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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고된 쿠데타, 8월 종파사건
김재웅 지음 / 푸른역사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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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현재 김정은의 일인독재체제를 유지하는 나라이고 그의 일인독재체제는 그의 할아버지 김일성으로부터 3대째 이어져 온 것입니다. 주목할 점은 북한이 ‘조선노동당’의 일당독재(一黨獨裁)가 아니라 한사람이 모든 권력을 독점하는 독재정(獨裁政)으로 사실상 군주제와 유사한 형태입니다.

하지만 북한이 처음 성립되고 초기부터 김일성 일인독재체제는 아니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김일성은 자신의 일인독재를 완성하기 위해 자신을 비판하고 소련과 중국의 개입을 촉구해온 쿠데타 세력을 숙청해야 했습니다. 이 책은 북한성립이후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었던 쿠데타에 대한 분석서입니다.

위에서 잠시 언급한 김일성의 일인독재체제는 원래 북한의 혁명가들이 추구했던 사회주의 정치체제와 무엇이 달랐나? 비판세력은 김일성 일인독재체제가 네가지가 결여되었다고 생각했고, 이를 바로잡으려 했습니다.

그 네가지는,

첫째, 김일성에 대한 개인숭배
둘째, 인사문제( 김일성에 아첨하는 인사들로만 간부선발)
셋째, 조선노동당내 집단지도체제가 와해되었고, 당내 민주주의가 저해됨
넷째, 조선민족해방운동사가 김일성의 항일투쟁사로 왜곡되어 김일성과 관련된 만주항일빨치산 이외의 조선의용군 등 항알무장투쟁 역사가 왜곡됨.

1956년 당시 북한의 수뇌부에서 활동하던 소련출신 고려인들과 중국 연안에서 무장투쟁을 하던 인사들 중 일부가 당시 김일성 일인독재체제에 대해 위의 네가지 사항을 시정하지 않으면 북한이 사회주의 정치체제로 제대로 발전할 수 없다고 믿었고 신념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이 사건은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 사후 후계자인 후르쇼프가 1956년 2월 소련공산당 제20처대회애서 ‘스탈린 격하’를 선언하고 나서 그 동인을 얻었습니다. 소련의 1인자가 전임인 스탈린의 일인독재정치를 비판하고 나섰고, 이 정치적 선언의 효과는 동유럽과 북한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습니다. 사실상 소련의 위성국으로 억압받던 폴란드와 헝가리에서 소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북한에서는 김일성 일인독재체제에 대한 비판이 북한 수뇌부에서 나왔던 겁니다.

국제정세에 큰 영향을 받았던 만큼 국제정세가 바뀌면 상황은 예상치 못하게 흘러갈 수 있었습니다. 사회주의 모국인 소련과 중국에서 사실상 비판세력을 지지해 김일성의 통치력이 약해진 기간이 잠시 있었습니다.

하지만 1956년 일어난 헝가리사태로 국제정세는 반전합니다. 스탈린격하운동의 영향으로 소련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려 했던 헝가리는 동유럽에서 영향력을 잃기 싫었던 소련이 군대를 파견하고 사태를 유혈진압해서 소련에 대한 비판세력을 탄압했습니다. 거기다가 중국과 소련간의 분쟁이 격화되면서 이 두 나라가 북한에 간섭하기 어려워졌고, 해게모니 장악을 위해 서로 경쟁적으로 북한 끌어들이기에 골몰합니다.

북한은 소련의 헝가리 유혈진압을 비판세력을 탄압해도 괜찮다는 신호로 받아들였고, 소련은 실제로 김일성 비판세력의 숙청을 묵인했습니다.

중국도 처음 비판세력에 가담했던 연안계 인사들 탄압에 대해 북한에 항의했으나 소련과의 중소분쟁으로 이들에 대한 탄압을 사실상 승인했습니다.


이 책은 북한이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있으나 1950년대말부터 사실상 김일성 일인독재국가로서, 국가의 모든 결정을 김일성 혼자 독점하고, 아첨을 일삼는 측근만을 기용해 사실상 경제정책에 실패해 현재까지도 굶주림에 시달리고 중국의 원조없이는 살수 없는 국가가 된 역사적 원인을 캐고 있습니다.

당시 북한수뇌부에서 김일성을 견제하며 주요 정책결정을 하던 엘리트들이 이를 그냥두지 않았을 것이고, 그래서 ‘8월종파사건’이 일어난 것이지요. 다수가 소련과 중국에서 유학하고 소련공산당이나 중국공산당에 입당해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싸운 전력이 있는만큼 사회주의 사회에 대한 정견에서도 그렇고 항일투쟁 전력을 김일성이 혼자 독식하는데 불만이 많았을 겁니다.

끝으로 한반도의 북쪽의 한국전쟁 이후의 현대사를 파해친 이 책을 보면서 느낀 두가지를 언급하려 합니다.

