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읽었던 개정판 중국근현대사 강의(한울 아카데미,2021)은 한국의 중국연구자들이 교과서적인 입장에서 중국의 근현대사를 정리한 책이라면 이 책은 미국에서 연구하는 중국인 학자 입장에서 저술된 책입니다.

충북대 김승욱 교수께서 번역을 하시면서 중국적 입장에서 저술된 부분을 중립적인 용어로 바꾸면서 번역을 하셨지만 그라도 중국입장의 역사서술이라는 입장은 바뀌지 않은 것 같습니다.

교과서적으로 중국의 근대를 나누는 기점으로 흔히 아편전쟁(1840-1842,1856-1860)을 꼽는데, 이 책은 임진왜란을 근대의 기점으로 잡습니다.

아편전쟁을 근대의 시작으로 보는 이유는 유럽 제국주의 세력이 ‘폐쇄’된 중국에 문호개방을 요구하고 그에 대한 항전으로 벌인 전쟁이 아편전쟁이고, 이 전쟁의 결과로 중국이 개항하고 ‘유럽의 문명’을 받아들여 근대로 나가게 되었다는 시각입니다.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진 이 시각은 다분히 유럽중심주의(Eurocentrism)에 기반한 시각으로 유럽이 정상이고 비유럽은 정상이 아니라는 오리엔탈리즘 (Orientalism)도 포함된 설명입니다.

하지만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사회가 ‘정체’되어 제국주의 유럽에 넘어갔다는 시각은 근래 수정되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임진왜란(1592-1598)을 동아시아 근대의 기점으로 보는 시각은 일견 타당합니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처들어온 일본의 군인 중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카톨릭 다이묘(大名)였다는 사실도 있고, 임진왜란 이전 이미 일본이 포르투갈을 통해 화승총 기술을 전해 받아 이미 임진왜란에서 조총으로 실전배치를 끝냈다는 사실도 있습니다.

중국에서도 이미 마르코폴로 이후 마테오 리치를 대표로 하는 서양의 선교사들과 교류를 진행해 상당한 서양지식을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명말 타이완을 차지했던 정성공 (鄭成功)은 청 제국 초기 남명 정권을 세우는데 일조한 군인으로 네덜란드의 수중에 있던 타이완을 탈환합니다.

포르투갈, 스페인에 이어 동아시아에 나타난 네덜란드는 일본과는 나가사키를 통해 교역하고 있었고, 타이완을 점령하고 무려 40여년을 그 섬에서 보냈습니다.

동아시아가 ‘패쇄적’이라는 주장은 그래서 왜곡의 여지가 큽니다. 알려지지 않아서 모르는 상황을 일반적인 대외쇄국과 정체로 파악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무튼 이 책을 통해 ‘임진왜란 ‘이라는 동아시아 전쟁이 가지는 의미가 생각보다 훨씬 클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단순히 조선사애서 조선 전기와 후기를 구분짓는 분기점만이 아니고, 동아시아 역사의 맥락(context)애서 봤을 때 말입니다.

사상적 견지에서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쿠데타인 인조반정(仁祖反正,1623)이 일어나 서인정권이 들어섰고 제조지은 (再造之恩)을 명목으로 쇠퇴하고 있는 명에 대한 무조건적 사대를 주장합니다.

오랑캐인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를 외교적 실체로 인정하지 않는 실책을 범합니다.

결과는 병자호란이고 조선은 패했습니다. 근본주의적 성리학이 조선의 지배층을 지배했지만 그들의 사상은 그들의 사회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중국은 사상적으로 좀 달랐습니다. 중국인들에게 주희 (朱熹)의 유교 경전해석은 그저 유교경전을 읽는 한 방법이지 조선에서처럼 절대시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청의 강건성세(康乾盛世)시기, 즉 강희제가 ‘삼번의 난’을 진압한 1681년부터 옹정제 그리고 건륭제 치하의 시기에, 청은 대외적으로 팽창하여 러시아와 국경선을 획정하였고 중앙아시아의 준가르 평원까지 정복해 오이라트 몽골을 복속하기까지 했습니다.

중앙아시아와 동북에서 몽골과 러시아와 마주하고 교류하고 외교협상을 하고 군사정복을 하던 청은 청대 아담 술을 비롯한 유럽의 지식도 같이 흡수 했습니다.

