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디올로지 - 몸이 말하는, 말하지 못한, 말할 수 없는 것
이유진 지음 / 디플롯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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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4월 출간된 책으로 한겨레 기자이신 이유진님이 쓰신 책입니다.

사회학, 여성학, 문화학을 공부하신 저자께서 여성의 입장에서 근대이후 서구와 한국에서 논의되었던 몸(body)에 대한 담론의 사회사를 정리하신 책입니다.

백인 이성애자 남성의 시각에서 보여진 여성과 유색인종 그리고 비인간(non-human)을 바라보는 시선의 정치학을 담았습니다.

백인 이성애자 남성의 시각에서 바라본 여성의 몸이 대상이라는 점에서 이책의 첫 세개의 장이 ‘가슴’, ‘엉덩이’, ‘각선미’인 것은 의미심장한 배치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근대이후 백인 이성애자 남성이 각 인종의 위계를 결정지은 체질인류학(Physical Anthropology) 및 우생학(Eugenics)의 관점에서 여성을 인간이외의 동물들과 함께 주체(subject)가 아닌 대상(objective)로 위치짓고 열등한 존재로서 인식해왔다는 점에서 첫번째 세개의 장에서 설명하는 가슴 엉덩이 각선미는 남성적인 시선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신체부분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과학이 객관적이라는 신화는 초기 과학자들이 거의 대부분 백인 남성들이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고, 과학발전의 시기가 서구의 제국주의 팽창기와 일치한다는 면에서 객관적일 수가 없지만 ‘과학은 객관적’이라고 배워왔습니다.

서구의 직선적인 역사발전론이나 피부가 하얀 백인종이 가장 우월하다는 피부색깔에 따른 우열은 사실 서구 백인 남성들의 생각일 뿐 아무런 객관적 증거가 없는데도 마치 당연한 사실인 것처럼 알려져 왔습니다.

서구 백인 남성들은 서구의 여성들을 ‘대상’으로 바라보는 관음적인 시선을 유지해 왔다면 비서구, 즉 중동이나 아시아의 국가들도 모두 ‘여성화’하고 ‘대상’으로 바라보았으며, 백인 남성들에 비해 열등한 존재로 여기고 ‘문명화’의 대상으로 여겼고, 이교도의 세상인 이 비서구세계에 기독교를 전파해서 문명을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올랐습니다.

그리고 이런 이유는 중동과 아프리카 아시아의 여러나라들을 식민지로 만드는 행위를 정당화했고, 이어 침략전쟁을 시작했습니다.

믿을 수 없지만 유럽에서는 박람회에서 아프리카나 아시아 등 비서구 지역에서 온 사람을 ‘전시 대상’으로 정리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고, 이들 희생자들 중 죽어서 자연사 박물관에 박제가 되어 전시되는 경우까지 있었습니다.

기본적으로 근대의 서구의 세계관이 생명체를 기계와 동일한 것으로 생각했고,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보았기 때문에 백인 이성애자 남성이 아닌 모든 경우는 다 자연의 일부로 정복을 해도 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민주주의가 시작된 고대 그리스에서도 투표권을 행사하는 이들은 노예가 아닌 성인 남성뿐이었고, 여성들과 시민이 아닌 자들은 모두 제외되었습니다.

서구에서 백인여성들이 참정권을 행사하게 된 것은 놀랍게도 근대기 지난 지 한참 지난 19세기 말에 이르러서입니다.

서구의 절대적 가치인 양 선전되어오던 대의제 민주주의와 선거도 바라보는 주체가 남성인지 여성인지, 백인인지 유색인인지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페미니즘을 지지하지는 않지만 공동체의 일원이자 가족으로서 남성과 여성이 동등해지고 차별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서로의 차이를 아는 것이 이해의 첫걸음이라고 생각하는데, 요새 매체를 통해 바라본 여성혐오정서와 여성차별은 그 임계를 넘었다고 생각합니다.