첫째, 1950년 6월 이전까지 하나의 나라였던 남한과 북한에 대해 남한에서는 그동안 지나치게 북한에 대한 역사를 터부시했다고 생각합니다. 남한에서 진행된 자본주의에 의한 경제발전과 정치전개만큼, 북쪽에서 진행된 사회주의 경제발전과 정치전개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출발점은 항일운동이 우파뿐만 아니라 좌파에서도 있었고, 연해주와 중국에서 무장투쟁하던 인사들이 북한의 성립에 기여한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마치 좌파쪽 항일운동이 역사에 없었던 것처럼 치부하고, 우파쪽인 임시정부만 강조하는 것도 역사왜곡인 건 마찬가지입니다. 대체로 친일성향이거나 제국대학출신 엘리트들이 통치해온 한국에서 이는 인정하기 싫은 역사적 사실일겁니다. 남한의 설립당시 뿌리가 친일 친미성향인 엘리트였던 것처럼 북한도 소련이나 중국에서 활동하던 좌파 엘리트였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이 이들 사회주의 항일투사들 중 김일성 일인독재에 반기를 든 이유와 경과를 설명한 것인 것 만큼 그 전사 (前史)를 인정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최근 친일인 뉴라이트세력이 홍범도 장군의 항일독립운동을 깎아내리고 폄하하는 행위는 일본제국주의에 영합하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비이성적인 주장이죠.

북한을 아는 건 북한의 현재를 알기 위해서 필요할 뿐만 아니라 한국의 안보를 위해서도 지피지기(知彼知己)의 전략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극히 골수 우파적인 입장에서 봐도 북한이 주적이라면, 북한을 제대로 아는 것은 필수조건입니다.

반면, 북한의 실체를 모르고 관심없어하면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북한의 도발을 부추기는 일부 친일 극우세력의 적대적 공존전략은 북한을 국내정치에 이용하는 하수의 전략으로 한국을 전쟁위험에 빠뜨리게 하는 매우 위험한 도박입니다.

둘째, 위의 쿠데타의 네가지 명분은 현재의 윤석열 검찰독재정부에도 그대로 해당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을 책에서 읽으면서 기시감(旣視感, Déjà Vu)을 느껴 당혹스러웠습니다.

사실상 일인독재로서 윤석열 대통령이 모든 결정을 하는데( 물론 여기에 대통령 부인의 영향력 내지 이면에서의 결정여부가 아직은 불분명합니다), 집권여당인 국민의 힘은 대통령의 거수기로 전락해 사실상 국가정책 결정에 아무런 영향력을 끼칠 수 없습니다.

두번째 인사문제는 윤석열 정부 출범 직후부터 현재까지 문제가 되온 사안입니다. 고위인사의 상당수가 전직검사들로 해당 포스트의 경험이 전무한 경우가 많고, 수사하듯 일을 처리하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외에는 대통령 부인의 사적 인맥이거나 대통령의 개인적 인맥에 따르는 경우로 역시 전문성과는 거리가 멉니다. ‘아첨꾼’문제가 심각한 건 새삼 언급할 필요가 없습니다. 김일성과 마찬가지로 윤석열 정부도 업무성과가 형편없습니다. 역대급의 무능은 재론할 필요가 없습니다.

셋째, 집단지도체제 붕괴는 한국의 맥락에서는 윤석열 정부가 정부의 시스템을 망가뜨리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봅니다. 검찰과 감사원을 대통령의 수족으로 만들어 버렸고, 제1야당 대표를 정치수사로 옭매면서 사실상 입법부와 척을 지고 있고, 거부권을 남발해 국회의 입법권을 무력화시켜 버렸습니다. 30년이상을 늘공으로 살아온 관료출신 대통령과 역시 관료출신이 대부분인 내각역시 법률의 위반 여부만 따지고, 정치적 정무적 감각을 상실한 상태이고 대통령부터 모든 관료조직이 ‘책임회피’와 ‘복지부동’이 몸에 벤 상태입니다. 추측컨데 윤대통령은 아마 평생 ‘책임’이라는 걸 진적이 없는 걸로 보입니다.

넷째, 역사왜곡도 이 정부의 주요과제로서 항일운동사를 부정하고 일제의 전쟁범죄애 면죄부를 주는 일을 서슴치 않습니다. 심지어 일제강점 당시 한국인은 없고 일본인이었다는 망언까지 나오는 형국입니다. 일본의 침략전쟁을 위해 보급기지 역할을 했던 한국이 그에 필요한 인프라를 투자했을 뿐인 일제의 경제정책을 마치 한국이 일제없이는 경제발전이 불가능하다는 식으로 왜곡합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시각을 고스란히 가져와서 당혹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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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계 미국인으로 콜럼비아 대학에서 팔레스타인을 연구하는 라시드 칼리디 (Rashid Khalidi)의 팔레스타인 현대사 연구서입니다.