그러니 주희가 해석한 근본주의적 성리학은 여러 해석 중 하나였고 이미 당시 중국에서조차 뜬구름 잡는 추상적 학문이라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조선과 다르게 중국에서는 양명학(陽明學)과 고증학(考證學)이 발전해 왔는데, 고증학의 경우도 전적에 파묻혀 사회현실을 진단하고 참여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이상으로 보았을 때 조선에서 송시열 (宋時烈)로 대표되는 서인 노론계 근본주의적 성리학이 대책없이 경직된 유학이며 허상을 쫓는 학문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화이변태(華夷變態)라는 표현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중국이 고대로부터 한족(漢族)을 화(華)로 그 외 다른 민족은 오랑캐인 이(夷)로 여겨져 왔습니다. 중원의 한족국가인 황제에게 주변의 제후국들은 조공관계를 맺고 왕위를 책봉(冊封)받아 정치적 권위를 유지했습니다.

그런데 동북의 오랑캐인 만주족이 삼번의 난을 진압하고 명실상부하게 중원을 장악하고 심지어 타이완까지 차지하게 되어 중국을 지배하게 된 것입니다.

한족 중심이라던 화이론(華夷論)자체의 전제가 흔들리게 된 겁니다.

조선과 일본은 이 중대한 중국의 변화에 다른 입장을 취했습니다.
조선은 전통적 한족국가인 명에 대한 사대를 고집했고 일본은 스스로 중화(中華)가 되는 길을 택했습니다. 두 국가의 이 다른 선택이 조선과 일본이 전혀 다른 길을 가게 만든 분기점이었습니다. 일본은 이 선택으로부터 20세기에 이르러 대동아공영권을 주장하고 조선과 중국, 만주지역과 동남아시아,타이완까지 침략하게 되고 미국의 진주만을 폭격하게 됩니다.

중원이 더이상 중화가 아니라는 자각에 대한 조선과 일본의 다른 대응이 역사를 각기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만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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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근현대사 강의 (양장) - 개정판 중국근현대사학회 강의총서 1
중국근현대사학회 엮음, 배경한 책임편집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21년 7월
평점 :
품절


18세기부터 21세기 현재까지 청나라 말기부터 현재 중화인민공화국까지의 중국의 역사를 개관한 책입니다.

각 장이 하나의 주제로 단행본을 구성할 수 있는 여러 이야기를 한권에 모아서 처음 읽기 적합한 책입니다.

각 장 말미에 붙은 참고문헌이 구미와 일본 그리고 중국과 한국 학계의 연구목록을 망라한 듯해 유용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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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프로야구계의 내부와 운영전략을 밝혀 화제가 된 ‘Moneyball(WW Norton,2011)’의 작가가 같은 시기에 쓴 책이 오늘 소개하는 책입니다.

Moneyball 과 마찬가지로 이 책도 2015년 영화로 만들어졌고 히트작이 되었습니다. 저도 3번 이상 본것 같습니다.

1980년대이후 공과대학 연구실에서 금융사로 자리를 옮긴 금융공학자들(Quant)이 만들어 확산시킨 자산 유동화 (securitization)라는 월가의 발명품과 파생상품(Deriatives)이 월가의 탐욕과 결합해 과도한 레버리지(leverage)를 일으키고, 대출자의 소득수준도 고려하지 않은 체 미국의 부동산 붐에 편승해 남발된 서브프라임 대출 (sub prime loan)과 이를 담보로 한 부동산담보부채권(ABS; asset backed securities )의 가격 폭락은 이 담보부 채권을 기반으로 만든 새로운 파생상품의 폭락으로 이어져 결국 미국의 금융시스템을 붕괴시킵니다.

이미 많이 알려진 사실이라 사실 다시 이 역사적 사실을 언급하는 건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책이 ‘2007년 금융위기 ‘를 다룬 다른 책들과의 차이점을 언급하고자 합니다.

이 책은 사실 2007년 금융위기가 발생하기까지의 전사(前史)를 주로 다루고 이 책의 제목처럼 신용도가 최악인 부동산 담보부 채권을 공매도(Short)해서 이익을 보려는 헤지펀드 매니저들의 이야기가 중심입니다.