정치가 기본적인 국민의 삶을 생각하지 않고, 정치적 이익을 위해 여성혐오와 갈라치기를 당연시하고 있는 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대의민주주의 체제의 나라에서 국민을 대표해서 정치를 하겠다는 후보가 남성과 여성을 차별하고 여성혐오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 자체가 정치인으로서 자격미달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윤석열 정부에서 추진한 여성가족부 해체는 여성국민을 무시하는 파렴치한 정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술을 좋아하는 권위적인 검사출신 대통령은 여성을 남성과 다른 열등한 이들이라고 생각하는 건 합리적 의심입니다. 그래서 ‘보수’라는 이름을 달고 나와서 ‘차별’과 ‘홀대’를 정책으로 내세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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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tional Populism : The Revolt Against Liberal Democracy (Paperback)
Roger Eatwell / Penguin Books Ltd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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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나온 포퓰리즘(populism)입문서입니다.

영국 Penguin 출판사의 자회사인 Pelican에서 일반인대상으로 문고판으로 2018년 출간된 책입니다. 제가 알기론 Pelican 문고판이 이전에 발간되다 중단되었는데 이후 다시 재발간을 결정하고 나온 문고 시리즈 중 하나입니다.

책은 본문 292쪽이고 결론포함 총 7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저자들은 흔히 우리가 생각하듯 포퓰리즘이 파시즘(Fascism)과 유사하고 인종주의적(Racism)이며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Liberal Democracy)의 일시적 일탈현상이라는데 동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21세기의 상당부분 이 포퓰리즘이 계속될 것으로 봤습니다.

이책의 분석대상이 미국과 유럽 특히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서구유럽이지만 한국도 그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지난 30여년을 지배해온 신자유주의(neoliberalism)와 세계화(globalization)의 여파, 그리고 이로인한 빈부의 양극화(polarization)와 2008년을 강타한 금융위기 (Financial crisis)와 1929년 대공황을 방불케 한 공황 (The Great Recession)이 미국과 서구를 강타했고, 이런 상황이 포퓰리즘 발흥의 환경적, 역사적 조건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책은 크게 4가지 요인을 포퓰리즘이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를 압도하게 된 이유로 꼽습니다.

첫째, 불신 (Distrust). 이 요인은 대의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체제가 사실 일반국민들을 제대로 대표하지 못하는데 기인합니다. 대체로 공부를 많이 한 엘리트들이 의회에 진출하는데 이들은 대학을 진학하지 못한 일반 노동자들이나 평범한 농민들을 대변하지 못하고 추상적인 페미니즘, 동성애 옹호(LGBT)등을 옹호하는 한편, 자신들의 전통적 기반인 노동자들의 지지보다는 대학을 졸업한 중산층 전문직들의 지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런 현상은 대표적으로 영국의 노동당(Labour)과 미국 민주당(Democrat)에 공통적으로 나타난 현상입니다. 전통적으로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하던 정당이 자신들을 더이상 대변하지 않고,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수 없게되자 대안으로 떠오른 포퓰리즘 정당으로 지지를 옮긴겁니다.

즉 파워엘리트 카르텔과 기층의 노동자를 비롯한 일반국민들 사이의 괴리감에서 이런 문제가 생긴겁니다.

두번째는 파괴(Destruction)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즉 자신과 조상들이 살아왔던 사회의 관습과 문화가 밀려드는 이민자들로 파괴될까 두려운겁니다.

미국과 서유럽으로 한정한 이 책에서 이런 자신들이 살아온 나라의 역사와 문화가 파괴될 염려는 아프리카와 서남아시아로부터의 대량이민과 난민의 유입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이슬람 인구가 늘어나는 건 서구사회의 정체성에 대한 위협으로 보고 있고,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테러로 인해 이들을 더욱 경계하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런 대규모 이민과 난민유입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따라 촉진된 경우인데, 유럽에서는 이들의 대량유입이 국가정체성을 위협할 뿐 아니라 대학을 진학하지 못한 저숙련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위협한다고 우려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도 세계화로 인해 미국의 공장들이 노동력이 값싼 멕시코나 아시아, 중국으로 빠져나가자 민주당의 전통적 지지기반이던 공업지대(Rust Belt)의 노동자들이 민주당에 대한 지지를 거두고 공화당과 트럼프 지지로 돌아선 것입니다. 최근에 트럼프2기 정부에서 미국에 공장유치에 열을 올리는 상황과 맥락이 닿아 있습니다.

