(The Great Recession) 여파로 수많은 미국인들이 중산층으로 살지 못하고 하위로 내려갔다는 사실은 많은 책에서 극히 일부 건조하게 사실을 나열했을 뿐 각 개개인이 이후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준 글이 없었습니다.

이 책의 미덕은 극단적으로 양극화된 미국 사회에서 하루아침에 부동산 가격 폭락과 경기침체로 집과 직업을 잃은 수많은 미국인들이 어떻게 자동차에서 생활하며 아마존의 창고일과 무료 캠핑장을 찿아다니며 살게 되었는지, 저자가 무려 3년을 추적하고 이들과 교감하며 쓴 글입니다.

자신들의 개인적인 아픔을 저자에게 털어놓아 책이 완성된 사실도 놀랍지만 이들이 나름 어떻게해서든 삶을 지탱해가려는 노력은 매우 눈물겹습니다.

대부분 60-80대 노인들로 복지제도가 허약한 미국 자본주의체제 하에 무방비로 해고된데다가 2008년 금융위기로 집까지 잃게 되자 이들은 어쩔수 없이 RV또는 트레일러같은 차량에서 생활하게 됩니다.

사회적으로 홈리스(homeless)라고 불리워지는 걸 두려워하면서 ‘벤에 사는 사람들 (vandwellers)로 불리길 자청하고 온라인상 스스로를 돕는 커뮤니티를 개설하고 십시일반으로 서로 돕습니다.

미국의 파워엘리트들이나 기득권층이 세상에 보이기 싫어하는 미국의 치부를 드러내는 책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실체를 사회학적으로 접근하기 좋은 보기 드문 저널리스트의 심층취재기이지만 또한 매우 미국적인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책에서 보듯, 사회보장지원금( social security)이 부족해 노인들이 어려운 삶을 살수 밖에 없는 현실은 미국의 경제체제를 남김없이 복사해 적용해온 한국사회에도 이런 유사한 일이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합니다.

정치권에서 복지를 무슨 ‘시혜’처럼 생각하고 복지제도가 커지면 일을 안한다는 둥 헛소리는 좀 그만 했으면 합니다.

국가의 역할이 국가의 구성원 모두의 안전과 행복을 위한 것이지 구성원의 한 부분인 기업의 이윤만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국가가 거대은행의 탐욕으로 만들어진 금융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세금을 쓰면서 잘못을 저지른 거대은행은 살려준 반면 (bail out), 은행의 영업으로 모기지를 설정하고 집을 샀던 일반 중산층들이 집을 잃고 거리로 내몰리게 된게 2008년 금융위기의 결과입니다.

여파는 아직도 계속됩니다. 30여년간 지속된 저금리 정책으로 금융정책(monetary policy)을 쓰지 못하게 되자 미국 금융당국은 돈을 푸는 양적완화정책(Quantitative Easing;QE)을 시행합니다. 이렇게 풀린 돈이 인플레이션울 유발하면서 동시에 경기를 자극합니다. 미 금융당국은 미국이 경기침체에서 벗어난 것 같은 신호를 받으면서 시중에 풀린 돈을 거두어들이면서 금리 인상을 시작합니다.

현재 전세계적으로 일어나는 금리인상은 어느날 갑자기 생긴게 아닙니다. 일차적 원인은 2008년 금융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양적완화이고, 역사적으로는 신자유주의를 관철하기 위해 각종 규제를 철폐하면서 지속적으로 유지된 ‘비정상적인’저금리’때문입니다.
QE와 금융정책이 어떻게 무용지물이 되었는지는 별도의 논의가 필요한 분야입니다. 중앙은행이 과연 유효한 정책을 펼수 있는 정책기관인지 여부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별도로 다룰 예정입니다. 금리는 화폐의 가치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국가의 국력과 경제력을 나타내기도 하고 국제정치의 역학관계와도 밀접해 여기서는 간략하게만 짚을 수 밖에 없습니다.

아무튼 이책은 이전에 소개한 경제학자 조셉 스티그리츠 박사의 ‘불평의 대가(열린책들,2013)’의 현장보고서 같은 책입니다.

같이 읽으면 좋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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