모두가 근거없이 부동산담보부채권과 이것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금융상품의 가격이 오를 것이라는 믿음으로 투자를 한 월가의 거대투자은행과 전혀 반대로 대출미상환(default)위험이 높은 미국 부동산 시장과 부동산담보부 대출의 부실가능성에 베팅을 한 소수의 사람들이 주류에 도전하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미국의 금융당국이 2007년 9월 금융위기 발발이후 어떻게 세금을 퍼부어 미국의 거대금융기관을 살렸는지, 미국이 서브프라임 담보부 채권과 관련 파생상품의 위험을 떠안은 거대 보험사 AIG를 어떻게 구했는지, 어떻게 월가의 은행들이 투자은행을 포기하게 되었는지는 당시 Fed의장이던 버냉키 (Ben Bernanke)의 회고록( The Courage to Act,2015)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자부심을 가지고 자신의 업적을 과도하게 포장한 책이지만 미국의 금융당국이 세금으로 사실상 거대투자은행을 어떻게 구했는지 보여줍니다. 수천만불씩 연봉을 받던 월가의 CEO들은 1929년 세계대공황( the Great Depression)이후 최악으로 기록된 이 사태에 책임이 있는데도 아무도 잘리지 않았습니다.

흔히 CEO들의 연봉은 그들의 실적과 관련되어 정당화되곤 하는데, 그 실적이라는 것이 사후적으로 조작이 가능해서 항상 논란의 여지가 생길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수익을 높이고 싶다면 매출을 과대계상하거나 비용을 과소계상을 하면 되는데 어떤 회계처리방식을 택하는지에 따라 좋게 보일 수 있는 방법이 생길 수 있죠.

이책에 잠깐 언급되는 것처럼 채권의 대손으로 인한 비용증가를 보여주지 않기 위해 새 회사를 만드는 등 방법은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이 책의 주요 대상인 해지펀드의 경우 거대금융회사와 별개의 법인인 경우가 많아 더 채권부실화로 인한 손실을 알 수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경우라도 경영통제의 관점에서 CEO들이 무능하다는 비판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2007년 금융위기는 이후 ‘대침체(the Great Recession)’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미국 Fed가 직접 불량채권을 매입하고 또 경기침체의 대웅하기 위해 지속적인 저금리 정책으로 대응을 하면서 전세계 경제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불량자산을 Fed가 직접 매입하면서 반대급부로 달러가 시중에 풀려나가는 양적완화(Quantitative Easing;QE)정책을 지속하면서 중앙은행은 사실상 금융통화정책의 기능을 잃어버려 중앙은행의 경제에서의 역할에 대해 논쟁이 일기도 했습니다.

현재 Fed가 침체가 아닌 경기과열과 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로 금리인상을 추진하는 것도 경제에 대응하려는 이유도 있지만 중앙은행의 원래 역할을 되찾아야 하는 정치적 이유도 있다고 봅니다.

양적완화와 그로 인한 저금리에 길들여진 실물경제는 Fed가 과도해진 자산을 줄이기 위해 테이퍼링 (Tapering)에 대한 구두개입을 할때마다 긴축발작(taper tantrum)을 일으키는 등 부작용을 일으켜 왔다는 건 2007-2009년 대침체이후 보게되는 현상입니다.


저는 2000년대에 일어난 가장 중요한 두가지 경제적 사건을 뽑는다면 지금 소개하는 책이 이야기하는 ‘2007년 금융위기 ‘가 하나고 다른 하나는 2020년 전세계를 강타한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COVID-19 Pandemic)’입니다.

여기에 최근 발생한 우크라이나 전쟁(Ukraine War)을 뽑을 수 있겠네요.

2007년의 금융위기로 사실상 신자유주의 경제학이 종말을 고했습니다. 경제를 기업가와 CEO에게만 맡길 수 없다는 걸 미국 월가가 박살나는 걸 보며 알 수 있었습니다.
금융이 실물경제가 동떨어져 스스로 아윤만 추구하다 시스템 자체가 작동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세금으로 구제되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기업이 사회에 볼 도움이 안되고 결국 정부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점이 명확해졌습나다. 작은정부로는 대처할 수 없는 재난이었습니다. 이 재난은 아직도 완전히 종식된 건 아니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코로나 팬데믹은 ‘세계화(globalization)’라는 신자유주의의 쌍둥이 체제 역시 종식시켰습니다.

