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연주 시전집 - 1953-1992
이연주 지음 / 최측의농간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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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전집을 읽으면서 어둠 속에 잠겨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무슨 시들이 이렇게 어둡다. 칙칙하냐, 이 시인 밝게 살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에 시인에 대한 설명이 나와 있지 않기에 시인을 검색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한 시들이었는데...

 

제목들도 그렇다. 생전에 발간한 시집 제목이 "매음녀가 있는 밤의 시장"이라니...

 

매음녀... 삶의 나락에서 그래도 살겠다고 몸부림치는 사람, 자신의 몸을 상품으로 내맡길 수밖에 없는 사람, 낮에 활동하기 보다는 밤에 활동할 수밖에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매음녀 아니던가.

 

이런 매음녀에 관한 시가 6편이 실려 있다. 이상하게 '매음녀1'부터 '매음녀7'까지 제목이 붙어 있는데도 '매음녀2'라는 제목을 가진 시가 없다. 그래서 6편이다. 아마도 시인이 썼지만 발표는 하지 않은 듯하다.

 

몇 개의 제목을 보아도 시집이 참으로 음울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토피아는 없다, 어떤 행려병자, 악몽의 낮과 밤' 등등

 

유고시집 제목은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속죄양, 유다"

게다가 처음 시작부터 부제를 달고 있는 시들이 있는데, 그 부제가 '위험한 시절의 진료실'이다. 9편의 시가 이 부제로 실려있는데... 시대와 화합하지 못한 시인의 모습을 절절하게 느낄 수 있는 시들이다.

 

시인은 그렇게도 이 세상의 삶에 고뇌를 했나 보다. 그의 삶이 유다의 삶처럼 괴로웠던 걸까? 이 전집에는 시인에 대한 설명이 하나도 들어있지 않기 때문에, 시인이 여성인지 남성인지부터 고민해야 하는데...

 

검색해보니 한국여성문인 사전에 이름이 올라가 있으니 여성시인이고, 40이 되어 세상을 떠났는데, 그것이 자살이라고 하니...

 

세상의 고민을 짊어지고 그 고뇌를 시로 표현해서 삶을 추구했으나, 결국 자신이 고민을 모두 짊어지고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시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집이 무겁도록 음울한 내용들이 시전집을 가득 채우고 있는데... 시인이 살았던 시대, 우리 사회가 참으로 무거운 시대였지만, 그 시대의 무게를 온몸으로 시인 역시 받아들였다는 생각이 든다.

 

생전에 한 권의 시집을 내었고, 유고시집 한 권 도합 두 권의 시집이 전부인 시인의 전집을 내는데... 동인 활동으로 발표한 작품을 모아놓은 것까지도 좋은데... 시인에 대한 해설, 설명이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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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7-04-17 14: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녀의 시는 가슴의 통점 자극제입니다....

kinye91 2017-04-17 14:18   좋아요 1 | URL
저도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광주시편
김시종 지음, 김정례 옮김 / 푸른역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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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지금 김시종 시인의 광주시편을 읽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하고 싶다. 이미 37년이 지난, 일제강점기보다도 더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광주에 관한 시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라는 질문.

 

일제강점기 36년(통칭 말하는, 이 시집에서도 36이라는 숫자는 일제강점기를 뜻하는 숫자로 나오니 정확한 기간 대신에 이 기간을 쓰도록 한다)이 제대로 해결이 되었던가.

 

청산이 되었던가. 아니다. 지금도 친일인명사전을 둘러싸고도 많은 논쟁이 일어나고 있듯이 친일대상자들이 거의 세상을 떠났음에도 명백한 진실이 밝혀지지 않고 있는데, 광주는 아직도 대상자들이 살아 있으니, 더 어려운 과제로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친일잔재 청산이나 광주민주화운동이나, 좀더 내려가면 4.3운동이나 모두 미완성인, 진행 중인 역사이다. 우리는 아직도 과거의 역사 속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김시종의 광주시편을 읽어야 한다. 그의 광주시편은 제두 4.3을 겪고 일본으로 밀항한 시인이 광주에서 일어난 일을 보고 도저히 침묵할 수 없어 언어로 표출해낸 결과물이다.