이러한 시각은 보기에 따라서 백인 노동자들의 시각을 따른 것으로 상당히 인종주의(Racism)적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저자들은 인종주의라고 낙인찍을 일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세번째는 박탈감(deprivation)입니다. 이는 경제적인 입장에서의 상대적 박탈감( relative deprivation)으로 불평등(inequality)의 심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규제완화의 여파로 부자들은 계속 부자가 되고 가난한 이들은 계속 가난해지는 상황이 지속되것 있습니다.

규제완화와 최소한의 정부를 주장하는 신자유주의적 정책보다 유럽각국의 포퓰리즘 정당들은 정부의 역할 강화와 경제발전의 이익을 직접 보지 못한 소수자들에 영향력을 확대하며 기존의 전통적 좌파정당이 하던 역할까지 포괄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정치적 지지자들의 지지조정 (dealignment)입니다. 즉 한 지역구(electorate)에서의 전통적으로 지지하던 정당의 지지를 철회하였지만 그 대체세력이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경우를 말합니다.

이건 사전적 의미이지만, 예를 들어 미국 민주당의 전통적 지지세력인 공장노동자들이 미시간주같은 지역에서 민주당의 지지를 철회하고 공화당 대선후보인 트럼프를 지지한 경우입니다. 이들은 2016년 미 대선에서 여성과 흑인 등 소수자권리에 집중한 힐러리를 지지하지 않았고, 이유는 엘리트인 힐러리가 노동자의 목소리를 대변한다고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전통적인 지지세력이 떨어져 나가자, 선거는 예측이 불가한 정치행위가 되었습니다. 유권자들이 이번에 특정 정당을 지지했다고, 다음에도 지지하리란 보장은 없습니다. 유럽의 사민주의( social democrat)정당들이 전통적인 지지기반은 노동자들의 지지를 포퓰리즘 정당에게 빼앗긴 체 추락하고 있는 상황이 이런 정치적 지지철회 현상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정치의 효용성( effectiveness) 측면에서 볼 때 투표권을 행사해 국민들의 이익을 대변하라는 국회의원이 하라는 대의정치는 안하고, 자신의 이익만을 도모하거나, 권력만을 탐하거나 일반 국민들의 생각과 다르게 먹고사는 문제는 생각하지 않곳 뜬구름 잡는 소리앗 하고, 많이 배웠다고 국민을 가르치려 들면 국민이 이 국회의원을 탄핵하거나 표로 응장하는게 당연합니다. 대의정치의 테두리에선 그방법이 정당합니다.

하지만 요새처럼 정보도 많고 모든게 이어진 세상에 과거의 유물인 대의정치를 계속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반문해봅니다.

대의정치는 교육을 못받은 대중이 많을 때 엘리트가 대신 합리적으로 공공의 의사결정을 하기 위해 필요한 제도이지, 지금처럼 국민들이 국회의원들보다 더 현안파악과 정세파악이 빠른 상황에서는 오히려 국회의원이 할 역할이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는 방식이 어떻든 국민의 의사를 정치에 반영하면 그뿐이지 효용감없는 국회의원을 왜 선거에서 뽑아야 하는지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됩니다.

포퓰리즘이 부정적인 측면이 있지만 국민의 목소리를 대변하지 못하고 있는 의원들에게 대안이 있다는 점을 간파한 건 분명히 민주주의의 본질에 부합한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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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부터 짬짬히 읽어오던 책을 오늘 완독했습니다.

2020년에 구입한 2013년도에 출판된 책을 이제 읽은 셈입니다. 독일에서 독일시를 공부하신 중앙대학교 류신교수가 지으신 책이고, 문학을 공부하신 입장에서 독일의 사상가 발터 벤야민 (Walter Benjamin)의 시각과 일제강점기 소설가이신 박태원 선생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1934)>의 형식을 빌러 쓰신 책입니다.

대도시 서울의 이곳저곳을 산책하면서 느낀 생각과 감상을 현재의 한국문학작품과 벤야민의 저작을 인용하면서 마치 구보처럼 서울이라는 대도시를 관상(觀賞)하는 여정을 따라갑니다.