저자가 책 말미에서 밝혔듯 자신의 아들이 팔레스타인 현대사를 처음 접하는 일반독자를 대상으로 책을 써보라고 권유한게 이 책을 집필한 동기가 되었다고 했고, 책은 집필목적을 달성한 것으로 보입니다.

팔레스타인 지역뿐만 아니라 인근의 레바논, 시리아, 그리고 이집트 등 다른 아랍국가들과 이스라엘 사이에 팔레스타인 난민을 사이에 두고 어떤 갈등이 존재했는지 협상의 당사자 중 한명으로 참가한 경험을 토대로 풀어냅니다.

이 책은 현재 아마존에서 현재 진행되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의 여파인지 몰라도 이 분야 베스트셀러이고, 한국에도 2021년번역이 되었습니다. 이 책의 미국판이 2020년 출판되었고 페이퍼백판이 2022년 출판되었으니, 현재 진행되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과 별개로 한국에서 번역되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팔레스타인 100년 전쟁, 라시드 칼리디 지음, 유강은 옮김 (열린책들.2021)

이 책의 미덕은 대체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간 전쟁의 역사를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서술한 경우가 대부분인 경우에 비추어 팔레스타인의 입장에서 서술된 귀한 경우이기 때문입니다.


유럽에 살던 유태인들이 제1차세계대전이후 이스라엘을 건국하기 위한 운동을 시작하고, 제2차세계대전 이후 1948년 실제 이스라엘을 건국하면서 현재 이스라엘 땅에 살고 있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몰아내고 민간인들을 학살하면서 비극이 시작됩니다.

저자는 이스라엘 건국을 주도한 시오니즘( Zionism)이 유럽에 살던 유태인이 주장한 것으로 아랍세계에서 아랍인과 같이 살던 유태인들과는 무관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20세기 초 영국의 외무장관이던 발포어( Balfour)의 선언으로 시작된 유태인의 중동이주계획은 제1차세계대전으로 붕괴한 오스만제국(Ottoman Empire)의 혼란한 정세를 틈타 아랍세계의 독립을 선동하면서 이 지역에 풍부한 석유이권을 차지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100여년 이상 지속되온 중동지역의 분쟁과 테러 그리고 전쟁의 원인제공에 영국은 그 원죄가 있습니다.

이 주장은 중동문제에 정통한 전문가 대부분이 공유하는 관점으로 영국의 지식인들도 인정을 합니다.

최초 유럽의 유태인들의 팔레스타인 이주를 인정했던 식민주의 세력이던 영국은 하지만 1956년 수에즈 위기 (the Suez Crisis)를 계기로 주도권을 미국으로 넘기게 됩니다. 그 이전까지 영국과 프랑스는 중동지역의 국경선을 결정하며 헤게모니를 행사해 왔지만 수에즈 위기에 미국이 개입하며 이집트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주도권을 상실합니다.

영국의 현대사가들이 수에즈 위기가 대영제국이 쇠퇴하게 되는 결정적인 분기점으로 보는 이유입니다.

책은 팔레스타인이 겪은 수많은 전쟁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그것보다 유럽의 유태인 시오니즘 추종자들, 영국의 정치가들과 미국의 정치가들 그리고 그들을 후원하고 미국의 중동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국의 유태계 백만장자들(대부분 골수 시오니즘 추종자들임)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이스라엘을 건국시키고 이들을 내쫓았는가입니다.

저자는 이들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존재(existence) 자체를 부정하는 철저한 식민주의자들이라고 봅니다.

이들 미국의 시오니즘 추종자들인 유태인들은 팔레스타인 지역은 사람이 살지 않는 빈 공간으로 인식하고, 성경에 나와있듯 원래 유태인이 살았던 팔레스타인에 유태인이 돌아오는 것 ( return to homeland)으로 이해합니다. 이는 유태인들 뿐만 아니라 성경에 기반을 둔 미국의 주류 백인들 사이에서도 거부할 수 없는 종교적 정당성을 둔 것으로 이해됩니다.

하지만 이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수 세대간 살아온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존재, 문화, 역사를 깡그리 무시하는 매우 폭력적이고 제국주의적이며, 식민주의적 관점의 시각입니다.

그리고 이 시각은 무고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전쟁에서 학살되고 난민이 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보는 시각입니다.

이는 미국이 서부개척을 할 때 이 지역에 원래 살고 있던 원주민 (Native American)들의 삶을 깡그리 부정하고 마치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로 생각했던 것과 똑같습니다. 미국을 건국한 백인들은 자신들의 우월한 서양문명을 비문명세계인 원주민이 사는 빈공간에 채워넣는다는 제국주의적 발상을 한 겁니다. 우리에게 알려지지는 않었지만 아메리카 대륙에는 원주민들이 만들었 문명과 문화가 있었지만 이는 ‘없는 존재’로 간주된 겁니다.

