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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계 미국인으로 러시아사를 공부한 저자가 일본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하게되는 과정을 미국과 소련의 패권다툼과정으로 설명한 책입니다.

제2차세계대전, 특히 아시아 태평양 전쟁( Asia Pacific War)의 종전과정을 연구한 국제정치사입니다.

본문이 보론포함 총 628쪽에 달하는 책으로 일본출신 러시아사 연구자답게 미국 일본 러시아의 일차사료를 인용해 논지를 전개합니다.

논지는 간단명료합니다.

일본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한 이유는 통상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두발의 원자폭탄 때문이라는 것이 이제까지의 설명이었습니다. 연합국은 1945년 7월 열린 포츠담 회담( Potsdam Conference)에서 일본에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고, 원폭을 맞은 일본이 결국 무조건 항복하게 되었다는 설명이죠.

하지만 저자는 연합국이 포츠덤에서 요구한 무조건 항복을 천황의 통치권을 의미하는 국체(國體)를 수호해야 한다는 믿음으로 거부하고 조건부 항복을 요구했고 원폭을 맞은 이후에도 종전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소련의 극동전선 참전 ( 만주와 랴오뚱 반도 침공, 사할린과 쿠릴열도 침공 및 홋카이도 침공계획)이 일본이 무조건 항복에 계기( momentum)를 제공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입니다.

제국주의 일본의 무조건 항복( unconditional surrender)는 조선의 식민지해방과 관련이 있기때문에 한국현대사에서도 끊임없이 논의되고 재해석되는 주제이기도 하지만 논의 자체를 한반도에 좁혀서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조선의 독립은 분명 제2차세계대전 종전과 관련되어 발생했고 국제정치와 외교 전반에 걸친 맥락( context)를 이해하지 못하면 편협해지거나 반쪽짜리 이해가 될 수 있습니다.

일본의 항복에 앞서 유럽전선에서 나찌 독일이 먼저 항복을 했고, 미국 영국 중국 소련 등 열강은 이미 패전한 독일을 분할점령하고 통치하려 했다는 선례가 있었다는 걸 간과하면 안됩니다.

거기에다 소련은 결국 나찌 독일을 패전으로 이끈 독소전쟁를 이끌었고 그 유럽전장에서 싸웠던 적군 ( Red Army) 지휘관들이 만주와 일본을 공격했다는 사실도 중요합니다.

스탈린은 얄타에서 연합국이 약속한 다렌항의 실질적 점유를 위해 그리고 러일전쟁에서 일본에 뺐겼던 사할린을 되첯기 위해 1945년 8월 아시아전선에 참전합니다.

위의 세가지 선행조건( pre condition)때문에 소련은 미국과 일본을 분할점령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고, 사할린과 쿠릴열도 점령 후 홋카이도에 진격하려 했습니다. 연합국이 유럽전선에서 독일을 분할점령한 선례가 있는데다가 독소전쟁에서 가장 큰 인명피해를 본 소련이어서 소련이 생각한 일본의 분할점령은 그 연장선에서 일관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소련군의 만주진격이 부담스러웠고 중국공산당과 협력하게 될까 두려웠기 때문에 소련의 일본 분할점령구상을 거부하게됩니다.

조선의 해방이후 소련군이 현재 북한지역인 청진 등으로 미군보다 먼저 진주하게 되는 이유도 소련군의 만주침공이라는 관점에서 보아야 할 사항입니다. 미국과 38도선을 경계로 선을 분할점령하기로 합의한 후 소련은 관동군의 퇴로를 막기 위해서라도 북조선 점령이 불가피했던 겁니다.

그리고 미국은 소련이 조선의 남쪽으로 진격하지 않을까 매우 불안했습니다.

미국의 트루먼과 소련의 스탈린은 아시아전선에서의 종전을 둘러싸고 서로 각축을 벌였고, 미국은 독일에서와 달리 일본을 미국 홀로 단독점령하기를 바랬고 실제로 그대로 되었습니다. 일본이 미소 양국간 분할점령될 수 있었는데도 조선이 분할점령된 이유는 결국 미국 정책당국의 의지 때문인 것이었습니다.

독일의 분할점령과정은 다시 살펴봐야하겠지만 미국이 소련과 여러면에서 갈등을 빚지 않았나 추정합니다. 그리고 독소전쟁이후 소련이 동유럽 국가들을 영향권에 넣어 위성국가로 만든 것도 영향이 있었을 겁니다.

