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성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터키'는 동양인가, 서양인가 라는 질문을 할 수 있다. 터키라는 나라가 참으로 방대한 나라이기도 하고, 그 영토가 동양과 서양에 걸쳐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터키를 소아시아라고 했단다. 소아시아라고 하는 것, 그것은 터키를 동양으로 본 것이다. 그런데 터키는 이슬람 문명의 중심이었다. 오스만투르크제국이 지배한 영토 아니었던가. 이슬람을 동양 종교로 볼 수는 없는데도, 유럽인들은 터키를 동양으로 보는 경향이 더 강했나 보다.

 

반대로 우리와 같은 동양에서는 터키와 같은 이슬람은 서양으로 보고 있었으니...

 

여전히 터키는 동양과 서양의 중간에 다리를 걸치고 있다. 비록 그들은 자신이 서양에 속한다고, 월드컵 예선에도 유럽예선에 참여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들의 영토는 동양 쪽에 더 많이 속해 있다.

 

이런 질문을 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이 소설 때문이다. 오르한 파묵이라는 소설가. 노벨 문학상을 받은 소설가인데, 그의 소설이 유럽 사람들에게는 이국적인 느낌을 주나 보다.

 

책의 뒷표지에 있는 글 중에 "오르한 파묵, 동양에서 새로운 별이 떠올랐다" -<뉴욕 타임즈>라는 글이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지금의 우리에게는 터키는 유럽이다. 같은 동양으로 잘 인식되지 않는다. 전형적인 동양에 속하는 우리가 이 소설을 읽을 때 느끼는 당혹감이 어쩌면 여기에서 오는지도 모른다.

 

유럽 사람들은 이 소설을 동양적인 것으로 판단하고 있지만, 우리에게는 이탈리아나 터키나 다 유럽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느끼는 점과 유럽인이 느끼는 점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한다.

 

이 소설의 내용이 바로 신분을 바꿔 사는 사람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데, 해설을 보면 동서양의 갈등보다는 동서양의 융합을 다루고 있는 소설이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모두 서양일 뿐일 수도 있는데...

 

이탈리아 사람이 터키군에게 포로로 잡혀 노예가 된다. 그는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탈리아에서 인정받는 지식인이 아니고 책을 읽고 대학교육을 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소설의 배경인 17세기에는 이 정도의 유럽 지식인은 동양에 가면 우월한 지식인이 된다는 사고가 팽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터키에 학문적 호기심이 왕성한 '호자'라는 사람의 노예가 된다. 호자와 그는 서로 공부를 하며 지식을 교류하지만 이탈리아 사람인 '나'가 터키 사람인 '호자'를 가르치는 쪽으로 소설의 내용이 전개된다.

 

지식의 불균형, 또는 문화를 바라보는 불균등한 관점이 드러난다. 그러나 여기서 소설이 끝나서는 안된다. 호자는 터키의 문화, 문명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그는 자기네 사람들을 바보라고 한다.

 

자신의 지식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자신이 꾸며낸 허무맹랑한 이야기만이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결국에는 하얀 성을 앞에 두고 '나'와 신분을 바꾼다.

 

이런 바꿈을 위해서 둘은 외양이 닮았다는 쪽으로 시작되지만, 나중에는 누가 보아도 다른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다고 서술이 되어 있는데도 이 바꿈은 무시된다.

 

이것을 터키 사람들의 무지라고 해야 하나? 아니다. 그들은 이런 바꿈을 용인해줄 수 있는 포용력이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 사람이 '호자'인 척하면서 산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그렇게 살게 해준다.

 

반면에 이탈리아인이 된 '호자'에 대한 이야기는 짧막하게 나올 뿐이다. 그 역사 '나'로 잘 살아간다고.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인가. 무지하다고 바보같다고 이야기되는 동양이 사실은 바보스럽지 않으며 그들 나름대로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문화에선 우열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의 특성에 맞는 삶의 형태일 뿐이라고, 그 사회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모습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고.

 

문화의 우열이 아니라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이 소설의 화자인 '나'는 이탈리아인이지만 터키인 '호자'가 되어 살아가기 때문이다.

 

'나'라는 사람이 겪는 모험소설로 읽어도 되고,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동서양의 융합을 그려보이고 있는 소설로 읽어도 되는 역사소설의 형태를 띤 소설이다. 그냥 17세기 터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소설로 읽어도 되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