유럽출신 유태인들이 팔레스타인 땅에 이스라엘을 세운 것이나 영국의 청교도들이 미국을 건국하고 이후 독일 등 동유럽 출신 이민들이 미국의 중서부를 개척하는 모든 과정이 제국주의적 팽창과 식민주의 그리고 서구우월주의 ( Eurocentrism)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서구인들이 비서구 유색인종들에게 행한 폭력과 학살 전쟁을 보면 이들이 진정 선진문명을 이룬 이들이 맞는지 회의적입니다.

최근의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을 보면 벤자민 네탄야후 수상을 비롯한 이스라엘의 극단주의적 시오니즘 추종 군부세력이 사실상 가자지구( Gaza Strip)의 팔레스타인인들을 무차별 학살(massacre)하는 인종청소(ethnic cleansing)의 지경에 으른 것으로 보여집니다. 학교와 병원을 폭격해서 이 지역에 사람이 살 수 없도록 하고 있고 그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합니다. 서구언론에서 절대말하지 않는 것 중 하나가 이스라엜군이 팔래스타인에 가하는 절대우위의 불균형적 군사적 타격 (disproportionate strike)입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지 못하도록 공중폭격과 포격을 민간안이 밀집한 시가지에 무차별적으로 퍼붓습니다. 네탄야후 총리는 이번 전쟁으로 전범으로 기소되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저자가 일하는 콜럼비아 대학을 비롯한 미국 대학가에서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학살공격에 대한 시위가 일어나는 등 그 폭력과 잔인함이 이미 임계치를 넘어선 것으로 보입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하바드, 유펜 그리고 콜럼비아 대학 총정이 사임을 했고, 그 배후에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골수 시오니즘 지지자인 유태인 백만장자들이 압력을 가한 사실이 드러나는 스캔들이 있었습니다. 미국이 민주주의 사회라는 사실이 무색합니다.

이 책을 보면 미국을 비롯한 주류 서구사회가 지칭하는 테러리스트라는 낙인이 과연 온당한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경우는 미국의 지원을 받은 막강한 군사력으로 팔레스타인인들의 주거지와 난민캠프가 무차별 폭격을 당하고 탱크가 들어오는 상황에서 이들은 자살폭탄테러나 암살 이외에 저항할 방법이 없는데도 말입니다.

끝으로 한국의 최근 우려되는 상황에 대해 언급하려 합니다.

과도한 친일로 일관하는 윤석열 대통령이 올해 광복절을 앞두고 뉴라이트계통의 역사학자인 김형석씨를 독립기념관장으로 임명해 군인출신이며 보수인 이종찬 광복회장과 갈등양상을 보였습니다.

이분의 발언이 문제적인 것은 일제강점기 당시 한국인들은 ‘일본인’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인식때문입니다. 일제의 식민통치를 정당화시켜주는 무서운 발언으로, 전형적인 식민주의자적인 인식입니다.

앞에서 이스라엘의 유태인 시오니즘 추종자들이 팔래스타인 사람들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더해 유태인들은 이들의 국가수립의 권리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대화상대로 인정되지 않아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영국 미국 이스라엘과의 대외관계에서 제외되고, 협상에서 배제되어 왔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김형석 신임관장의 한국인 국민 존재 부정발언은 그가 친일이고 극단주의적 식민주의자라는 자기증명입니다. 자기나라 국민의 존재를 부정하고 식민지 일제의 정책을 정당화하는 주장이 친일이 아니면 도대체 뭐가 친일일까요?

최근 용산 대통령실이 용산 총독부라고 불리는 것도 신임 독립관장 임명과 관련해 볼 때 사실로 보는 것이 마땅합니다.

개인적으로 식민지 모국에 부역하던 엘리트들의 전통이 청산되지 않은 체 남아있다가 때를 만나 활개를 치는 것으로 봅니다. 친일파를 우대했던 이승만 정부와 미군정의 역사적 후과가, 역사적으로 단죄되지 못했던 친일파에 대한 후유증이 21세기 들어 나타난 것입니다.

일제강점기 조선출신 지식인들에 대한 연구서 한권 소개합니다.

제국대학의 조센징, 정종현 지음 (휴머니스트,2019)

위의 책에서 일제시대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한 엘리트 중 특히 법조인들은 일제로부터 사상검증을 받은 ‘검증된’ 친일파라는 역사적 사실이 나옵니다. 다른분야는 시험에만 합격하면 임용이 보장된 것과 달리 판검사 임용은 시험합격은 물론이고 추가적으로 그 사람이 ‘친일’임이 증명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바꿔말하면 친일이 아니라면 조선인은 결코 일제시대에 판검사 임용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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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계 미국인으로 러시아사를 공부한 저자가 일본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하게되는 과정을 미국과 소련의 패권다툼과정으로 설명한 책입니다.

제2차세계대전, 특히 아시아 태평양 전쟁( Asia Pacific War)의 종전과정을 연구한 국제정치사입니다.