멀지만 임금이 싸고 생산력이 좋은 나라에 공장을 짓는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 되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같은 재닌싱황에서 국경이 봉쇄되면 이 모든 일은 부질없는 일이 되니까요.

오히려 중요한 공장은 자국에 지어야 공급망 ( supply chain)의 회복력(resilience)을 담보할 수 있고 공급망이 끊어졌을 때 ( supply chain disruption) 경제적 안보를 지킬 수가 있습니다.
반도체를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바로 경제안보와 관련된 국가간 이익을 보는 입장차이를 보는 가장 좋은 최근의 예입니다.

한미동맹이 한국의 안보의 고갱이라고 하지만 그 하나만 보기엔 상황이 너무 복합적이고 가변적입니다

당장 미국이 진행하는 태이퍼링은 한국에도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칩니다. 양적완화라는 사실상 돈을 찍어 유동성을 공급하는 극단적 금융정책의 발단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알려면 다시 2007년 미국의 부동산 시장과 채권시장으로 돌아가 복기해 보는 것 이외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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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반도의 북쪽 요동땅의 압록강( 鴨綠江)과 두만강(豆滿江) 유역에서 살던 여진족(女眞族)과 조선의 대외관계를 연구한 책입니다.

저자의 박사학위 논문을 출판한 책으로 260쪽에 이르는 작은 책입니다.

한국사람들은 아직도 소중화(小中華)의식이 남아 있어서 그런지 만주땅이나 요동지방, 연해주 지방을 포함하는 한반도 북부 스텝지역의 유목민족들에 대해 인종적 편견이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중세, 근세사는 물론이고 일제 강점기 당시 만주국에 대한 연구서도 손에 꼽을정도로 적습니다.

하지만 만주땅의 경제개발계획이 이 땅에서 거의 그대로 재현되었고, 구한말에 청나라는 일본과 조선에서 이권다툼을하고 조선의 주권을 유린한 당사자였습니다.

한석정교수님의 ‘만주모던(문학과지성사,2016)’이 박정희 정권에 미친 만주국의 영향을 고찰한 책이라면, 정영숙교수가 쓰신 ‘고종44년의 비원(너머북스,2010)’은 구한말 고종 재위시의 정치사를 총체적으로 개괄한 책입니다.

동학농민혁명을 진압하지 못해 청국을 끌어들인 고종의 결정은 결국 당시 청의 북양대신 (北洋大臣)이던 이홍장(李鴻章)과 사실상 중국의 대사자격으로 조선에 주재했던 원세개 (袁世凱)의 노골적인 내정간섭을 초래했고 결국 청일전쟁으로 귀결되는 비극을 맞이합니다.

청을 세운 누르하치(努爾哈赤)는 이책의 마지막 6장에서 소개되는데 압록강 유역에서 활동하던 건주여진(建州女眞)출신의 정치지도자입니다.

한국학자가 한국어로 저술한 누르하치의 평전은 아직 없습니다. 다만 중국학자가 저술하고 번역된 누르하치의 평전으로 이 책은 대청제국(大淸帝國, ᡩᠠᡳᠴᡳᠩ ᡤᡠᡵᡠᠨ 다이칭 구룬) 건국과정을 중심으로 서술된 책입니다.

과문한 지라, 첸제센의 ‘누르하치(돌베개,2015)’이외 다른 누르하치 평전을 본 적은 없네요.

특정 주제보다 통사적으로 청나라의 역사를 서술한 책은 꽤 많은 것 같습니다. 특히 병자호란 당시 청과 조선에 관련된 저서는 꽤 많아 근세 청과 조선의 정치사, 외교사를 어는데 도움이 됩니다.

다시 주제로 돌아와서,
내조(來朝)라는 말의 의미부터 되짚어 봅니다. 이말은 외국의 사신(使臣)이 찿아온다는 뜻과 지방에서 신하가 임금을 알현(謁見)하려 조정(朝廷)에 찿아온다는 말도 됩니다.

즉 ‘여진인 내조’라는 뜻은 조선의 북쪽 두만강과 압록강 주변에 사는 여진족들이 조선의 임금을 찿아온다는 의미입니다.

