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의 박사학위 논문을 출판한 책으로 결론 포함 총 5장으로 이루어진 학술서입니다.
연구에 해당하는 시기는 무신정권 붕괴이후 몽골이 고려의 국왕권을 실질적으로 제약하기 시작한 원종이후 공민왕 통치기까지입니다.
고등학교 국사시간이후 고려의 정치사에 대한 책은 사실 처음 본 셈입니다.
이책의 핵심주장은 고려의 국왕 통치권이 몽골에 복속하고 몽골의 부마국이 되면서 국왕권의 위상이 복합적으로 바뀌었고 그에 따라 전제주의 왕권국가에서 절대적이던 고려의 왕권이 약간 변용된 동아시아적 화이론 (華夷論)에 따라 몽골을 중국의 황제으로, 고려를 몽골의 한 제후(諸侯)국으로서 상정해 사대하고, 몽골은 몽골이 지배하던 다른 울루스 (ulus,칸국; 汗國)과 마찬가지로 고려를 대하면서 실질적으로 고려의 왕을 정하는데 실질적인 결정권을 가지게 됩니다.
고려의 신료들은 고려의 절대왕권이 몽골황실과의 관계에 따라 변화하자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변화한 정치환경과 구조를 이용하기 시작합니다.
전통적인 동아시아의 책봉(冊封)관계에 더해 유목민족 특유의 부족간의 결합 혹은 가문과의 결합이 중요해집니다.
외교적으로만 의미가 있고 내치에 관여하지 않는 일반적 책봉관계에서 몽골-고려의 책봉관계는 사실상 몽골이 고려의 국내정치를 좌지우지하는 실질적 책봉 관계로 변화합니다.
아마 한국의 역사에서 외부의 세력이 직접 국내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결정권을 가졌던 시기는 이책에서 설명하는 고려의 몽골 복속기 그리고 19세기 고종 연간 청의 원세계(袁世凱)와 북양대신 (北洋大臣) 이홍장 (李鴻章)이 조선에 내정간섭을 한 시기가 유일하지 않나 싶습니다.
충열왕은 무신정권기 약화된 왕권이 몽골 복속이후 사실상 몽골황실의 결정에 따라 이루어지는 경험을 하고 그 자신 몽골에서 숙위(宿衛)생활을 통해 몽골의 관습을 경험하고 몽골의 황제권에 기대 고려의 왕권을 회복하려 합니다. 이를 위해 당시 몽골 황제이던 쿠빌라이 칸의 부마(駙馬)가 되기를 요청합니다.
이에 더해 충렬왕은 몽골이 일본원정을 위해 고려에 설치한 몽골의 관청인 정동행성(征東行省)의 승상(丞相)직을 겸임합니다. 고려의 왕이 고려 지역을 총괄하는 몽골관청의 수장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왕권을 몽골의 황제권력에 의지해 강화하다보니 부작용이 나타납니다.
몽골의 황제는 자신의 책봉권을 사용해 고려의 왕을 폐위시키고 복위시킵니다.
충렬왕 다음의 왕인 충선왕은 몽골황실 공주 출신 부인과의 불화로 몽골로부터 고려왕으로 책봉 받은 지 7개월만에 폐위를 당하고 충렬왕이 복위됩니다.
충선왕은 충렬왕 사망 이후 다시 복위되어 친몽골적인 통혼제도를 받아들인후 제위를 이어가게 됩니다.
이러한 현상을 중조 (重祚)라고 하는데 두번째 왕위를 나아간다는 뜻으로 조선시대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왕을 폐위시키고 복위시키는 과정에서 몽골 황실의 힘을 체감한 고려의 신료들은 고려의 국왕권에 도전하는 방식으로 간언(諫言)이외에 몽골황실에 직접 고하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신료들은 유목국가애서 가문간의 통혼관계가 중요하다는 걸깨닫자 직접 몽골 황실에 줄을 대기 시작합니다.
고려의 왕실이 몽골 황실과의 통혼을 통해 권력을 얻었다면 신료들도 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이고 이는 고려 국내정치에서 고려 왕실과 경쟁하는 집안들이 많이 생긴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공민왕 당시 몽골의 황후였던 고려 출신 기황후( 奇皇后)를 배출한 기씨집안이 고려 왕실인 왕씨 집안에 대한 대항세력으로 떠오른 것도 몽골제국- 제후국간의 특수한 관계, 즉 가문사이의 관계에 기인한 것입니다.