본문이 보론포함 총 628쪽에 달하는 책으로 일본출신 러시아사 연구자답게 미국 일본 러시아의 일차사료를 인용해 논지를 전개합니다.

논지는 간단명료합니다.

일본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한 이유는 통상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두발의 원자폭탄 때문이라는 것이 이제까지의 설명이었습니다. 연합국은 1945년 7월 열린 포츠담 회담( Potsdam Conference)에서 일본에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고, 원폭을 맞은 일본이 결국 무조건 항복하게 되었다는 설명이죠.

하지만 저자는 연합국이 포츠덤에서 요구한 무조건 항복을 천황의 통치권을 의미하는 국체(國體)를 수호해야 한다는 믿음으로 거부하고 조건부 항복을 요구했고 원폭을 맞은 이후에도 종전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소련의 극동전선 참전 ( 만주와 랴오뚱 반도 침공, 사할린과 쿠릴열도 침공 및 홋카이도 침공계획)이 일본이 무조건 항복에 계기( momentum)를 제공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입니다.

제국주의 일본의 무조건 항복( unconditional surrender)는 조선의 식민지해방과 관련이 있기때문에 한국현대사에서도 끊임없이 논의되고 재해석되는 주제이기도 하지만 논의 자체를 한반도에 좁혀서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조선의 독립은 분명 제2차세계대전 종전과 관련되어 발생했고 국제정치와 외교 전반에 걸친 맥락( context)를 이해하지 못하면 편협해지거나 반쪽짜리 이해가 될 수 있습니다.

일본의 항복에 앞서 유럽전선에서 나찌 독일이 먼저 항복을 했고, 미국 영국 중국 소련 등 열강은 이미 패전한 독일을 분할점령하고 통치하려 했다는 선례가 있었다는 걸 간과하면 안됩니다.

거기에다 소련은 결국 나찌 독일을 패전으로 이끈 독소전쟁를 이끌었고 그 유럽전장에서 싸웠던 적군 ( Red Army) 지휘관들이 만주와 일본을 공격했다는 사실도 중요합니다.

스탈린은 얄타에서 연합국이 약속한 다렌항의 실질적 점유를 위해 그리고 러일전쟁에서 일본에 뺐겼던 사할린을 되첯기 위해 1945년 8월 아시아전선에 참전합니다.

위의 세가지 선행조건( pre condition)때문에 소련은 미국과 일본을 분할점령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고, 사할린과 쿠릴열도 점령 후 홋카이도에 진격하려 했습니다. 연합국이 유럽전선에서 독일을 분할점령한 선례가 있는데다가 독소전쟁에서 가장 큰 인명피해를 본 소련이어서 소련이 생각한 일본의 분할점령은 그 연장선에서 일관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소련군의 만주진격이 부담스러웠고 중국공산당과 협력하게 될까 두려웠기 때문에 소련의 일본 분할점령구상을 거부하게됩니다.

조선의 해방이후 소련군이 현재 북한지역인 청진 등으로 미군보다 먼저 진주하게 되는 이유도 소련군의 만주침공이라는 관점에서 보아야 할 사항입니다. 미국과 38도선을 경계로 선을 분할점령하기로 합의한 후 소련은 관동군의 퇴로를 막기 위해서라도 북조선 점령이 불가피했던 겁니다.

그리고 미국은 소련이 조선의 남쪽으로 진격하지 않을까 매우 불안했습니다.

미국의 트루먼과 소련의 스탈린은 아시아전선에서의 종전을 둘러싸고 서로 각축을 벌였고, 미국은 독일에서와 달리 일본을 미국 홀로 단독점령하기를 바랬고 실제로 그대로 되었습니다. 일본이 미소 양국간 분할점령될 수 있었는데도 조선이 분할점령된 이유는 결국 미국 정책당국의 의지 때문인 것이었습니다.

독일의 분할점령과정은 다시 살펴봐야하겠지만 미국이 소련과 여러면에서 갈등을 빚지 않았나 추정합니다. 그리고 독소전쟁이후 소련이 동유럽 국가들을 영향권에 넣어 위성국가로 만든 것도 영향이 있었을 겁니다.

미국은 일본을 점령하면서 전쟁책임이 있는 히로히토 천황의 지위를 유지시키고 그를 폐위시키지 않았습니다. 일본 본토탈환작전을 세우면서 일본군이 오키나와와 이오지마에서 죽기를 각오하고 달려드는 경험을 해서 천황의 폐위를 너무 큰 위험이라고 생각해서입니다. 천황을 전범으로 처벌해야한다는 미국의 여론이 비등했는데도 내려진 결정이었습니다.