미국은 일본을 점령하면서 전쟁책임이 있는 히로히토 천황의 지위를 유지시키고 그를 폐위시키지 않았습니다. 일본 본토탈환작전을 세우면서 일본군이 오키나와와 이오지마에서 죽기를 각오하고 달려드는 경험을 해서 천황의 폐위를 너무 큰 위험이라고 생각해서입니다. 천황을 전범으로 처벌해야한다는 미국의 여론이 비등했는데도 내려진 결정이었습니다.

1945년의 역사를 복기하는 건 불편하지만 2024년 현재의 한국과 북한의 기원이기때문에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국일본의 내각과 관료제가 얼마나 더 유유부단하고 종전을 미루었던 경과를 보면서 이미 일본이라는 나라의 비효율성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원폭을 맞고도 천황의 통치권을 부르짖고, 법률의 합법성을 따지는 전근대적 충성과 조직의 경직성을 보여주었습니다. 합리적으로 보여도 국민의 목숨을 하찮게 여긴다는 점에서 매우 야만적입니다.

옥쇄(玉碎)를 각오하고 무모하게 전쟁을 계속하려던 군국주의 일본 육군을 내각은 전혀 통제하지 못했고 관료제의 기제하에 결정을 미루던 내각은 결국 히로히토 천황에게 종전의 결단을 요청합니다.

무모함과 비효율은 현재 일본 조직을 대표하는 특징이라고 보고 있고 이 책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국체론으로 설명되는 일본의 천황제에 대해 언급하려 합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일본의 패전 이전의 천황제는 신정일치 정치제도로 전혀 근대적인 제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매우 원시적이고 고루합니다( archaic). 1945년 9월 패전 이전까지일본인들은 천황을 현인신(現人神), 즉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 신으로 여겼습니다. 일본의 전후는 신이었던 천황이 인간이 된 시기이기도 합니다. 서구의 어느국가도 전근대시기 왕이 신의 은총을 받고 신권을 행사한다고 생각했지 왕을 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낡은 개념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메이지 시대 이런 국가의 체계를 만든게 조선초대통감이자 일본 초대총리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입니다. 애초 근대적 민주주의와 관계가 없는 절대왕권주의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봉건적인 제후국들의 느슨한 연합체였던 에도막부가 명실상부한 신정일치 철대왕조국가가 되도록 개조한 정치인일 뿐입니다.

따라서 패전이전의 천황제 즉 메이지헌법하의 천황제로 회귀를 주장하는 전범의 후손 출신 일본의 국우정치가들의 국가 인식방식도 지극히 전근대적이고 고루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서구적 민주주의 관점에서 봤을 때 일본의 신정잂치정치체제눈 중동의 강국 이란의 신정일치정치체제와 매우 유사합니다. 따라서 일본의 정치체제가 근대적이고 서구적이라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일본 의회에 아직도 메이지유신 당시의 정치 지도자의 자제들이 대를 이어 정치를 거의 세습적으로 하고 있고 상당수 전범의 후손들이 정치를 대대로 하고 있는 걸 보면 껍데기만 민주주의일뿐 사회 자체가 전근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은 2006년 미국에서 영어판으로 발표되고 이후 일본에서 일어판으로 새로 쓰여졌습니다.

Hasegawa Tsuyoshi, Racing the Enemy (Harvard University Press,2006)

또 한가지, 이책은 2023년 출간된 이화여대 정병준 교수님의 신간 <1945년 해방직후사>의 참고문헌 중 하나입니다. 이 책의 국제정치적 배경이라고 보아도 무방한 책입니다.

정병준, 1945년 해방직후사 ( 돌배게,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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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에서 한국현대사를 연구하시는 정병준 교수님의 최신작입니다.

2023년 12월 출간된 책이고 이책에 대해서는 역사학자 심용환 선생님의 방송을 통해 알게되었습니다.

본문 425쪽으로 전체 4장으로 이루어진 책으로 언론에는 ‘아무도 아닌 자‘인 미국인들이 미군정 치하에서 어떻게 한국의 정치과정에 개입했는지를 최초 발굴했다고 소개되었고, 실제 1945년 9월 미군의 남한 진주이후 통역과 문고리권력의 등장에 대해 이 책 2장이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이책의 내용 중 1장의 미군 진주 전 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총독부의 공작에 대한 내용은 전에 소개해드린 다른 책에서도 상당부분 내용이 겹칩니다. 즉 일제가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을 한 이후 권력의 진공 상태에서 유일하게 정권인수를 준비하던 리더가 여운형이었습니다. 조선총독부는 패망이후 조선인들이 일본인들을 습격할까봐 두려워 치안대책을 여운형과 논의하려 했습니다. 이 당시 친일세력이던 한민당과 우파는 패전이후 친일행적에 대한 처단이 두려워 사실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해방 후 첫 26일동안의 행적을 그린 르포로 한겨레 길윤형 기자가 아래의 책을 출간했습니다.