 

얼마나 안타까웠을 것인가.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그냥 지켜보기만 하는, 듣기만 하는 그런 상황에 처해 있는 시인. 그의 마음 속에서 터져나오는 피울음을 언어로 표현해낸 것, 그것만이 시인이 할 수 있는 일이었기에 더더욱 슬픈 그런 시편들.

 

게다가 우리 글이 아니라 일본어로 시를 쓸 수밖에 없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도 표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상황.

 

그런 마음들이 절절하게 담겨 있는 시편들이 이 시집이다.

 

최근에 광주와 관련하여 이순자의 회고록이 문제가 되었다. 전두환도 피해자라고... 사람들이 분노했다. 이건 도대체 무슨 심사인가.

 

모 대통령 후보는 광주에서 일어난 발포책임자를 찾아내겠다고 했다. 총을 쏜 군인들은 있는데, 발포명령자는 없는 상태.

 

성공한 쿠테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건가 뭔가, 도대체... 그 당시 최고 책임자가 누구인가, 그것은 이미 다 알려져 있지 않은가. 그러면 발포명령자를 찾지 않아도 발포책임자는 명확하게 가릴 수가 있다.

 

'그 한밤중에도 또 / 멀리 천둥소리가 울리고 있었습니다' ('먼 천둥'에서)고 표현하는 그런 총소리, 발포 책임자

 

누구인가, 우리는 누군지 알고 있지 않은가.  이런 발포로 인해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누가 올렸는가 만장 하나 / 팽팽 펄럭펄럭 / 하늘 끝 한 점을 뒤틀리며 펄럭이고 있다'('흐트러져 펄럭이는'에서)고, 이런 희생자들이 있는데, 함께 하지 못해 '살아 있는 몸을 의지로 바꾼 남자가 죽었다. ... 살아가야 할 인생을 걸고 / 남자는 벽 속의 평온을 끊었다' ('입 다문 말-박관현에게'에서)는 사람도 있는데...

 

아직도 책임회피를 하고 있다니. 아직도 진실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니.

 

그렇다. 광주는 아직도 진행형이다. 그래서 이 시집을 읽어야 한다. 진행형을 종결짓기 위해서.

 

재일 시인, 김시종, 그가 피어린 마음으로 쓴 시편들, 그리고 일본 작가가 그린 광주민주화운동 그림들.

 

이 시집을 번역하기 위해 고생한 사람들, 이 사람들을 위해서도 광주를 기억 속에 가두기 보다는 우리의 삶으로 끌어내 완결지어야 한다. 그것이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의 의무다.

 

이 시집은 그 점을 다시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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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테의 수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2
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음, 문현미 옮김 / 민음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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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도 유명한 이름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그러나 이름만큼 그의 작품을 읽지는 않았다. 그냥 릴케라는 이름으로 존재했다. 다른 시인들의 시에 등장하는 릴케, 또는 다른 작품에 등장하는 릴케.

 

읽지 않아도 너무 유명한 작가, 릴케. 그의 시집을 한 권 읽었고, 소설집을 한 권 읽은 것이 전부. 이 말테의 수기는 읽어야지 하면서도 늘 미루기만 했던 책.

 

드디어 읽었다. 읽으면서 릴케의 이 작품이 왜 유명한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말테라는 주인공이 자신의 삶과 생각을 자유롭게 쓰는 형식으로 이루어진 책인데, 서양의 문화, 역사에 대해서 잘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커다른 감흥을 느낄 수가 없었다. 오히려 릴케라는 이름때문에 인내심을 갖고 읽었다고나 할까.