찿아온 목적은 조선으로부터 경제적 이익을 얻고, 조선으로부터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서였습니다.

위 목적 중 첫번째 경제적 이익은 조선 조정과 조공무역( 朝貢貿易)을 통해 접경지역에서 찿을 수 없는 물건을 구하고 이를 통해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두번째 목적은 이 책의 주제와도 관련있습니다.

즉, 여진족들은 조선과 독자적인 조공-책봉(朝貢冊封)관계를 통해 조선과 여진족 간에 일정의 천자-제후관계를 형성하고 조선의 영향력 아래 정치적 안정을 꾀했다는 말입니다.

저자에 따르면 조선은 임진왜란 이전까지 남쪽에서 쓰시마(對馬島)와 류큐(琉球)와 같은 조공책봉 관계를 맺고 이들의 내조를 허락했습니다.

이책이 커버하는 조선전기는 명나라의 전성시대로 흔히 동아시아는 전통적인 조공책봉관계에 의거 중화주의의 입장에서 명나라와 다른 오랑캐 국가 ( 조선도 포함)들 간의 단일한 중국중심의 외교관계로만 설명되어왔는데, 사료와 연구는 단일한 조공책봉관계로 설명할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임진왜란 이전까지 조선은 명과 조공책봉관계를 유지하며 사대를 지속하는 한편으로 북쪽에서는 여진과 남쪽으로는 일본과 류큐와 조공책봉관계를 맺고 소중화로서 중심을 잡았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대외관계는 조선이 임진왜란으로 일본의 침공을 받고, 건주여진의 누르하치 세력이 커지고 대청제국이 성립되고 병자호란이 일어나면서 모두 바뀌게 됩니다.

책의 6장은 청이 건국하기 이전 누르하치가 조선이 국경방어를 위해 두만강유역에서 복속해온 여진족 부락인 번호(藩胡)를 어떻게 쇄환 (刷還)하는지의 과정을 설명합니다.

건주여진의 누르하치가 두만강 유역의 여진족을 통합시키고 이후 산해관 (山海關)을 넘어 명을 멸망시키게 됩니다.

이전에 소개했던 계승범 교수의 ‘모후의 반역 (역사비평사,2021)’에서 조선이 사대를 하던 명을 버리고 살기위해 병자호란이후 청과 조공책봉관계를 맺었다고 했습니다.

국내정치적으로 집권 서인 세력들은 유일한 천자(天子)로 받들고 책봉을 받아온 명을 버린 것으로 조선왕가의 정통성을 스스로 버린 셈이 되었습니다.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 쿠데타 세력이 광해군을 폐위한 주요 명분중 하나인 배명(背明)을 스스로 저버리는 아이러니에 직면한 것입니다.

좀 더 긴 역사적 기간을 보면 병자호란의 패배로 조선 태조 이래 조선왕실로 내조 (來朝)를 해오던 여진족 오랑캐에게 무릅을 꿇고 이들을 천자로 다시 관계를 맺어야하는 기막힌 상황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중국 천자(명)-조선-여진의 관계에서

여진 천자(청)-조선의 관계로 완전히 상하주종관계가 뒤바뀐겁니다.

이런 상황으로 정당성을 상실한 조선의 근본주의적 성리학(fundamental neo-Confucianism)이 점점 사회를 등한시한 체 사변적으로 변해가게 됩니다.

조선이 여진과 맺어온 조선중심의 ‘조공책봉’관계가 잘 작동하고 별 문제가 없어 한 수 아래로 보던 오랑캐 여진족에게 힘으로 역전당하는 굴욕을 맛보았으니 잘못을 시인할 수도 없고 내부로 침잠할 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상업과 공업을 천시하고 군사력 향상을 도외시한 성리학이 조선 국력 약화에 일조한 것은 분명합니다.
또한 사회구조상 조선의 사대부의 물질적 삶을 노비계급에 의지해야 하는 형편이라 경제적으로도 자생눙력이 없는 계급이 사대부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심지어 조선사회를 노예제 사회라고 주장한 미국의 학자도 있을 정도니 말입니다. 조선인구의 약 30%가 노비였고 이들이 없으면 사대부들이 책만 읽는 건 불가능했다는 말입니다.