길윤형 지음, 26일 동안의 광복 (서해문집,2020)

이 책은 8월 15일 해방이후 미군이 진주하기 직전 상황에 대한 이야기이고 사실상 한국이 일제 패망이후 실질적인 해방을 만끽했던 짧은 26일간의 이야기입니다.

1945년 9월 미군정이 시작되고 야전군인 출신으로 행정과 정치경력이 전무한 하지 중장 (General Hodge)가 미군정을 위해 남한 땅에 들어옵니다.

이미 카이로회담, 테헤란 회담 그리고 포츠담 회담에서 미국은 연합군( 미 영 중 소)측과 패전국에 대한 전후처리를 합의한 바 있고, 그 원칙은 어느 특정세력에게 권력을 넘기지 않는다는 것이었고, 한국의 경우 신탁통치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남한에 진주한 미24군단장 하지는 미국 국무부 전쟁부 및 도쿄에 주재하는 맥아더 장군의 명령에 따라야 함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으로 한국의 전후 정치와 정부에 대한 결정을 내립니다.

미국이 독일과 일본의 전후처리에 골몰해 한국에 대한 훈령을 내리지 않고 방치하면서 이런 월권행위를 일으킨 겁니다.

통념과 달리 미군정의 하지장군은 미국의 전후처리 방침인 한국의 신탁통치에 대한 반대를 표명하고 자신의 독자적인 판단으로 과거 친일전력이 있는 한민당 세력과 김구의 중경임시정부 세력을 간판으로 활용하여 과도정부를 세우려고 했습니다. 현재 국우진영에서 ‘국부’로 추앙받는 이승만은 귀국조차 하지 않던 시점이었습니다.

통념과는 다르게 1945년 후반기까지 이승만은 조선에서도 미국에서도 모두 잊힌 인물이었고, 미국조야와 사이도 좋지 않았습니다. 이승만을 과도정부 수반으로 세우려고 했던 건 하지장군의 독단적 결정에 불과한 것이죠.

미군정은 조선총독부로부터 사실상 행정권을 회수하여 서울과 지방에서 행정권을 행사하고 있던 건준과 인민위원회를 ‘공산주의’로 몰아 사실상 배제한체 일제시대 친일을 했던 한민당 세력과 구한말부터 한국에서 교육사업을 했던 개신교 선교사 세력을 우대하고 이들을 중심으로 보수주의적 과도정부를 독자적으로 수립하고자 한 겁니다.

일제시대 미국에 유학할 정도면 조선총독부와 관계가 원만했을 것이고 또한 집안의 재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미군정 초기 고위직을 차지했던 대부분 인사들은 미션스쿨( 연희전문, 숭실전문)출신에 미국 유학파로 영어에 능통한 이들이었습니다. 하지장군의 전담통역이던 이묘묵(李卯默)은 연희전문 출신 미국 유학파로 일제말기 유명한 친일파였습니다.

하지만 미국 일리노이 출신 야전군인인 하지는 그의
이력따위는 관심없었고 덕분에 이묘묵은 통역이자 문고리 권력으로 일제시대 이후에도 권력을 누렸습니다.

이묘묵을 포함한 초기 미군정 고위직들은 대체로 미션스쿨출신의 미국 유학파였고 지역적으로는 기독교의 영향력이 강했던 서북지역( 평안도) 출신으로 이들은 반공주의로 무장되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책을 보면서 인지하게 된 사실은 현재 기득권의 일부가 된 보수 기독교 세력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다는 점입니다. 반공주의의 산실이 된 영락교회도 신의주 출신 한경직 목사가 미군정의 후원으로 세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1945년 이후 서북출신 보수 기독교의 원류를 찿아보는 건 정치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일로 보입니다.

이 책에 소개된 ‘아무것도 아닌 자’로 영향력을 행사한 윌리엄스가 일제하 조선에 거주했던 기독교 선교사 출신 자손이라면 하지장군의 정치고문이던 버치는 미군 하급장교이지만 해방정국 막후에서 활약한 인물입니다.