1945년의 역사를 복기하는 건 불편하지만 2024년 현재의 한국과 북한의 기원이기때문에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국일본의 내각과 관료제가 얼마나 더 유유부단하고 종전을 미루었던 경과를 보면서 이미 일본이라는 나라의 비효율성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원폭을 맞고도 천황의 통치권을 부르짖고, 법률의 합법성을 따지는 전근대적 충성과 조직의 경직성을 보여주었습니다. 합리적으로 보여도 국민의 목숨을 하찮게 여긴다는 점에서 매우 야만적입니다.

옥쇄(玉碎)를 각오하고 무모하게 전쟁을 계속하려던 군국주의 일본 육군을 내각은 전혀 통제하지 못했고 관료제의 기제하에 결정을 미루던 내각은 결국 히로히토 천황에게 종전의 결단을 요청합니다.

무모함과 비효율은 현재 일본 조직을 대표하는 특징이라고 보고 있고 이 책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국체론으로 설명되는 일본의 천황제에 대해 언급하려 합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일본의 패전 이전의 천황제는 신정일치 정치제도로 전혀 근대적인 제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매우 원시적이고 고루합니다( archaic). 1945년 9월 패전 이전까지일본인들은 천황을 현인신(現人神), 즉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 신으로 여겼습니다. 일본의 전후는 신이었던 천황이 인간이 된 시기이기도 합니다. 서구의 어느국가도 전근대시기 왕이 신의 은총을 받고 신권을 행사한다고 생각했지 왕을 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낡은 개념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메이지 시대 이런 국가의 체계를 만든게 조선초대통감이자 일본 초대총리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입니다. 애초 근대적 민주주의와 관계가 없는 절대왕권주의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봉건적인 제후국들의 느슨한 연합체였던 에도막부가 명실상부한 신정일치 철대왕조국가가 되도록 개조한 정치인일 뿐입니다.

따라서 패전이전의 천황제 즉 메이지헌법하의 천황제로 회귀를 주장하는 전범의 후손 출신 일본의 국우정치가들의 국가 인식방식도 지극히 전근대적이고 고루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서구적 민주주의 관점에서 봤을 때 일본의 신정잂치정치체제눈 중동의 강국 이란의 신정일치정치체제와 매우 유사합니다. 따라서 일본의 정치체제가 근대적이고 서구적이라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일본 의회에 아직도 메이지유신 당시의 정치 지도자의 자제들이 대를 이어 정치를 거의 세습적으로 하고 있고 상당수 전범의 후손들이 정치를 대대로 하고 있는 걸 보면 껍데기만 민주주의일뿐 사회 자체가 전근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은 2006년 미국에서 영어판으로 발표되고 이후 일본에서 일어판으로 새로 쓰여졌습니다.

Hasegawa Tsuyoshi, Racing the Enemy (Harvard University Press,2006)

또 한가지, 이책은 2023년 출간된 이화여대 정병준 교수님의 신간 <1945년 해방직후사>의 참고문헌 중 하나입니다. 이 책의 국제정치적 배경이라고 보아도 무방한 책입니다.

정병준, 1945년 해방직후사 ( 돌배게,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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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에서 한국현대사를 연구하시는 정병준 교수님의 최신작입니다.

2023년 12월 출간된 책이고 이책에 대해서는 역사학자 심용환 선생님의 방송을 통해 알게되었습니다.

본문 425쪽으로 전체 4장으로 이루어진 책으로 언론에는 ‘아무도 아닌 자‘인 미국인들이 미군정 치하에서 어떻게 한국의 정치과정에 개입했는지를 최초 발굴했다고 소개되었고, 실제 1945년 9월 미군의 남한 진주이후 통역과 문고리권력의 등장에 대해 이 책 2장이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이책의 내용 중 1장의 미군 진주 전 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총독부의 공작에 대한 내용은 전에 소개해드린 다른 책에서도 상당부분 내용이 겹칩니다. 즉 일제가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을 한 이후 권력의 진공 상태에서 유일하게 정권인수를 준비하던 리더가 여운형이었습니다. 조선총독부는 패망이후 조선인들이 일본인들을 습격할까봐 두려워 치안대책을 여운형과 논의하려 했습니다. 이 당시 친일세력이던 한민당과 우파는 패전이후 친일행적에 대한 처단이 두려워 사실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해방 후 첫 26일동안의 행적을 그린 르포로 한겨레 길윤형 기자가 아래의 책을 출간했습니다.

길윤형 지음, 26일 동안의 광복 (서해문집,2020)

이 책은 8월 15일 해방이후 미군이 진주하기 직전 상황에 대한 이야기이고 사실상 한국이 일제 패망이후 실질적인 해방을 만끽했던 짧은 26일간의 이야기입니다.

1945년 9월 미군정이 시작되고 야전군인 출신으로 행정과 정치경력이 전무한 하지 중장 (General Hodge)가 미군정을 위해 남한 땅에 들어옵니다.

