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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령작가입니다
김연수 지음 / 창비 / 200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쓴다는 행위. 알고 있는 것을 언어를 통해 다른 드러내는 일. 언어학 이론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쓰인 것이 쓰려고 하는 존재를 온전히 드러낼 수 있을까? 존재와 글 사이에는 어떤 간극이 있지 않을까?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 어디까지 진실인가? 사실과 진실을 구분하기 힘들듯이, 우리는 언어를 통해서 진실에 다가갈 수 있을까?
이번 김연수 소설집은 이렇게 빗나감을 보여주고 있다. 쓴다는 말이 직접 나온 소설도 있지만, 그런 말이 나오지 않은 소설도 빗나감이 주를 이루고 있다.
빗나감, 어긋남, 아니 알 수 없음. 한낮 속에 서 있을지라도 진실은 알 수 없다는 것. '이렇게 한낮 속에 서 있다'는 소설이 그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보이는 어떤 행위에 대해서 판단하지만, 과연 그 판단이 진실일까? 보여짐이 진실과 일치할까. 어쩌면 쓴다는 행위와 보여짐이라는 것이 비슷하지 않을까. 쓰는 순간 그 대상에게서 멀어지듯이 보여지는 순간 가려지는 것이 있음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일제시대 친일과 북한군에 점령당한 서울에서 한 부역 행위. 쉽게 말할 수 있을까? 그들의 친일이나 부역은 어디까지 진실일까? 소설 속에서 그런 행위를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어긋남, 빗나감을 이렇게 잘 보여주는 문장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친일을 하면서 했다는 말이 참... '일본이 승리한다고 믿는 게 아니라 일본이 승리한다고 믿는다는 그 사실만을 믿는 것'('이렇게 한낮 속에 서 있다 '중에서. 236쪽)
이 말 속에는 거리가 있다. 도대체 진실은 없다. 교묘하게 거리를 둔다. 쓴다는 행위가 이렇지 않을까 하는데... 쓰기는 자신을 돌아보고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말이 무색할 지경이다.
그렇게 이번 김연수 소설집에서는 쓰기가 진실을 드러내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진실을 밝히는 일이 불가능함을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특히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에서는 쓰는 행위가 많이 나오는데, 그 쓰기가 진실을 향해 가지 않고 오히려 진실을 가리는 쪽으로 간다.
설산을 넘으면 진실을 만나는 일이 아니라, 설산에서 길을 잃고 마는 일. 이 소설은 그런 과정을 보여준다. 자신을, 또 애인을 알기 위해서 글을 쓰지만, 글을 쓰면서 진실은 사라지고 기록만 남게 되고 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럼에도 쓰기를 포기하지 못하고, 등정을 하면서도 계속 써 나가지만, 그는 자신이 알고 있던 구절마저도 잊게 된다.
설산 속에서 실종이 되는 그와 마찬가지로 글은 진실로 가지 않고 진실로 가는 사람을 헤매게 한다. 그런 모습이, 사람과 사람이 만나더라도 서로 빗나가는 관계를 보여주는 소설들이 이 소설집을 차지한다.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 모두가 그렇다고 봐도 된다. 필연이 아닌, 진실이 아닌, 그냥 그렇게 보여진 것, 쓰인 것들만으로 파악할 수밖에 없는 관계. 그래서 서로 이해 불가능에 빠질 수밖에 없는 관계.
그런 관계들을 김연수 소설이 보여주는데... 이 소설들을 읽으면 '이것이다'라고 주장하는 일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 생각하게 된다.
보여지는 것에 가려진 진실이 있고, 쓰여진 것이 아니라 쓰이지 않은 진실이 있는데, 그것들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보여진 것, 쓰인 것을 기반으로 판단을 내린다면, 그 관계는 파탄에 이를 수밖에 없음을...
특히 사람의 관계는 더욱 그러함을 소설을 통해서 생각하게 된다. 소설집 제목이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에서 알 수 있듯이, 작가는 글을 통해서 세계를 보여주는 사람이다. 그러니 작가라는 말에는 쓰기라는 말이 이미 내포되어 있다.
그런데 그냥 작가가 아니라 유령 작가다. 유령은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존재, 또는 존재하지 않으나 존재하는 존재다. 그렇게 유령은 언어 뒤편에 있는 존재다. 그런 존재가 쓰는 글. 유령작가가 쓰는 글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 유령작가란 말에서 이 소설집에 실린 쓰기 행위가 지닌 거리, 빗나감이 느껴지고, 서로가 서로 관계를 맺는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는 현실임을 생각하게 된다.
소설이 보여주는 세계가 바로 그렇다. 현실과 같은 듯하면서도 현실이 아닌. 그래서 우리에게 다른 세계를 보여주는 쓰기의 모습. 하지만 소설은 그런 빗나감을 통해서 우리가 현실을 다시 보게 만든다.
김연수 이번 소설집을 통해서 내가 알고 있는 것이 과연 다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쓰이지 않은 것, 보여지지 않은 것에 대해서 생각도 해보게 하는 소설이기도 하고. 특히 다른 존재와의 관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