버치가 남긴 문서에 대해서 이 책은 말미에 약간 언급하고 있지만 버치문서에 대해서도 별도의 책이 출판되어 있습니다.

박태균 지음, 버치문서와 해방정국 (역사비평사,2021)

영관급도 아닌 일개 위관급 미군장교가 해방이후 남한정국에 영향력을 미치는 상황을 보면 기가 막힐 따름입니다.

끝으로 이 책의 단점을 하나 말하려고 합니다.

역사서가 대체로 사료에 대한 해석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다보니 시기가 겹치는 경우 동일한 설명이 반복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좀 더 간명하게 설명되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또 하나 느낀 건 미군정 시기가 전문 연구자 이외에 별로 알려지지 않은 체 보수세력들의 설명이 마치 진실인 것처럼 대중에 유포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입장에 따라 다양한 견해가 나올 수 있고 이 책에서 언급했다시피 아직도 미군정에 대해서는 미스터리한 부분이 남은 불완전한 시기라는 점입니다. 친일세력이 일부러 당대의 역사를 왜곡시켰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 시기는 좀 더 면밀한 검증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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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역사전문 언론인인 와타나베 노부유키가 저술한 책을 역사학자이신 이규수교수께서 번역하신 책입니다.

청일전쟁사를 일본 육군참모본부에서 공식적인 정사 (正史)로서 1904년 <일청전사>라는 이름으로 간행되는데, 이 책은 이 정사 역사서를 쓰기위한 초고(草稿) 에 해당되는 <일청전사 결정초안>을 발굴해 대조함으로서 청일전쟁 이후 매이지 정부와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県有朋)로 대표되는 일본 육군의 군벌세력들이 청일전쟁의 역사적 사실을 어떤 방침을 가지고 취사선택해 국민에게 보이려고 했는지를 밝힙니다.

그리고 최초로 공식편찬된 이 청일전쟁의 정사가 이후 일어난 러일전쟁의 공식역사서인 <일러전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그리고 더 나아가 일본이 제2차세계대전에서 패전을 하는데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핍니다.

한마디로 일본은 최초 청일전쟁사를 편찬하면서 자신들에게 불리하거나 일본군이 어려움에 처했던 역사적 사실은 모두 정사에서 뺐습니다. 여기엔 일본군이 청나라 군대에 행한 무모한 작전과 인명을 경시한 사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청전사 결정초안>에서 보여준 청일전쟁 당시 평양성 전투는 사실 두 군대간의 싸움이 백중세였고, 청국 군대가 평양성을 버리고 나오다가 죽게된 건 당시 도입된 만국공법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에도 공식 <일청전사>애는 일본이 압도적으로 청나라를 이겼다고 서술된 것이 한 예입니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서 미래에 같은 일이 재발되지 않으려면 역사적 사실을 모두 제대로 기록하고 평가를 해야할텐데 매이지 육군 군벌둘은 자신들의 군대가 저지른 실수와 만행은 모두 삭제하고 전과(戰果)를 부풀린 겁니다.

1894년 일본이 조선땅에 들어와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하고 국왕을 위협한 사건은 일본군이 치밀하게 작전을 세운후 실행한 ‘군사작전’으로 학자들 사이에서는 발생한 날을 따서‘7월 23일 전쟁’으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 있을만한 사건인데도 공식 <일청전사>에는 내용이 누락되었습니다.

일본의 나카츠카 아키라 (中塚明)교수가 1997년 <역사의 위조를 묻다-전사에서 지워진 일본군의 ‘조선왕궁점령’>이라는 책을 펴냈고, 한국에는 2002년 원광대 박맹수 교수 번역으로 출판되었습니다.

나카츠카 아키라 지음, 박맹수 옮김, 1894년 경복궁을 점령하라! ( 푸른역사,2002)

작은 책인데 아직도 발행이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러일전쟁과 관련해서는 시바 료타료의 <언덕위의 구름坂の上の雲)>과 일본에서 군신으로 추앙받는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가 뤼순공방전애서 승리한 이면에 어떤 진실이 있는지 파헤칩니다. 러일전쟁에서 가장 많은 일본군 전사자가 나온 이 전투를 지휘한 사령관이 군신 노기 마레스케가 아니라 당시 만주군 총참모장 고다마 겐타로(児玉源太郎)일수도 있다는 정황을 설명합니다 (pp168-182).

총평으로 이책을 보면서 편견일수 있겠지만 좀 발칙한 개인적 의견을 말해보고 싶습니다.

