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서양미술 순례 - 창비교양문고 20 창비교양문고 20
서경식 지음, 박이엽 옮김 / 창비 / 199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디아스포라'라는 말로 이 책의 저자인 서경식은 자신을 표현한다. '이산'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이 말은 여기에서도 저기에서도 이방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을 의미한다고도 할 수 있다.

 

재일교포. 서경식의 삶은 이 말로 정리가 된다. '자이니치'라고도 하는데 일본인으로서도 한국인으로서도 살아가기 힘든 사람들의 삶이다. 그런 삶을 온몸으로 겪은 사람들이 바로 서경식의 가족이 아닌가 한다.

 

형인 서승과 서준식이 한국에 유학왔다가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 조작되어 - 감옥생활을 하고, 그는 대학생 시절부터 이런 형들의 구명을 위해 자신의 삶을 살아야 했다.

 

형들을 면회가는 어머니, 어머니를 모시고 가는 누이, 결국 자식들의 석방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신 어머니, 아버지.

 

이런 상태에서 그는 유럽을 여행하기로 한다. 자신의 마음을 어디에도 두지 못하고 있으므로, 변화가 필요했을 터. 유럽 여행을 통해 자신을 추스리려고 하는데...

 

어쩌다가 여행이 미술관 기행이 되어 버렸고, 그 기행을 오랫동안 하게 된다. 미술관에서 그는 자신을 만나고, 자신이 겪어야 했던 현대사를, 가족의 현대사를 만나게 된다.

 

그가 처음 만난 그림은 '캄뷰세스 왕의 재판'이다. 어떤 판사가 형벌을 받고 있는 장면. 그 형벌이 무엇이냐면 껍데기를 벗기는 형벌이다. 형리들이 사람의 껍데기를 벗기고 있는 극히 사실적인 그림.

 

이 그림에서 그는 충격을 받는다. 이 그림에서 자신의 아버지를 연상하는데... 아버지를 연상하는 것은 가족의 비극을 떠올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그는 그림을 통해 자신을 만나게 된다.

 

미술을 전공하는 사람과는 달리 그림에 대한 미술사적 설명보다는, 그 그림을 통해서 느낀 점을 더 잘 표현하고 있고, 또 그림을 만나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이야기가 잘 서술되어 있다.

 

그리고 그림을 만나기까지의 과정에서 느끼는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겪어야 했던 비극들을 떠올리고, 그것을 그림을 통해 치유해 나가는 과정이 잘 묘사되어 있다.

 

단지 그림에 대한 안내서가 아니라 그림을 통해서 자신의 상처를 만나고 보듬어 가는 과정을 서술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책 표지에 나오는 조각상은 미켈란젤로의 '반항하는 노예'다. 이 반항하는 노예에서 그는 자신의 형을 연상하게 되는데... (바뀐 판본에서는 모딜리아니의 '하임 수띤 초상'이 표지 그림인듯)

 

조국에 돌아와서 조국에서 형벌을 받고 있는 형들, 그들은 순종하는 노예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반항하는 인간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지만, 결코 좌절하지 않고 굴복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음을 그림 순례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책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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