이미 카이로회담, 테헤란 회담 그리고 포츠담 회담에서 미국은 연합군( 미 영 중 소)측과 패전국에 대한 전후처리를 합의한 바 있고, 그 원칙은 어느 특정세력에게 권력을 넘기지 않는다는 것이었고, 한국의 경우 신탁통치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남한에 진주한 미24군단장 하지는 미국 국무부 전쟁부 및 도쿄에 주재하는 맥아더 장군의 명령에 따라야 함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으로 한국의 전후 정치와 정부에 대한 결정을 내립니다.

미국이 독일과 일본의 전후처리에 골몰해 한국에 대한 훈령을 내리지 않고 방치하면서 이런 월권행위를 일으킨 겁니다.

통념과 달리 미군정의 하지장군은 미국의 전후처리 방침인 한국의 신탁통치에 대한 반대를 표명하고 자신의 독자적인 판단으로 과거 친일전력이 있는 한민당 세력과 김구의 중경임시정부 세력을 간판으로 활용하여 과도정부를 세우려고 했습니다. 현재 국우진영에서 ‘국부’로 추앙받는 이승만은 귀국조차 하지 않던 시점이었습니다.

통념과는 다르게 1945년 후반기까지 이승만은 조선에서도 미국에서도 모두 잊힌 인물이었고, 미국조야와 사이도 좋지 않았습니다. 이승만을 과도정부 수반으로 세우려고 했던 건 하지장군의 독단적 결정에 불과한 것이죠.

미군정은 조선총독부로부터 사실상 행정권을 회수하여 서울과 지방에서 행정권을 행사하고 있던 건준과 인민위원회를 ‘공산주의’로 몰아 사실상 배제한체 일제시대 친일을 했던 한민당 세력과 구한말부터 한국에서 교육사업을 했던 개신교 선교사 세력을 우대하고 이들을 중심으로 보수주의적 과도정부를 독자적으로 수립하고자 한 겁니다.

일제시대 미국에 유학할 정도면 조선총독부와 관계가 원만했을 것이고 또한 집안의 재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미군정 초기 고위직을 차지했던 대부분 인사들은 미션스쿨( 연희전문, 숭실전문)출신에 미국 유학파로 영어에 능통한 이들이었습니다. 하지장군의 전담통역이던 이묘묵(李卯默)은 연희전문 출신 미국 유학파로 일제말기 유명한 친일파였습니다.

하지만 미국 일리노이 출신 야전군인인 하지는 그의
이력따위는 관심없었고 덕분에 이묘묵은 통역이자 문고리 권력으로 일제시대 이후에도 권력을 누렸습니다.

이묘묵을 포함한 초기 미군정 고위직들은 대체로 미션스쿨출신의 미국 유학파였고 지역적으로는 기독교의 영향력이 강했던 서북지역( 평안도) 출신으로 이들은 반공주의로 무장되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책을 보면서 인지하게 된 사실은 현재 기득권의 일부가 된 보수 기독교 세력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다는 점입니다. 반공주의의 산실이 된 영락교회도 신의주 출신 한경직 목사가 미군정의 후원으로 세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1945년 이후 서북출신 보수 기독교의 원류를 찿아보는 건 정치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일로 보입니다.

이 책에 소개된 ‘아무것도 아닌 자’로 영향력을 행사한 윌리엄스가 일제하 조선에 거주했던 기독교 선교사 출신 자손이라면 하지장군의 정치고문이던 버치는 미군 하급장교이지만 해방정국 막후에서 활약한 인물입니다.

버치가 남긴 문서에 대해서 이 책은 말미에 약간 언급하고 있지만 버치문서에 대해서도 별도의 책이 출판되어 있습니다.

박태균 지음, 버치문서와 해방정국 (역사비평사,2021)

영관급도 아닌 일개 위관급 미군장교가 해방이후 남한정국에 영향력을 미치는 상황을 보면 기가 막힐 따름입니다.

끝으로 이 책의 단점을 하나 말하려고 합니다.

역사서가 대체로 사료에 대한 해석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다보니 시기가 겹치는 경우 동일한 설명이 반복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좀 더 간명하게 설명되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또 하나 느낀 건 미군정 시기가 전문 연구자 이외에 별로 알려지지 않은 체 보수세력들의 설명이 마치 진실인 것처럼 대중에 유포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입장에 따라 다양한 견해가 나올 수 있고 이 책에서 언급했다시피 아직도 미군정에 대해서는 미스터리한 부분이 남은 불완전한 시기라는 점입니다. 친일세력이 일부러 당대의 역사를 왜곡시켰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 시기는 좀 더 면밀한 검증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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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역사전문 언론인인 와타나베 노부유키가 저술한 책을 역사학자이신 이규수교수께서 번역하신 책입니다.

청일전쟁사를 일본 육군참모본부에서 공식적인 정사 (正史)로서 1904년 <일청전사>라는 이름으로 간행되는데, 이 책은 이 정사 역사서를 쓰기위한 초고(草稿) 에 해당되는 <일청전사 결정초안>을 발굴해 대조함으로서 청일전쟁 이후 매이지 정부와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県有朋)로 대표되는 일본 육군의 군벌세력들이 청일전쟁의 역사적 사실을 어떤 방침을 가지고 취사선택해 국민에게 보이려고 했는지를 밝힙니다.