 

릴케와 관련된 여인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그를 중심으로 사랑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도 하겠지만, 말테의 수기에서 재미와 흥미를 느낄 수 있는 부분은 이야기 속의 이야기다.

 

조금은 환상적인 부분이 있는 이야기들도 등장하고 있으니, 사실적인 내용만이 실렸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릴케의 삶을 잘 알고 있다면 이 말테의 수기를 흥미있게 읽어갈 수 있으리란 생각을 한다. 이러나 저러나 내게 이 말테의 수기는 이런 문장들로 기억될 것이다.

 

시에 대하여, 시인에 대하여 한 구절들.

 

... 사람이 젊어서 시를 쓰게 되면, 훌륭한 시를 쓸 수 없다. 시를 쓰기 위해서는 때가 오기까지 기다려야 하고 한평생, 되도록이면 오랫동안, 의미(意味)와 감미(甘味)를 모아야 한다. 그러면 아주 마지막에 열 줄의 성공한 시행을 쓸 수 있을 거다. 시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감정이 아니고 (사실 감정은 일찍부터 가질 수 있는 거다), 경험이기 때문이다. 한 줄의 시를 쓰기 위해서는 수많은 도시들, 사람들, 그리고 사물들을 보아야 한다. 동물에 대해서 알아야 하고, 새들이 어떻게 나는지 느껴야 하며, 작은 꽃들이 아침에 피어날 때의 몸짓을 알아야 한다. 시인은 돌이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 (26-27쪽)

 

릴케는 시인이 되었다. 소설가가 되었다. 그는 작가가 되었다. 작가가 되기까지 그가 경험한 일들, 그런 일들이 이 말테의 수기에 나와 있다고 보면 된다.

 

이렇게 글을 쓰기 위해 말테는 많은 경험을 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관찰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쓰게 된다. 그 과정이 나타나 있다.

 

그래서 이 책은 한 사람의 작가가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이라고 보면서 읽으면 된다. 그렇게 읽으면 책에 나오는 유럽의 역사, 문화 상황을 자세히 알지 못해도 다양한 경험을 한 사람이 어떻게 해서 작가로 탄생하게 되는지를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한 작품을 읽었다. 다음에는 그의 예술론이 담겨 있는 아직 읽지 못하고 있는 '로댕론'과 '젊은 예술가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어야겠다. 그에게 한 발 더 다가가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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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0
하인리히 뵐 지음, 김연수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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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그것도 언론이 가하는 폭력에 대해서. 언론이 한 사람을 어떻게 파멸에 이르게 하며, 그 사람으로 하여금 또다른 폭력을 휘두르게 하는지에 대해서.

 

그래서 도대체 어떤 폭력이 더 폭력적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신체적으로 상처가 나야지만 폭력인가 하는, 그런 폭력보다 더 무서운 폭력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소설의 처음 부분을 세 단계로 구성했다고 한다. 작가인 하인리히 뵐의 '10년 후' 후기에 의하면 그것은 의도적이라고 한다.

 

제목과 작은 제목과 모토로 구성했다고 하는데, 제목은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이고, 작은 제목이 '혹은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다. 그리고 모토는 '이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이나 사건은 자유로이 꾸며 낸 것이다. 저널리즘의 실제 묘사 중에 <빌트> 지와의 유사점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의도한 바도, 우연의 산물도 아닌, 그저 불가피한 일일 뿐이다.'라고 되어 있다.

 

소설의 내용이 시작되기 전부터 독자들이 생각을 할 수 있게 작가가 어떤 장치를 해놓았다고 볼 수 있는데, 작가가 직접 꾸며낸 이야기이며, 유사한 점이 있다고 하는 것은, 소설에 현실이 잘 반영이 되었다는 것을 반증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현실일까? 현실 속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을 다룬다. 살인은 폭력이다. 이런 폭력은 기본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

 

소설 속 주인공은 카타리나도 살인에 대한 벌을 받기를 부정하지 않는다. 잘못했음을 인정한다. 그런데, 카타리나가 저지른 폭력은 개인적인 폭력이다. 궁지에 몰린 사람이 최후의 수단으로 행사하는 폭력.