2025년 시점에서 보면 2013년의 서울은 비슷한듯 하면서도 묘하게 다른 느낌이 듭니다.

강남역 사거리의 삼성빌딩이나 영등포의 타임스쿼어, 그리고 잠실의 롯데월드나 역삼동의 코엑스가 그대로 있지만 말입니다.

책에서 젊은이들로 북적이는 거리로 묘사된 가로수길은 현재 언론보도에 따르면 많이 쇄락했다고 하니 지난 12년의 세월경과를 이를 통해 알수 있는 것 같습니다.

서울에 대해서는 여러관점에서 많은 책들이 나왔지만 제가 읽었던 책들 중 인상깊었던 책 몇가지를 소개합니다.

첫번째는 이책의 모티브가 된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현대적으로 해석했던 책입니다.

조이담지음,구보씨와 더불어 경성에 가다 (바람구두,2005/개정판 2009)

다음은 서울에 남아있는 근대건축물을 건축적 역사적 디자인적 관점에서 미술적 식견으로 관찰한 책입니다.

최예선 지음, 모던의 시대 우리집 (모요사,2022)

또, 지금은 볼 수 없지만 자료로만 남은 근대건축물에 대한 책도 있습니다.

박고은 지음, 사라진 근대건축(HB Press,2022)

이책은 올해(2025) 새로운 판본이 나왔습니다.

다음으로 국문학자의 입장에서 한국전쟁이후 서울의 발전과정을 담은 연구가 있습니다. 역시 서울을 배경으로 한 현대한국문학의 인용이 돋보이는 책입니다.

송은영 지음, 서울탄생기: 1960-1970년대 문학으로 본 현대도시 서울의 사회사(푸른역사,2018)

그리고 마지막으로 문헌학자 김시덕박사의 임장(臨場)관련 첫책입니다.

김시덕 지음, 서울선언( 열린책들,2018).

일제시대로 거슬러올라가는 서울의 도시계획의 속살을 처음 알게해주었던 책으로 영등포의 탄생배경과 을축년 대홍수(1925)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2024년 개정판이 나왔습니다.

개인적으로 10년전 찍었던 사진촬영 경험을 통해 보면 구보나 벤야민의 도시산책과 관찰은 거리에서 사진을 촬영하는 행위와 놀랄만큼 유사하다고 생각합니다.

대상의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바라보는 행위는 사진가가 셔터를 누르기 전 반드시 해야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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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축 소멸 사회 - 압축 성장 대한민국은 왜 복합 위기의 길로 들어섰나
이관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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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에 한겨레출판에서 펴낸 책입니다. 건국대에서 정치학을 가르치는 이관후교수가 <한겨레21>에 연재한 내용을 책으로 묶어낸 결과물입니다.

우선 이책은 윤석열 전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한 12월3일 이후 출간된 책이기는 하지만 2024년 12월 이전의 상황만을 담아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내란’국면을 담아내고 있지는 못합니다.

윤석열정부가 오독(誤讀)한 법치주의 그리고 검사들을 전면에 앞세운 ‘검찰공화국’의 폐해 그리고 검사들의 기소만능주의 등에 대한 언급은 있지만 2024년 12월 3일의 비상계엄선포와 계엄해제 그리고 2025년 4월의 헌재 탄핵판결과 윤석열씨의 파면 역시 담겨있지 않습니다.

단지 2016년의 박근혜 전대통령의 탄핵만 포함되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작가께서 검찰공화국에 대해 상당히 온화하게 비판을 하신 것으로 보이며, 이 책의 재려가 된 칼럼을 쓸 당시에 윤석열 전대통령의 불법적 기습적 ‘계엄선포’까지는 미처 생각을 못하셨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12월3일의 비상계엄은 일반인의 상식을 훨신 뛰어넘는 믿기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검사출신 대통령의 생각은 아무튼 일반인의 그것과 다른 것이고 그가 생각하는 법치도 법의 통치(rule of Law)가 아닌 법에 의한 통치( rule by Law)로서 민주주의와 거리가 먼 검사 및 고위관료들이 ‘우둔한’국민들을 지도한다는 엘리트주의에 쩔은 전체주의적 통치였습니다.