몽골황실이 고려왕실의 후계자인 세자를 몽골에 인질로 잡고 사실상 후계를 정하고 고려의 왕들은 몽골에 상주하며 고려의 내정을 통치하는 독특한 방식을 취합니다.
고려왕이 고려를 비운상태에서 중요한 정치관련 문제를 몽골 현지에서 전결하는 특유의 방식인데 국정운영에 문제가 없었다고 합니다.
고려 공민왕과 기황후의 경우 사극을 통해 알려진 인물들인데 특히 기황후는 공민왕을 폐위시키고 기씨 출신으로 고려왕위를 이으려 했던 인물로 특히 고려 출신 몽골 황족이 미천한 신분으로 몽골 황위를 잇기 어렵다고 생각하자 자신들의 배경을 위해 고려왕위를 노린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공민왕 당시가 중요한 이유는 몽골제국이 해체되어가고 명이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공민왕은 몽골의 쇠퇴를 감지하고 실제 그렇게 양상이 전개되자 몽골황실의 영향력을 차단하고 고려의 왕권을 회복하려 노력했으며 기황후 일족인 기철(奇轍)을 왕권에 도전한 역모세력으로 처단했습니다. 기황후는 공민왕을 폐위하려 했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공민왕은 신진세력인 명나라와 새로운 사대관계를 맺어 몽골복속기를 끝냅니다.
공민왕의 후사문제는 이후 조선왕조를 일으킨 신흥세력의 역모에 대한 한 원인이 됩니다.
소략하게 내용을 정리했습니다.
박사학위 논문에 기반한 책이기 때문에 딱딱하리란 선입견과 달리 술술 읽힙니다.
다만 같은 내용이 자주 반복되는 건 흠입니다.
사료의 경우도 전통적인 한문사료인 <고려사>,<고려사절요>,<원사> 뿐만 아니라 <몽골비사 >,<부족지>등 몽골, 이슬람 자료를 활용했습니다.
맹목적인 민족주의 내지는 대외저항을 강조하는 호국적 입장보다 당시 정치권의 권력구조와 의사결정 과정을 면밀히 살피고 실제 무슨일이 일어났을지 검증해나가는 과정이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몽골에 관심을 가지다가 당시 한반도에 어떤 왕조가 있었나 매치하다 보면 고려를 만나게 됩니다.
몽골을 서술한 다른 역사서도 간략하게나마 고려에 대한 서술이 나오지만 몽골과 관련된 여러 국가들 중 하나일 뿐이기 때문에 한번은 고려에 대한 책을 읽을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13세기 유럽인들의 몽골선교여행에 대한 기록으로 ‘몽골제국기행(까치, 2015)’를 소개합니다. 서구에 몽골을 소개한 대표적인 사료로 알려진 기록입니다.
시간순서로 따진다면 이책보다 이전세대의 이야기로 주로 몽골이 러시아와 폴란드 그리고 흑해지역과 서아시아로 확장하던 시기의 이야기입니다.
시기적으로 몽골은 서쪽(유럽과 러시아)과 남쪽(남송)경략이 마무리 된 후 동쪽의 고려와 일본을 침략한 것으로 보입니다.
또, 인정하기 싫지만 고려는 사실상 몽골제국의 속국으로 독립국가로 보이지 않습니다.
전제국가인 왕조국가에서 국왕이 후계자를 자신의 뜻대로 정하지 못하는 건 사실 주권이 박탈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몽골과 오랜 항몽전쟁을 한 것으로 배웠는데 배운 것과 역사적 사실은 전혀 다릅니다. 좀 충격입니다. 고려에 대한 대중 역사서가 좀더 많이 출판되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애국’을 강조하는 국수주의적 보수 사학계에서는 인정하기 싫은 불편한 역사적 사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병탄(倂呑)까지는 아니어도 옛 소련처럼 하나의 정치연합체로 몽골과 고려가 100여년간 서로 얽혀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보입니다.
앞으로 몽골관련 책에서 한문으로 표기된 명칭과 몽골 고유의 명칭을 병기해서 표시를 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해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