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공부하신 방통대 일본학과 강상규 교수의 조선정치사 연구서입니다.

종장을 포함해 총 7장 598쪽의 벽돌책입니다.

조선건국부터 고종 재위당시 갑신정변 (甲申政變,1884)까지의 시기를 다루는 이 책은 전에 읽었던 ‘고종의 미관파천 시도와 한미관계( 경인문화사,2021)’의 참고도서 중 한권이었습니다.

특정한 시기, 즉 19세기 고종 재위시기를 좁게 다루지 않고 조선 건국기와 조선 중. 후기를 다룬 이유는 조선정치의
특성을 파악하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때문에 덧붙여진 것입니다.

유교적 예(禮)를 중시하고 다분히 윤리적 기반위에서 정치를 바라보는 조선의 전통적 성리학 기반의 정치는 왕권이 신권에 의해 제약당하는 정치였으며 당시 식자인 유생(儒生)들이 공론정치(公論政治)라는 제도하에서 국왕의 결정사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해 국왕의 통치가 쉽지 않았습니다.

윤리적 유가철학(儒家哲學)만을 공부한 선비와 학자관료들은 유연하기보다 완고하며 세상사에 무관심하였고, 국방과 기술에 대해 무지했습니다. 매우 독선적인데다가 편협하기까지 해서 서세동점(西勢東漸)의 격변의 19세기에 잘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유가를 배운 자신들만이 문명인이고 통상을 요구하러 조선과 접촉온 서양인들은 양이(攘夷)라고 배척하고 세상에 문을 걸어 잠갔습니다.

서양인들은 조선인을 야민인으로 생각하고 교화의 대상으로 삼았고, 조선의 양반과 지배층들은 유교를 배우지 못한 서양인들을 야만인으로 규정해 금수(禽獸 )와 같다고 했습니다.

중국 중원이 만주에 살던 여진족(女眞族)으로 통치권력이 넘어간 이후 조선만이 중화문화(中華 文化 )의 정수를 간직하고 있다고 믿는 조선중화(朝鮮中華)주의가 뿌리깊게 박혀 있어 성리학적 유교 이외의 사상에 대해 포용력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조선 중기이후 정권을 잡아온 노론 벽파(老論僻派) 선비들이 특히 완고했습니다. 고종이 즉위한 이후 수렴첨정을 하던 조대비(趙大妃)가 흥선대원군( 興宣大院君) 과 손을 잡고 당시 서학교도들을 학살한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가 유교국가의 완고함을 보여준 한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병인박해로 프랑스인 신부가 순교하고 천주교도들이 죽자 앙스는 이에 대한 복수를 위해 병인양요(丙寅洋擾)를
일으키고 대원군은 프랑스군을 격퇴합니다. 이일을 계기로 조선의 쇄국정책은 더욱 강고해집니다.

격변기인 19세기 중엽 조선의 통치자였던 흥선대원군과 고종의 통치를 전부 다룬다는 건 물리적으로불가능하고 다만 병인박해의 사례처럼 조선의 근본주의성리학이 너무 유연하지 못하고 뜬구름잡는 주장을 반복해 격변의 시기 변화의 바을 타지 못하게 한 것이 원인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같은 시기 일본이 재빨리 서양의 기술과 제도를 받아들인 건 일본이라는 무사위주의 분권적 사회에 상대적으로 성리학의 영향력이 조선보다 덜한 면도 있었고, 막말부터 일본의 살길은 서양열강보다 먼저 아시아 대륙을 침략해 경제적 이익을 도모해야 한다는 정한론(征韓論)의 영향때문이라고 보입니다.

그리고 주목할 것은 근대사에서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두번의 양요(洋擾), 즉 프랑스와 싸운 병인양요(丙寅洋擾,1866)와 미국과 싸운 신미양요(辛未洋擾,1871) 그리고 청국의 개입을 불러와 최초로 외세개입을 촉발하는 임오군란(壬午軍亂,1882)이 생각보다 매우 중요한 사건인데도 전문적으로 이를 다룬 글이나 책을 본적이 없습니다. 물론 논문을 읽어보지 않아 제가 모를 수도 있지만 말입니다.

대원군의 사실상 (de facto)의 섭정(攝政)이 끝나고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고 개화를 하고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려는 1860-1880년대의 이 시기는 일본이 조선과 중국 대륙을 탐하고 있었으나 아직 구체적으로 정책을 세워 실행하기 전이었고, 서양의 문호개방에 대해 대처를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 조선의 운명이 갈릴 수 있었던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조선후기인 18세기 경부터 청나라를 왕래하며 서양의 여러 문물을 접해왔을텐데 19세기 후반까지 양반과 학자관료들이 고집스럽게 근본주의 성리학에만 매달리고 경제활성화를 위한 정책이나 국방력 강화정책을 쓰지 않은 것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사회가 폐쇄적이어도 외교관들이 청국으로 사행을 다녀오면 지식층에라도 장기적으로 영향을 미쳤을탠데 갑신정변이후까지도 유생들이 경전만을 인용하며 왕의 부국강병책에 반대 상소를 올리는 광경은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장면입니다. 이렇게 현실을 모른 체 허황된 주장만을 내세워 유교가 아닌 모든 것들을 야만으로 간주하는 무모함이 현실적인 부국강병책 실행을 불가능하게 하고 결국 외세를 끌어들이게 되는 선택을 하게 만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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