경쟁을 조장하는데다 상위 10%만을 위한 사회가 되다 보니 사회는 나머지 90%를 방치했고, 복지제도마져 미비한 현실 속에 한국은 출산율이 OECD국가 중 최저이고 자살율은 1위인 희망없는 사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포퓰리즘과 정쟁만 일삼는 정치는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관심을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국정을 책임져야할 윤석열 정부는 검사+관료 카르텔과 같은 인적구성을 가지고 외교와 경제처럼 ‘선제적’대응이 필요한 분야에 무능을 보였습니다. 사건이 일어나야 사후처리를 담당하는 검사들과 정해진 틀에서만 관성적으로 움직이는 관료들에게 애초부터 상상력을 동원해야 하는 ‘혁신적’문제해결이나 ‘선제적’해결을 바라는 것 자체가 아마 무리였을겁니다.

50%가 넘을 정도로 어처구니없이 세수예측을 틀린 기재부를 보면서 무능한 정도가 임계점을 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청년들이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어 결혼도 안하고 결혼한 부부가 아이를 가지기 싫어하는 나라에서 여성정책을 총괄하고 여성의 복지를 전담하던 ‘여성가족부’를 폐지하겠다고 하는 비정상적인 정책을 펼쳤습니다.

여성차별을 없애고 여성의 안전을 먼저 생각해도 여성들이 출산을 할지 말지를 알 수 없는데 여성도 아닌 50대 남성들이 나서서 여성가족부 폐지를 주도한 것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여성혐오를 기반으로 정치를 시작했던 청년정치인 이준석씨는 윤석열 탄핵이후 현재 조기대선에ㅜ후보로 출마하면서 여성가족부를 폐지할 것이며 그 이유는 ‘불필요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여성혐오를 기반으로 정치를 시작했으면서 청년의 반인 여성을 무시하면서 어떻게 대선에까지 도전하는지 이해할 수없는 정치인이 이준석씨입니다. 여성입장에서는 윤석열씨만큼 낙선시켜야 할 정치인이라고 생각합니다. 40대치고 시대에 뒤떨어져 있어요.

얼마전 중앙대의 김누리 교수께서 나와 대담하신 내용이 이 책의 내용과 겹칩니다.

한국사회가 승자독식의 소수 엘리트만을 위한 독재적 사회가 된 것은 견고한 ‘엘리트 카르텔’때문이라는 진단이었습니다. 현재와 같이 경쟁을 당연시하는 교육체제에서는 일등을 하던 수재들이 자신보다 공부를 못한 이들을 자신보다 아랫사람으로 보고 자신들이 나라를 이끈다는 선민의식(選民意識)을 가지게 되고 자신들을 특별한 존재로 여기게 된다는 점이고 이는 결국 계급의 상하를 자연스럽게 여기고 독재나 과두정(oligarchy)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입니다.

즉 엘리트 소수만을 위한 사회구조가 정착되면 엘리트가 아닌 다수의 국민들은 물가와 생활고 그리고 치솟는 집값을 감당하지 못하고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고 살아가게 된다는 겁니다. 아직도 엘리트의 주류를 차지하는 50대이상 서울대 출신 남성들은 여성차별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여성을 출신의 도구로만 이해합니다. 그러니 돈만 주면 아이를 더 낳을것이라는 생각에서 한발짝도 나아가지 않고 있고, 여성가족부 폐지에도 별다른 말이 없습니다.

이번에 민낯을 고스란히 보여준 기득권 카르텔 내지 엘리트 카르텔이 깨지지 않는 한 희망을 주는 미래를 보여주지 않는 한 사실상 ‘출신파업’상태인 한국의 현재 상황은 나아지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한국은 정말로 소멸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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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ight Eaters : The New Science of Plant Intelligence (Hardcover)
Zoe Schlanger / HarperCollins Publishers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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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학에 관련된 책을 별로 읽은 기억이 없는데 책표지에 이끌려 읽게 된 책입니다.