 

폭력은 어떻게 발생했는가? 이것을 추적해야 한다. 평범한 가정관리사인 여인이 살인을 저지르게 되기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가?

 

평범한 가정관리사라는 말, 철저하게 자신의 생활을 문제 없이 잘 유지하고 있었던 이혼한 여성이 어느 날 마음에 드는 남자를 만난다. 그런데 그 남자가 경찰의 수배를 받고 있는 사람이고, 이 여성 또한 경찰의 감시망에 들게 된다.

 

그가 도망친 이후, 카타리나는 온갖 소문에 시달린다. 소문? 소문이라고 할 것도 없다. 조작된 사실이라고 해야 한다. 그것도 언론이 조작해서 내보내는.

 

조작된 사실, 이것도 엄연한 폭력이다. 그렇게 인식하지 않고 있는 경우가 많아서 그렇지, 신체적인 폭력보다 더한 폭력일 수가 있다. 그것도 개인을 불특정 다수에게 노출시키는 언론의 조작된 사실 보도는 개인적인 폭력이라고 하기보다는 집단적인 폭력 또는 폭력을 유발하는 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

 

악의적으로, 선정적으로 한 개인의 명예는 생각지도 않고 자신들 신문이 팔리기를 바라면서, 또는 자신들 신문의 관점을 사람들이 따르기를 바라면서 기사를 왜곡해서 내보내는 기자에게 카타리나는 괴롭힘을 당할 수밖에 없다.

 

알려지지 않은 사실, 알려질 수 없는 사실은 무시한 채, 언론은 흥미 위주로 사건을 만들어간다. 그런 기자를 살해하고 자수한 여성, 그가 카타리나다.

 

언론에 의해 사생활이 폭로되고 파렴치한 사람이 되며,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주변 사람들도 어려움에 처하게 되는 상황... 이렇게 심한 폭력이 있을까?

 

여기에 카타리나는 기자 살해라는 폭력을 저지른다. 어느 폭력이 더 잔인한가? 어느 폭력이 더 용서받지 못할 것인가?

 

소설에서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분명 카타리나의 폭력은 일어났다. 그러나 언론에 의한 폭력은 묻혀졌다. 언론은 '아님 말고' 식의 보도, 또는 '아님에도 긴 것'처럼 보도를 한다.

 

나중에 잘못이 밝혀지면 정정보도문을 내면 그만이다. 그 동안 고통을 겪은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다.

 

이 소설에서도 마찬가지다. 언론은 여전히 건재하다. 감옥에 간 사람은 카타리나일 뿐이다. 이것이 소설 속만의 일인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황색언론이 얼마나 많은가, 최근에는 가짜뉴스라는 것까지 등장하고 있으니...

 

언론으로 인해 피해받은 사람이 많은 것도 현실이고.

 

개인적인 폭력과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사실을 왜곡해서 그를 고립시키는 폭력, 어느 폭력이 더 문제가 있는지, 어느 폭력이 더 폭력적인지 고민하게 하는 소설이다.

 

개인의 폭력은 이유없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니 폭력의 발생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해서는 안 된다. 사회구조적인 문제까지 생각해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도 이 소설은 생각할거리를 주고 있다. 지금 우리 역시 이런 언론의 폭력 속에 있지 않은가. 비록 나는 아니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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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성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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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는 동양인가, 서양인가 라는 질문을 할 수 있다. 터키라는 나라가 참으로 방대한 나라이기도 하고, 그 영토가 동양과 서양에 걸쳐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터키를 소아시아라고 했단다. 소아시아라고 하는 것, 그것은 터키를 동양으로 본 것이다. 그런데 터키는 이슬람 문명의 중심이었다. 오스만투르크제국이 지배한 영토 아니었던가. 이슬람을 동양 종교로 볼 수는 없는데도, 유럽인들은 터키를 동양으로 보는 경향이 더 강했나 보다.