즉 사대부는 명분만 있고 실리는 챙기지 않은 의식구조를 갇진 계급인 겁니다.
따라서 오랜기간 억압받았던 피지배층이 장기적 관점에서 19세기에 일으킨 농민 반란과 서북지역의 민란은 발생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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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의 모후(母后)는 임금의 어머니를 뜻하는 말로 이 책에서는 조선의 15대 임금 광해군(光海君)의 계모이자 광해군의 아버지이자 조선 14대 왕 선조(宣祖)의 두번째 왕비인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제목에 따르면 모후의 반역이라 하는 말은 서궁에 유폐(幽閉)되었던 인목대비의 반격이라는 의미로 즉 인조반정( 仁祖反正)을 의미합니다.

계승범 교수의 이 책은 광해군의 집권 시기를 다루는 정치사로 광해군이 왜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했는지를 밝히고 있으며 굉해군 정권을 쿠데타로 무너뜨린 능양군(인조)의 반정이 17세기 이후 조선후기라고 명명된 기간동안 조선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분석합니다.

계승범 교수의 이전 저서인 ‘중종의시대(역사비평사,2014)’에 따르면 조선에 왕위찬탈(王位簒奪)로 볼 수 있는 쿠데타는 총 4번으로 첫번째가 조선초 태종 이방원이 일으킨 왕자의난에 따라 아버지 조선태조 이성계의 왕위를 빼앗은 것이고, 두번째는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은 수양대군, 즉 세조의 욍위찬탈입니다.

이 첫 두번의 쿠데타는 태종의 것은 조선 건국초에 일어난 것으로 별 비난을 받지 않았고 세조의 쿠데타는 유교화가 어느정도 지난 상태에서 일어나 지탄의 대상이 된 쿠데타였습니다.

16세기가 들어서 일어난 중종의 쿠데타, 즉 중종반정( 中宗反正)은 폭군 연산군의 왕위를 빼앗은 것으로 연산군의 폭정으로부터 별 무리없이 정상적인 ‘바름으로 돌아간다’는 말에 걸맞게 정당화되었습니다.

15세기까지 양반과 상민의 구별이 뚜렷하지 않았던 조선사회는 중종당시인 16세기부터 사대부라는 관인계급이 등장하면서 조선은 급속히 유교근본주의 사회로 진화합니다.

하지만 사대부계층은 유교경전만 읽고 주희의 성리학을 절대시 하면서 상업과 공업을 무시하고 군사를 중요하지 않게 생각합니다. 경제적 현실주의 따위는 생각하지 않는거죠.

거기에 명나라와의 사대(事大)만을 절대적으로 생각하며 스스로 명의 번국 (藩國)을 자처해 조선왕들은 권위를 명의 책봉(冊封)에 의존하게 됩니다.

이렇게 집권 사대부 계급이 유교 근본주의에 빠져 현실적 생각을 등한시 하던 16세기 말 동아시아를 뒤흔든 국제전쟁인임진왜란이 터지고, 군사적 방비가 전무했던 조선은 왜(倭)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밀리게 됩니다.
무능력하고 소심한 환란을 맞아 조선 땅을 버리고 선조는 중국의 요동(遼東)으로 망명할 생각만 하고 이 와중에 광해군은 세자로 임명됩니다.

명의 책봉도 못 받은체 임진왜란 당시 선조의 권력을 일부 이양받아 전란으로 어지러운 나라를 이끌어야 했던 사람이 당시 세자였던 광해군이었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도 광해군을 견제했던 선조는 적자를 볼 요량으로 새 장가를 드는데 이 사람이 인목대비입니다.

40년 이상 나이차이가 나던 왕과 왕비 사이에 적자가 태어나는데 선조는 적자가 아닌 광해군에게 보란 듯 젊은 왕비도 둘이고 60이 넘은 나이에 적자를 보게 됩니다.

역사상 보여지는 선조라는 임금은 능력이 없으면서도 권력욕은 강하고 자식인 광해군에게 평생 상처를 주면서도 이를 모르는 무심하고 먼 아버지였던 것 같습니다.