데뷔작가인 저자는 환경전문 저널리스트로 일을하다 식물학 관련 최신 논문과 책을 접하면서 식물학에 빠져들게 되고 관련 글을 미국의 여러 잡지에 기고하게 되고 또 미국과 남미 그리고 유럽의 식물학자들을 만나 이야기하고 또 그들의 필드트립에 참여하면서 이 책을 썼습니다.

우선 젊은 데뷔작가가 호기심에 이끌려 직장을 그만두고 바로 전업으로 글을 쓸 수 있는 환경이 부러웠습니다. 한국에서 이렇게 작업하는 게 가능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2024년 미국과 영국에서 출판된 책인데, 저는 영국판으로 읽었습니다.

식물학에 문외한인 제가 봐도 책에는 놀라운 내용이 많습니다. 주로 1990년대부터 2020년대까지 식물학자들의 최신 연구성과가 소개되는데, 우리가 흔히 식물은 수동적( passive)이라는 편견을 깨는 사례가 나옵니다.

예를 들어 식물 중에는 꽃가루 수분을 위해 의도적으로 벌과 같은 곤충들을 유도하는 건 물론이고, 자신과 가까운 친척식물(kin)이 가까이 있을 경우 경쟁을 피해 뿌리와 잎이 의도적으로 친척식물의 잎과 뿌리를 피해 경쟁을 피해 협력( cooperation)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런 협력을 위해서는 소통이 필수적인데 학자들 중 식물간의 소통(communication)을 연구하는 경우도 있는데 서로간 화학물질( chemical components)을 내서 소통을 하는데, 꽃이 내는 향기가 그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그런데 학자들은 식물들은 동물이나 인간과 마찬가지로 의도적으로 소통을 하고 서로 돕는다는 점입니다.

심지어 주변에 있는 식물들과 잎모양과 형태를 그대로 따라 변해 주변 식물과 구별이 불가능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생존을 위한 전략이겠으나 이 책에서 처음 본 경우라 경이롭습니다.

책의 말미에는 인간과 인간의외의 생명채(nonhuman)가 같이 사는 방식을 고민하는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의 논의가 나옵니다.

인간이 생태계의 가장 우월한 존재라는 19세기 유럽식 사고방식이 당연하게 생각되는 현실에서 인간과 같이 지구에서 살아가는 동물의 권리 ( animal right) 뿐만 아니라 식물들도 같은 권리를 누릴 수 있다는 다소 급진적인 견해도 소개됩니다.

사실 식물학 논의에서 시작되었지만, 새롭게 밝혀진 식물의 행동과 소통 그리고 생존방식에 대한 연구결과는 함께 사는 지구에 대한 논의로 이어지며, 권리에 대한 사회적 논의로도 이어집니다.

서구의 참정권(suffrage)는 백인남성에서 백인여성 그리고 유색인종으로 확대되는데, 역사적으로 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했던 (nonhuman)이들의 권리가 확대되온 역사였고, 이런 맥락에서 역시 비인간영역인 동물과 식물의 생존권도 사회적으로 그리고 법적으로 논의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서구의 법률가들이 식물이나 동물들이 개발로 인해 손해를 볼 수 있다면 소송의 당사자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을 하는 대목은 타당하고 논리적인 한편 매우 놀랍다고 생각했습니다.

식물학이 한국에서 별로 주목을 받는 분야가 아니어서 그런지 아직 이 책은 한국어 번역이 되지 않았습니다.

영어판의 경우 식물학에 그리고 식물 분류학(taxonomy)에 불가피한 라틴어 학명이 등장해 매우 곤혹스럽지만 저자가 의외로 라틴어 풀이도 같이 해주고 있어 읽기의 어려움은 없습니다.

생물학 중 특히 진화생물학에 관심이 많았는데 리 책을 통해 다양한 식물학 분야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느학문이나 마찬가지자만 맥락을 알기 위해 역사적인 설명은 불가피하고, 그런 의미에서 과학사나 인류학, 곤충학 등 인접분야의 학자들의 설명과 주장이 같이 들어가 논의가 더 풍부해졌다고 생각합니다.

제목인 ‘the light eater’는 빛을 먹는 생명체로 풀이할 수 있는데 광합성을 식물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으로 파악한 직관적 제목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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