청일전쟁사를 일본 육군에서 편찬하려고 준비한게 청일전쟁 직후이고 최초 공식역사서가 나온게 1904년이니 이미 120여년전 일입니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조상뻘인 조슈(長州)의 육군군벌 야마가타 아리토모 (山県有朋)와 그 추종자들은 애초부터 역사를 사실(史實)대로 기록할 의지가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위대한 대일본제국은 전쟁에서 이겨야 하며 어떠한 실수나 반문명적인 행동, 집단학살이나 강간 등 전쟁범죄 그리고 전술과 전략의 부재, 그리고 병참문제로 전쟁에서 어려움을 겪는 모든 일본군의 약점은 일본의 국민들이 알아서는 안되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항상 이기는 줄 알았던 일본은 제2차세계대전에서 미국에 대항해서 싸우다 그 결과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을 맞고 패배했습니다.

20세기초부터 1945년까지 일본은 ‘집단최면’ 상태였고 그 원인은 물론 일본이 처음 행한 국제전인 청일전쟁과 그 이후러일전쟁 등 초기 전쟁에 대해 공과를 왜곡하고 역사를 위조하도록 지시한 일본의 육군군벌에게 있는 것이죠.

과문하지만 이들의 영향력이 아직도 일본의 군국주의와 맥이 닿아있는 일본의 극우 정치인과 역사수정주의자들에까지 마치고 있다고 추정합니다.

일본의 국민소설이라고 불린 <언덕위의 구름(坂の上の雲 )>이 3대에 걸쳐 읽힌 문제작이고 이책을 통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안 일본인들도 많다하니 그 내용을 봐야할 것 같습니다. 더구나 2009-2011년 일본 NHK에서 드라마로 만들어 방영한 작품입니다.

특히 시바 료타로의 우익적 역사관은 ‘일본과 중국은 근대화에 실패한 나라이고 일본은 성공한 나라‘라는 것으로 이 글을 쓰는 저를 비롯한 한국인들에게 특히 문제적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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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광대에서 연구하시는 이병한 교수께서 2019년 출판하신 동아시아의 냉전사 연구서입니다.

냉전사(The Cold War History)라는 분야 자체가 현대사 중 1945년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를 다루는 매우 특수한 분야이다보니, 그리고 그중 사회주의/ 공산주의권에 대한 분야이므로 상당히 전문적인 분야인 것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저자의 연세대 박사학위 논문을 출판한 것이라고 알려주셨습니다.

사회주의/ 공산주의권에 대한 20세기의 역사는 그 이념에 대한 평가와 별개로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에 일어난 역사적 사실로서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의 중요한 한축으로 잊혀져야 할 이유도 정당성도 전혀 없습니다. 이들 중 일부가 북한의 독재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애초의 이들의 순수한 동기를 알지 말아야 할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100년이 넘게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역사적 사실 그 자체로 바라보는게 처음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냉전을 흔히 보듯 미소 두 블럭간의 대결로 보는 서구적 시각 혹은 유럽적 시각(Eurocentric perspective)이 아니라 동아시아(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를 포괄하는) 지역의 시각으로 냉전을 바라보려 했습니다.

유럽과 다른 동아시아의 냉전의 역사를 추적해보려고 했고, 미국과 동맹국인 일본이나 한국 등 자유주의 진영에서 본 냉전이 아니라 중화인민공화국, 북조선, 그리고 북베트남 등 소위 공산주의 국가들이 바라본 냉전을 다뤘습니다.

공산주의에 대한 혐오와 컴플렉스( Red complex)로 터부시했고 그래서 분명히 동아시아에서 일어나고 기록된 역사였으나 애써 무시하고자 한 역사의 한 부분을 복원한 점에 이 책에 의의가 있습니다.

이 책의 결론 부분에서 잠시 언급하기도 한 중국의 부상(浮上)은 집필당시인 2014-2018년에 그 전조가 나타나기는 했으나 지난 2022-2023년 현재처럼 첨예해지기 전의 상황입니다. 그리고 코로나 팬데믹의 영향도 물론 이 책이
나온 후의 상황이라 다루어지지 않았다는 건 유의해서 볼 사항입니다.

근래에 접한 정치권의 논쟁 중 상식적인 면을 물고 늘어진 한가지 사례를 소개합니다.

문재인 전 대통령께서 책을 소개하시면서 한국전쟁의 성격이 ‘국제전(International War)’ 이었다고 언급한 부분에서 여당 정치인들이 북한의 남침 사실을 무시했다느니, 한국전쟁이 내전이었다고 날선 비판을 했습니다. 물론 그들은 언제나처럼 비판의 근거는 대지 못했습니다. 논쟁하는 법을 모르는 분들이라 그러려니 합니다.