 

반대로 우리와 같은 동양에서는 터키와 같은 이슬람은 서양으로 보고 있었으니...

 

여전히 터키는 동양과 서양의 중간에 다리를 걸치고 있다. 비록 그들은 자신이 서양에 속한다고, 월드컵 예선에도 유럽예선에 참여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들의 영토는 동양 쪽에 더 많이 속해 있다.

 

이런 질문을 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이 소설 때문이다. 오르한 파묵이라는 소설가. 노벨 문학상을 받은 소설가인데, 그의 소설이 유럽 사람들에게는 이국적인 느낌을 주나 보다.

 

책의 뒷표지에 있는 글 중에 "오르한 파묵, 동양에서 새로운 별이 떠올랐다" -<뉴욕 타임즈>라는 글이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지금의 우리에게는 터키는 유럽이다. 같은 동양으로 잘 인식되지 않는다. 전형적인 동양에 속하는 우리가 이 소설을 읽을 때 느끼는 당혹감이 어쩌면 여기에서 오는지도 모른다.

 

유럽 사람들은 이 소설을 동양적인 것으로 판단하고 있지만, 우리에게는 이탈리아나 터키나 다 유럽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느끼는 점과 유럽인이 느끼는 점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한다.

 

이 소설의 내용이 바로 신분을 바꿔 사는 사람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데, 해설을 보면 동서양의 갈등보다는 동서양의 융합을 다루고 있는 소설이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모두 서양일 뿐일 수도 있는데...

 

이탈리아 사람이 터키군에게 포로로 잡혀 노예가 된다. 그는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탈리아에서 인정받는 지식인이 아니고 책을 읽고 대학교육을 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소설의 배경인 17세기에는 이 정도의 유럽 지식인은 동양에 가면 우월한 지식인이 된다는 사고가 팽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터키에 학문적 호기심이 왕성한 '호자'라는 사람의 노예가 된다. 호자와 그는 서로 공부를 하며 지식을 교류하지만 이탈리아 사람인 '나'가 터키 사람인 '호자'를 가르치는 쪽으로 소설의 내용이 전개된다.

 

지식의 불균형, 또는 문화를 바라보는 불균등한 관점이 드러난다. 그러나 여기서 소설이 끝나서는 안된다. 호자는 터키의 문화, 문명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그는 자기네 사람들을 바보라고 한다.

 

자신의 지식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자신이 꾸며낸 허무맹랑한 이야기만이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결국에는 하얀 성을 앞에 두고 '나'와 신분을 바꾼다.

 

이런 바꿈을 위해서 둘은 외양이 닮았다는 쪽으로 시작되지만, 나중에는 누가 보아도 다른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다고 서술이 되어 있는데도 이 바꿈은 무시된다.

 

이것을 터키 사람들의 무지라고 해야 하나? 아니다. 그들은 이런 바꿈을 용인해줄 수 있는 포용력이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 사람이 '호자'인 척하면서 산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그렇게 살게 해준다.

 

반면에 이탈리아인이 된 '호자'에 대한 이야기는 짧막하게 나올 뿐이다. 그 역사 '나'로 잘 살아간다고.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인가. 무지하다고 바보같다고 이야기되는 동양이 사실은 바보스럽지 않으며 그들 나름대로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문화에선 우열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의 특성에 맞는 삶의 형태일 뿐이라고, 그 사회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모습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고.

 

문화의 우열이 아니라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이 소설의 화자인 '나'는 이탈리아인이지만 터키인 '호자'가 되어 살아가기 때문이다.

 

'나'라는 사람이 겪는 모험소설로 읽어도 되고,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동서양의 융합을 그려보이고 있는 소설로 읽어도 되는 역사소설의 형태를 띤 소설이다. 그냥 17세기 터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소설로 읽어도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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