권력 유지를 위해 자신의 어린 이복동생(8세)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강화도에 위리안치( 圍籬安置)시키고 죽게 만들었고 계모인 젊은 어머니를(9세 연하)를 서궁에 유폐시키고 대비(大妃)라는 왕후의 지위에서 강등시켜 어머니 자격을 박탈한 폐모(廢母)론은 이야기 자체가 가지는 폭발력 덕분에 많은 사극의 소재가 되어왔고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광해군과 인조 당시의 조선은 몇가지 눈여겨 볼 대목이 있습니다.

첫째, 광해군이 집착적으로 자신의 왕권에 위협을 가할 수 밖에 없는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할 수 없었던 것은 적장자가 아닌 광해군이 임진왜란이라는 환란의 시기를 지나고 불안정한 조선에서 상황에 떠밀려 왕이 된 이유가 크고, 조선 왕으로는 드물게 명으로부터 세자 책봉을 받지 못한체 왕이 된 첫 케이스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왕권이 불안정하다는 걸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고 광해군은 불안정한 왕위를 지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했습니다.

두번째, 성리학의 관점에서 역모를 모의한 경우 비록 부모라 하더라도 역적으로 처벌이 가능하다고 인정되어 왔으나 조선의 경우 인조반정을 계기로 부모에 대한 효가 나라에 대한 충을 앞선다는 경직적 성리학 근본주의가 자리잡는 계기가 됩니다.

성리학에서 볼때 충과 효 중 어느 가치가 더 중요한지 논쟁할 수 있는 대상이었으나 인조반정을 계기로 조선에서 효는 충을 뛰어넘는 절대 가치로 교조화하고 이는 조선후기를 규정짓는 경직적인 성리학 근본주의로 귀결됩니다.

셋째, 따라서 필연적으로 성리학은 효에 우선순위를 둠으로서 더 철학적 사변적 심리적인 면을 강조하게 되고 나라의 운영을 포함하는 좀 더 사회적인 의미의 충이 우선시되지 않아 군주권이 신권에 밀리며 조선 말 세도정치를 비롯한 각종 폐단을 가지고 오게 됩니다.
그 시작이 인조반정입니다.

넷째, 광해군의 배명(背明)적 외교정책과 인목대비 서궁유폐를 말하는 폐모(廢母)를 명분으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인조는 병자호란에서 청에게 패해 청에게 사대를 하게 되면서 광해군을 공격했던 배명의 명분을 잃게 됩니다.

성리학 근본주의가 인간의 내면 수양을 중시하고 현실을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는데다 상업과 군사를 무시하기 때문에 군대양성을 소홀히 하는데다 몰역사적이고 비현실적이게도 오로지 명나라 황제만을 천자(天子) 로 인식하는 경직적 사고를 가지고 있어 기마부대가 우수한 유목민족 출신인 청의 현실적 힘을 애써 무시한 것도 병자호란에서 패배하게 된 원인으로 생각됩니다.

현실적 외교와 군사력 강화가 근본주의적 성리학적 사고 앞에는 불가능했고 필연적 결과를 삼전도에서 항복하면서 인식하게 된 겁니다.

명을 배반하고 청과 화친했다고 쿠데타를 일으켜 광해군을 폐위해버린 서인을 비롯한 척화파 세력들은 병자호란에서 져 ‘오랑캐’인 청국에게 항복하고 살기 위해 군신관계를 맺어 광해군이 행한 배명보다 훨씬 더한 배명을 행하게 됩니다

다섯째, 그 결과 배명은 사라지고 폐모만 남아 광해군은 어머니를 폐한 천륜을 저버린 군주로 남게되고 사대의 대상인 명이 멸망한 후애도 명에 대한 사대를 계속하는 조선중화주의 혹은 소중화주의라는 지극히 ‘분열적인’사대의식이 조선에 남게 됩니다.

충격적이게도 명에 대한 사대의식은 19세기 말 고종 때까지 이어졌는데 이해하기가 어려운 현상입니다.

명을 배반하지 않는 제후국이라는 자기 최면하에 멸망한 지 200년이 넘은 나라를 위해 의식을 치루고 중국 한족이 보기에 동쪽 오랑캐중 한 나라인데도 스스로 ‘소중화’로 여기고 있고, 청과 다시 책봉관계를 유지하는 상황은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조선 사대부 스스로 청의 만주족들이 ‘오랑캐’라고 여기면서도 현실적 필요에 의해 사대와 책봉관계를 유지하고 거기다 다시 망한 명에 대한 의례를 200년 넘게 지속하고. 얼마나 이율 배반적인 나라인지 모르겠습니다.

