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들의 연인
정미경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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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경 소설집을 읽다. 7편의 소설이 묶여 있다. 공통된 주제를 찾기 힘들지만, 소설이란 원래 삶을 표현하는 문학 아니던가. 그러니 삶에서 겪음직한 일들이 이 소설집에서 표현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전체적으로 이 소설집을 읽으면서 '욕망'에 대해서 생각했다. '욕망?' 무엇에 대한 욕망일까? 다양한 욕망이 있겠지만, 우선 '돈'에 대한 욕망을 꼽을 수 있겠다.


돈이라는 말, 자본이라는 말, 어느 정도는 생계에 꼭 필요한 돈. 이 돈을 위해서 살지는 않는다고 하지만, 대부분 돈 앞에서 무력해지는 인간들의 모습 아닌가?


'돈'은 어느 정도는 있어야겠지만, 더 많아지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될까? 이를 욕망으로 바꾸어보자. 욕망은 삶을 능동적으로 이끄는 역할을 한다. 그렇지만 욕망이 충족된 다음에는 어떻게 될까? 내가 이룰 것을 다 이루었노라 한다면? 그 다음 삶은 어떤 모습을 띨까?


'너를 사랑해, 들소, 내 아들의 연인'에서는 돈을 매개로 욕망을 이야기 할 수 있다. 안정된 자리를 잡지 못해서, 돈 때문에 위기 상황에 처한 자산관리사와 여전히 시간 강사 역할밖에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자신들의 욕망을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관계. 그것이 너를 사랑한다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그들은 사랑을 위해서 또다른 매개체를 필요로 할 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것이 바로 '돈'이다. 자신들이 바라는 생활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돈'.  그 돈을 지니고 있는 사람을 이용해서 욕망을 실현시키려 하지만, 과연 그 욕망이 실현되었을 때 그들 관계가 지속될 수 있을까?


너를 사랑한다고 하는 말이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욕망을 포기하지 못하는, 어쩌면 욕망의 크기 앞에서 자신들의 사랑을 이용하는 그런 관계. 이런 관계의 뒤틀림이 '들소'라는 소설에서 잘 나타난다.


조각가. 예술가다. 돈하고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주인공이 남편과 갈등을 하는 이유는 돈에 있다. 자신의 일을 돈과 관련지어 할 수밖에 없는 상황. 이상적인, 사회사업가라 할 수 있는 남편에게 반했지만, 함께 살아가면서는 그 점이 바로 싫어지는 이유가 된다.


예술을 위한 예술이 아니라 돈을 위한 예술을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 사회사업을 한다고 하지만, 그 사회사업에는 '돈'이 필수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다. 그것을 하지 못한다면 자신이 그 사람을 떠날 수밖에 없다. 이별이든 죽음이든.


소설 속 남편의 죽음은 그래서 필연이다. 다만 예술가로서의 자신을 찾는다면 다시 남편의 일에 대해서 욕망에 대해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작품이 들소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 이미 사라져 버린 동물. 여기서는 이제 '돈'은 개입하지 않는다. '돈'이 개입하지 않을 때 예술은 자기만의 특징을 지니게 된다. 


'돈'에 얽힌 이야기는 '내 아들의 연인'으로 넘어가면 개인과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 대 관계의 문제가 된다.


가난한 사람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이 살아온 환경과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관계가 문제가 된다. 결국 사람 대 사람의 관계가 아니라 관계 대 관계의 문제가 되기 때문에 그런 관계는 지속될 수밖에 없다.


차이, 그 사람을 욕망하지만, 그 사람이 지닌 관계는 용납할 수가 없는, 용납할 수가 없다는 말이 적확한 것이 개인으로서 만났을 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 주변의 사람들과 만났을 때는 문제가 도드라져 보이게 된다고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욕망의 테두리에 개인은 받아들일 수 있지만 그 개인이 지니고 있는 관계들까지는 받아들이기 힘들고, 또 내 욕망의 테두리가 아닌 내가 지니고 있는 관계의 테두리로 확장하면 그 개인조차도 받아들이기 힘들어지게 된다.


사랑에도 개인이 아닌 집단으로서의 관계가 있음을, 그러한 집단이 서로 다르면 어울리기 힘들어짐을 '내 아들의 연인'이라는 소설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욕망의 끝을 보지 않으려는 몸부림, 아니 욕망의 끝을 본 다음에는 더 이상의 삶에 의미를 찾지 못하게 됨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 바로 '밤이여, 나뉘어라'다.


늘 내 앞에 있던 존재, 천재라고 불리던 친구가 몰락한 모습,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나 역시 내 욕망의 끝을 보게 된다. 그래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나는 친구의 몰락한 모습을 인정하지 않아야 한다.


그 친구 역시 아마도 자신의 욕망의 끝을 보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더이상 나아갈 곳이 없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자신을 견딜 수 없게 된다. 결국 순간이여 멈추어라 하고 말하는 순간, 사람의 삶은 끝나게 된다.


그러니 우리는 늘 욕망해야 한다. 인간이 용납할 수 없는 욕망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추동하는 욕망. 그러니 돈을 위해서 사랑을 이용하는 것은 관계의 파탄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또한 맹목적인 이상 추구 역시 파탄날 수밖에 없다. 현실을 떠난 이상은 공허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욕망을 갖지 않아서도 안 된다. 욕망이 없는 상태, 이를 갈망이 없는 상태라고 한다면 그때부터는 삶이 무의미해진다. '밤이여, 나뉘어라'에 나오는 천재처럼. 


결국 이 소설집을 읽으며 어떤 욕망을 지녀야 하는가? 욕망이라는 말이 부정적이라면 어떤 갈망을 지녀야 하는가로 바꾸면 된다.


다양한 내용의 소설들이지만, 돈에 대한 욕망이 결코 우리 삶을 행복하게 하지는 못함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과 욕망(갈망)을 상실했을 때의 인간의 모습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


삶이란 이렇게 다양한 욕망과 갈등들이 얽혀 있는 것임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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