그리고 최초로 공식편찬된 이 청일전쟁의 정사가 이후 일어난 러일전쟁의 공식역사서인 <일러전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그리고 더 나아가 일본이 제2차세계대전에서 패전을 하는데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핍니다.

한마디로 일본은 최초 청일전쟁사를 편찬하면서 자신들에게 불리하거나 일본군이 어려움에 처했던 역사적 사실은 모두 정사에서 뺐습니다. 여기엔 일본군이 청나라 군대에 행한 무모한 작전과 인명을 경시한 사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청전사 결정초안>에서 보여준 청일전쟁 당시 평양성 전투는 사실 두 군대간의 싸움이 백중세였고, 청국 군대가 평양성을 버리고 나오다가 죽게된 건 당시 도입된 만국공법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에도 공식 <일청전사>애는 일본이 압도적으로 청나라를 이겼다고 서술된 것이 한 예입니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서 미래에 같은 일이 재발되지 않으려면 역사적 사실을 모두 제대로 기록하고 평가를 해야할텐데 매이지 육군 군벌둘은 자신들의 군대가 저지른 실수와 만행은 모두 삭제하고 전과(戰果)를 부풀린 겁니다.

1894년 일본이 조선땅에 들어와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하고 국왕을 위협한 사건은 일본군이 치밀하게 작전을 세운후 실행한 ‘군사작전’으로 학자들 사이에서는 발생한 날을 따서‘7월 23일 전쟁’으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 있을만한 사건인데도 공식 <일청전사>에는 내용이 누락되었습니다.

일본의 나카츠카 아키라 (中塚明)교수가 1997년 <역사의 위조를 묻다-전사에서 지워진 일본군의 ‘조선왕궁점령’>이라는 책을 펴냈고, 한국에는 2002년 원광대 박맹수 교수 번역으로 출판되었습니다.

나카츠카 아키라 지음, 박맹수 옮김, 1894년 경복궁을 점령하라! ( 푸른역사,2002)

작은 책인데 아직도 발행이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러일전쟁과 관련해서는 시바 료타료의 <언덕위의 구름坂の上の雲)>과 일본에서 군신으로 추앙받는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가 뤼순공방전애서 승리한 이면에 어떤 진실이 있는지 파헤칩니다. 러일전쟁에서 가장 많은 일본군 전사자가 나온 이 전투를 지휘한 사령관이 군신 노기 마레스케가 아니라 당시 만주군 총참모장 고다마 겐타로(児玉源太郎)일수도 있다는 정황을 설명합니다 (pp168-182).

총평으로 이책을 보면서 편견일수 있겠지만 좀 발칙한 개인적 의견을 말해보고 싶습니다.

청일전쟁사를 일본 육군에서 편찬하려고 준비한게 청일전쟁 직후이고 최초 공식역사서가 나온게 1904년이니 이미 120여년전 일입니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조상뻘인 조슈(長州)의 육군군벌 야마가타 아리토모 (山県有朋)와 그 추종자들은 애초부터 역사를 사실(史實)대로 기록할 의지가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위대한 대일본제국은 전쟁에서 이겨야 하며 어떠한 실수나 반문명적인 행동, 집단학살이나 강간 등 전쟁범죄 그리고 전술과 전략의 부재, 그리고 병참문제로 전쟁에서 어려움을 겪는 모든 일본군의 약점은 일본의 국민들이 알아서는 안되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항상 이기는 줄 알았던 일본은 제2차세계대전에서 미국에 대항해서 싸우다 그 결과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을 맞고 패배했습니다.

20세기초부터 1945년까지 일본은 ‘집단최면’ 상태였고 그 원인은 물론 일본이 처음 행한 국제전인 청일전쟁과 그 이후러일전쟁 등 초기 전쟁에 대해 공과를 왜곡하고 역사를 위조하도록 지시한 일본의 육군군벌에게 있는 것이죠.

과문하지만 이들의 영향력이 아직도 일본의 군국주의와 맥이 닿아있는 일본의 극우 정치인과 역사수정주의자들에까지 마치고 있다고 추정합니다.

일본의 국민소설이라고 불린 <언덕위의 구름(坂の上の雲 )>이 3대에 걸쳐 읽힌 문제작이고 이책을 통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안 일본인들도 많다하니 그 내용을 봐야할 것 같습니다. 더구나 2009-2011년 일본 NHK에서 드라마로 만들어 방영한 작품입니다.

특히 시바 료타로의 우익적 역사관은 ‘일본과 중국은 근대화에 실패한 나라이고 일본은 성공한 나라‘라는 것으로 이 글을 쓰는 저를 비롯한 한국인들에게 특히 문제적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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