하지만 한국전쟁은 서구의 냉전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미소대결을 본격화한 최초의 사례라고 나오고 냉전이 열전 (the Hot War)로 번진 사례로 언급됩니다. 한국전쟁의 국제전성격은 또한 휴전협정 당사국을 보면 됩니다.

나무위키에 따르면 휴전협정은 북한의 김일성, 중국인민지원군의 팽덕회, 국제연합군의 미군 대장 마크 클라크 (Mark W Clark) 이 사인했고, 조선인민군 대장 남일, 국제연합군 수석대표 미군 대장 윌리엄 해리슨의 이름이 올라 있습니다.

국제전이 아니면 국제연합군이나 중국인민지원군 대장이 후정협정에 사인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북한의 김일성과 조선인민군 사령관의 이름은 협정서이 올라있으나 당사자라던 이승만 대통령이나 백선엽 장군 이름은 없습니다.

이 해프닝은 한국전쟁의 휴전에 대한 역사적 사실조차 모르거나 아니면 왜곡해도 된다는 불순한 동기가 있다고 밖에 할 수 없습니다.

최근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에 대한 중국쪽의 인식을 일별할 수 있는 연구서가 한권 나왔습니다. 한국전쟁, 즉 중국에서는 항미원조(抗米援朝)라고 불리는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에 대한 서사가 어떻게 전유되고 있는지 살핀 문화사입니다.

항미원조, 백지운 지음( 창비,2023)

또한 중국은 한국전쟁을 통해 휴전협정 체결이후 1958년까지 진행된 북한의 재건과정이 새로운 중국의 정체성만들기와 연결된다(p85)고 인식합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한 이후 첫 국제전이 한국전쟁이고 이 전쟁에서 마오쩌뚱의 아들이 전사했다는 사실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북중관계를 혈맹이라고 부르고 서로 형제라고 부르는 데는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한국과 관련된 언급은 여기서 그치고 저자의 주장을 잠시 요약해 보겠습니다.

통념과 달리 중국과 동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에는 오랜기간 중국과의 외교관계에서 나타난 중화주의(中華主義)의 영향이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시간이 지남에 따라 중화의 주체가 명대의 한족(漢族)에서 청대의 만주족(滿洲族)으로 바뀌고,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화의변태(華夷變態)라는 용어가 생겨나고, 조선이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하는 등 중화사상 자체가 분기하고 중심이 없어지는 듯 보이고, 과거 근세시대의 종주국인 중국과 종속국인 중국 주변국간의 조공(朝貢) 관계가 국제법적인 조약관계로 바뀌었어도 오랜기간 중국과 동아시아 국가들간의 관계에서 고래의 영향인 중화주의적 관계가 완전히 단절될 수는 없다는 점입니다.

일견 당연하고 당연한 주장입니다. 한국의 경우도 중국과 수천년간 관계를 맺어왔고, 그 관계가 근대적 외교관계로 바뀌었다고 해도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유교문화에 대한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건 자명합니다. 문명개화가 무엇이든 서양의 법률체계를 배우고 더할 수는 있어서 서양적인 법과 정치개념들이 동아시아 전통의 관념을 하루아침에 바꿀 수는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던 부분은 동남아시아의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타이, 인도네시아 등 국가들과 중국과의 관계입니다. 이번에 처음 본 내용이고 새삼 무지를 깨닫게 되는 부분입니다. 프랑스, 네덜란드 등 서구제국과 얽힌 근대이후 뿐만 아니라 근세이전 중국과 조공관계를 이루던 복잡한 역사가 있어 이해가 쉽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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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조정자 - 보수와 혁신의 경계를 가로지른 한 지식인의 기록
남재희 지음 / 민음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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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를 하고 책을 봤는데, 중복되는 내용이 너무 많은 칼럼집 모음입니다.

그래도 합리적인 사고를 하시는 드믄 보수정치인의 ‘회고록’으로 생각했는데 그에 해당하는 내용이 없었습니다.

글이 대부분 칼럼이나 인상기로 2010년대 후반에서 2022년까지 집필된 것입니다. 역사적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지만 정치권 이면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오히려 기자/ 논설위원 생활을 하신 1960-1980년대 글을 집중적으로 모았으면 의미가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수많은 글을 써오고 기고하신 걸로 아는데 초기 글이 전혀 없어 놀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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