조선 전기와 중기 정치를 읽기 전에는 몰랐는데, 조선의 성리학적 근본주의 그중에서도 인조반정 이후 조선후기 버전은 조선의 역사에 별 도움이 되지 않은 탁상공론에 불과하다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부모 자식간의 관계가 천륜(天倫)이라고 주장하면서 왕권보다 신권을 우선하며 국가의 녹을 먹으면서도 국가에 대한 충의(忠義)는 중요하지 않게 여기고, 본인은 일 안하고 책만 읽고 일은 모두 노비가 하고, 즉 노비가 없으면 경제적 기반을 만들 수없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노비의 수는 계속 늘어가게 되는 상황을 방치하고, 노비는 국방의 의무가 없기 때문에 군사력도 계속 감소하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즉 사대부 수가 늘어날수록 노비 수가 늘어나고 군사력은 약화될 수 밖에 없는 사회구조가 만들어 질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인조반정을 일으킨 세력들과 그후예들이 병자호란을 거치며 자신들의 거사를 정당화하기 위해 자신들이 저지른 ‘배명’을 숨기고 광해군을 희생양 삼아 인목대비의 폐모를 더욱 강조할 수 밖에 없었고, 이는 충과 효라는 두 중요한 가치에서 효를 더욱 절대화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효가 충보다 중요해지면서 군신관계가 약화되고 왕권이 약화되어 조선후기는 신권정치로 점철됩니다.

사변적 성리학이 성행하고 스승으로서의 군주상이 요구되고 이에 부합하는 걸로 알려진 성리학 군주 정조이후 학자적 자질이 정조보다 떨어지는 군주들이 등장하자 조선의 정치는 외척의 손아귀에 떨어지게 됩니다.

주자의 성리학이 최초의 유학에 비해 근본주의자이지만 충과 효라는 두 가치가 서로 상보적이고 경쟁적이며 군주의 통치에 있어 충이 효을 앞설 수 있는 것인데도 조선에서 17세기 인조반정이후 효는 반정 세력이 생존의 필요에 의해 경직적 성리학을 추구하게 되고 누구도 효가 충을 앞선다는 주장에 반론을 제기할 수 없게 됩니다.

끝으로 이책의 장점을 몇가지 말하고자 합니다.

첫째, 실증적 근거에 제시해 주장을 전개합니다.

둘째, 조선의 사료뿐만 아니라 중국측 사료까지 같이 설명하기 때문에 조선과 명과의 책봉관계를 좀더 면밀하게 재구성할 수 있으며 인목대비 폐위 논쟁에 대한 중국의 전거를 따로 정리해서 이해하기 쉬웠습니다.

셋째, 이전의 연구들을 면밀히 검토하고 비평하며 구체적인 연구와 주제를 정합니다.

넷째, 인목대비의 서궁유폐에 대한 당시 정치적 역학관계를 대해 종합적으로 저술한 첫 한국어 연구서입니다.

인조반정의 직접적 원인 중 하나인데도 여태 독립된 주제로 연구가 되지 않았다는 건 충격적입니다.


다섯째, 조선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 당시 중국의 나라인 명과 청에 대해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새삼 느낍니다. 중국의 경우 조선 당시만이 아니라 사서와 당시 사대부들이 인용한 경전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고 경전이해를 위해 필수적으로 춘추전국시대에 대한 이해도 필요합니다.

중세 근세사에 있어 중국의 영향력은 절대적입니다. 중국의 역사와 유교에 대한 이해없이 조선은 이해가 불가능한 과거입니다.

근래 중국을 무시하고 폄하하는 일부 목소리는 매우 우려스럽습니다.

미국과 길게 잡아야 1860년대부터 교류를 시작했다면 중국과의 교류역사는 그 수십배에 달하는 긴 기간입니다. 수천년을 헤아립니다. 조선만 따져도 500년 입니다.

한국은 중국을 단순히 최대 교역상대국이라는 표면만 볼 입장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몰역사적인 시각을 가진 것이 분명한 집권층의 시각을 자주접하게 되어서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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